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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양식 스크랩 진주성과 촉석루 ; 420년 전 혈루가 남강되어 흐른다.
琴堤 추천 0 조회 136 14.01.06 09:55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부산을 출발하여 산청 대원사로 가려면 진주를 거쳐야 한다. 대원사를 가기도 바쁘지만 나그네

발길은 절로 진주성으로 향한다. 여러번 와봤지만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진주성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은 잘 알려진 관계로 상세히 기술하지는 않겠다.

다만 사진만으로는 부족하므로 간단한 소개는 하고자 한다.

 

우리 또래의 중년들은 진주성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진주대첩논개일 것이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진주대첩은 알아도 진주대패는 잘 모른다. 임진왜란 3대승첩만 기억하려는 민족사관이

가르친 후유증이다. 그로인해 진주성을 떠올리며 승리의 순간만을 기억하고 논개의 의기만

기억한다면 역사의 올바른 가르침이 아니다. 

 

진주대첩은 진주성 1차전투를 일컬음이요, 진주대패는 진주성 2차전투를 말함이다.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느냐도 중요하지만 왜 패배했느냐도 중요한 것이다.

 

논개는 바로 진주대패 후에 등장한 인물이다. 그런데 왜 논개는 왜장을 안고 남강으로 투신하여 

죽은 것일까? 왜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함이다. 누구에 대한 복수인가? 바로 자신의 남편 최경회

대한 복수이다.

 

그러면 최경회는 누구인가? 진주성 2차전투인 진주대패 당시 삼장사의 한 명으로 경상우도병마

절도사였던 인물이다. 최경회에 대한 것은 논개와 함께 나중에 의기사에서 좀 더 다루겠다.

 

먼저 진주성 개략부터 살펴보자. 진주성은 원래 백제의 토성이 있던 곳을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석성으로 구축하였는데 불과 13년 뒤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진주성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10월, 3,800여 명의 군사와 의병 1,000여 명을

지휘하여 왜군 2만 여 명을 섬멸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일각에선 3만 여명이라고 하나 적게 잡은

수치를 인용함) 이로인해 크게 당황하고 분개한 왜군은 다음 해인 1593년 6월, 이를 설욕하고자

10만 여 명의 대군으로 다시 진주성 공략에 나섰고, 진주성은 진주군민 7만 여 명과 김천일 의병장

등 인근에서 몰려온 의병 등이 지원하면서 분전했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인해 성내의 7만 군민이 모두 순국하고 성 안에 피신하여 병졸을 돕던 2만 여 명의 민간인까지

일거에 학살 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이 전투를 진주성 2차전투라고 부른다. 진주대패인 것이다.

 

3,800여 명의 병졸과 의병 1,000여 명으로 왜군 2만을 섬멸한 1차 전투, 7만 군민으로 왜군 10만을

상대해 전멸당한 2차 전투에서 보듯이 전쟁이란 싸우는 군사의 숫자만으로 단순히 승리를 점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치밀한 전략전술이 수반되지 않는 한 승리는 요원한 것이며, 특히 적들의 화기가

월등히 강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어쨋거나 2차 전투에서 성이 함락당하자 삼장사 중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는 다른 장수들과

함께 촉석루에 올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미리 준비해 둔 임종시를 읊으며 남강에

투신자결하였다. 임종시에는 다음과 같은 비장함이 적혀 있었다.

 

"촉석루 중에 있는 우리 삼장사(최경희, 김천일, 고종후)

한잔 술 마시며 웃으면서 강물을 가리키네.

남강물 출렁이며 도도히 흐르는데

파도가 마르지 않음은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

 

촉석루하면 논개를 떠올리나 삼장사 등의 장수들도 혈루(血淚)를 흘리며 생의 마지막을 보낸 비극의 

장소임을 알아야 한다.  

 

이후에 논개가 등장한다. 논개는 최경회의 첩이었다. 당시 다른 부녀자들과 함께 피신해 있던 논개는

그 해 7월 7일(음력)에 왜군들이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기생을 소집하자 기녀 행세를 

하고 축하연에 든 후에 일본군 장수들이 술에 크게 취하자 춤을 추며 왜장을 유인하면서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성 아래 높은 바위로 가서 왜장을 허리를 껴앉고 남강으로 투신 자결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우야담 등의 문헌에 왜장들의 승전연회나 그 연회에 논개가 기생분장하고 나왔다는

기록은 없다.) 

