오래된 것들이 칭송받는 세상이다. 50년 된 식당, 100년 된 나무, 수백년 된 건물…. 모두 보물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 누대에 걸쳐 정성과 손맛이 응집된 종가음식이다. 길게는 수세기를 이어내려온 종가음식은 맛이면 맛, 모양이면 모양, 색과 향, 그리고 품위까지 음식의 질을 결정하는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화려함 때문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존재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게다가 상에 놓는 법이며 먹는 법 같은 ‘예법’까지 따라붙으면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 된다.
하지만 종가의 모든 음식이 화려하거나 격식을 차린 것은 아니다. 종가에도 소위 ‘일상음식’이 있다. 가족들이 아침저녁으로 먹는 밥, 일꾼들과 나눠먹는 밥은 소박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정해진 방식대로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만들어야 하는 의례음식이 ‘정성의 정수’라면 제철 농산물, 지역 식재료로 단촐하지만 맛있게 만든 일상음식은 ‘사랑의 정수’였다. 그 일상음식이 의례음식과 견주지 못할 바는 없을 터. 올 한해 동안 강레오 셰프와 함께 이름난 종가를 찾아다니며 종부가 손꼽는 종가의 일상음식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첫번째로 경북 성주 의성김씨 문절공파 종가, 사우당종택을 찾아갔다.
“올 한해 종가의 종부님들 손맛을 배우러 다니자고요. 종부님들이야말로 음식의 대가들이잖아요. 역사가 오랜 만큼 이야기도 많고 배울 것도 많을 것 같아요.”
유럽에서 이태리요리·프랑스요리를 공부한 강레오 셰프가 종가음식을 배우러 가자고 나섰다. 평소에 파스타나 스테이크 같은 음식만 먹을 것처럼 보이는 호텔 셰프가, 그것도 유럽음식에 정통한 사람이 종가음식이라니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강 셰프가 한식에 대한 무한애정을 말로 쏟아낸다.
“한국 사람인데 당연하지요. 한식에 대한 관심이 엄청 많아요. 궁중음식연구원에서 한복려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했어요. 최근 호텔에 한식 전문점을 낸 것도 그래서고요. 우리나라 호텔에 한식당이 거의 없다는 것은 아시죠?”
종가음식에 대한 관심을 간직한 지도 오래란다. 개인적으로 인연을 맺고 음식 이야기를 듣는 종부도 있다고 했다. 제철·지역 식재료를 이용해 만든 음식의 최고봉이 바로 종가음식인 데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만드는 법도 다양하고 얽힌 이야기도 많을 테니 셰프로서 욕심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도 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꼭 전국의 종가를 돌며 종부로부터 직접 음식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단다.
● 경북 성주, 사우당종택을 찾다
그렇게 시작된 종가음식 탐방의 첫번째 목적지는 경북 성주의 600년 된 의성김씨 문절공파 종가였다. 종가의 고택 사우당종택은 수륜면 수륜리 윤동마을에 있다. 고택은 솟을대문에서 시작해 안채·사랑채·서당·재실까지 한줄로 이어져 마을 뒷산까지 뻗어 있었다. 솟을대문 앞에 서자 안채 깊숙이에서 재실을 나서는 종부가 보였다. 문절공파 21대 종부 류정숙씨(70)다. 대문 밖 손님을 발견한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종부의 지혜 담긴 겨울음식, 우엉조림
“어서들 오세요. 이 시골까지 귀한 걸음 하셨네요. 겨울이라 들에 나는 것도 없는데 뭘 대접해야 하나?”
지역 주민들에게 다도를 가르치는 ‘차선생’이기도 한 종부는 “먹을 게 없다”며 향이 좋은 녹차와 직접 빚은 오색 다식을 내왔다.
“종가에서 일상적으로 즐겨 드시던 음식은 어떤 것들이 있으신가요? 철에 따라 별미 음식도 해드셨죠? 소개 좀 해주세요.”
인사 나누기가 무섭게 강 셰프가 질문을 쏟아낸다.
“종가라고 특별할 게 뭐 있나요? 다들 비슷하게 먹었죠. 그래도 꼽자면 초여름 은어국수가 있어요. 종택 오는 길에 다리 하나 건너오셨죠? 그 개울이 옛날에는 정말 깨끗해서 은어가 많이 살았어요. 고지기랑 머슴들이 은어를 잡아오면 푹 고아서 국수를 말아먹었죠. 시어머니 살아 생전에는 초여름마다 해먹었어요. 요즘은 개울이 옛날 같지 않아서 은어가 잘 없는 데다 종가에 종손과 저 둘밖에 없으니 해먹을 일이 없어요.”
