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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那般 N 阿曼 -
나반과 아만
[한단고기]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처음 만난 곳은 아이사타阿耳斯它
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환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 삼성기전 하 / 원동중
인류의 조상 ≒ 나반(那般)과 아만(阿曼)
인류의 조상 ≒ 아담과 이브
아이사타 아만과 나반 ≒ 에덴동산 아담과 이브
아만과 나반 ≒ 아담과 이브
아이사타 ≒ 에덴동산
Eden
에덴
제 73 편 에덴 동산 3. 동산의 위치
73:3.1
장소 위원회는 거의 3년 동안 자리를 비웠다. 이 위원회는 가능한 세 장소에 관하여 좋게 보고했다. 첫째는 페르시아 만(灣)에 있는 섬이었고, 둘째는 나중에 둘째 동산으로서 차지했던 강 위치였고, 셋째는, 지중해의 동쪽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튀어나온 길고도 좁은 반도(半島)였다―거의 섬이었다.
73:3.2
그 위원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셋째 선택에 찬성했다. 이 자리가 선택되었고, 이 지중해 반도로, 생명 나무를 포함해서 세계의 문화 본부를 옮기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출처 : 유란시아서
Eden
에덴
에덴동산의 위치 ≒ 지중해의 동쪽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튀어나온
길고도 좁은 반도(半島)
지중해(地中海) ≒ 땅(地) 가운데(中)의 바다(海)
완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
..오인도(五印度)의 강역(疆域)은 남인도는 큰 바다로써 한계하고 서인도는 홍해(紅海)·지중해(地中海)가 있어 한계하여 예나 이제나 절연(截然)하여 어긋나지 않으며 오직 동·북의 두 인도는 육지의 경계가 각국과 들쑥날쑥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西印度
서인도
서인도 제도(西印度諸島) ≒ 카리브 해(Caribbean Sea)
카리브 해(Caribbean Sea) ≒ 서인도 제도(西印度諸島) ≒ 웨스트 인디스(West Indies)
서인도 제도 (아메리카 제도 [諸島]) [西印度諸島, West Indies]
서반구 적도 북쪽에 위치하며, 남아메리카 북쪽 해안과 중앙 아메리카 동쪽 해안 및 멕시코 일부에 접하는 대서양의 부속 해역.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1s3832b
카리브 제도 [카리브, 서인도제도]
카리브 제도(Caribbean, 네덜란드어: Caraïben, 독일어: Karibik, 프랑스어: Caraïbes, 스페인어: Caribe, 포르투갈어: Caribe, Caraíbas)는 카리브 해와 카리브 해의 섬들, 그리고 주변 해안으로 구성된 지역을 말한다. 카리브 지역은 북아메리카의 남동쪽, 중앙아메리카의 동쪽,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카리브 판 위에 넓게 자리잡고 있으며, 7000개 이상의 섬들과 암초들로 이루어져 있다. 서인도 제도라고 불리는 이 섬들은 대개 카리브 해 동부와 북부 가장자리 윤곽으로 화산호를 형성한다. 이 섬들이 서인도 제도로 불리는 이유는 1492년 이곳에 상륙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에 도착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35931
Caribbean Sea
카리브 해
카리브해(Caribbean Sea)의 도시 ≒ 자메이카(Jamaica)
자메이카 [자마이카, 자메이카 섬]
자메이카(영어: Jamaica, 문화어: 져메이커)는 카리브 해 서인도 제도의 섬나라이다.
역사
남아메리카 출신의 아라왁과 타이노 토착민들이 기원전 4000년과 1000년 사이 자메이카에 정착을 했다.[1] 1494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때 특히 현재 구 항구로서 알려진 가장 인구가 많이 형성된 자메이카의 남 해안과 함께, 추장이 다스리는 200여개 이상의 마을이 있었다.[1] 타이노족들은 영국이 섬을 접수할 때까지 자메이카에 살고 있었다.[1] 1494년 콜롬버스가 발견한 이래 스페인과 영국의 지배하에 노예매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9179
Jamaica
자메이카
Jamaica, Queens
Jamaica is a neighborhood in the borough of Queens in New York City. It was settled under Dutch rule in 1656 in New Netherland as Rusdorp.[1] Under British rule, it became the center of the Town of Jamaica. Jamaica was the county seat of Queens County from the formation of the county in 1683 until March 7, 1788, when the town was reorganized by the state government and the county seat was moved to Mineola (now part of Nassau County)..– 영어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20XX306906
Jamaica, Queens
자메이카
자메이카(Jamaica) ≒ 자메이카(Jamaica, New York City)
자메이카(Jamaica, New York City) ≒ 카리브 해(Caribbean Sea)에 있다.
Queens (disambiguation)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20X4994394
카리브 해(Caribbean Sea) ≒ 자메이카(Jamaica, New York City) 일대의 바다
완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 ≒ “서인도(西印度)에 지중해(地中海)가 있다.”
지중해(地中海) ≒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의 바다
에덴동산의 위치 ≒ 지중해의 동쪽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튀어나온 길고도
좁은 반도(半島)
지중해(地中海) 일대에서 길고 좁은 반도 ≒ 롱 아일랜드(Long Island)
롱아일랜드 [Long Island]
미국 뉴욕 주 남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섬.
대체로 코네티컷 주 남부 해안과 나란히 뻗어 있으며, 북쪽에 있는 롱아일랜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네티컷 주와 마주보고 있다. 롱아일랜드의 서쪽 끝은 뉴욕 시 항구의 일부를 이룬다. 이 섬은 4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킹스·퀸스·나소·서퍽 군이 나란히 있다. 킹스 군은 뉴욕 시의 독립구인 브루클린 자치구이기도 하며, 퀸스 군은 퀸스 자치구이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6r2008a
Long Island
롱 아일랜드
롱아일랜드(Long Island) ≒ 북쪽에 있는 롱아일랜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네티컷 주와 마주보고 있다.
롱아일랜드 해협 [Long Island Sound]
해협의 반 이상이 섬으로 둘러싸인 북대서양의 하구.
북쪽의 뉴욕-코네티컷 해안과 남쪽의 롱 아이랜드 사이에 있다. 해협의 전체면적은 3,056㎢, 길이는 145㎞, 폭은 5~32㎞이다. 동쪽으로는 오리엔트포인트(롱아일랜드), 플럼·걸·피셔즈 섬들까지, 서쪽으로는 좁다란 스로그스 곶(串)과 경계를 이루는데, 스로그스 곶은 이스트 강을 지나 어퍼뉴욕 만까지 돌출해 있다. 2번에 걸친 빙하의 전진으로 해협의 수심이 30m 이상 깊어졌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6r2011a
Long Island Sound
롱아일랜드 해협
롱아일랜드 해협 ≒ 지중해(地中海)
카리브 해(Caribbean Sea) ≒ 지중해(地中海) ≒ 롱아일랜드 해협(Long Island Sound)
에데동산(Garden of Eden) ≒ 롱아일랜드(Long Island)
Eden
에덴
[한단고기]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처음 만난 곳은 아이사타阿耳斯它
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환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 삼성기전 하 / 원동중
인류의 조상 ≒ 나반(那般)과 아만(阿曼)
인류의 조상 ≒ 아담과 이브
아이사타 아만과 나반 ≒ 에덴동산 아담과 이브
아만과 나반 ≒ 아담과 이브
아이사타 ≒ 에덴동산 ≒ 롱 아일랜드
롱 아일랜드
아이사타
에덴
- 苔叟 -
태수
정약용 (조선 학자) [丁若鏞, 다산]
1762(영조 38) 경기 광주~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먼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이가환(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처럼 유교경전과 선학의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이무렵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암행어사를 비롯하여 금정찰방 곡산부사(谷山府使)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1799년 중앙정계에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진농서 應旨進農書〉의 검토를 통해 토지문제를 농업체제 전반과 연결시켜 구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
그의 학문과정과 생애 후기는 주로 유배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향촌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혁의 대상인 사회와 학리(學理)를 연계하여 현실성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다. 〈주례 周禮〉 등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다(→ 다산학).
…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1280a
정약용 [정미용, 정다산,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년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1] ~ 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2]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3]가 있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122371
丁若鏞
정약용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茶山
다산
다산시문집 제5권 시(詩) 산행잡구(山行雜謳) 20수. 3월 18일
…
모래밭 위는 생선 시장이요 / 沙上鮮魚市
다리 가엔 막걸리 집일러라 / 橋邊濁酒家
언제나 목로집 계집들은 / 由來壚上女
붉은 머리털이 왜놈 종자 같아 / 紅髮似夷鰕
물가에 자리잡은 초가집 / 臨水黃峁屋
- 韓國古典飜譯園
紅髮
홍발
언제나 목로집 계집들은 / 由來壚上女
붉은 머리털이 왜놈 종자 같아 / 紅髮似夷鰕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赤髮
적발
정약용(丁若鏞) ≒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華城
화성
- 水原 -
수원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경기(京畿)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동쪽으로 용인현(龍仁縣) 경계까지 21리, 남쪽으로 충청도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50리, 같은 현 경계까지 59리, 진위현(振威縣)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남양부(南陽府) 경계까지 20리, 같은 부 경계까지 1백 13리, 북쪽으로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39리, 서울까지는 88리가 된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수성군(水城郡)이라 고치었다. 고려 태조(太祖)가 남쪽으로 정벌할 때에, 이 고을 사람 김칠(金七)ㆍ최승규(崔承珪) 등이 귀순하여 힘을 다하였으므로, 그 공로로 승격시켜 수주(水州)라 하였다. 고려 성종(成宗)이 도단련사(都團鍊使)를 두었는데, 목종(穆宗)이 혁파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지수주사(知水州事)로 회복하였다. 원종(元宗) 12년에 착량(窄梁)에 방수(防戍)하고 있는 몽고 군사가, 대부도(大部島)에 들어가서 주민들을 침노하고 노략질하자, 섬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하게 여겨 몽고 군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부사(副使)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쳐 평정하자, 그 공로로 도호부로 승격시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뒤에 또 승격시켜 수주목(水州牧)이 되었는데, 충선왕(忠宣王) 2년에 모든 목사(牧使)를 없앰에 따라, 강등시켜 수원부(水原府)를 만들었다. 공민왕(恭愍王) 11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선봉(先鋒)을 보내어 양광도(楊廣道)의 주군(州郡)에게 항복하기를 권유하자, 수원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맞아 항복하여, 적의 형세를 더욱 강성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드디어 강등시켜 군이 되었는데, 군 사람들이 재상 김용(金鏞)에게 중한 뇌물을 바치니 다시 부(府)가되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설치하고, 또 판관(判官)을 두었다.
【속현】 쌍부현(雙阜縣) 부(府) 서쪽 4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옛날 육포(六浦)이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와서 본부에 예속되었다. 용성현(龍城縣) 부 남쪽 5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본래 고구려의 상홀현(上忽縣), 또는 차홀(車忽 수릿골)이라고 한다. 신라에서 차성(車城)이라 고치어 당은군(唐恩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와서 본부에 예속되었다.
【진관】 도호부(都護府)가 3이고 부평(富平)ㆍ남양(南陽)ㆍ인천(仁川). 군(郡)이 2이고 안산(安山)ㆍ안성(安城). 현(縣)이 7이다 진위(振威)ㆍ양천(陽川)ㆍ용인(龍仁)ㆍ금천(衿川)ㆍ양성(陽城)ㆍ통진(通津)ㆍ김포(金浦).
【군명】 한남(漢南)ㆍ수성(隋城)ㆍ매홀(買忽)ㆍ수성(水城)ㆍ수주(水州).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高宗) 32년에 군(郡)으로 고치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중종(中宗) 30년에 복구(復舊)하였다 선조(宣祖) 35년에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별중영장(別中營將)을 겸하였다. 숙종(肅宗) 13년에 총계좌영장(摠戒左營將)을 겸하도록 고치었다. 정종(正宗) 16년에 진(鎭)을 남양(南陽)으로 옮겼다. 정종 13년 부(府)의 화산(華山)에 있는 현륭원(縣隆院)으로 옮겼다 즉 옛 치소(治所)이다. 치소를 팔달산(八達山) 동쪽으로 옮겼다 광주(廣州)의 일용(日用)ㆍ송동(松洞) 두 면(面)을 내속(來屬)시겼다. 17년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다 사도(四都) 중의 하나이다. ..
【역원】 장족역(長足驛) 부의 동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동화역(同化驛) 부의 서쪽 7리 되는 곳에 있다. 청호역(菁好驛) 부의 동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 도산원(島山院) 부의 동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사원(蛇院) 부의 남쪽 13리 되는 곳에 있다. 대제원(大梯院) 부의 남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
【고적】 정송폐현(貞松廢縣) 부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옛 송산(松山)부곡(部曲)이다. 광덕폐현(廣德廢縣) 부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위의 두 현은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와서 예속되었다. 포내부곡(浦內彌部曲)ㆍ육내부곡(陸內彌部曲) 모두 부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쟁홀(爭忽)부곡 부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水原都護府
수원도호부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 본래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수성군(水城郡)이라 고치었다.
買忽
매홀
買 mái
Mái
Ma
마케도니아 공화국 [마케도니아 구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FYROM, 마께도니아 공화국]
마케도니아 공화국(Република Македонија, 문화어: 마께도니아 공화국)은 유럽 동남부 발칸 반도에 위치한 내륙국이다. – 위키백과
스코페 [Skopje]
스코페 (마케도니아어: Скопје 스코폐, 알바니아어: Shkupi 슈쿠피, 세르비아어: Skoplje 스코플례, 크로아티아어: Skoplje 스코플례, 불가리아어: Скопие 스코피에, 오스만터키어: Üsküb, 그리스어: Σκόπια, 문화어: 스꼬삐에)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로 인구는 약 44만 명(1994년)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 건설되었는데 이름은 스쿠피 (Skupi)로 알려졌다. 13세기에는 세르비아가 지배했지만, 1392년부터 1912년에 걸쳐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위스퀴프 (Üsküp)라는 이름으로 번영했다. 그 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의 지배를 받았지만, 1944년에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성립하면서 수도가 되었다.
스코페는 바르다르강 연안 스코페 분지에 위치한다. 교통의 요지이며 베오그라드∼살로니카(그리스) 철도가 통한다. 공업도시이며, 문화의 중심지이다.[1]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C%8A%A4%EC%BD%94%ED%8E%98
마케도니아
매홀군(買忽郡) ≒ 마케도니아(Macedonia)
수성군(水城郡) ≒ 스코페(Skopje)
買忽郡
매홀군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 정종 13년 부(府)의 화산(華山)에 있는 현륭원(縣隆院)으로 옮겼다
華山
화산
華 빛날 화, 꽃 화
華 꽃 화
장미(Rose)의 나라 ≒ 불가리아(Bulgaria)
불가리아의 수도 ≒ 소피아(Sofia)
소피아 (불가리아 수도)[Sofia]
(불)Sofiya. 불가리아의 수도.
발칸 반도의 중앙 부근, 불가리아 서부에 있는 지구(地溝)같이 생긴 계곡인 소피아 분지 안에 있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2s2507a
소피아 [Sofia, 소피야]
소피아(София 소피야, 문화어: 쏘피아)는 불가리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의 하나이다. 소피아의 역사는 기원전 8세기에 이곳에 세워진 트라키아인들의 거주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가리아
서부 비토샤 산 밑에 자리잡고 있다. 인구는 2003년 현재 1,208,930명이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19801
소피아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치소(治所) ≒ 불가리아(Bulgaria) 소피아(Sofia)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화성(華城) ≒ 불가리아(Bulgaria) 소피아(Sofia)
정약용(丁若鏞) ≒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華城
화성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역원 ≒ 동화역(同化驛)
동화역(同化驛) ≒ 부(府)의 서쪽에 있다.
알바니아(Albnia) ≒ 마케도니아(Macedonia), 불가리아(Bulgaria)의 서쪽에 있는 나라.