 

이 때 논개의 나이는 꽃다운 청춘인 19세였다.(일설에는 그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촉석루 옆에 작은 사당(의기사)이 있으니 논개의 초상을 모신 사당이고 입구에 비문이 있다.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촉석루와 사당의 사진을 보면서 다시 하도록 하겠다.

 

논개가 복수한 왜장의 이름은 게야무라 로쿠스케인데 가토 기요마사(한자명 ; 가등청정)의 부장이며,

논개가 투신한 바위는 원래 위험한 바위라 해서 위암을 불리다가 논개 사후 의암으로 불리고 있는데

인조 7년(1629년)에 정대륭이 바위의 벽면에 의암이라고 새겼다.

 

(논개가 함께 투신한 왜장이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확실한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일본에서는

박종화의 소설 '논개와 계월향(1962년 작)'에 처음 언급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진주성을 간단히 사진으로 보도록 하자. 촉석루 위주로 찍다보니 시간에 쫓겨 진주성 사진은

많이 찍지 못했다. 그렇다고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사용하지는 않겠다.

 

12만 여 가구, 30여 만 여명의 인구를 가진 역사의 도시 진주시에 비해 시외버스터미널은 시골의

조촐한 단층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정감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남강변 산책로를 따라 호젓하게 걷노라면 이내 진주성에 도착한다.

멀리 보이는 성문이 정문인 촉석문이다.  진주성은 국가지정 사적 제118호이다.

 

촉석문 옆으로 남강 방향의 축성형태가 잘 드러난다.

 

성 안으로 들어가 논개의 의암에서 바라본 촉석문 방향

 

촉석문. 진주성의 정문이다. 정문이라 하기에는 어딘지 성벽과 루(樓)의 수성의 형태가 이해되지 않는다.

누각의 총안도 보이지 않고 정문 위 전돌을 쌓은 부분도 여장 형태가 없고 총안이 없다.  

아치형 성문 안으로 보이는 팔작지붕의 측면의 건물이 촉석루이다. 크기로 보나 위계로 보나 공북문이

정문으로 보인다.

 

촉석문은 1972년 복원하였고, 성내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은 1975년 복원되었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여 정화사업을 펼치면서 2002년 북문인 공북문을 복원했다.

 

 

아쉬운 일이지만 홍예로 된 성문으로 진입하자마자 바닥에 벽돌이 깔린 너른 마당을 만난다.

깔끔하다는 인상을 제외하고는 전혀 한국적이 아닌 이 느낌은 선뜻 발걸음을 옮겨 저곳에

보이는 촉석루로 향하기 어렵다. 차라리 흙을 밟고 싶은 심정이다.

 

촉석문 옆으로 이어지는 여장에서 바라본 촉석루와 남강.

성 아래 바위 중에 왼쪽으로 조금 튀어나온 듯이 보이는 바위가 논개가 투신한 의암이다.

이 강변에서 매년 가을 진주유등축제가 열린다.

 

촉석루에서 바라본 진주성과 남강의 가을.

 

성내에 바라본 촉석루 방향. 성 아래 남강변으로도 산책로가 있다.

 

성 아래 남강변으로 나갈 수 있는 작은 협문이 몇 곳 있다.

남강변의 성곽은 강과 절벽이 1차 저지선 역할을 하므로 수성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비록 복원한 성벽이지만 튼튼한 성벽을 쌓기 위해 돌을 다듬되 잘 보면 층을 바꿀 때 돌 중간을

깎아서 위쪽 돌과 맞물려 쌓는다. 성벽 밖은 높이 쌓고 안쪽은 방어하기 쉽게 토벽을 세운 다음

수성에 편하도록 여장을 만들고 여장 중간중간에 총안을 설치한다.

 

  

성벽과 여장. 태석(苔石)이 되어가는 세월의 흐름이 보인다.

 

진주성의 가을. 멀리 보이는 팔작지붕의 2층누각이 영남포정사이다. 흔히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리며,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창건하여 경남 관찰사 감영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 일제 강점기에 

경남도청이 이전하기까지 도청의 정문이기도 하였다. 비록 일제 강점기였으나 도청의 정문이었다니,

요즘 짓는 건축을 그저 서양 것으로만 도배하는 건축업계와 정부, 지자체는 저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건축에는 도통 흥미가 없는 것일까? 유리로만 도배하여 도대체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서울특별시청의

신관과 비교해보라.      

 

멀리 성벽 위의 여장이 없다면 진주성 내부인지 모를 정도로 잘 정비된 도심공원의 모습이다.

