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1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마태오 10,7-15
나눌 줄 아는 자가 되기 위해 이 두 가지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아끼지 말고 내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어줄 줄 모르는 이들은 탐욕에 사로잡혀 성령의 힘을 잃습니다.
곧 마귀도 쫓아낼 수 없게 되고 병을 치유하는 힘도 잃습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의 힘이 있음을 자신도 믿지 못하게 되어 하느님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영혼을 구원하려 하다가 지치고 쓰러집니다.
이런 면에서 사제나 신자들의 청빈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조건 가난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믿음으로 필요에 따라서는 다 내어줄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습관이 덕이 되고 덕이 본성이 됩니다.
오랜 습관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한두 번의 선행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본성의 변화가 요구됩니다.
1800년대 후반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 해티 그린(1834-1916)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같은 속옷을 50년간 입을 정도로 검소를 넘어선 구두쇠였습니다.
오죽하면 그녀의 아들이 다리가 아팠을 때 가난한 행세를 하고 동네 보건소에 가서 치료하였을까요? 결국 아들은 감염이 심해져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나이가 들었음에도 탈장 치료비를 아끼려 복대를 하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해티 그린이 이렇게 구두쇠가 된 이유는 어렸을 때의 교육 탓입니다.
그녀의 집은 부유했습니다.
글을 알게 되자 아버지에게 신문을 읽고 받은 돈을 쓰지 않고 저축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할아버지에게 경제나 주식에 대한 정보를 읽어주며 용돈을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누는 게 아니라 모으면 내 것이 된다는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단 한 번도 나눔을 통한 즐거움, 하느님께 봉헌함을 통한 자유로움을 느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받았을 때도, 그것을 투자하여 어렸을 때부터 깨우쳤던 경제 관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을 때도 그 돈은 여전히 자기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돈을 제대로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외롭게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록펠러는 십일조는 내었지만, 가난한 사람은 도울 줄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성경 말씀을 보고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지원해 주게 됩니다. 그녀로부터 받은 감사의 편지는 그의 일생을 바꿔놓았습니다.
나눔의 행복을 알게 된 것입니다.
먹어보지 않고 어떻게 그 맛을 알겠습니까?
해보지 않으면 그 행복을 알 수 없어서 습관은커녕 그것이 고통인 줄 알고 할 용기를 낼 수조차 없게 됩니다.
반면 성 빈센트 드 폴은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면서 모든 것은 주님께서 섭리해주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힘든 상황에도 자녀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고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부자가 그 교육비를 전액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임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그가 해적선에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는 경험을 하게 만드십니다.
그는 자유인이 되어 정말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을 믿게 됩니다.
그 이후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주는 삶을 살게 되고 지금도 전 세계에서 그가 세운 수도회와 수많은 시설에서 가난한 이들이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김범석 교수의 책에 죽어가던 한 암 환자가 임종 직전에 인사라도 하러 찾아왔을 때 “내 돈 2억 갚아라, 임마!”라는 마지막 말을 하고 죽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어주는 것도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먼저 100원을 주면 10원은
하느님께, 10원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게 교육해야 합니다.
해봐야 행복을 알고 행복해야 계속할 수 있고 그래야 내어줌이 나에게 덕이 되고 본성이 될 수 있습니다.
십일조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은 매달 반드시 나에게서 일어나야 주님께서도 악령을 쫓는 능력과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사라지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1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마태오 10장 7-15절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수도원 담을 따라 걸으면서
탁월한 대 영성가께서 한 수도공동체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하루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공동체 문을 나서 교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수도원 담 안으로부터 크게 다투는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스승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 늘 옥신각신하던 두 형제가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아침부터 크게 다투고 있는 두 형제를 보자 스승까지도 덩달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 순간 당장 달려가서 이렇게 혼냈을 것입니다.
“이 쫌생이들아! 너희들 그렇게 할 일이 없냐? 아침부터 싸움질이나 하고 있게. 너희들, 그 작은 것 하나 양보 못하면서, 도대체 뭣 하러 수도원 왔어? 그러려면 당장 짐 싸라!”