알바니아 [Albania]
알바니아(알바니아어: Shqipëri/Shqipëria 쉬키퍼리/쉬키퍼리아, 게그 알바니아어: Shqipnia/Shqypnia 쉬키프니아/쉬퀴프니아)또는 공식 국명으로 알바니아 공화국(Republika e Shqipërisë)은 남동부 유럽에 있는 나라이다. 국토 북서쪽은 몬테네그로, 북동쪽은 코소보, 동쪽은 마케도니아 공화국, 남쪽과 남동쪽은 그리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서쪽에는 아드리아 해, 남서쪽에는 이오니아 해가 있는데, 두 바다를 잇는 오트란토 해협 사이로 이탈리아와는 7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수도는 티라너이다. 알바니아인들은 "검은 독수리의 나라"라고 자칭한다.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국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 유일한 나라이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9942
티라나 [티라너]
티라나(알바니아어: Tiranë, Tirana)는 알바니아의 수도이다. 아드리아 해에 위치한 두러스의 동쪽 약 35km에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원조로 금속·섬유·식품 가공·담배 등의 산업이 발달했다. 티라나 대학 이외에 각종 전문학교가 있다. 이 도시의 인구는 353,400명(2003년 기준)이다. 시내에는 알바니아의 민족 영웅인 스칸데르베그의 동상이 있다. 16세기까지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지만, 17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 발달했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D%8B%B0%EB%9D%BC%EB%82%98
알바니아
알바니아(Albnia)의 수도 ≒ 티라나(Tirana)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동화역(同化驛) ≒ 알바니아(Albnia) 티라나(Tirana)
同化驛
동화역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고적 ≒ 포내부곡(浦內彌部曲), 육내부곡(陸內彌部曲)
浦內彌部曲
포내부곡
浦
포
포드고리차 [티토그라드]
포드고리차(몬테네그로어: Podgorica)는 현 몬테네그로의 수도이다. 1326년 이전에는 리브니차(Ribnica),
1945년부터 1991년까지는 티토그라드라고 불렀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D%8F%AC%EB%93%9C%EA%B3%A0%EB%A6%AC%EC%B0%A8
체티녜 [세틴제]
체티녜(세르비아어: Цетиње / Cetinje)는 몬테네그로 공화국의 주요 도시이며, 과거에는 옛 왕국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몬테네그로인이 90.67%, 세르비아인이 4.61% 정도 거주하고 있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C%B2%B4%ED%8B%B0%EB%85%9C
Podgorica
포드고리차
포드고리차(Podgorica) ≒ 몬테네그로의 수도이다.
포내부곡(浦內彌部曲) ≒ 포드고리차(Podgorica)
육내부곡(陸內彌部曲) ≒ 체티녜(Cetinje)
陸內彌部曲
육내부곡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고적 ≒ 정송폐현(貞松廢縣) 옛 송산(松山)부곡(部曲)이다.
松山
송산
松
송
코소보 [코소보 메토히야 자치주, AP 코소보 메토히야, AP 코소보, 코소보 메토히야]
코소보(알바니아어: Kosovë / Kosova 코소버 / 코소바, 세르비아어: Косово и Метохија 코소보 이 메토히야,[1] 문화어: 꼬쏘보)는 발칸 반도에 있는 분쟁 지역이다.
..코소보는 내륙 지방/내륙국이며, 북쪽과 동쪽으로 중부 세르비아, 남쪽으로 마케도니아 공화국, 서쪽으로 알바니아, 북서쪽으로 몬테네그로와 접하고 있다.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세 나라는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승인했다) 수도는 프리슈티나이며, 그 밖에 도시로 페치(페야), 프리즈렌, 자코비차(가코바),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미트로비차) 등이 있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C%BD%94%EC%86%8C%EB%B3%B4
Kosovo
코소보
정송폐현(貞松廢縣) ≒ 코소보(Kosovo)
貞松廢縣
정송폐현
水原
수원
- 安城 -
안성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京畿)
안성군(安城郡)
동쪽은 죽산현(竹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은 충청도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쪽으로는 양성현(陽城縣)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는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8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5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내혜홀(奈兮忽)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백성군(白城郡)이라 고쳤다. 고려 초기에 지금의 명칭으로 고쳐서 현으로 만들었고, 현종(顯宗) 9년에 수주(水州)에 예속시켰다. 뒤에 천안부(天安府)에 이속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0년에 홍건적이 송도(松都)에 침입하였으므로 임금이 남쪽으로 가는데, 적이 선봉(先鋒)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부르니, 양주(楊州)ㆍ광주(廣州) 일대 주군(州郡)에 이르는 곳마다 그 칼날을 꺾는 자가 없었다. 오직 안성 고을 사람이 항복하는 체하고, 연회를 베풀어서 적군을 호궤하다가, 취한 틈을 타서 괴수 6명을 베어 죽였다. 이 때문에 적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11년에 그 공으로 군으로 승격되었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에 충청도에서 본도에 예속시켰다
【군명】 내혜홀(奈兮忽)ㆍ백성(白城).
【역원】 강부역(康富驛) 군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광실원(光實院)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대비원(大悲院) 군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 – 한국고전번역원
安城郡
안성군
안성군(安城郡) ≒ 본래 고구려 내혜홀(奈兮忽)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백성군(白城郡)이라 고쳤다.
백성(白城) ≒ 하얀 성
베오그라드 ≒ 하얀도시
베오그라드 [벨그라드]
베오그라드(세르비아어: Београд/Beograd 듣기 (도움말·정보), 헝가리어: Nándorfehérvár/Belgrád)는 세르비아의 수도이자, 발칸 반도의 주요 도시중 하나이다. 베오그라드는 ‘하얀 도시’라는 뜻이다. 1918년부터 2002년까지는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으며, 그 후 2005년까지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연방의 수도였다. 인구는 2002년 120만명으로, 교외 인구를 합치면 1,717,800명이다. 이 도시는 오늘날, 세르비아가 유고 연방이 무너졌을때, 그대로 수도를 계승하였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B%B2%A0%EC%98%A4%EA%B7%B8%EB%9D%BC%EB%93%9C
세르비아 [스르비야, 쎄르비야, 세르비아 공화국]
세르비아 공화국(Република Србија/Republika Srbija 레푸블리카 스르비야, 문화어: 쎄르비야)은 유럽 동남부의 발칸 반도 중앙과 카르파티아 분지의 남부 저지에 자리잡은 내륙국이다.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남동부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11032
세르비아
세르비아(Serbia) 수도 ≒ 베오그라드(Beograd)
안성군(安城郡) ≒ 세르비아(Serbia)
安城郡
안성군
안성군(安城郡) 역원 ≒ 대비원(大悲院)
대비원(大悲院) ≒ 서쪽에 있다.
세르비아(Serbia) 서쪽 ≒ 슬로베니아(Slovenia)
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 공화국]
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어: Republika Slovenija 레푸블리카 슬로베니야)는 중부 유럽에 있는 나라로 알프스 산맥 끝부분과 지중해와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서남쪽으로는 아드리아 해, 남동쪽으로는 크로아티아, 북동쪽으로는 헝가리,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수도는 류블랴나이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1949
슬로베니아
대비원(大悲院) ≒ 슬로베니아(Slovenia)
大悲院
대비원
安城郡
안성군
- 眞墨 -
진묵
일옥 [一玉, 1562~1633]
요약
조선 중기의 승려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 수많은 신이(神異)를 남겼다.
호 진묵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전라도 만경현 불거촌
본문
호 진묵(震默). 전라도 만경현(萬頃縣) 불거촌(佛居村) 출생. 7세에 출가하여 전주 봉서사(鳳棲寺)에서 불경을 읽었는데 한 번 읽으면 내용을 통달하였으므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 수많은 신이(神異)를 남겼다.
대표적인 것은, 길을 가다가 소년들이 냇가에서 물고기를 끓이는 것을 보고, "이 무고한 고기들이 붙잡혀 고생을 하는구나?" 탄식하자 한 소년이 "스님도 먹고 싶지 않은가?"라고 희롱하였다. "나도 잘 먹는다"라고 대꾸하고 함께 매운탕을 먹은 뒤 냇가에 가서 대변을 보니 먹었던 물고기들이 살아서 헤엄쳐 갔다고 전한다.
- 두산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130204
진묵대사[震默大師]
<인명> 조선 인조 때의 중(1562~1633). 이름은 일옥(一玉). 석가의 소화신(小化神)으로 추앙받았으며,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하고 신통력으로 많은 이적(異跡)을 행하였다고 한다. 저서에 《어록(語錄)》이 있다. – 다음국어사전
震默大師
진묵대사
진묵대사(震默大師) ≒ 전라도 만경현(萬頃縣) 출신이다.
萬頃縣
만경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全羅道)
부안현(扶安縣)
동쪽으로 김제군(金堤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남쪽으로 고부군(古阜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흥덕현(興德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52리, 북쪽으로 만경현(萬頃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서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건치연혁】 부령현(扶寧縣)은 본래 백제 개화현(皆火縣)이었는데, 신라 때 부령 혹 계발(戒發)이라고도 칭한다. 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에도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감무를 두어 보안(保安)을 겸임하였다. 보안현은 본래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이었는데,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 보안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부령감무로 겸임하게 하였으며, 신우 때에 두 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4년에 보안을 다시 부령에 합쳤고, 15년에 또 나누었다가 8월에 다시 합쳤으며, 다음해 7월에 또 나누었다가 12월에 두 현을 또 합치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익년(翌年)에 흥덕진(興德鎭)을 파하여 본현에 옮겨서 부안진(扶安鎭)이라고 부르고, 병마사(兵馬使)로써 판사(判事)를 겸하게 하였고, 세종 5년에 규례대로 고치어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만들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군명】 개화ㆍ부령(夫寧)ㆍ계발(戒發)ㆍ보안ㆍ낭주(浪州)ㆍ흔량매ㆍ희안.
【풍속】 풍속은 단자(蜑子 중국 남방 해변가에서 생활하는 종족)와 같다. 이규보의 시에, “습속은 남방 단자와 많이 같으니 현으로 된 것이 잠총국(蠶叢國)으로부터 시작된 줄 어느 누가 믿으랴.” 하였다.
【형승】 변산천부(邊山天府) 이규보의 시에, “변산(邊山)은 예로부터 천부(天府)로 불리면서, 긴 재목 잘 뽑아 동량(棟樑) 재목에 대비하네.” 하였다. 강산청승(江山淸勝) 앞 사람의 시에, “강과 산의 맑고 좋음은 영주(瀛洲)ㆍ봉래(蓬萊)와 겨룰 만하니, 옥을 세우고 은을 녹인 듯 만고에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 – 한국고전번역원
扶安縣
부안현
부안현(扶安縣) ≒ 부령현(扶寧縣)은 본래 백제 개화현(皆火縣)이다.
부안현(扶安縣) ≒ 풍속은 단자(蜑子 중국 남방 해변가에서 생활하는 종족)와 같다.
부안현(扶安縣) ≒ 남방 해변가에서 생활하는 종족과 같다.
전라도(全羅道) ≒ 파키스탄, 인디아, 인도네시아, 호주, 뉴기니
전라도(全羅道) 전주부(全州府) ≒ 파키스탄(Parkistan)
Parkistan
파키스탄
스리나가르(Srinagar) ≒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불린다.
스리나가르 (인도 도시)[Srinagar]
인도 북서부 인도령 잠무카슈미르 주의 여름 주도.
해발고도 1,600m의 젤룸 강변을 따라 발달해 있으며 카슈미르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 산악지대와 맑은 호수들 가운데 있어 관광도시로 성장했다. 젤룸 강을 가로지르는 7개의 목조다리와 서로 인접한 수많은 운하와 수로가 있으며, 그 위로 '시카라'라고 불리는 수많은 카슈미르식 곤돌라(양끝이 뾰족하고 바닥이 평평한 배)가 다닌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3s0181a
스리나가르
스리나가르(도그리어:श्रीनगर; 우르두어:سرینگر, 카슈미르어: سِرېنَگَر श्रीनगर)는 인도 잠무 카슈미르 주의 주도로 인구는 약 89만(2001)이다. 카슈미르 계곡의 중심지로 해발 1,600m의 고도에 있기 때문에 피서지로 유명하다. 도시에서 달 호(湖)가 내려다보이며 동안(東岸)에는 매우 험한 빙식곡(氷蝕谷)의 산이 보이고, 호안(湖岸)에는 무굴 왕조 5대의 샤 자한 황제의 정원이 있다. 시내에는 운하가 종횡으로 뻗어 있어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불린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210873
슈리나가르에 있는 예수의 무덤
.. 예언자 유즈 아사프의 묘지는 오늘날 칸자르 Khanzar 지역의 안지마르에 있다. 후에 묘지 주위에 세워진 건물은 <라우자 발 Rauza Bal>의 준말인 <로자발 Rozabal>이라 한다. ..
.. 부처의 발자국과 마찬가지로 유즈 아사프의 발자국에도 특이하고 확실한 표시가 있다. 분명히 조각가는 십자가형에서 생긴 흉터를 부조로 조각한 것이다. ..
- 출처 P. 284 – 285,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저자 홀거 케르스텐 번역 장성규, 고려원, 1987
Srinagar
스리나가르
부안현(扶安縣) ≒ 스리나가르(Srinagar)
扶安縣
부안현
- 萬頃縣 -
만경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全羅道)
만경현(萬頃縣)
【건치연혁】 본래 백제 두내산현(豆乃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김제군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임피현(臨陂縣)에 붙였고, 예종(睿宗) 원년에 감무를 두었다가 후에 현령으로 승격시켰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각 1인. 【군명】 두내산ㆍ두산(杜山).
【산천】 .. 군산도(郡山島)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둘레가 60리이다. 벼랑에 배를 감출 만한 곳이 있어서 모든 조운(漕運 배로 물건을 운반하는 것)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순풍을 기다린다. 섬 가운데 마치 임금의 왕릉 같은 큰 묘가 있었는데, 근세에 이웃 고을 수령이 그 묘를 파내어 금은기명(金銀器皿)을 많이 얻었는데, 사람들에게 고발 되어 도망하였다 한다.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12 봉우리가 성처럼 서로 잇대어 있고, 옛날에 군산정(群山亭)이라는 객관이 있었으며, 또 오룡묘(五龍廟)가 있었다.” 한다.
【봉수】 길곶 봉수(吉串烽燧) 현의 서쪽 29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부안현(扶安縣) 계화도(界火島)에 응하고, 북쪽으로 옥구현(沃溝縣) 사자암(獅子巖)에 응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萬頃縣
만경현
만경현(萬頃縣) ≒ 본래 백제 두내산현(豆乃山縣)이다.
만경현(萬頃縣) 남쪽 ≒ 부안현(扶安縣)
부안현(扶安縣) 북쪽 ≒ 만경현(萬頃縣)
부안현(扶安縣) ≒ 스리나가르(Srinagar)
스리나가르(Srinagar)의 북서쪽 ≒ 아자드카슈미르
아자드카슈미르 (파키스탄령 자치체)[Azad Kashmir]
파키스탄령 잠무카슈미르 지방에 있는 준주.
인도 대륙 북서부에 있다. 아자드카슈미르의 아자드는 '자유'라는 뜻이다. 인도가 분할된 뒤인 1947년에 건립되어 파키스탄의 보호를 받아왔으며 경제적·행정적으로도 파키스탄과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서도 인정하는 자체 독립정부를 갖추고 있는 등 정치적으로는 파키스탄 세력권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초생달 모양의 지역으로서 동쪽으로 인도령(領) 잠무카슈미르 주, 남쪽과 남서쪽으로 펀자브 지방에 있는 파키스탄의 주들, 서쪽으로 북서변경 주, 북쪽으로 파키스탄의 길기트 및 발티스탄과 각각 접해 있다.
북부는 히말라야 산맥 기슭의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최고봉인 잠가르 봉은 해발 4,734m에 이른다. 남부는 피르판잘 산맥의 북서쪽 지맥(支脈)에 해당하며 산맥의 평균고도는 3,800m이다. 이 산맥들 사이로 젤룸 강과 푼치 강을 비롯한 젤룸 강의 상류 쪽 지류들이 깊이 팬 계단식 계곡을 가로질러 흐른다. 젤룸 강은 아자드카슈미르의 서쪽 경계선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남부 지방은 푼치 강 유역의 좁은 평야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 행정중심지 무자파라바드는 철도를 통해 남서쪽의 아보타바드와 연결된다. 남부의 주요도시로는 미르푸르가 꼽힌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4a2297a
Azad Kashmir
아자드 카슈미르
만경현(萬頃縣) ≒ 아자드 카슈미르
萬頃縣
만경현
진묵대사(震默大師) ≒ 전라도 만경현(萬頃縣) 출신이다.
진묵대사(震默大師) ≒ 석가모니의 후신불(後身佛)로 추앙받았다.
震默
진묵
- Gandhi -
간디
간디 (인도 민족주의 지도자) [Gandhi, Mohandas Karamchand]
1869. 10. 2 인도 구자라트 포르반다르~1948. 1. 30 델리 뉴델리.