CNN이 선정한 한국의 가볼만 한 곳 50선에 촉석루가 선정된 이후 더욱 깔끔해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동상. 살아 있는 화석이라는 은행나무와 소담스런 가을 햇살이 어우러지며

진주대첩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공북문 방향. 멀리 보이는 성문이 공북문.

 

공북문. 한 눈에 봐도 공북문의 위계가 촉석문보다 높아 보인다. 이 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에 나와 있는 진주성의 정문을 2002년 5월 1일 복원하였다고 안내책자에 적혀 있다.

그럼 그렇지. 공북문이 정문이 맞는 것이다. 공(拱)은 두 손을 맞잡아 가씀까지 들어올려 공경

한다는 뜻이고, 북(北)은 임금이 있는 북쪽, 북두를 뜻한다.   

 

공북문 문루(門樓) 2층은 총안이 뚫려 있는 판문으로 막혀 있다.  

촉석문이나 공북문 모두 루에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두어 아쉽다. 수원화성의 네 문처럼 모두 개방되기를 바래본다.

 

공북문 성문 천정에도 두 마리 용이 다툰다. 좌우측면의 돌을 보면 기계로 잘 다듬은 돌이나

마치 특수한 불록처럼 만들어 쌓아서 튼튼한 축성을 하였다. 미술적으로도 이렇게 쌓은 것이

훨씬 아름답다. 앞선 사진의 촉석문과 비교해보라.

 

공북문 밖으로 나와 비스듬히 공북문과 성벽을 본 모습. 가을의 푸른 창천 아래 지난 날,

대첩 후의 승리의 함성과 대패 후의 수 많은 절규가 섞이어 들리는 듯한데, 다만 가을날이라 그런지

1592년 10월의 승리의 함성이 더욱 크게 들리는 듯하다. 

 

진주성 내에는 이밖에도 서장대, 북장대, 창렬사, 포루, 호국사 등이 있고 국립진주박물관도 있으나

일정상 다 돌아보지 못하여 이번 촬영에는 카메라에 담지 못하였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제 촉석루로 가보자.

 

 

촉석루 입구에 섰다. 삼문의 크기가 뒤에 보이는 촉석루를 넘지 않는다.

삼문의 지붕을 보라. 솟을대문의 멋진 지붕이 촉석루 팔작지붕 합각마루와 추녀마루 안에

절묘하게 들어와 포근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담장의 회토 사이마다 자연돌을 넣어 정감마저 든다.

  

삼문 왼쪽 문에서 바라본 촉석루 측면. 촉석루는 정문인 삼문으로 들어서면 이렇게 측면이

먼저 반기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이유는 촉석루에 올라보면 알 수 있다.

 

삼문 안으로 들어가 삼문의 닫혀진 중문 뒤에서 찍은 촉석루 측면.

 

촉석루는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꼽히는 명품 누각이다. 1층은 돌기둥으로 누각을 튼튼히 받치고

있고 전부 두리기둥이며, 2층은 나무 기둥도 두리기둥. 포작은 주심포 양식으로 고려 중기인 1241년,

고려 고종28년에 처음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나 광해군 10년(1618년)에 전보다

더욱 웅장한 건물로 중건하여 1948년에는 국보로 지정되기도 했으나 2년 뒤인 한국동란 때 다시 불에

타서 전소되는 비운을 겪는 등 8차례 중수되었다.(현재 경남 문화재자료 제8호) 

 

지금의 촉석루는 국가의 예산이 아닌 '진주고적보존회' 시민의 성금으로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니

진주 시민들의 애향심과 촉석루 사랑을 알 수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정면인데 촉석루를 오르는 나무 계단이 있다.

계단 위 현판에는 촉석루라 되어 있고 누각 안으로 보이는 현판엔 남장대라 되어 있다.

 

촉석루라는 말은 벼랑 위에 돌이 높이 솟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전쟁시에는 이곳이 지휘본부

사용되므로 남장대라 이름 붙여 있다. 평시에는 향시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여졌고, 많은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진주8경 중 제1경 촉석루에 올라 남강을 바라본다. 묵묵히 흐르는 남강은 오늘도 말이 없다.

진주대첩이라는 승리의 기쁨은 1년도 채 가지 못하고 최경회 장군을 포함한 삼장사와 장수들이 분루를

흘리며 투신 자살한 곳이 이곳이다. 그 날, 저 남강의 역사에서 오직 그 날, 강물은 유난히도 붉었으리라.