그러나 스승은 다시 발걸음을 밖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는 길고도 긴 수도원 담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담을 세 바퀴나 돌고 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간 스승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두 형제를 타일렀다고 합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문제에 개입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분노나 화로부터 자유롭게 했습니다.
수도원 담을 따라 천천히 돌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습니다.
스승이 담을 따라 돌던 시간은 어쩌면 다투고 있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스승은 다투고 있던 형제들로부터 받은 부정적인 감정의 영향을 수도원 담을 따라 걸으면서 최소화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조금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갓 수도생활을 시작한 햇병아리 수도자가 스승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승님, 제 마음이 이토록 고통스럽고 슬픔에 가득 차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보지 말고, 누구도 판단하지 말며, 누구도 비방하지 말게. 그러면 주님께서 평화를 주실 것이네.”(안셀름 그륀, ‘하늘은 네 안에서부터, 분도출판사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복음전도 여행’에 파견하시면서 몇 가지 당부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평화의 사도가 되라는 당부말씀이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복음 선포자로서 지녀야할 중요한 자세 중에 하나가 ‘평화’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 선포자 자신이 내적으로 평화로워야 합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사람이 내면의 불안정으로 인해서 얼굴이 어둡거나 침울하다면 복음 선포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복음을 선포한다는 사람이 어딜 가나 분열을 조성한다면 그게 옳은 일이겠습니까?
복음선포자는 마음이 늘 잔잔한 호수 같아야 합니다.
그 어떤 바람 앞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적 평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삶의 중심에 자리하시니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평화가 복음 선포자에게 필요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강론>
(2024. 7. 11. 목)(마태 10,7-15)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예수님께서 하신 그대로 따라 하면 됩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0,7-15).”
1)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 일들을 하라고 지시하신 것은, 당신이 하시는 일을 제자들이 함께하기를 바라셨음을 나타냅니다.
<사도들과 교회가 하는 일들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셨던 일들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하는 일들입니다.
다른 일이나 새로운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삶’도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셨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따라 하라는 지시입니다.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은 흉내 낸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는다는 뜻이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흉내 내는 것과 닮는 것은 다릅니다.
닮는 것은 ‘온 마음’으로, 또 ‘온 삶’으로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지만, 흉내 내는 것은 속마음과는 다르게 겉으로만 실천하는 위선입니다.>
2)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주님의 복음을, 또는 주님의 은총을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입니다.
<선교활동은 장사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선물로 주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셨으니, 제자들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금이나 은이나 구리돈이 없었을 텐데,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지니지 말고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라는 말씀도 뜻은 같은데, 당신을 따르고 있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 떠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굶주림과 헐벗음을 감수하라는 강요는 아닙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먹이신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는,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입니다.
‘찾아내어’ 라는 말 때문에, 숙식을 제공할 사람을
제자들이 찾아다녀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누군가가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한다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믿고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여라.
그리고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는 짓은 하지 마라.
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4)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평화’를 전해 주라는 뜻이기도 하고,
참 평화를 얻는 방법을 알려 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평화를 전해 주려면 전해 주는 사람 자신이 먼저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물질적인 것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날 것이고, 그런 모습으로 평화를 전해 주는 것은 ‘거짓’입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은, ‘기뻐하고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복음에 대한 기쁨도 없고, 평화도 없는 사람은 선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혹시 한다고 하더라도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고, 그러면 상대방이 먼저 눈치를 챌 것입니다.>
“마땅하면”은 “믿고 받아들이면”이고, “마땅하지 않으면”은 “믿기를 거부하면”입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주었는데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러면서 ‘구원의 길’을 외면하고 ‘멸망의 길’로 간다면, 그 책임은 전해 준 제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은 그 사람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라는 말씀은,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라는 뜻인데, 위협하라는 뜻이 아니라, 늦기 전에 회개하고 믿으라고 타이르라는 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