남아프리카 공화국 생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간디에게 완전히 새로운 도전과 기회의 땅이었다. 더반의 법정에서는 유럽인 판사가 그에게 터번을 벗으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퇴장했다. …
1899년 보어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영국 식민지 나탈에서 완전한 시민권을 주장하는 인도인들에게 나탈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설득하고 1,100명의 지원자를 모아 간호부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보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뒤에도 인도인들의 처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1906년 트란스발 정부는 극히 굴욕적인 인도인등록 법령을 제정했다. 인도인들은 그의 지도 아래 그 법령에 대한 불복종과 그로 인한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겠다고 맹세했다(→ 시민불복종). 이때에 처음으로 사티아그라하(satyāgraha:진실에의 헌신)가 태어났다. 이는 적대자들에게 원한과 투쟁, 폭력을 쓰지 않고 저항해 그것으로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1g0866b
Gandhi
간디
남아프리카 공화국 ≒ 간디에게 완전히 새로운 도전과 기회의 땅이었다.
South Africa
남 아프리카
-
아프리카
아프리카 [Africa, 아불리가, 아프리카 속주, 아프리카 대륙]
아프리(Afri)는 카르타고와 인접한 북아프리카에 살던 여러 민족의 이름이었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5732
Carthage
카르타고
Carthage, New York
Carthage is a village located in the Town of Wilna in Jefferson County, New York. The population was 3,721 at the 2000 census. The village is named after the historic Carthage in North Africa.
The Village of Carthage is at the southeast town line and is east of Watertown.
Highlights include a heated sidewalk at St. James Catholic Church, the Elks Lodge, the Sewage Treatment Plant, Intorcia's Doughnuts, and Stefano's Pizzeria.
Carthage is also the home of the illustrious Carthage Comets!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20XX126539
New City
뉴 시티
카르타고(Carthage) 뜻 ≒ 신도시(新都市)
신도시(新都市) ≒ 카르타고(Carthage) ≒ 뉴시티(New City)
아프리(Afri) ≒ 카르타고와 인접한 북아프리카에 살던 여러 민족의 이름.
아프리(Afri) ≒ 뉴욕주 제퍼슨 군(Carthage,Jefferson County, New York)
워터타운 [Watertown]
미국 뉴욕 주 북부 제퍼슨 군의 군청 소재지(1805)이며 시.
블랙 강의 폭포(34m) 옆에 위치하며 온타리오 호에서 16㎞ 동쪽, 시러큐스에서 116㎞ 북쪽에 있다. 이 지역은 1801년 워터타운 군구로 처음 편성되었고, 목재·제지·가성칼륨 산업으로 발전했다. 1816년 워터타운 자치체가 별도로 편성되었다. 1878년 이곳에서 개최된 군 박람회 기간중 F. W. 울워스가 정찰제로 물품을 판매하는 계획을 착안했다. 목재자원이 고갈되자 방대한 수력자원을 갖고 있는 이 지역에는 기계류, 수송장비, 제설기, 스키 리프트 제조공장 등 각종 기업들이 유치되었다. 워터타운은 오랫동안 주위의 낙농장들을 상대로 한 교역·유통 중심지였으며 관광(세인트로렌스 개발 계획의 하나인 사우전드 섬 휴양지에 기반을 둠)과 인근의 캠프드럼 군사보호구역 또한 경제적 생산요소에 보탬이 되고 있다. 제퍼슨지역사회대학(1961)이 있고, 그외에 유명한 기관으로 제퍼슨 군 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여기에는 1802년 이후 이곳에 정착한 프랑스 이주민들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18㎞ 서남서쪽에는 1812년 전쟁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새커츠 항이 있다. 1869년 시가 되었다. 인구 27,759(1998).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0008a
Watertown
워터타운
북아프리카 카르타고(Carthage) ≒ 워터타운(Watertown, New York)
북아프리카(Africa) 사람 ≒ 뉴욕주 워터타운(Watertown)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
Lybia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 아랍 공화국]
수도는 트리폴리(아랍어로는 '타라불루스')이다.
역사
고대에는 베르베르인이 살고 있었으나 카르타고·로마 이후 7세기에 들어와 아랍 세력의 침입으로 아랍화했다. 15세기부터 리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 후 1911년,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으로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차지하였다. 1938년이 되자 9만명에 달한 이탈리아 이주자들이 트리폴리, 벵가지 주변에서 농장을 열었다. 이탈리아는 독일과 일본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패전국으로 격하되었다. 이 때를 틈타 영국과 프랑스가 이 땅을 차지하였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9177
트리폴리 [Tripoli]
(아)Ṭarābulus. 정식 이름은 Ṭarābulus al-Gharb('서[西]트리폴리'라는 뜻).
리비아 북서부의 도시. 지중해 연안에 있다. 이 도시는 리비아의 수도이자 이 나라 최대의 도시이며 주요항구이기도 하다. 고대에 오에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이 도시는 원래 사브라타·렙티스와 함께 '아프리카의 트리폴리'를 형성했던 도시들 중 하나였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2t4104a
Tripoli
트리폴리
리비아(Lybia)의 수도 ≒ 아프리카의 트리폴리(Tripoli)
Tripoli, Washington County, New York
http://newyork.hometownlocator.com/ny/washington/tripoli.cfm
Washington County, New York
Washington County is a county located in the U.S. state of New York. It is part of the Glens Falls, New York Metropolitan Statistical Area. As of the 2000 census, the population was 61,042. It was named for the Revolutionary War general (and later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George Washington. The county seat is Fort Edward.
- 영어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20&query=Washington%20County%2C%20New%20York
Fort Edward (town)
Fort Edward is a town in Washington County New York, United States. It is part of the Glens Falls, New York Metropolitan Statistical Area. The population was 5,892 at the 2000 census. The Town of Fort Edward has a village named Fort Edward within the town. The town is on the west border of the county, and is the county seat of Washington County. – 영어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20&query=Fort%20Edward%20%28town%29%2C%20New%20York
Libya
리비아
리비아(Lybia)의 수도 트리폴리(Tripoli) ≒ 포트 에드워드(Fort Edward,New York)
트리폴리(Tripoli) ≒ 포트 에드워드(Fort Edward)
Africa
아프리카
- Boer -
보어
보어 전쟁 (남아프리카 공화국 역사)[── 戰爭, Boer War, 남아프리카 전쟁]
South African War, Anglo-Boer War라고도 함. 보어인(남아프리카에 사는 네덜란드계 백인) 공화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트란스발), 오렌지 자유주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1899. 10. 11~1902. 5. 31).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9b3631a
보어인 (인종)[── 人, Boer]
(네덜란드어로 '남편' 또는 '농부'라는 뜻) 네덜란드계(系) 또는 위그노(신교도)계 남아프리카인. 특히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주에 최초로 자리잡았던 정착민 중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보어인의 후손을 보통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 부른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wikipedia.org/wiki/File:Boercamp1.jpg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20XX191537
Anglo-Boer War
앵글로-보어 전쟁
South African War ≒ Boer War ≒ Anglo-Boer War
보어(Boer) ≒ 남편 ≒ 농부(農夫)
보어인(Boer) ≒ 네덜란드계(系) 또는 위그노(신교도)계 남아프리카인
보어인(Boer) ≒ 남아프리카인(South African)
보어인(Boer) 즉 남아프리카인(South African)의 거주지 ≒ 오렌지자유주(Orange Free State)
Orange
오렌지
오렌지 자유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주)[── 自由州, Orange Free State]
(아프)Oranje Vrystaat.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4개 주 가운데 2번째로 작고 정중앙에 위치한 주. 북쪽은 트란스발 주, 동쪽은 나탈 주와 레소토, 남쪽과 서쪽은 케이프 주와 경계를 이룬다. ..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6a0566a
Orange Free State
The Republic of the Orange Free State (Afrikaans: Oranje-Vrystaat; Dutch: Oranje-Vrijstaat) was an independent Boer republic in southern Africa during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and later a British colony and a province of the Union of South Africa. – 영어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20XX180208
Orange Free State
오렌지 자유주
Orange, New York
Orange is a town in Schuyler County, New York, United States. The population was 1,752 at the 2000 census. The Town of Orange is in the southwest part of the county and is east of Bath, New York. – 영어위키백과
http://en.wikipedia.org/wiki/Orange,_New_York
Schuyler County, New York
Schuyler County is a county located in the U.S. state of New York. As of the 2000 census, the population was 19,224. The county seat is Watkins Glen. The name is in honor of General Philip Schuyler, one of the four major generals in the Continental Army in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 영어위키백과
http://en.wikipedia.org/wiki/Schuyler_County,_New_York
Orange, South Africa
오렌지, 남 아프리카
오렌지 자유주(Orange Free State) ≒ 뉴욕주 슐러카운티(Schuyler County, New York)
보어인(Boer) 즉 남아프리카인(South African)의 거주지 ≒ 오렌지자유주(Orange Free State)
보어인(Boer) ≒ 남아프리카인(South African)
남아프리카인(South African) ≒ 뉴욕주 슐러카운티(Schuyler County, New York) 주민
Orange, New York
오렌지, 뉴욕주
- African Slave -
아프리칸 슬레이브
노예 [奴隸, slave]
인격으로서의 권리와 자유없이 주인의 지배하에 강제·무상으로 노동하며 또 상품으로 매매·양도의 대상이 되는 인간.
고대 오리엔트, 고대 그리스·로마, 식민지시대의 아메리카 등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중국이나 한국의 옛 노비도 이에 해당하지만 유럽의 노예와는 달리 결혼이 가능했으며, 어느 정도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중세사회의 농노나 지주제도에서의 소작인 등은 개인의 권리와 최소한의 자기경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예와는 구별된다.→ 노예제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4n0090a
노예제 [奴隸制, slavery]
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소유되어 있는 상태.
노예는 법적으로 재산 또는 소지품으로 여겨지며 자유인이 가지는 정상적인 권리 대부분을 인정받지 못한다. 노예제는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다. 대체로 전쟁포로, 납치(노예 포획), 범죄행위에 대한 벌, 빚에 대한 보상, 부모나 후견인 또는 우두머리의 직접 매매, 원래 주인에서 다른 주인으로 소유권을 이전하는 과정 등을 통해 본인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노예가 되었으며 그 자식들 또한 거의 다 노예가 되었다. 19세기에 서구 국가들이 대대적인 노예해방을 여러 차례 선언하기는 했지만 노예들은 주인이 해방을 승인해야만 노예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예는 가사노예와 생산노예의 2가지 유형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왔다. 첫번째 유형에 속하는 노예는 집안에서 하인 역할을 주로 하면서 주인을 모셨고, 생산노예는 대부분 탄광이나 농장 같은 곳에서 시장성 있는 상품을 생산하는 일을 했다. 노예제는 문명이 수렵 및 채집단계를 지나 목축생활에 이르고 난 후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목축시기에 노예들은 주인을 도와 양떼를 지키는 일을 했고 집안 식구의 일원으로 취급되었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처럼 좀더 발달한 문명권에서는 이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즉 도시의 노예들은 집안일을 했고 반면에 시골의 노예들은 주인의 밭과 탄광에서 무리지어 일했다. 생존에 필요한 정도의 농업생산에서 잉여분을 생산할 수 있는 시장형태의 농업생산으로 경제체제가 변하면서 노예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대폭 낮아졌다. 노예들은 더이상 하인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리스 로마 문명은 대부분 노예제를 받아들였으며, 노예들은 일상적인 가사와 농사일은 물론 관리직이나 비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로마 제국 말기에 노예집단은 그들이 속해 있는 영지 바깥으로는 팔려가지 않았다. 이슬람 세력이 등장한 아라비아 반도에서 아랍인·투르크인·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 전쟁이 여러 차례 벌어졌을 때도 노예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코란은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믿음이 깊은 행위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자유민이 된 노예들은 곧 이슬람 공동체 안으로 흡수되었다.
남아메리카 인디언들도 노예상태를 경험했다. 15세기말 스페인인들은 신대륙 대부분을 정복한 뒤 인디언들을 탄광이나 밭에서 일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이 옮긴 질병과 거칠고 힘든 작업조건 때문에 오래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페인인들은 1517년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 노예를 처음에는 서인도제도로, 그 다음에는 설탕산업이 번성하고 있던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냈다. 흑인 농장노예라는 가혹한 관행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북아메리카에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1619년 네덜란드 배에 실려 영국 식민지였던 버지니아에 처음으로 도착했다. 영국 사람들은 이때 담배·설탕, 그리고 후에는 목화를 재배하게 되는 수익성이 아주 높은 농장을 개발하고 있었다. 밭일에 필요한 노예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노예거래가 작물수출보다 더욱 수지가 맞는 사업이 되었으며 이런 흐름에 따라 북아메리카·서인도제도·아프리카 서부를 잇는 정교한 무역망이 만들어졌다. 1681년 버지니아에 있었던 노예는 2,000명 가량이었지만 19세기 중엽 아메리카에 있던 노예의 수는 4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do?query1=b04n0096a
노예제 [奴隸制, slavery]
..밭일에 필요한 노예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노예거래가 작물수출보다 더욱 수지가 맞는 사업이 되었으며 이런 흐름에 따라 북아메리카·서인도제도·아프리카 서부를 잇는 정교한 무역망이 만들어졌다. ..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do?query1=b04n0096a
奴隸制
노예제
노예(奴隸) ≒ 고대 오리엔트, 고대 그리스·로마, 식민지시대의 아메리카 등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노예거래가 작물수출보다 더욱 수지가 맞는 사업이 되었으며 이런 흐름에 따라 북아메리카·
서인도제도·아프리카 서부를 잇는 정교한 무역망이 만들어졌다.
남아프리카(South Africa) ≒ 뉴욕주 슐러카운티(Schuyler County, New York)
북아프리카 카르타고(Carthage) ≒ 뉴욕주 카르타고(Carthage, New York)
African Salave
아프리칸 노예
-
아메리카
아메리카 [Americas, 아메리카 대륙]
아메리카는 유럽계 항해사들이 개척한 신대륙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1]를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
이름의 유래
아메리카가 처음으로 대륙의 이름에 쓰인 것은 1507년이다. 독일인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이탈리아인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지도를 만들면서 아메리카란 이름이 붙었다.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아 대륙을 탐험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506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현재도 그 지역은 서인도 제도라 불린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15227
미국 [미국인, USA, 미합중국, 아메리카 합중국]
미합중국(美合衆國, 영어: United States of America, USA, 스페인어: Estados Unidos de América)또는 단순히 미국(美國)은 북아메리카에 위치한 연방 국가이다. 본래 영국을 비롯한 유럽계 청교도들이 이주하여 개척이 시작되었으며 현재 본토의 48개 주와 하와이 주, 알래스카 주를 포함해 2006년 현재 모두 50개 주와 1개 특별구(D.C.)로 이루어져 있다. 미국은 과거 영국 식민지 중 유일하게 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루었으며,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와 부통령제 (대통령, 부통령 임기는 1선당 4년이며 이미지가 아주 나쁜 대통령이 아닐 경우 재선까지 가능하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경우는 3선에 성공하여 12년 동안의 임기기간을 지냈다.)를 시행한 나라이다. ..
명칭
현재 한국어에서 쓰이는 미국(美國)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시기 중국인들이 아메리카(America)를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음차표기인 美利堅을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미리견이 줄어들어 생긴 말이다. 여기서 美라는 한자는 의미와는 관계없이 아메리카의 "메"음을 적는 소리글자의 용법(가차)으로 쓰인 것으로, 미국을 일컬어 아름다운 나라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하는 것은 한자의 뜻에 이끌린 잘못된 해석이다.
일본에서는 亜米利加(아미리가)로 표기하였으며, 이를 줄여서 米国이라고 하나, 역시 한자의 뜻과는 관련이 없다. 중국식과 일본식 표기이외에 며리계(弥里界)라는 독자적인 음차표기도 존재했다. [1]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X754
America
아메리카
아메리카 ≒ 美라는 한자는 의미와는 관계없이 아메리카의 "메"음을 적는
소리글자의 용법(가차)으로 쓰인 것이다.