개울에서 잡은 민물고기로는 찜을 했다. 처음에는 센불로 익히다가 중불로 줄여서 뜸 들이듯이 오래 익히면 뼈까지 흐물흐물해진다. 간장양념만 해서 먹어도 흙냄새 하나 없다고 했다. 추어탕도 많이 해먹었다. 들에서 뜯어온 배추를 삶아 넣고 대파·매운고추 쫑쫑 썰어 넣어 끓이면 온 식솔들이 다 한그릇씩 먹었다고.
“옛날에야 종가가 재산도 많고 힘도 있어서 좋은 것 잘 먹었죠. 그런데 알다시피 근래에 종가들이 어디 그런가요. 돈도 부족하고 사람도 없고….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추어탕은 그런 시절을 잘 넘겨보려는 시어머니의 지혜가 담긴 음식이에요. 미꾸라지 양이 적어도 배추를 듬뿍 넣으면 국이 엄청 많아지잖아요. 여러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죠.”
● 시대에 맞춰 새 문화 만드는 사람, 종부
우엉조림도 그런 음식이다. 제대로 된 식재료를 구하기 힘든 겨울철, 우엉 뿌리를 캐다가 반찬으로 만든 것이다.
“여기 우엉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거든요. 구하기 쉬운 데다 간장양념에 조리기만 하면 되니 영양가가 높으면서도 해먹기 쉬운 반찬이죠. 제가 막 시집 와서 모든 일이 다 서툴 때 시어머니께서 처음으로 ‘잘했다’고 칭찬해주신 음식이기도 해요. 그래서 제게는 특별한 음식이에요.”
“이 다식도 문절공파 종가의 내림음식인가요?”
차를 마시며 종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 셰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했다. 답은 뜻밖에 ‘아니다’였다.
“시어머니 때까지는 손님에게 술과 감주를 내놨죠. 해마다 술을 담그고 감주를 떨어뜨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저만의 것이 있으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종부는 종가의 전통·음식·예법을 전수받고 보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지만, 또 시대에 맞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기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도를 시작했고 다식을 만들었죠. 제 후대에 후대로 이어지면 우리 집안의 내림음식이 되겠죠?”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종부에게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종가의 온고지신(溫故知新) 가풍이 느껴졌다.
성주=이상희 기자, 사진=김덕영 기자 montes@nongmin.com
● 류정숙 종부의 ‘우엉조림’ 꿀팁…우엉 껍질을 벗긴 뒤 식초 몇방울 떨어뜨린 물에 20분 정도 우려서 떫은맛을 뺀다. 팔팔 끓는 물에 3~4분 데친 뒤 물을 따라내고 간장과 조청을 넣고 조린다. 조청은 성주참외 조청을 사용한다. 마지막에 참기름을 살짝 둘러준다.
도미 푹 고아낸 육수에 콩가루국수 넣으니 ‘찰떡궁합’
도전! 강레오 셰프의 종가음식 ‘도미국수’와 ‘우엉전’
강레오 셰프가 류정숙 종부에게서 들은 방식대로 의성김씨 종가의 내림음식인 은어국수와 우엉전을 재현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철이 안 맞아 은어를 구할 수 없어 은어 대신 도미를 사용하기로 했다.
강레오표 종가음식 도미국수와 우엉전이다. 도미국수는 도미를 푹 고아서 육수를 낸 뒤 밀가루와 콩가루를 6대4의 비율로 섞어 반죽한 국수를 넣고 끓여내면 된다. “도미의 구수하고 진한 국물에 콩가루국수가 끝내주게 어울린다”는 것이 강 셰프의 설명. 얼음이 녹고 은어가 나오면 꼭 은어국수를 만들어보겠단다.
우엉전은 한번 삶은 우엉을 방망이로 두드려 편 뒤 밀가루·달걀물을 묻혀 기름에 지지면 된다. 성주지역에서 많이 나는 부추로 꾸밈을 하는 센스도 발휘. 종부에 대한 강 셰프의 감사 표현이었다.
문절공 김용초와 사우당 김관석
문절공 김용초는 고려 말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한 문신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기여한 개국공신이다. 고택이 있는 윤동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은 후손인 사우당 김관석 때다. 김관석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다. 사우당의 사우는 문방사우의 사우다. 고택의 이름이 사우당종택인 것도 여기서 유래했다. 현재 21대 종손 김기대씨와 종부 류정숙씨가 고택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