 

촉석루에서 바라본 오른편. 진주성의 가을이 아름답다. 하지만 진주성의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1593년 6월.

420년 전의 치열했던 9일간의 전투와 그 아픔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저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일 것인가.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7만 여 명의 군민과 2만 여 명의 피난민들이 흘린 피는 남강을 붉은 홍강, 혈루강으로

만들었을 것이며, 그들의 절규에 남강은 흐름을 멈춘 채 숨을 죽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몇번째 보는 남강이지만 너무나 조용히 흐른다. 마치 호수처럼 조용하다.

침묵의 무게로 건물을 지어 그 엄숙함이 국내 최장의 건축이 된 세계문화유산 종묘의 침묵조차

남강의 침묵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진주 남강유등축제는 바로 그들이 흘린 피와 넋을 기리는 축제이다. 아픔을 승화시키려는 우리 민족의

특유의 기질과 진주시민들의 애향심이 발현된 축제인 것이다. 차마 낮에는 불을 밝히기 미안하여,

그래서 밤에 그들을 추모하기에 더욱 화려하다. 

 

진주 남강유등축제는 매년 가을 초, 개천예술제(10/3시작하여 통상 10/10까지)와 함께 개최되는데

올 2013년에는 10월 1일에서 13일까지 개최되었다. 대한민국대표축제의 하나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풍등을 올리고 남강에 유등을 띄워 군사적인 신호와 전술, 가족에게 안부를 묻는

통신수단 등에서 유래된 가장 진주적인 축제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축제기간 중에는 삼국시대 전승 기념잔치에서 유래한 소싸움 전국대회를 진양호 후문가에

세워진 전용경기장에서 개최하는데, 진주 소싸움은 특히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울분을 토해내는

민족정신이 강한 행사로 유명하여 매년 수 만 군중이 모일 정도였다.

 

진주시에서는 당시의 민족정신 계승과 애향심 고취를 위해 상설 소싸움을 개최하는데 매년 3월~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13:30~18:00까지 이어진다.        

 

거의 같은 기간에 개최되는 진주 개천예술제는 1949년에 영남예술제에서 출발한 지방문화예술제

행사의 효시이다. 또한 진주의 대표적인 축제로 매년 5월 넷째 주 금~일요일에 개최되는 (2013년

에는 5월 24~26일)에 진주논개제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진주논개제 이전에 논개를 기리는

행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의암별제(義巖別祭)이다.

 

의암별제의 역사는 19C까지 올라간다. 1868년 (고종 5년) 진주목사 정현식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행사를 개최했는데, 특이하게도 여성들만이 제관이 될 수 있는 제례로 제향에 악, 가, 무가 포함된다.

일제강점기에 중단 되었다가 2002년 진주논개제로 부활하여 올 해로 12회를 개최하였다.

 

진주논개제에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만이 아니라 남강의 봄축제와 물축제가 함께 개최되어 성공적인

지방축제의 방편을 보여주고 있다. 

 

  

촉석루에서 바라본 왼쪽. 사진에서 보듯 촉석루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지은 시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촉석루 파노라마사진.

 

 

촉석루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더 돌아가면 논개 비석이 있다.

'의랑논개의 비'라고 되어 있고 그 옆으로 논개사당이 있다.

 

논개 비석 옆, 작은 사당이 있다. 정문에 지수문이라 현판이 걸려있고 안쪽에 의기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기(妓)는 잘못된 것이다. 사실 논개는 기생이 아니다. 서두에 말한대로 왜장들의 연회에 참석코저 기생으로

화(化)했을 뿐.

 

논개와 최경회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논개(論介)라는 이름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붙인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1574년 9월 3일생으로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출신이다.

아버지는 주달문으로 주촌의 훈장이었으며,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니 어엿한 양반가 출신이다.

논개 위로는 오빠가 한 명 있었으나 어려서 요절하였고 논개는 주달문이 40세의 얻은 딸이다.

 

1578년 부친 주달문이 사망한 후 숙부 주달무의 집에 의탁했는데 주달무가 어린 조카를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은 뒤 도망하자 논개의 어머니가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으나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되었다.