메
매
매사추세츠 주 [매사추세추 주, Massachusetts, 메사추세츠 주, 매사추세츠]
역사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영국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상륙함으로써 최초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미국독립혁명은 최초로 이 주에서 일어났다. 19세기 전반에는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주도하였다. 남북 전쟁 이후에는 아일랜드계 이민이 급증하여 민족 구성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고 종교적으로도 기존의 개신교 외에 로마 가톨릭교도가 부쩍 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케네디 가문이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12584
Massachusetts
매사추세츠
미국 ≒ 영국을 비롯한 유럽계 청교도들이 이주하여 개척이 시작된 나라로 영국의 식민지 중
전쟁을 통해 최초로 독립한 나라.
메사추세츠 ≒ 영국 청교도들이 처음 상륙한 땅으로 미국독립혁명이 최초로 일어난 주.
아메리카(America) ≒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506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현재도 그 지역은 서인도 제도라 불린다.
노예거래가 작물수출보다 더욱 수지가 맞는 사업이 되었으며 이런 흐름에 따라 북아메리카·
서인도제도·아프리카 서부를 잇는 정교한 무역망이 만들어졌다
Massachusetts
메사추세츠
- Danny Boy -
대니 보이
Frederick Weatherly
Frederick Edward Weatherly (1848-1929) was an English lawyer, author, songwriter and radio entertainer. He wrote the lyrics of the well-known ballad Danny Boy which is set to the tune A Londonderry Air. Weatherly wrote over 3,000 popular songs, including "Roses Are Blooming In Picardy" and "The Holy City".
Frederick Weatherly (usually known as Fred) was born in Somerset and after schooling at Hereford Cathedral School graduated from Oxford University with a degree in Classics 1871. Weatherly studied at Brasenose College. He is reported to have helped out members of the Brasenose IV, who had practised for the Henley Regatta without a cox. When they were told they had to have one, Weatherly volunteered to start the race with them and immediately jump out of the boat. He did so and the team won - although they were later disqualified.
- 영어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20&query=Frederick%20Weatherly
Somerset [sʌ́mərset(ʃìər)]
서머셋 (잉글랜드 남서부의 주) 강변에 있는 등기소·세무서 등이 있는 건물
- 다음영어사전
대니 보이(Danny Boy)의 작사가 Frederick Edward Weatherly는
서머셋(Somerset)에서 태어났다.
Somerset
Somerset (pronunciation (help·info); IPA /ˈsʌmɚˌsɛt/) is a county in South West England. The county town is Taunton, which is in the south of the county. The ceremonial county of Somerset borders the counties of Bristol and Gloucestershire to the north, Wiltshire to the east, Dorset to the south-east, and Devon to the south-west. It is partly bounded to the north and west by the coast of the Bristol Channel and the estuary of the River Severn. The traditional northern border of the county is the River Avon, but the administrative boundary has crept southwards, with the creation and expansion of the City of Bristol, and latterly the county of Avon and its successor Unitary Authorities in the north.[1] – 영어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20XXX51763
Somerset, UK
서머셋
“Somerset is partly bounded to the north and west by the coast of the Bristol Channel”
Bristol
브리스톨
Somerset, Massachusetts
Somerset is a town in Bristol County, Massachusetts, United States. The population was 18,234 at the 2000 census. It is the birthplace and hometown of Clifford Milburn Holland (1883 - 1924), the chief engineer and namesake of the Holland Tunnel in New York City. – 영어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20XX257155
Somerset, Massachusetts
서머셋
“Somerset is a town in Bristol County, Massachusetts.”
Bristol
브리스톨
계몽주의 사상가 존 로크(John Locke)는 서머셋(Somerset)에서 태어났다.
대니 보이(Danny Boy)의 작사가 Frederick Edward Weatherly는 서머셋(Somerset)에서 태어났다.
잉글랜드 서머셋(Somerset, UK) ≒ 매사추세츠 서머셋(Somerset, Massachusetts)
Frederick Edward Weatherly
Danny Boy
Somerset
서머셋
서
-
서머셋
아리마태아 요셉 [Joseph of Arimathea]
아리마대 요셉, 또는 아리마태아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한 명(마태오 27:57)으로, 루가에 따르면 아리마태아는 유대인들의 동네 이름이다.
성경
복음서에 따르면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명망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고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와 질서를 열심히 대망하는 거룩한 사람(마르코 15:43)으로, 예수를 죽이려던 의회의 결정과 행동에 찬동을 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루가 23:51) 그의 행적 중 가장 유명한 행동은 그리스도의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하자, 그 시체를 내려다가 고운 베로 싸서 바위를 파 만든 무덤에 모셨다.(루가 23:53) 이는 바위무덤에 시체를 모셨다가, 유골만 남으면 유골함에 모시던 유대인들의 장례방법에 의한 것이다. 요한복음은 그를 예수의 제자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외경과 전설에서 언급되어지는 아리마대 요셉
전설에 따르면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성배 안에 모았다고 한다. 그 피는 로마의 백부장이었던 롱기누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입혔던 창에서 흐른 것이었다. 5세기 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빌라도 행전에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겪은 이야기들이 나와있다. 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가 그의 부활로 인해 무덤에서 사라진 후에 요셉은 시체를 훔친 자로 오인되어 40년 형을 언도받았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고 그에게 성배를 주시면서 이를 보호하는 수호자로 삼으셨다. 이 성배의 힘으로 그는 감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매일 그에게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와서 그에게 빵을 하나씩 주고 갔다.
전설에 따르면 감옥에서 나온 후에 고령의 요셉은 그의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처남 브론과 그의 아들 알란과 함께 성배를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간다. 서머싯 주에 있는 글래스턴베리에 그는 작은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이 교회는 1184년에 불탔고 대신 대규모의 수도원으로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이 수도원도 1539년 헨리 8세에 의해 파괴되어 버린다. 오늘날에는 단지 그 폐허만이 남아있다). 전설은 이외에도 그가 글래스턴베리에 도착해서 자신의 지팡이를 땅에 꽃았을 때에 그곳에서 가시나무 덤불이 자라났다고 한다. 수백년간 이 덤불은 그 작은 교회 안에서 성탄절 때마다 꽃을 피웠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들에 따르면 요셉은 성배를 글래스턴베리의 성문 곁에 묻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철분을 많이 함유한 이른바 성배우물(Chaice Well)의 근원이 만들어졌고 그 우물 물의 붉은 기운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성배 이야기는 다시 아서 왕 전설로 연결된다.
이러한 글래스턴베리를 둘러싼 요셉과 관계된 이야기들은 모두 전설들이며 기독교 초창기 문서들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유럽 대륙에 만연해 있던 성인과 성물에 대한 숭배와 (특히 이탈리아) 이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려는 중세 영국의 성인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러한 전설들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보게 된다.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성서신학자들 중에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을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요한 13:23)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의 대표작 인디아나 존스에서 잠깐 언급되기도 했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73157
Joseph of Arimathea
아리마태아 요셉
전설에 따르면 감옥에서 나온 후에 고령의 요셉은 그의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처남 브론과 그의 아들 알란과 함께 성배를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간다. 서머싯 주에 있는 글래스턴베리에 그는 작은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이 교회는 1184년에 불탔고 대신 대규모의 수도원으로 다시 지어졌다.
서머싯 주 [서머싯]
서머싯 주(Somerset)는 영국 잉글랜드의 남서부의 주(州)이다.
1세기 경에 아리마태아 요셉이 영국 최초의 교구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교회가 이 주의 글래스턴베리에 있다. 성배 전설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C%84%9C%EB%A8%B8%EC%8B%AF%20%EC%A3%BC
Somerset
서머싯
잉글랜드 서머셋(Somerset, UK) ≒ 매사추세츠 서머셋(Somerset, Massachusetts)
“1세기 경에 아리마태아 요셉이 영국 최초의 교구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교회가 이 주의 글래스턴베리에 있다. 성배 전설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Somerset
서머셋
-
앙골라
콩고 왕국 (아프리카 왕국)[── 王國, Kongo Kingdom]
아프리카 중서부 콩고 강 유역에 있던 주요왕국.
반투어(語)를 사용했으며 14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니콩고(manikongo)라 칭하는 왕이 통치했으며 서아프리카의 상아·가축가죽·노예·패류화폐의 교역이 경제력의 기초를 이루었다. 1484년 처음으로 포르투갈인과 접촉한 뒤 몇 년 되지 않아 제6대 마니콩고인 은징가 음벰바(뒤의 아폰소 1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포르투갈과 외교적·경제적 관계를 넓혔으나 포르투갈인이 노예 약탈행위를 확대함에 따라 협정은 곧 무산되었다. 1570년경 콩고 왕국의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국내에서 긴장이 격화했다. 결정적인 음브윌라 전쟁(1665) 이후 콩고 왕국은 서로 대립·반목하는 여러 족장체제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콩고 왕권이라는 개념과 주체성은 살아남아 중앙 아프리카에서 여전히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do?query1=b21k3831a
콩고 [Congo (disambiguation)]
콩고(Congo)는 아프리카의 인접한 두 나라가 함께 쓰는 이름이다.
콩고 공화국 또는 브리자빌-콩고는 서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콩고 민주 공화국 또는 킨샤사-콩고는 중앙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이다.벨기에의 식민지였다. 1971년부터 1997년 사이에는 자이르란 나라 이름을 사용했었다.
콩고란 이름은 다른 곳에서도 사용된다.
콩고 강은 위의 두 나라를 흐르는 강이다.
콩고 제국은 서아프리카에 있던 옛 왕국으로, 지금의 앙골라, 콩고 공화국, 그리고 콩고 민주 공화국의 서쪽에 걸쳐 있던 나라다.
《콩고》는 마이클 크라이튼이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을 기반으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콩고 제국은 서아프리카에 있던 옛 왕국으로, 지금의 앙골라, 콩고 공화국, 그리고 콩고 민주 공화국의 서쪽에 걸쳐 있던 나라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21297
앙골라의 역사
지금의 앙골라 지역에 원래 살던 종족은 코이산어를 쓰는 수렵·채취인이었는데, 중앙 아프리카에 살던 많은 반투어계 종족이 남부 남아프리카로 이동해 와 1000년까지 먼저 살던 종족을 흡수하고 이 지역에 철기문화와 더불어 농작물 재배법을 퍼뜨렸다. 결국 이 반투어계 종족은 남부 아프리카의 주요종족으로 남았고, 1600년에 이르러 지금의 앙골라가 있는 지역을 점령했다. 앙골라에서 반투족이 세운 왕국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콩고 왕국으로 음반자콩고를 수도로 삼았으며, 포르투갈인들은 상살바도르두콩고라고 불렀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4a4174b006
North Africa
북 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카르타고(Carthage) ≒ 뉴욕주 카르타고(Carthage, New York)
북아프리카 카르타고(Carthage) ≒ 워터타운(Watertown, New York)
북아프리카(Africa) 사람 ≒ 뉴욕주 워터타운(Watertown)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
Angola
앙골라
콩고왕국(Kongo Kingdom) ≒ 앙골라, 콩고 공화국, 콩고 민주 공화국에 걸쳐 있던
나라.
콩고왕국(Kongo Kingdom) ≒ 마니콩고(manikongo)라 칭하는 왕이 통치했다.
Manikongo
마니콩고
Mani + kongo
Man
Manhattan
Saint Nicholas Avenue (Manhattan)
Saint Nicholas Avenue is a major New York City street. It runs north-south between 193rd Street and 111th Streets in the New York City borough of Manhattan. It goes through the neighborhoods of Washington Heights and Harlem. – 영어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20X4512511
Washington Heights, Manhattan
Washington Heights is a New York City neighborhood in the northern reaches of the borough of Manhattan. It is named for Fort Washington, a fortification constructed by Continental Army troops during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at the highest point on Manhattan island to defend the area from the British forces. – 영어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20&query=Washington%20Heights%2C%20Manhattan
Fort Washington (New York)
Fort Washington was a fortified position near the north end of Manhattan Island (now part of New York City) and was located at the highest point on the island. The fort was held by American forces as the British completed their occupation of New York City in 1776 during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 영어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20&query=Fort%20Washington%20%28New%20York%29
Fort Washington
포트 워싱턴
콩고왕국(Kongo Kingdom) ≒ 앙골라(Angola), 콩고(Kongo)
콩고왕국(Kongo Kingdom) ≒ 포트 워싱턴(Fort Washington)
Angola
앙골라
- 延安 -
연안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黃海道)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동쪽으로 배천군 경계까지 33리, 서쪽으로 평산부 경계까지 31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29리, 북쪽으로 평산부 경계까지 33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8리이다.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동음홀(冬音忽)이다 음(音)은 삼(彡)으로 쓰기도 하며, 시렴성(豉鹽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는 염주(鹽州)라 하였다. 성종(成宗)조에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현종(顯宗)조 초기에는 방어사를 폐지하고 해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조에 거란 군사를 막아 싸워 공이 있으므로 영응 현령(永膺縣令)으로 승격시켰으며, 후에 또 고을 사람 차송우(車松祐)가 위사 공신(衛社功臣)이 되었으므로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승격시켰다. 원종(元宗)조에는 또, 이분희(李汾禧)가 위사공신이 되었으므로 석주(碩州)로 고쳤고 충렬왕(忠烈王)조에는 또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이 여러 목(牧)을 없앨 때에 강등하여 부로 하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로 하고 경기에서 다시 본도에 예속시켰다.
【관원】 부사ㆍ교수 각 1인.
【군명】 동음홀ㆍ시렴성ㆍ해고(海皐)ㆍ염주ㆍ영응ㆍ온주(溫州)ㆍ오원(五原)ㆍ양원(陽原)ㆍ복주(復州)ㆍ석주.
【형승】 남쪽으로 와룡지(臥龍池)에 임하고 북쪽으로 비봉산(飛鳳山)을 의지하였다 권근(權近)의 〈향교기(鄕校記)〉에 있다. 동남쪽으로 끝이없이 큰바다가 하늘에 닿았다 위와 같은 글. 관서(關西)의 첫째주(州)이다. 이영간(李靈幹)이 말하기를, “관서의 첫째주로서, 국가의 복된 땅이다.” 하였다. ..
【제영】 들이 넓어 먼 바다에 닿았다 이원(李原)의 시에, “들이 넓어 먼 바다에 닿았고, 하늘이 낮아 푸른 멧부리에 붙었네.” 하였다. 못 물빛은 큰 들에 닿았다 권근(權近)의 시에, “못 물빛은 큰 들에 닿았고, 하늘빛은 낮은 멧부리에 닿았네.” 하였다. 용지(龍池)에 한 조각배이네 유계문(柳季聞)의 시에, “봉악(鳳岳)은 천 층 돌이요, 용지에 한 조각배이네.” 하였다. .. - 한국고전번역원
延安都護府
연안도호부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 원래 고구려의 동음홀(冬音忽)이다 신라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다.
延安
연안
安
안
앙골라 [앙골라인민공화국]
앙골라 공화국(포르투갈어: República de Angola [ʁɛ'publikɐ dɨ ɐ̃'gɔlɐ], 콩고어: Repubilika ya Ngola)은 아프리카 남서부에 있는 국가이다. 남쪽은 나미비아, 북쪽은 콩고 민주 공화국, 동쪽은 잠비아와 접한다. 서쪽은 대서양을 닿고 있다. 위요지인 카빈다는 콩고 민주 공화국과 콩고 공화국을 접한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였던 앙골라는 상당한 자연 자원이 있다. 그중에는 기름과 다이아몬드가 매우 현저하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인 나라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9943
앙골라의 자연환경
앙골라는 지형학적으로 크게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가장 큰 지역으로서 전국토의 3/5을 차지하는 중앙고원이다. 이 지역은 높이가 1,100∼1,400m에 이르는 거대한 남서 아프리카 고원과 산맥지대의 일부로서 앙골라의 남부와 중동부를 차지하고 있다. 둘째, 말란제·벵겔라·비에·후일라·룬다디비데 고원과 같은 산간고원지대로서 중앙고원지대의 북부와 서부에 2,400m 이상의 높이로 솟아 있다. 이 산간지대에는 높이가 2,590m 이상인 봉우리가 몇 개 있으며, 앙골라 최고봉인 모코 산의 높이는 2,619m이다. 나머지 두 지역은 서해안의 사막지대, 그리고 높이가 서서히 낮아지는 고원 단층애로 된 동부지역으로서 역시 높이에 의해 구분된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4a4174b001
Angola
앙골라
앙골라(Angola) ≒ 전국토의 3/5을 차지하는 중앙고원은 높이 1,000m 이상이다.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 하늘이 낮아 푸른 멧부리에 붙었다.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 앙골라(Angola) 중부 이남 지역
延安
연안
앙골라(Angola)의 남쪽 ≒ 나미비아(Namibia)
나미비아
나미비아 공화국(영어: Republic of Namibia 리퍼블릭 오프 나미비아[*], 독일어: Republik Namibia 레푸블리크 나미비아[*])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공화국이며 수도는 빈트후크이다. 북쪽에 앙골라와 잠비아, 동쪽에 보츠와나와 짐바브웨, 남쪽과 동쪽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접경하고 있다. 독립 전쟁 후 1990년 3월 21일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었다.
역사
나미비아라는 이름은 나미브 사막에서 유래했으며, 이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으로 간주된다.[3] 1990년 독립 전에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Deutsch-Südwestafrika)로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 남서아프리카로서 변경되었고, 독일과 영국의 식민지배에 영향을 받았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헤레로인과 나마쿠아인은 독일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고 그 후 헤레로나마쿠아 학살 속에, 10,000 명의 나마인 (부족의 절반 인구)과 대략 65,000 명의 헤레로인 (대략 부족의 80% 인구)이 죽었다.
지리
전체 면적은 825,418 km²정도로서 전 세계에서 34번째로 베네수엘라 다음으로 큰 나라이다. 몽골에 이어 나미비아는 인구 밀도가 가장 적은 나라 중에 하나이다.(1㎢ 당 2.5명) 나미비아는 생명체와 관계가 없는 지대가 상당히 많다. 중앙고원, 나미브 사막, 절벽 지대, 저지대(Bushveld), 칼라하리 사막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
중앙 고원은 남북에 뻗쳐있으며 북동쪽으로 해골해안(Skeleton Coast)에 접한다. 나미브 사막과 해안 평원이 남서쪽에 있으며 남쪽에는 오렌지 강이 있다. 나미브 사막이 넓게 퍼져있으며 모래언덕과 평원을 따라서 전체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폭은 100~수천km정도이다. ..…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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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트후크 [윈드후크]
빈트후크(아프리칸스어: Windhoek, 문화어: 윈드후크)는 나미비아의 수도이다. 나미비아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연결되는 철도가 있다.
나미비아의 상업, 공업의 중심지로 주민의 대부분은 반투제민족이 살고 일부 6%를 차지하는 독일계 주민도 있다. 도시는 작고 주위가 사막에 둘러싸여 있어 강수량은 적다. 교회, 도서관, 미술관 등이 정비되고 있고, 중세 독일풍의 건물이 위치해 있다.
인구 약 23만 명(2003년)이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B%B9%88%ED%8A%B8%ED%9B%84%ED%81%AC
Namibia
나미비아
나미비아(Namibia) ≒ 북동쪽으로 해골해안(Skeleton Coast)에 접한다.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 해고군(海皐郡)
나미비아(Namibia)의 수도 ≒ 빈트후크(Windhoek)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 나미비아(Namibia)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지역 ≒ 나미비아(Namibia), 앙골라(Angola) 루안다 이남 지역
延安
연안
- 百濟 -
백제
다산시문집 제8권 대책(對策)
지리책(地理策) 건륭(乾隆) 기유년(1789) 윤(閏) 5월에 임금이 내각(內閣)에서 직접 시험을 보인바, 어비(御批)에 수위를 차지하였다.
.. 한 나라 말기에 공손강(公孫康)이 군사를 나눠 주둔하여 유염(有鹽)을 차지하고 유염(有鹽)을 설립하였는데, 유염은 지금의 연안(延安)이며, 그 뒤에 그 지방의 추장(酋長)이 대방을 점거하여 대방왕(帶方王)이 되었는데, 백제 책계왕(責稽王)이 대방왕의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이것이 대방 문제의 둘째입니다. .. – 한국고전번역원
해동역사 속집 제4권 지리고(地理考) 4
사군(四郡)
..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둔유현은 《한서》에 실려 있는 낙랑군의 속현이다. 유염현은 지금의 연안부(延安府)이다. 연안은 고구려 때에는 염주(鹽州)였고, 삼국 시대에는 시염성(豉鹽城)이었는데, 시염은 유염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구태
?~?
백제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
〈삼국사기〉에는 백제 시조가 온조(溫祚)라고 전한다. 그러나 중국 기록인 〈주서 周書〉 백제전에는 "백제는 그 조상이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란 이가 있어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나라를 시작했다"고 하며, 또 "매년 4번 시조 구태의 묘(廟)에 제사지낸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수서 隋書〉에는 이를 좀 자세히 부연하고 있다. 이를 〈삼국사기〉에 전하는 또 다른 건국설화인 비류(沸流)의 어버이인 우태(優台)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 234~285 재위)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태는 '구이'라고도 읽히는데 '구'(ku)와 '고'(ko, ku)가 같은 음이고, '태'(台)의 원음은 '이'(以 i)로서 이(爾)와 같은 음이라는 것이다. 한편 부여계통의 인명이나 관명에 나오는 '태'(台)는 '치'·'디'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고이왕.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2g2326a
百濟
백제
“백제는 그 조상이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란 이가 있어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나라를 시작했다"
帶方故地
대방고지
“한 나라 말기에 공손강(公孫康)이 군사를 나눠 주둔하여 유염(有鹽)을 차지하고 유염(有鹽)을 설립하였는데, 유염은 지금의 연안(延安)이며, 그 뒤에 그 지방의 추장(酋長)이 대방을 점거하여 대방왕(帶方王)이 되었다.”
帶方王
대방왕
“유염현은 지금의 연안부(延安府)이다. 연안은 고구려 때에는 염주(鹽州)였고,
삼국 시대에는 시염성(豉鹽城)이었는데, 시염은 유염이다.”
延安
연안
유염(有鹽) ≒ 연안(延安) ≒ 대방(帶方)
연안(延安) ≒ 대방(帶方)
百濟
백제
백제(百濟)의 시조(始祖) ≒ 구태
백제의 시조 구태가 건국한 곳 ≒ 황해도(黃海道)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 ≒ 나미비아(Namibia), 앙골라(Angola)
延安
연안
- 海州 -
해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黃海道)
해주목(海州牧)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군(內未忽郡)인데, 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하였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라 고쳐 불렀으며, 고려 태조가 고을이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다 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초년에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절도사를 두고 해주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하며, 양주(楊州)와 함께 경기의 좌우 보(輔)로 삼았다. 현종(顯宗) 때에는 절도사를 폐지하고 네 도호부의 하나로 정하여 안서(安西) 도호부라 불렀으며, 예종(睿宗) 때에는 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다시 목으로 고쳤는데, 공민왕조에 왜적이 목사 엄익겸(嚴益謙)을 죽이니, 고을 아전으로서 목사를 구원하지 않은 자를 베고, 주(州)를 군으로 강등하였다가 후에 다시 목으로 하였다. 본조 태종 17년에 평산부의 서쪽 지경을 나누어서 예속시켰으며, 세조조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진관】 도호부가 2 연안(延安)ㆍ풍천(豐川). 군이 1 배천(白川). 『신증』 현으로 강등하였다. 현이 6 송화(松禾)ㆍ은률(殷栗)ㆍ강음(江陰)ㆍ강령ㆍ옹진ㆍ장연. 『신증』 배천. ..- 한국고전번역원
海州牧
해주목
해주목(海州牧) ≒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군(內未忽郡)인데, 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하였다.
海州
해주
海
해
Hae
Hanne
하 네
요하네스버그 (남아프리카 공화국 도시)[Johannesburg]
남아프리카 공화국 트란스발 주에 있는 도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제와 공업의 중심지이자 금광업의 중심지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대 도시이며, 동시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요하네스버그는 보통 란트라고 불리는 비트바테르스란트의 남쪽 경사면 해발 1,740m 지점에 있다. 란트는 트란스발 고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동서로 뻗은 산마루의 분수령으로 바위가 많은 지역이다. ..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6a2787a
Johannesburg
요하네스버그
황해도(黃海道) 최대도시(最大都市) ≒ 해주목(海州牧)
남아프리카 최대도시 ≒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황해도(黃海道) 해주목(海州牧) ≒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海州牧
해주목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의 남쪽 ≒ 마세루(Maseru)
해주목(海州牧)의 남쪽 ≒ 강령현(康翎縣)
마세루 [Maseru]
마세루(Maseru)는 레소토의 수도이다. 셀리던 강(Caledon River)의 하류에 있는 레소토의 최대 도시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국경으로부터는 불과 2km 떨어져 있다. 레소토 상업의 중심지이고 인구는 37만 명(1999년)이다.
1869년, 소토족의 왕 모쇼에쇼에 1세가 수도로 창건했다. 일찍이 영국의 보호령 버스트랜드의 주도였고 1966년 독립과 함께 수도가 되었다. 도시는 29°19′S 27°29′E / 29.31°S 27.48°E / -29.31; 27.48에 위치한다. 도시의 이름은 "붉은 사암의 장소"를 뜻하는 소토어 단어이다.[1] 국제 공항이나 레소토 국립대학이 있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51998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黃海道)
강령현(康翎縣)
동쪽으로 가을포(茄乙浦)까지 30리, 남쪽으로 등산곶(登山串)까지 60리, 서쪽으로 해주 경계까지 30리, 북쪽으로 같은 주 경계까지 35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9리이다.
【건치연혁】 영강현(永康縣)은 본래 고구려의 부진이(付珍伊)였는데 고려 초기에 영강으로 고쳤다. 현종 9년에 옹진현(甕津縣)에 예속하였으며, 예종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어서 가화현(嘉禾縣)을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종 14년에 장연현에 합하고 얼마 안 가서 예전대로 하였다. 백령도(白翎島)는 원래, 고구려의 곡도(鵠島)였는데 고려조에서 백령진(白翎鎭)이라 하고, 현종조에 진장(鎭將)을 두었다. 공민왕 때에는, 물길이 험난하므로 육지로 나와서 문화현 동촌 가을산(文化縣東村加乙山)에 임시로 우거하게 하였으며, 나중에는 땅이 협착하다 하여 진장을 폐지하고 문화현에 예속시켰다가, 공양왕 때에는 파하여 직촌(直村)으로 하였다. 본조 세종 10년에, 영강ㆍ백령을 합하여 강령현으로 하고, 해주ㆍ우현(牛峴) 이남의 땅을 분할하여 예속시켜 현의 치소를 사천(蛇川)으로 옮기고, 진을 설치하여, 첨절제사 겸 판현사로 하였는데, 후에 고쳐 현감으로 하였다. 옛날 영강현의 치소는 지금 장연현의 금동역(金洞驛)이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부진이ㆍ영강ㆍ백령 가을산 지역에 임시 우거할 때에는 그대로 백령이라 하고, 본 섬은 장연현에 속하였다.
【산천】 봉황산(鳳凰山) 고을 북쪽 10리에 있는, 진산이다. .. 순위도(巡威島) 고을 남쪽 60리 바다 가운데 있는데 목장이 있다. ..
【제영】 조수가 관도 나루터에 밀리니 언덕이 묻히네 배둔(裵屯)의 시에, “해가 수루(戍樓)에 지니 고각이 울리고, 조수가 관도에 밀리니 언덕이 묻히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康翎縣
강령현
레소토(Lesotho)의 수도 ≒ 마세루(Maseru)
강령현(康翎縣) ≒ 레소토(Lesotho)
Lesotho
레소토
강령현(康翎縣)의 남쪽 ≒ 등산곶(登山串)
마세루(Maseru)의 남쪽 ≒ 케이프타운(Cape Town)
케이프타운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도)[카프스타트]
아프리칸스어로는 Kaapstad.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도이며 케이프 주(州)의 주도인 항구도시.
희망봉에서 북쪽으로 약 50㎞ 떨어진 케이프 반도 북단에 있다. 시와 교외의 많은 구역이 테이블 산과 그에 이웃하는 산봉우리들의 가파른 비탈을 감고 있어, 케이프타운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진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시의 본역(本域)은 대부분 그 지방의 넓은 평지에 걸쳐 있다. 케이프타운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남서쪽 말단에 자리잡고 있어 최근까지는 이 나라 제1의 해항이었지만, 1980년대초에 더반 항에 추월당했다. 아프리카 남서부 대서양 연안 가까이에서 흐르는 벵겔라 해류가 냉각 효과를 미쳐 케이프타운의 기후를 온화하게 한다. 연평균강우량 660㎜ 가운데 약 절반이 평균기온 13℃의 온화한 겨울(6~8월) 동안에 내리며, 여름은 온난(21℃)·건조하다(여름 평균강우량은 51㎜ 미만). 케이프타운은 큰 강이 없어 담수의 수요를 저수지 수계로 충당한다. .. – 브리태니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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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e Town
케이프타운
등산곶(登山串) ≒ 케이프타운(Cape Town)
海州
해주
- 黃海道 出身 -
황해도 출신
金九
김구
김구 (한국 독립운동가·정치가) [金九, 백범]
1876. 7. 11 황해도 해주~1949. 6. 26 서울. 항일독립운동가·정치가.
일제침략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이다(→ 민족해방운동). – 브리태니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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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이승만
이승만 [우남 이승만, 우남, 리승만]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황해도 평산 출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교육가·언론인·정치인이며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협성회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고 도미 후에는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거쳐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 11일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6533
黃海道
황해도
海州
해주
- 朝鮮史 -
조선사
조선사편수회 (일제강점기 관청) [朝鮮史編修會]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식민주의적 한국사상(韓國史像)을 구축하기 위해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만들어진 관청(→ 일제강점기, 식민사관).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 12. 4,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강화하여 발족시킨 기구로서 사업의 종류와 원칙은 이때 정해졌다.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고문에는 이완용(李完用)·박영효(朴泳孝)·권중현(權重顯) 등이 임명되었다. 실제업무는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교수인 쿠로이타[黑板勝美]가 총괄했으며,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대표자인 이나바[稻葉岩吉]가 편찬업무를 주관했다.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주요사업은 조선사의 편찬과 이를 위한 조선사료의 수집이었다. 작업순서는 사료수집, 편찬, 기고(起稿), 초고(草稿) 정리 등으로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조선사의 편찬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편년사(編年史)로 한다. ② 편찬의 시대구분은 삼국 이전, 삼국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전기·중기·후기(~갑오개혁)의 7편으로 한다. ③ 편찬의 문체는 일문(日文)으로 한다. ④ 사료의 수집범위는 인멸이 우려되어 갑오개혁 이후까지 한다는 것 등이었다. 심의과정에서 정만조(鄭萬朝)·이능화(李能和)·어윤적(魚允迪) 등이 단군(檀君)·기자(箕子) 등 건국신화는 민족정신발휘상 중요하며, 삼국 이전을 고대조선으로 하고 신화는 첫부분에 넣어야 할 것과, 강문(綱文)에 우리 글을 넣을 것 등을 제안했으나 일본인 위원들의 독단으로 원안 그대로 결정되었다. 사료수집은 조선사편찬위원회 직원만으로는 어려워 1923년 5월 도지사회의에서 조선사료보존에 관한 협의회를 열고 '조선사편찬에 따른 고문기·문서 등 보존에 관한 건'이라는 훈시를 내려 관민이 일치하여 대대적으로 사료를 수집할 것을 독촉했다. 이것은 일제가 '학술적이고 공평한' 조선사의 편찬과 사료의 인멸 방지를 구실로 한국의 사료를 탈취하여 한국인의 사료 접촉을 막는 작업이었으며, 나아가 이 사료를 식민사관에 입각해 취사선택하여 조선사를 편찬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찬 작업을 더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위원회를 중심으로 1925년 조선사편수회관제를 공포하여 새로운 독립관청인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회장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고문에 이완용·박영효·권중현·쿠로이타·핫도리[服部宇之吉]·나이토[內藤虎次郞], 위원에 이마니시[今西龍]·이능화·어윤적·오다[小田省吾] 등, 간사에 이나바 등 3명, 수사관에 이나바·홍희(洪熹)·후지타[藤田亮策] 등 3명이 임명되었다. 이후 이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 등이 수사관으로 참여했으며, 최남선(崔南善)도 1928년 12월 촉탁위원으로 참여했다.