 

1579년 장수 현감 최경회의 심리로 재판이 열리고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돌아갈 곳도 없고 생활고도

막막한 모녀는 장수관아의 침방관비를 자청했다. 졸지에 양반에서 노예가 되는 신분하락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모녀의 사정이 딱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는데, 이후 최경회가 무장현감으로

갈 때 이들 모녀를 데리고 갔고, 영암군수, 영해부사, 담양부사를 역임할 때도 데리고 다녔다고 알려졌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 중 한 명인 기대승의 제자이기도 한 최경회는 1590년 모친 임씨가 죽자 상을

치루기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인 화순에 낙향해 있었는데, 3년상 기간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친형들과 고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고,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휘하였던 의병들을 수습하여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금산과 무주에서 전주와 남원으로 진격하는 왜군과 싸웠으며,

금산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추적하여 우지치에서 크게 격파하였는데, 이로 인해 진주로 집결하는 왜군을

막음으로써 진주대첩을 가능케한 공을 세운 것이다.

 

최경회는 이 전공으로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오르면서 진주성으로 간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창의사 김천일,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 복수의병장 고종후 등과 분전했으나 9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앞서 언급한 대로 임종시를 남기고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사후 1753년(영조 29년) 충의(忠毅)라는 시호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화순의 포충사와 진주성

내의 창렬사, 장수 월강사에 배향되어 있다. 성내의 창렬사는 선조 40년(1607년)에 세워진 사당으로

진주성 2차전투에서 순국한 최경희 등의 신위를 모셨는데 원래 진주대첩에서 순국한 김시민 장군은

별도의 충민사라는 서원에 신위가 모셔졌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창렬사로 옮겨져 현재는

김시민, 최경회, 김천일, 황진 등 39위를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논개는 1592년 17세에 최경회의 부실(첩)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경회가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할

때 논개는 의병 훈련을 뒷바라지 했다고 전한다. 그런즉, 진주성까지 남편을 따라온 논개가 진주성

함락 후 왜장에게 복수하게 된 것은 단순한 관기로서의 의기(意起)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논개를 기생으로만 알고 있을까? 논개에 대해 처음 알려진 것은 논개가 죽은 지

1년 뒤인 1594년의 일이다. 당시 하삼도의 임진왜란의 피해상황을 살피러 온 유몽인이 진주에

머물면서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면서 논개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에 논개가 관기라는 이유만으로 광해군 9년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순국 사실이 기록되지

않자, 논개의 신분이 미천하여 정사에 실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1621년 자신이 편찬한

'어우야담'에 논개의 순국 기록을 남긴다. 어우야담에 나오는 논개는 진주의 관기로 묘사되어 있고,

왜장들이 연회할 때 기생으로 몸단장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 들어 죽었다는

기록은 나온다.

 

또한 1799년 (정조23년) 편찬된 '호남절의록'에도 "기생 논개는 장수인(전라북도인)으로 공(최경회)이

사랑하였다."라는 구절이 있어 최근까지 논개가 기생으로 알려졌다가 1987년 해주 최씨 문중(최경회

문중)에서 발행한 '일휴당실기'(최경회 행장을 기록한 것)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어 있는데 논개가

최경회의 부실(첩)이라고 되어 있고, 나머지 기록에 왜장들의 연회와 기생 이야기가 없다.

 

어우야담과 일휴당실기 모두 논개가 몸단장하고 의암에 올라 왜장들을 유인하니 이 때 한 명이 의암에 

오르자 그를 껴안고 투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선생은 논개의 생년월일을 조작하여

(즉 나이를 조작하여) 논개가 꽃다운 나이에 순국한 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했는데 어느 것이 분명한

사실인지는 모르나 논개가 기생이 아니라 부실인 것은 확실히 알려진 셈이다.

 

비록 첩일지라도 훈장의 딸로 태어나 어엿한 양반가 출신이었던 논개의 숭고한 희생을 생각한다면, 

기생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이제 그만 떼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19세기까지만 해도 그녀는 유교사회에서 양반이었다가 관비로, 관비에서 다시 첩으로 되었다는 것과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것(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당시 사회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정절을 지키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의 숙부가 조카인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아 넘긴 점 등으로 주씨 문중에서 기피

인물로 외면당하다가 1970년대에 방계 후손들이 그의 묘소를 방문하면서 재평가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논개를 주제로한 문학작품도 당연히 많은데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수주 변영로, 만해 한용운, 고은, 임종성 등 당대의 유명 시인들의 시, 모윤숙의 서사시는 물론이고,

전통 시가인 임동권의 한국민요집1, 장두환의 '촉석루', 정연보의 '진주의기사' 등등.