조선사편수회에서의 〈조선사〉 편찬작업은 앞서 정해진 골격을 대부분 유지하는 선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시대구분에 있어서 앞서의 제1·2·3편을 제1편 신라통일 이전, 제2편 신라통일 이후라고 정정하여 모두 6편으로 했다. 둘째, 한국인 위원이 강력히 주장한 건국전설(단군·기자 신화)을 편년적으로 본문에 넣는 것에는 반대했으나 제4편 고려 공민왕 24년 폐왕 원년조에 단군기사를 넣도록 했다. 셋째, 편수의 범위와 관련하여 시대구분의 시작을 신라통일 이전, 마지막을 갑오개혁으로 하는 것과 발해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나왔으나 결국 수렴되지 않았다. 넷째, 최남선이 지적한 〈삼국유사〉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 개찬한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이와 같이 조선사편찬작업에 참여한 일부 한국인 학자들은 일제가 〈조선사〉를 편찬하는 명분을 높이는 데 기여했을 뿐, 자기 의견을 거의 반영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사 편찬사업은 한국인들로부터 자기 역사연구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것으로서, 서술의 중심은 한국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서술하기보다는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며 사대주의로 일관했다거나 중국과 일본보다 역사와 문화가 뒤떨어져 있다는 데 두어졌다. 즉 일본의 한국 침략과 강점의 합법성을 입증하기 위한 사료의 취사선택·왜곡을 자행했으며,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목적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1938년까지 〈조선사〉·〈조선사료총간 朝鮮史料叢刊〉·〈조선사료집진 朝鮮史料集眞〉 등을 간행했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2443a
朝鮮史編修會
조선사편수회
조선사 편찬사업은 한국인들로부터 자기 역사연구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것으로서, 서술의 중심은 한국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서술하기보다는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며 사대주의로 일관했다거나 중국과 일본보다 역사와 문화가 뒤떨어져 있다는 데 두어졌다.
즉 일본의 한국 침략과 강점의 합법성을 입증하기 위한 사료의 취사선택·왜곡을 자행했으며,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목적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편찬 목적 ≒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며 사대주의로 일관한 나라였으며, 중국과 일본보다 역사와 문화가 뒤떨어져 있다.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고문 이완용 ≒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 출신(出身)
경기도(京畿道) 광주목(廣州牧) ≒ 체코 프라하(Praha)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고문 박영효 ≒ 경기도(京畿道) 수원(水原) 출신(出身)
경기도(京畿道)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 불가리아 소피아(Sopia)
朝鮮史
조선사
編修會
편수회
- 林慶業 -
임경업
임경업
임경업(林慶業, 1594년~1646년 음력 6월 20일(양력 8월 1일))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 무장이었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가 충민(忠愍)이며,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충주(忠州) 출생이다. 판서(判書) 임정(林整)의 후손이다.
생애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0년 소농보권관, 1622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에 응모 출전하여 정충신 휘하에서 머무르다가 안현(鞍峴) 싸움에서 이괄의 군대를 맞아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에 올랐다.
그후 우림위장·방답진첨절제사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영장으로 강화에 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 1630년 평양중군으로 검산성(劒山城)과 용골성(龍骨城)을 수축하는 한편 가도(島)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劉興治)의 군사를 감시, 그 준동을 막았다.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명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공유덕(孔有德) 등의 무리를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방어사를 겸임할 때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636년 무혐의로 복직되었다.
대청 투쟁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서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되었다. 1640년 안주목사 때 청나라의 명령으로 주사상장으로 가도에 주둔 중인 명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한다. 어쩔 수 없이 출병하긴 하였으나, 다시 명군과 내통하여 의도적으로 선봉장을 피하고, 청나라 장수 섬세괴를 선봉장에 나서게 하고 그 사실을 명군에 알려 섬세괴가 전사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도 주둔 명군의 지휘관인 도독 홍승주가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체포되었다. 임경업은 청으로 압송되기 전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했고, 이에 청 태종은 임경업을 빌미로 조선 내 반청세력에 대한 소탕령을 내렸다. 조선에 더 머무르기 힘들게 된 임경업은 1643년 명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명나라 등주 도독 황룡을 통해 숭정제로부터 부총병의 직위를 하사받고 청나라 정벌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벌 준비 중 청군이 북경을 함락하고 청태종이 산해관에 입성하자 황룡은 겁을 먹고 도망쳤고, 중군을 이끌던 마등홍이 대신 전군을 영솔하고 임경업과 함께 석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명나라 숭정제가 목매어 자결하였고, 천도한 남경마저 함락되어 정세가 바뀌자 마등홍 역시 청에 항복하였다. 임경업도 도망가려 하였으나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 태종은 임경업을 설득하여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경업은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이때 국내에서 좌의정 심기원의 모반에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기원이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접한 1646년 인조는 임경업을 심문하기 위해 임경업의 환국을 요청했고, 순치제는 그를 내주었다. 인조의 친국 과정에서 심기원과는 아무런 관련 사항이 없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자 임경업을 시기한 김자점이 나라를 배신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위반했다며, 형리들을 시켜 장살(杖殺)시켜 버렸다. ..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45220
林慶業
임경업
임경업(林慶業) ≒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의주부윤이었다.
白馬
백마
- 義州 -
의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3권 평안도(平安道)
의주목(義州牧)
동쪽은 삭주부(朔州府) 경계까지 1백 16리, 귀성부(龜城府) 경계까지 82리이고, 남쪽은 용천군(龍川郡) 경계까지 60리, 같은 군의 경계에 있는 양책관(良策館)까지 66리, 철산군(鐵山郡)경계까지 79리이고, 서쪽은 압록강(鴨綠江)까지 14리이고, 북쪽은 같은 강까지 2리이며, 서울에서는 1천 1백 86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용만현(龍灣縣)인데, 화의(和義)라고도 불렀다. 처음에는 거란(契丹)이 압록강 동쪽 기슭에 성을 두고 보주(保州)라고 일컬었고, 문종 때에 거란이 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포주(抱州) 일명 파주(把州). 라고 일컬었는데, 예종 12년에 요(遼)의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도통(都統) 야율녕(耶律寧) 등과 금(金)의 군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 도망해 와서 우리 영덕성(寧德城)에 문서를 보내어 내원성(來遠城) 및 포주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속하므로 우리 군사가 그 성에 들어가서 병기ㆍ돈ㆍ곡물을 수습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의주 방어사(義州防禦使)로 고치고 남계(南界)의 인호(人戶)를 덜어다가 채워서 그제서야 다시 압록강으로 경계를 하고 관방(關防)을 두었다...
【진관】 군(郡) 2 철산(鐵山)ㆍ용천(龍川).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각 1인.
【군명】 용만ㆍ화의ㆍ보주ㆍ포주ㆍ파주ㆍ함신ㆍ송산(松山).
【풍속】 풍기(風氣)가 굳세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사냥[畋獵]을 좋아한다.
지지(地志).
【형승】 압록강이 천연적인 도랑을 이루고 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낙랑(樂浪)이 지경을 나누었다. 기순(祁順)의 시에서.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의주는 우리나라 문호(門戶)이어서, 예로부터 중요한 관방(關防)이네. 장성(長城)은 어느 해에 쌓았는가, 꾸불꾸불 산 언덕을 따랐네. 넓고 넓은 말갈(靺鞨)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흘러 봉강(封疆)을 경계지었네. 내가 벌써 천 리를 떠나왔는데, 여기 와서 이렇게 머뭇거리네. 내일 아침 강 건너 떠나가면, 요동 벌판에 하늘이 망망하리라.” 하였다.
위화도(威化島) 검동도의 아래에 있는데, 둘레가 40리이다. 검동도와 위화도 두 섬 사이를 압록강의 지류가 가로막고 있는데 굴포(掘浦)라고 일컫고 주성(州城)에서 25리 떨어졌다. 위의 세 섬들은 그 땅이 모두 기름지고 넉넉하여서 백성들이 많이 개간해 경작했었는데, 천순 5년 신사에 농민들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에게 잡혀가 그 뒤부터는 관(官)에서 개간을 금하였다.
【고적】 국내성(國內城)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교외의 돼지[郊豕]가 달아났는데, 임금이 장생(掌牲) 설지(薜支)에게 명하여 쫓게 하니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잡아서 국내의 인가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臣)이 돼지를 쫓아 국내에 이르러서 그 산수(山水)를 보니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五穀)에 알맞고 또한 미록(麋鹿) 어별(魚鼈)의 자산(資産)이 많습니다.
【인물】 고구려 을파소(乙巴素) 고국천왕 때에 4부(部)가 함께 동리(東里)의 안류(晏留)를 추천하니, 임금이 국정(國政)을 맡기는데, 안류가 사양하여 이르기를, “미신(微臣)은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대정(大政)에 참여할 만하지 못합니다. .. - 한국고전번역원
義州
의주
의주목(義州牧) ≒ 보주(保州)
保州
보주
保
보
보아
리스보아
리스본 [리스보아]
리스본(영어: Lisbon, 포르투갈어: Lisboa 리스보아[*])은 포르투갈의 수도이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도 하다. 대서양에 면한 항구 도시이며, 인구는 564,477명 (2007년)이다.[1] 리스본의 경제적인 산출, 삶의 표준, 시장 크기, 그랑드 리스보아 (Grande Lisboa) 소구역에 기인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두 번째로 가장 중요한 재정적 경제적 중심이다.[2]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B%A6%AC%EC%8A%A4%EB%B3%B8
포르투갈 [포도아, 포르투칼, 포르투갈 공화국, 뽀르뚜갈]
포르투갈(포르투갈어: Portugal, 문화어: 뽀르뚜갈, 통용: 포도아(葡萄牙))는 유럽 서남부 이베리아 반도의 서부에 위치하는 나라이다. 정식 명칭은 포르투갈 공화국(포르투갈어: República Portuguesa 헤푸블리카 포르투게자[*])이다. 수도는 리스본이다. ..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10290
保州
보주
보주(保州) ≒ 리스본(Lisbon)
義州
의주
- 鴨綠江 -
압록강
압록강 [야루강]
..고대 한국어 아루(혹은 알루)와 만주어로 두 벌판의 경계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33800
의주목(義州牧) ≒ 검동도와 위화도 두 섬 사이에 압록강이 천연적인 도랑을 이루고 있다.
海峽
해협
지브롤터 해협 (유럽 해협) [Gibraltar, Strait of, 프레툼 헤르쿨레움]
(라)Fretum Herculeum.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해협.
스페인 남단과 아프리카 북서단 사이에 있으며, 길이가 58㎞이고, 마로키 곶(스페인)과 키레스 곶(모로코) 사이에서는 너비가 13㎞까지 좁아진다. 해협의 서쪽 끝은 트라팔가르 곶(북쪽)과 스파르텔 곶(남쪽) 사이에 있으며 너비가 43㎞이고, 동쪽 끝은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 사이에 있으며 너비가 23㎞인데,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은 지브롤터의 바위산(북쪽)과, 모로코 안에 있는 스페인의 고립 영토인 세우타 동쪽에 있는 하초 산(남쪽)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해협은 중요한 통로의 하나이며, 아프리카 북쪽에 있는 아틀라스 산맥과 스페인 고원 사이에 형성된 호(弧)에서 평균수심이 365m이다. ..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0j0666a
Strait of Gibraltar
지브롤터 해협
압록강(鴨綠江) ≒ 지브롤터 해협
스페인 지브롤터 해협의 남쪽 ≒ 모로코(Moroco)
의주목(義州牧)의 남쪽 ≒ 백마산(白馬山)
백마산(白馬山) ≒ 주에서 남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흰 용마(龍馬)가 나와서
논 까닭에 이름지었다고 한다.
모로코 최대 도시이자 항구 ≒ 카사블란카
카사블랑카 [Casablanca]
카사블랑카(Casablanca는 에스파냐어로 "하얀 집"을 뜻함. 아랍어: الدار البيضاء ad-Dār al-Bayḍāʼ / 모로코 아랍어로는 dar beïda) 는 모로코의 최대 도시이다. 위도는 33°32′N 7°35′W.에 있다.
역사
모로코 경제중심지 카사블랑카 –CASABLANCA-
카사블랑카(Casablanca)는 14세기 때부터 "앙파(Anfa)"라고 불리기 시작되었고 19세기 때 비로소 도시 모양새를 갖추게 된 현대도시이다. "카사블랑카(Casablanca)"란 이름은 본래 스페인어로 -하얀 집- 을 뜻한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연합국 대표 영국 처질 수상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비밀 회담이 열렸던 곳으로도 유명하며 또한 명화 "Casablanca"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도시이기도 하다.
경제의 중심지 카사블랑카 인구 350만의 도시 카사블랑카는 현재 모로코 제1의 상업 도시임은 물론 북 아프리카 최대 도시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도시 면적은 약 113 Km2이며 모로코 전체 인구의 10%가 거주하고 있다. 모로코 공업의 60%를 차지하고 전력 에너지 30%를 소비하며 수많은 국내외 금융업계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 대규모 항만시설 및 모하메드 5세 국제공항이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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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ablanca
카사블란카
카사블란카 ≒ 하얀 집(白城)
의주목(義州牧) 백마산성(白馬山城) ≒ 모로코(Moroco) 카사블란카(Casablanca)
白馬山城
백마산성
- 國內城 -
국내성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3권 평안도(平安道)
의주목(義州牧)
【고적】 국내성(國內城)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교외의 돼지[郊豕]가 달아났는데, 임금이 장생(掌牲) 설지(薜支)에게 명하여 쫓게 하니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잡아서 국내의 인가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臣)이 돼지를 쫓아 국내에 이르러서 그 산수(山水)를 보니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五穀)에 알맞고 또한 미록(麋鹿) 어별(魚鼈)의 자산(資産)이 많습니다. 서울을 옮긴다면 백성에게 이로움이 무궁할 뿐 아니라 또한 병란의 걱정을 면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친히 가서 지세(地勢)를 보고, 22년 겨울에 임금이 국내에 서울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고서 4백 25년을 지냈으며, 장수왕이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다. ○ 지금 상고하건대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에, “인주(麟州)에 장성(長城) 터가 있는데, 덕종 때에 유소(柳韶)가 쌓은 것이며, 주(州)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하였고, 또 병지(兵志)에,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 경계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였으니 국내성은 마땅히 옛 인주의 지경 안에 있을 것이다.” 하였으며.. –한국고전번역원
國內城
국내성
국내성(國內城) ≒ 불이성(不而城)
不而
불이
불
남방(南方) ≒ 불(火) ≒ Red(赤)
의주목(義州牧) ≒ 에스파니아, 포르투갈, 모로코
에스파니아, 포르투갈의 남쪽(南方) ≒ 모로코(Moroco)
모로코의 수도(首都) ≒ 라바트(Rabat)
라바트(Rabat) 뜻 ≒ 승리(勝利)의 근거지
라바트 [Rabat]
라바트(아랍어: الرباط)는 모로코의 수도이다. 인구수는 2004년을 기준으로 63만명에 달하고 있으며, 면적은 5,321㎢로 경기도의 절반 크기에 해당된다.
역사
라바트의 역사는 기원전 300년 부우 레그레그 강의 둑에 쉘라로서 알려진, 정착촌으로부터 시작했다.[1] 40년 로마인들이 쉘라를 정복했고 그곳을 로마인 정착촌 살라 콜로니아로 개조했다. 250년 베르베르인 지배자들에게 그곳을 넘겨줄때까지 식민지를 유지했다. 1146년 알모하드 왕조 지배자 압드 알-무'민이 스페인 공격을 위한 착수 지점으로서 이용하기 위해 라바트의 리바트를 완전한 규모의 요새로 바꾸었다. 1170년 그곳의 군사 중요성에 기인하여, 라바트는 현재의 "승리의 근거지"를 뜻하며, 현재의 이름을 유래한 리바투 엘-파스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B%9D%BC%EB%B0%94%ED%8A%B8
Rabat
라바트
국내성(國內城) ≒ 라바트(Rabat)
고구려 유리왕 22년 겨울에 임금이 국내에 서울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고서
4백 25년을 지냈으며, 장수왕이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다
國內城
국내성
義州牧
의주목
- 箕子朝鮮 -
기자조선
準
준
서
성(姓)의 하나.
문헌상 170여 개의 본관이 전하나, 오늘날 비교적 계통이 자세히 전하는 것은 이천(利川)·달성(達城)·장성(長城)·연산(連山)·남평(南平)·부여(夫餘)·남양(南陽)·평당(平當)·복흥(福興)·의령(宜寧)·황산(黃山)·염주(鹽州)·군위(軍威)·가성(佳城)·봉성(峰城)·용궁(龍宮) 등 20여 본이다. 서씨의 연원에 대해서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기자의 40세손인 준(準)이 위만의 침입을 피하여 서아성(徐阿城: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이주해 살았는데 이에 후손들이 그 지명을 따서 서씨라 했다고 전한다. 서씨는 대체로 이천서씨의 시조인 서신일(徐神逸)을 도시조(都始祖)로 삼고 있으며, 이천 이외의 나머지 본관은 이천서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천서씨는 신라 개국공신 서두라(徐豆羅)의 후손으로 신라 효공왕 때 아간(阿干)을 지낸 신일을 시조로 삼고 있다. 신일이 신라 말기에 이천 효양산(孝養山) 밑에 은거한 이후로 후손들이 이곳에 세거했다고 한다. 달성서씨는 이천서씨의 시조인 신일의 후손이라고 전하나 이를 확인할 만한 문헌이 없어 고려시대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낸 서한(徐閈)을 시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와, 고려시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달성군에 봉해진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는 판도공파(版圖公派)의 두 계통이 있다. 이 2파는 대구에 세거했으므로 같은 성씨일 것이나 문헌이 없어 분파도 따로 되어 있다. 소윤공파는 시조 이후 기록이 실전되어 7세 익진(益進)부터 대를 잇고 있으며, 판도공파는 7세조를 파조로 하여 현감공파(縣監公派)·학유공파(學諭公派)·판서공파(判書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 등으로 분파했다. 부여서씨의 시조인 서융(徐隆)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로 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당 고종으로부터 서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며 그 후손인 서존(徐存)을 중시조로 하거나 혹은 서존의 후손인 서수손(徐秀孫)을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21만 5,412호와 인구수 69만 3,954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14위이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1s3383a
徐씨
서씨
“서씨의 연원에 대해서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기자의 40세손인 준(準)이 위만의 침입을 피하여 서아성(徐阿城: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이주해 살았는데 이에 후손들이 그 지명을 따서 서씨라 했다고 전한다.”
徐阿城
서아성
신증동국여지승람 제7권 경기(京畿)
여주목(驪州牧)
동은 충청도 충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44리요, 강원도 원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요, 남은 음죽현(陰竹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3리요, 서는 이천부(利川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8리, 광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52리요, 북은 지평현(砥平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7리, 양근군(楊根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57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0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황효(黃驍)로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황려현(黃驪縣) 황리(黃利)라고도 한다. 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 원주에 붙이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 때 영의(永義)로 고치고, 충렬왕(忠烈王) 31년에 순경왕후(順敬王后) 김씨의 고향이므로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시켰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21년에 신우(辛禑)를 이 군에 옮기고, 황려부로 승격시켰다가 공양왕 원년에 다시 내려 군으로 하였다. 본조 태종조에 원경왕후의 고향이므로 다시 승격시켜 부(府)로 하고, 음죽현 북쪽 어서이촌(於西伊村)을 합하여 충청도로부터 본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고쳐 도호부(都護府)로 했다.
예종(睿宗) 원년에 영릉(英陵)을 부의 북성산(北城山)에 옮기고, 천녕현(川寧縣)을 혁파하여 이 부에 소속시키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 승격시켜 목(牧)으로 하였다.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신증』 연산(燕山) 7년에 본주(本州)가 쇠잔하였으므로 판관을 혁파하였다.
【군명】 골내근(骨乃斤) ㆍ황효(黃驍)ㆍ영의(永義)ㆍ황려(黃驪)ㆍ여강(驪江)ㆍ여흥(驪興)ㆍ여성(驪城)ㆍ황리(黃利).
【성씨】 본주(本州) 이(李)ㆍ민(閔)ㆍ안(安)ㆍ필(畢)ㆍ윤(尹)ㆍ김(金)ㆍ한(韓)ㆍ음(陰). 천녕(川寧) 견(堅)ㆍ현(玄)ㆍ최(崔)ㆍ유(兪)ㆍ방(房)ㆍ장(張). 등신(登神) 유(兪).
【형승】 국도 상유(上游)에 있다 김수온(金守溫)의 보은사(報恩寺) 기문에 있다. 한수마암(捍水馬巖) 이색(李穡)의 시에, “물을 막는 공은 마암석(馬巖石)이 높고, 하늘에 뜬 형세는 용문산(龍門山)이 크구나.” 하였다. 들이 평평하고 산이 멀다[野平山遠] 전인(前人)의 여강시(驪江詩)이다. 산수가 맑고 기이하다 권근의 여강시이다. 긴 강이 서쪽으로 흐르고, 첩첩한 영(嶺)이 북에서 왔다 설문우(薛文遇)의 시에, “긴 강이 서쪽으로 흘러 창해(滄海)에 들어가고, 첩첩한 영(嶺)이 북으로 와서 얕은 산을 둘렀네.” 하였다.
【산천】 북성산(北城山) 주 서쪽 7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옛 성터가 있다. 오압산(烏鴨山) 주 남쪽 10리에 있다. 강금산(岡金山) 주 남쪽 25리에 있다. ..
여강(驪江) 곧 한강 상류이며 주 북쪽에 있다. 객관(客館)을 강을 베개하여 지었다.
【능묘】 영릉(英陵) 우리 세종 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의 능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를 합장했다. 능은 본래 광주 서쪽 대모산(大母山)에 있었는데, 예종(睿宗) 원년 기축에 주 북성산의 양지편에 이장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驪州牧
여주목
여주목(驪州牧) ≒ 기천군(沂川郡)
沂 기
Ki
키
키예프 [Kiev, 키에프, 끼예브, 키이우, 키이우 (시)]
키예프(문화어: 끼예브, 우크라이나어: Київ 키이우[*], 러시아어: Ки́ев, 고대 루테니아어: Кыѥвъ)는 우크라이나의 최대 도시이자 수도이다. 드니프르 강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드니프로 강이 흑해(黑海)로 흘러드는 어귀로부터는 952㎞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인구는 2001년 현재 261만 1300명이다. ..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32564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공화국]
우크라이나(Україна)는 동유럽의 국가이다. 남쪽으로는 흑해, 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으로는 벨라루스, 서쪽으로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와 닿아 있다. 키예프(Kyiv)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이다.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후의 혼란과 끊임 없는 전쟁 속에서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였으나,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합병되었다.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하였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C%9A%B0%ED%81%AC%EB%9D%BC%EC%9D%B4%EB%82%98
Kiev
키예프
키예프(Kiev) 한자표기 ≒ 기보(基輔)
여주목(驪州牧) ≒ 키예프(Kiev)
驪州
여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경기(京畿)
이천도호부(利川都護府)
동쪽으로 여주(驪州)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40리이다. 서쪽으로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37리이고, 북쪽으로 광주(廣州) 경계까지 21리이며, 서울까지 1백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남천현(南川縣) 남매(南買)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승격시켜 군주(軍主)를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이 황무(黃武)로 고치어, 한주(漢州)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태조(太祖)가 남으로 정벌할 때에, 고을 사람 서목(徐穆)이 인도하여 물을 잘 건넜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을 주어서 군(郡)을 만들고 광주(廣州)에 예속시켰다. 인종(仁宗)이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高宗) 44년에는 영창(永昌)이라 일컬었으며, 공양왕(恭讓王)은 조비(祖妣) 신씨(申氏)의 고향인 까닭으로 승격시켜 남천군(南川郡)으로 만들었다. 본조 태조 2년에는 다시 이천현으로 만들어 감무를 두었고, 태종 13년에는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만들었으며, 세종 13년에는 지현사(知縣事)로 고치었다가, 26년에 천호(千戶) 이상이므로 예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관원】 부사(府使) 한 사람인데 종삼품(從三品)이며, 여러 도호부가 같다. 교수(敎授) 1인.
【군명】 남천(南川)ㆍ남매(南買)ㆍ황무(黃武)ㆍ영창(永昌)
【성씨】 본부 서(徐)ㆍ신(申)ㆍ안(安)ㆍ한(韓)ㆍ장(張)ㆍ왕(王)ㆍ홍(洪)ㆍ황(黃) 모두 내성(來姓)이다.
【형승】 땅은 넓고 기름지며 백성은 많고 부유하다. 권근(權近)의 향교기(鄕校記). ..
- 한국고전번역원
利川都護府
이천도호부
여주목(驪州牧) 이천도호부(利川都護府) ≒ 본래 고구려 남천현(南川縣)이다.
여주목(驪州牧) ≒ 키예프(Kiev)
러시아 제 3의 도시 ≒ 오데사(Odessa)
오데사 (우크라이나 도시) [Odessa]
우크라이나 오데사 주의 해항이자 주도.
..19세기 동안, 특히 1866년에 철도가 들어온 이후 급성장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은 제2의 항구이자 러시아 제3의 도시가 되었다. 곡물이 주요수출품이었다. 이 도시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고, 전함 포툠킨호 반란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고전적인 영화 〈포툠킨 Potemkin〉이 1925년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대항한 장기간의 방어전 동안 심한 피해를 입었다. ..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6a0467a
Odessa
오데사
이천도호부(利川都護府) ≒ 오데사(Odessa)
利川
이천
“기자의 40세손인 준(準)이 위만의 침입을 피하여 서아성(徐阿城: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이주해 살았다.”
準
준
- 萬景臺 -
만경대
김일성
생애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에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하리 칠곡(외가가 있었던 곳으로, 오늘날 평양 만경대)[7]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년 7월 10일~1926년)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8] 1892년~1932년)의 삼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의 전주 김씨 12대조가 전라북도에서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며,[7][9] 김형직은 할아버지 이래로 지주 집안의 묘지기였으며,[10]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한국의 독립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4] 어머니 강반석은 기독교도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10]는 칠골교회의 장로였다.[4] 김일성의 외가는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강돈욱은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인이었다.[10]
1919년 일곱 살이었던 김일성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장백현 팔도구에서 팔도구소학교를 다녔다. 그 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 김형직의 결심에 따라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평안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下里) 칠골에 있는 외가에서 머물면서 창덕소학교에 다녔다.[10] 창덕학교는 1907년 하리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5년제 학교인데,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도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한때 교장을 맡기도 했다.
북조선 측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열세 살 때(1925년)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무송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지린 성 지린으로 가서 유원 중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였고,[11] 1926년 10월 17일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다.[6] 1927년 길림성 중국인 학교인 육문중학교에 다니다가 1929년 반일활동으로 중국 군벌 당국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7]
감옥에서 나와 국민부 산하의 청년 조직에서 일할 무렵(1929년에서 1931년 사이) 김일성으로 개명한다.[7] 1930년 6월 30일 지린 성 창춘에서 카륜 회의를 하였다. 그의 무장 투쟁은 1937년부터 1940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작은 규모의 보천보 전투가 최고 성과로 여겨지며, 이 전투에서 일본인 7명 사망, 7명 중상의 피해를 입혔다.[4] 보통 약 100명 정도를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런 유격전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항일투쟁은 때때로 조선의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4] 당시 동북항일연군의 정치위원장이었던 위증민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던 데 비해 김일성의 현상금은 1만 엔으로 오르게 되었다.[4] 김일성 부대는 1940년 3월 25일 화룡현 홍기하에 있던 마에다 부대를 습격하였다. 이 습격에서 일본인 백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했으며, 탄약과 양곡을 노획했으나, 북한에서는 그다지 조명 받지 못하는 사건이다. 또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붕괴를 초래한 원인으로 교조주의를 혹독히 비판하고 하나의 통일된 운동으로 조직적인 투쟁을 할 것을 제시했다. 다만, 1929년 길림 제5 중학교 학생으로서 처음으로 조선혁명군 사건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길림 감옥에서 복역하고 1930년 5월 초에 출옥했다. 당시 그는 이종락의 부하로 활약했으나 북조선에서는 부인한다.[4][5]...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X507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
【건치연혁】 본래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태백산(太伯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단군(檀君)이라 일컬었으니, 이것이 전조선이요, 주 무왕(周武王)이 상(商)을 이기고 기자(箕子)를 여기에 봉하니, 이것이 후조선이요, 전하여 41대 손 준(準)에 이르러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그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 험(險)은 검(儉)이라고도 쓰니, 바로 평양이다. 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漢) 나라의 조명(詔命)을 받들려 하지 않으니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사군(四郡)으로 만들고 왕험성으로 낙랑군(樂浪郡)을 삼았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옮겨와 도읍하였고, 보장왕 27년에 당 고종(唐高宗)이 이적을 보내 신라와 함께 협공(夾攻)하여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 설인귀(薛仁貴)에게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진무(鎭撫)하게 하였는데, 뒤에 당 나라 군사가 떠나자 그 땅이 다 신라로 들어갔다. – 한국고전번역원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2권 지리고(地理考) 2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양성은 압록강(鴨綠江) 동쪽에 있는데, 일명 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하며, 바로 기자의 옛 도성이다. 성 밖에는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의 치소(治所)가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平壤府
평양부
평양부(平壤府) ≒ 본래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이다.
평양부(平壤府) ≒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사군(四郡)으로 만들고 왕험성으로 낙랑군(樂浪郡)을 삼았다.
평양부(平壤府) ≒ 낙랑군(樂浪郡)
평양부(平壤府) ≒ 성 밖에는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箕子墓
기자묘
기자의 피라미드 (이집트 건축) [Giza, Pyramids of, 아라마트알지자]
(아)Ahrāmāt al-Jῑzah.
이집트의 알지자(기자) 근처 나일 강 서안(西岸)의 바위고원에 세워진 제4왕조(BC 2575~2565경) 3개의 피라미드로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do?query1=b03g1159a
카이로 (이집트 수도) [Cairo]
(아)al-Qahirah('승리한'이라는 뜻). 이집트의 수도이며 아프리카 최대의 도시
나일강 하류가 로제타와 다미에타의 두 지류로 갈라지는 지점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며,
시가지의 대부분은 강의 우안에 조성되어 있다. 같은 자리에 같은 이름으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이 대도시는 옛것과 새것,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 브리태니커 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1k1237a
카이로 [까히라, 알까히라]
중-근세 이슬람 시대 건축물
카이로의 옛 도심 알 아즈하르 모스크인근 지역에는 이슬람 시대 사원과 성곽, 영묘, 학교인 마드라사가 수없이 많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살라딘이 세운 카이로 성(영어명 Citadel,아랍어 발음은 Qalaa)인근으로부터 북으로는 파티마 성곽의 북쪽 지역에까지 이르는 지역이다. 남북으로 4킬로미터가 넘는다. 대표적인 사원으로 알 아즈하르 모스크, 핫산 술탄 모스크(영어명 Sultan Hassan Mosque), 이븐 툴룬 모스크, 알 하킴 모스크, 리파아이 모스크가 있다. 후세인 모스크에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인 후세인 이븐 알리의 목이 안치되어 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시아파들은 이 사원을 중하게 여긴다. 카이로 성에 서있는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는 지대가 높은 성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어디서나 눈에 띈다.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던 시대에 세운 만큼 오스만 양식으로 지어졌다.
옛 도심에는 직사각형의 도시를 에워쌓던 성곽과 성문이 일부분 남아 있다. 특히 북쪽의 성곽과 성문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나스르 문'(현지 발음: 밥 알 나스르)과 '푸트흐 문'(밥 알 푸트흐) 두 개의 성문과, 10미터가 넘는 높이에 길이 수 백 미터에 이르는 성곽이 있다. 성의 남쪽에는 성곽은 남아 있지 않고, 성문인 '즈웨일라 문'(밥 알 즈웨일라)이 서 있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30237
Cairo
카이로
기자묘(箕子墓) ≒ 기자의 피라미드
평양부(平壤府) ≒ 카이로(Cairo)
平壤
평양
김일성(金日成) ≒ 1912년 4월 15일에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하리 칠곡(외가가 있었던 곳으로, 오늘날 평양 만경대)[7]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년 7월 10일~1926년)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8] 1892년~1932년)의 삼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金日成) ≒ 평양부(平壤府) 만경대(萬景臺) 출신이다.
萬景臺
만경대
萬 일만 만 景 볕 경, 그림자 영 臺 대 대
景 볕 경, 그림자 영
뜻을 나타내는 날일(日☞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京(경☞언덕 위에 궁전(宮殿)을 세움→높은 臺대)으로 이루어짐. 높은 대 위에 태양이 빛나다→태양의 빛, 또 빛에 비치어 線(선)이나 색이 뚜렷해 지다→물건(物件)의 그늘→빛에 비치는 경치 말함. – 다음한자사전
만경대(萬景臺) ≒ 평양부(平壤府) 시내 언덕 위에 세워진 높은 탑 또는 사원
카이로성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 지대가 높은 성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어디서나 눈에 띈다.