심지어는 1980년 대에 가수 이동기가 부른 가요 '논개'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논개 가요는 대학가 

응원가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도 목청터져라 아주 신명나게 부른다. 설마 잘죽었다는 뜻은 아니겠지?      

 

위 사당은 1740년 (영조 16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남덕하가 창건하였는데, 한국동란 때 소실된

것을 진주 의기창렬회가 1960년에 시민의 성금을 모아 재건한 것이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는 논개의 생가도 복원되어 있다.)    

 

    

촉석루오르는 계단 아래의 1층 누각. 멀리 여장이 보이는데 그 너머가 의암이 있는 절벽이고

누각 기단과 여장 사이에 작은 공간이 있다. 그리로 가면 여장 가운데부분 아래에 아래 사진처럼

의암으로 갈 수 있는 협문이 있다.

  

촉석루 아래 성곽에서 의암으로 내려가는 협문

 

협문을 나와 남강변 절벽 위에서 본 촉석루.

 

오른쪽에 보이는 바위가 의암이다. 바위에 적힌 의암이라는 한자가 보인다.

1625년 (인조3년)에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진주로 이사와서 새긴 글이다.

1651년(효종 2년)에는 경상우도의 재난을 살피러 조정에서 파견된 오두인이 진주에 들렀다가

바위에 새겨진 의암이라는 글자를 보고 촉석루에 의암기를 지었고, 1721년(경종1년)에는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의암사적비를 의암 바로 옆에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올 해 (2013년) 진주논개제에서는 이 의암에서 논개순국재현극을 펼쳐 420년 전의 논개의 의기로운

모습을 재현하기도 하였다.

   

정 식의 시, 의기논개지문.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의암에 올라 바라본 남강. 420년 논개가 투신한 그 자리에 서니 가슴 한 켠이 절로 아려온다.

 

학창시절 국어교과서에 시린 수주 변영로 시인의 시 '논개'가 절로 떠오른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의암에 올라 바라본 촉석루

 

 

 

 

 

성벽 중간에 난 협문으로 나가 남강변에서 찍은 촉석루.

강 건너편에서 보는 촉석루의 가을 풍경이 일품으로 아름다우나 일정상 건너편에서 촬영하지 못했다.

독자분들은 진주성에 간다면 강 건너편에서 꼭 바라보기 바란다.

 

촉석루 팔작지붕이 수림의 호위를 받으며 푸른 창천으로 솟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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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1.06 11:32

    첫댓글 아주 좋은 곳으로 잘 다녀오셨습니다.
    저도 다녀왔었지만, 금제님이 올리신 글을 보고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신 한 주가 되십시요..^^*

  • 작성자 14.01.08 10:45

    저도 사진으로보니 더 많이 공부합니다.
    주변경치가 얼마나 좋은지 촉석루에 올라보니
    시원 하다 못해 추운 겨울 바람이 많이 불더군요.
    오늘은 병원 검사 받느라 아주 다녀오느라 바빴습니다.좋은꿈꾸세요.^^

  • 14.01.07 23:38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내며 뛰어놀던 곳입니다.
    금제님 멋진 글을 읽으며 새삼 거기가 이런 곳이었던가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4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진주성은 천지개벽 수준으로 멋있게 바뀐 겁니다^^ 저는 옛 진주성에 대한 추억은 차고넘치는데 요즘 가보면 ...합니다.
    의기사에 원래 김은호 화백이 그린 멋진 초상이 있었는데 친일작가라 하여 다른 초상으로 바꿨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초상은 지금 덕수궁에 전시중인 그거 아닌가 싶습니다.

  • 작성자 14.01.08 10:52

    그러세요? 논개의 정신이 혈류가 남강되어 유유히 흐르는곳으로
    진주성 남강 촉석루 누각에 올라보니 도도히 흐르는 남강
    시원한 바람은 그시절의 논개를 생각케 합니다.
    그런데 랑군님이 검색으로 찾아보니 반지같은 것을 양손에 끼어
    의장이 빠져 나올수없이 깍지를 기고 뛰어내렸다합니다.
    바위를보니 술자리하기가 아주 멋지 자리이지만,
    경치에비해 자칫 위험이 따르는곳이더군요
    주변경관을 생각하면 난관을 설치 할수없기에
    개인의 안전에 맡긴곳이고 성돌 하나하나가 아주 정교하고
    옛사람들은 이런 멋진 유적과 애국하는 마음
    느끼는곳이라 논개 영정앞에 합장하였답니다.이곳도 맞은편에 감상이 좋고 낙화암도 가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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