만경대(萬景臺) ≒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平壤府
평양부
김일성은 1930년 6월 30일 지린 성 창춘에서 카륜 회의를 하였다. 그의 무장 투쟁은 1937년부터 1940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작은 규모의 보천보 전투가 최고 성과로 여겨진다.
吉林省
길림성
길림성(吉林省) ≒ 워싱턴주(State of Washington) ≒ 상록수주(常綠樹州)
장춘(長春) ≒ 시애틀(Seattle) ≒ 신경(新京)
長春
장춘
“1940년 일제는 관동군을 76만명으로 늘려 항일연군 토벌을 강화했다.”
“1942년까지, 전사·귀순하고 있지 않는 구성원은 소련에 탈출하였으므로 동북항일연군은 소멸했다.”
Changing the Face of Region
지역 얼굴 바꾸기
佛語
불어
불란서(佛蘭西) ≒ 캐나다 동북방 퀘벡 프렌치(Quebec Frenc)
퀘벡주(Quebec) ≒ 프랑스(France)
퀘벡 프렌치(Quebec Frenc) 동북방 ≒ 노바스코샤,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뉴브런즈윅
英語
영어
영국(英國) ≒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브런즈윅
19세기 북미대륙 중부 지역 ≒ 청(淸)나라
19세기 캐나다, 북미대륙 서부 및 멕시코 ≒ 조선의 함경도(咸鏡道)
20세기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중심지 ≒ 강소성(江蘇省) 즉 미시시피주(Mississippi)와 광동성(廣東省) 즉 플로리다주(Florida)
19세기 북미대륙 동부 지역 ≒ 서역 및 유럽, 중동, 아프리카,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
19세기 북미대륙을 점령한 나라 ≒ 북미대륙 동부에 위치한 원 서구열강 군벌세력
20세기 초 미국(美國) ≒ 원(原) 미국(美國) 즉 메사추세츠주(Massachusetts)와 북미대륙 동북방에 위치한
원 서구열강 군벌세력들에 의해 건국된 연방.
Changing the Name of Empire
제국이름 바꾸기
20세기 초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제국(日本帝國) ≒ 원(原) 미국(美國) 즉 메사추세츠주(Massachusetts)와 북미대륙 동북방에 위치한 서구열강 군벌세력들에 의해 건국된 연방군대.
일본제국군(日本帝國軍) ≒ 미연방군대(美聯邦軍隊)
1940년 일본제국(日本帝國) ≒ 관동군을 76만명으로 늘려 항일연군 토벌을 강화했다.
東北抗日聯軍
동북항일연군
金日成
김일성
平壤
평양
- 東北抗日聯軍 -
동북항일연군
동북항일연군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투쟁을 주도한 군사조직으로, 중국인과 한국인 등의 민족통일전선 성격을 띠었다.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유격부대를 공산당의 주도로 통합한 군사조직이다. 김일성 등 한국 독립 무장 투쟁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였다.
창설
동북한일연군은 만주국의 각 지방에 존재한 중국공산당 지도하의 반일 유격대를 기반으로 창설되었다.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의 결성이 호소되자, 중국공산당도 8월 모든 항일운동을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정리해 통일전선을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다음 1936년부터 만주 각지의 동북 인민 혁명군의 재편성이 시작되어, 동북항일연군이 성립했다.
활동
1937년에 제1로군 제 2군 제 6사(사장은 김일성)가 당시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함경남도(현재는 양강도) 보천보을 습격하였다. 이 전투로 김일성은 조선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항일 의병장으로서 유명하게 되어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할 때에 유력한 기반이 된다.
제1로군이 활동하고 있던 남만주는 조선과의 국경지대였고 전투가 잦았기 때문에, 제1로군의 활동은 조선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보천보 전투 이전부터 제1군의 김일성이나 최현( 제1로군 제 4사의 단장으로, 후의 북한 인민 무력 부장)의 이름은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등을 통해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 일본은 김일성이나 최현에 현상금을 걸었다. 이들 신문에서는 그들을 도적떼로 비난해, 피해를 받은 주민에게 동정하는 논조가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언론은 일본 정부에 의하여 검열을 받았으므로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 후도 만주국이나 조선 총독부를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실시했기 때문에, 일본은 이를 식민지 지배·만주국 통치를 가로막는 장해물로 간주하여 철저한 탄압을 하였다. 일본은 만주국의 경찰·군대나 관동군 등을 동원해 게릴라의 거점이나 협력하는 촌락 등을 섬멸하고, 이것과 병행하여 집단 부락을 건설하여 그들의 활동을 고립시키고, 귀순 공작 등의 수법을 이용해 동북항일연군을 탄압했다. 특히 집단 부락의 건설로 동북항일연군은 물자의 공급이 곤란해져 두메 산골에서의 게릴라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
동북항일연군의 전성기에는 참여인원이 1만명이 넘어 일본제국의 만주 및 중국 침략에 커다란 장애였다. 동북항일 연군은 한반도 내로 진공작전을 펼치기도 해,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도 위협으로 작용했다. 1939년부터 관동군과 만주국군의 마지막 특설대 등에 의한 대규모 소탕 작전을 전개하여 동북항일연군은 양정우, 리홍광 등 많은 전사자를 내었고 전광 등이 일본에 귀순하였다. 1940년 일제는 관동군을 76만명으로 늘려 항일연군 토벌을 강화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남은 사람들도 물자가 부족하여 활동의 지속하기 어려워져 소련으로 탈출했다. 항일연군 1~3로군의 지도부와 잔여 병력들의 상당수는 1941년까지 상소련 영내로 이동했다. [1] 1942년까지, 전사·귀순하고 있지 않는 구성원은 소련에 탈출하였으므로 동북항일연군은 소멸했다.
- 위키백과
東北抗日聯軍
동북항일연군
“1940년 일제는 관동군을 76만명으로 늘려 항일연군 토벌을 강화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남은 사람들도 물자가 부족하여 활동의 지속하기
어려워져 소련으로 탈출했다.”
“1942년까지, 전사·귀순하고 있지 않는 구성원은 소련에 탈출하였으므로 동북항일연군은 소멸했다.”
1942년 ≒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소멸
보천보 전투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만주에서 활약하던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부대가 국내진공하여 량강도
보천군 보천읍{(보천보)(해방전 명칭:혜산군 보천면 보전리)}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 위키백과
咸鏡道
함경도
혜산군[惠山郡] [명사]<지명> 함경남도의 북동쪽에 있는 군.
– 다음국어사전
량강도 보천군 보천읍{(보천보)의 해방전 명칭 ≒ 혜산군 보천면 보전리이다.
보천보전투 [갑산혜산진전투]
김일성(金日成)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의 일부 병력이 1937년 6월 4일,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진에 있는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하고 보천보 일대를 일시 점령한 사건. 일명 혜산진(惠山鎭) 사건이라고 한다. 당시 백두산 일대의 장백 근거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박달(朴達)·박금철(朴金哲) 등이 이끄는 함경북도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 소속 조직원들과 힘을 합해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보천보를 공격했다. – 브리태니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9b3780a
甲山惠山鎭戰鬪
갑산혜산진전투
보천보전투(갑산혜산진전투) ≒ 김일성(金日成)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의 일부 병력이
1937년 6월 4일,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진에 있는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하고 보천보 일대를 일시 점령한 사건.
일명 혜산진(惠山鎭) 사건이라고 한다.
보천보전투 ≒ 갑산혜산진전투
혜산군(惠山郡) ≒ 함경도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 소속이다.
惠山郡
혜산군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9권 함경도(咸鏡道)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
동쪽으로는 건주위(建州衛) 동량북(東良北) 경계까지 1백 5리요, 남쪽으로는 단천군(端川郡) 경계까지 90리, 북청부(北靑府) 경계까지 1백 32리이며, 서쪽으로는 삼수군(三水郡) 경계까지 65리이며, 북쪽으로는 혜산진(惠山鎭)까지 1백 1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3백 8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허천부(虛川府)이었는데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점거되어 누차 병화(兵火)를 겪고 인가가 없었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3년에 비로소 갑주 만호부(甲州萬戶府)를 두었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만들었고, 세종(世宗) 19년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겸절제사(兼節制使)라 일컬었으며, 세조(世祖) 7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그대로 진을 두었다.
【관원】 부사(府使) ㆍ 교수(敎授) 각 1인.
【군명】 허천(虛川) ㆍ 이산(夷山) ㆍ 갑주(甲州)
【산천】 ..혜산령(惠山嶺) 본부 북쪽 90리에 있다. 녹반현(綠礬峴) 본부 북쪽 91리에 있다. 유파현(楡波峴) 본부 남쪽 56리에 있다. 향동(香洞) 본부 서쪽 1백 11리에 있다. 진동동(鎭東洞) 본부 동쪽 37리에 있다. 허천강(虛川江) 본부 서쪽 1리에 있다. 북청부(北靑府)의 벌성포천(伐成浦川) ㆍ 산북파천(山北坡川) ㆍ 독산천(禿山川) ㆍ 황수천(黃水川)이 본부 남쪽 청주갈림[靑州岐]에서 합류하여 허천역(虛川驛) 곁을 지나서 이 강이 된다. 혜산강(惠山江) 본부 북쪽 95리에 있다. 그 근원이 백두산(白頭山) 남쪽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혜산진(惠山鎭)을 거쳐 허천강과 더불어 삼수군(三水郡)으로 들어가서 압록강(鴨綠江)이 된다. ..
백두산(白頭山) 본부 북쪽 3백 30리 거리에 있는데 회령부(會寧府) 편에 자세하다. 회산채(回山寨)ㆍ마죽령(馬竹嶺)ㆍ갈산(葛山)ㆍ흑산(黑山).
【관방】 혜산진(惠山鎭) 본부 북쪽 95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2천 3백 20척에 높이가 9척이며, 그 안에 우물 한 개가 있고,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영(營)이 있다. ○ 첨절제사(僉節制使) 1명이 있다.
【제영】 해와 달은 첩첩한 봉오리 사이로 밝은 빛을 감추었는데 하연(河演)의 시에, “해와 달은 첩첩한 봉우리 사이로 밝은 빛을 감추었는데, 우레처럼 울리며 번개처럼 달리는 것 몇 굽이 여울이더냐, 조각만한 하늘 몇 자[尺]나 되는 땅 위에 외로운 성이 있으니, 맑은 술 누른 꽃으로 한번 얼굴을 폈노라.” 하였다. 맑은 물 푸른 산 몇 만 겹[萬里]이더냐 정흠지(鄭欽之)의 시에, “맑은 물 푸른 산 몇 만 겹이냐, 구름과 연기 가리고 서리어 있는 듯 없는 듯 하다네, 백성들 다만 스스로 밭 갈고 우물 파는 것만 알아서, 그 순박(淳朴)함은 그대로 태고(太古)적 풍속일세.”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발해(渤海) 때에 율빈부(率賓府) 땅으로 하였으며, 금(金) 나라에서 도통소(都統所)를 삼아 휼품로(恤品路)에 예속시켰다. 뒤에 병화(兵火)를 겪었으므로 사람이 살지 않았다.
【방면】 읍사(邑社) 부안이다. 별해(別害) 서남쪽으로 60리에 있다. 진동(鎭東)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허린(虛麟) 서쪽으로 45리에 있다. 허천(虛川)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혜산(惠山) 북쪽으로 90리에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甲山都護府
갑산도호부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 군명 ≒ 본래 허천부(虛川府)였다.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의 북쪽 ≒ 혜산진(惠山鎭)
惠山
혜산
山
San
산
산타페이
샌타페이 [산타페이]
샌타페이(Santa Fe)는 미국 뉴멕시코 주 중부에 있는 뉴멕시코 주의 주도이다. 2006년 추산 인구는 72,056 명이다. 에스파냐 시대에 건설된,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도시로서, 서부로 향하는 역마차의 중계 지점이었다.
시는 해발 2,400m에 있으며, 1853년 아르헨티나 헌법이 채택된 곳이다. [1]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C%83%8C%ED%83%80%ED%8E%98%EC%9D%B4
산타페이
샌타페이(Santa Fe) ≒ 미국 뉴멕시코 주 중부에 있는 뉴멕시코 주의 주도이다.
혜산진(惠山鎭) ≒ 산타페이(Santa Fe)
惠山鎭
보천보
보천보전투(갑산혜산진전투) ≒ 김일성(金日成)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의 일부 병력이
1937년 6월 4일,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진에 있는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하고
보천보 일대를 일시 점령한 사건.
보천보 ≒ 혜산진(惠山鎭) 근처에 있는 도시
산타페이(Santa Fe) 근처 도시 ≒ 라스크루시스(Las Cruces)
라스크루시스
라스크루시스(Las Cruces, IPA: [lɑs ˈkrusɪs])는 미국 서부 뉴멕시코 주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 86,268(2006). 뉴멕시코 주 남부, 도냐아나 군의 군청소재지이다. 지명은 스페인어로 십자가라는 뜻이다. 해발고도 1,219m의 건조한 고원지대에 있으며, 주변에서는 관개농업과 목축을 하고 있다. 뉴멕시코 주립대학교가 있는 대학도시로, 뉴멕시코 주 남부의 교육, 문화의 중심지이다. 라스크루시스는 앨버커키 다음가는 뉴멕시코 주 제2의 도시인데,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텍사스 주의 엘패소이다. 엘패소에서 서북쪽으로 약 42마일(약 65km) 떨어져 있고, 앨버커키에서는 남쪽으로 약 225마일(약 340km) 떨어져 있어[1], 경제, 문화적으로는 주는 다르지만 엘패소와 더 밀접한 관계에 있다. 또한 멕시코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멕시코 문화의 영향도 강하며, 멕시코인도 많이 산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200523
Las Cruces
라스크루시스
보천보 ≒ 라스크루시스(Las Cruces)
보천보
뉴멕시코주 최대도시 ≒ 앨버커키(Albuquerque)
산타페이(Santa Fe)의 남쪽 ≒ 앨버커키(Albuquerque)
혜산진(惠山鎭)의 남쪽 ≒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
앨버커키 [알버커키]
앨버커키(Albuquerque)는 미국 뉴멕시코 주에 있는 도시이다. "앨버커키"로도 표기할 수 있으나 현지인의 발음은 "알버커키"로 표기하는것이 더 원음에가깝다. 인구는 504,949(2006)이며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연안, 표고 1,619m의 고지대에 있는 도시이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10&query=%EC%95%A8%EB%B2%84%EC%BB%A4%ED%82%A4
Albuquerque
앨버커키
앨버커키(Albuquerque) ≒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연안, 표고 1,619m의 고지대에 있는 도시이다.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 ≒ 본래 허천부(虛川府)였다.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 허천부(虛川府) ≒ 앨버커키(Albuquerque)
혜산강(惠山江) ≒ 해란강(蕙蘭江)
해란강(蕙蘭江) ≒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虛川府
허천부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 군명 ≒ 이산(夷山)
夷山
이산
夷
이
Ri
리
Rio Rancho, New Mexico
Rio Rancho (Spanish: Río Rancho) is a suburb of Albuquerque,and is the largest city and economic hub of Sandoval County in the U.S. state of New Mexico. It is the fourth-largest and fastest-growing city in New Mexico. As of the 2000 census, the city population was 51,765. It has risen to 71,607 as of the 2006 census estimate[1] and is expected to reach 125,000 by 2010.[2] – 영어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search.do?cpcode=20&query=Rio%20Rancho%2C%20New%20Mexico
Rio Rancho
리오 란초
이산(夷山) ≒ 리오란초(Rio Rancho)
夷山
이산
혜산진(惠山鎭) ≒ 산타페이(Santa Fe)
보천보 ≒ 라스크루시스(Las Cruces)
보천보 전투 ≒ 1937년 6월 4일 만주에서 활약하던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부대가 혜산진(惠山鎭)과
보천보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金日成
김일성
- 金英煥 -
김영환
"美, 군정 당시 이미 김일성 가짜로 판단"
(워싱턴=연합뉴스) 황재훈 특파원 = 해방공간에서 남한을 신탁통치했던 미국 군정은 북한 김일성 주석에 대해 일찌감치 `가짜 김일성'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연합뉴스가 12일(현지시간) 미 메릴랜드주에 위치한 연방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미 군정은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가짜 김일성' 논란이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우익에 의해 확산됐다는 주장이 다수 제기돼 왔다. 미 군정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8월 1일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북한의 한국인들'이라는 인물자료는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이 1924년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기술했다.
당시 극비로 분류됐던 이 자료는 항일투사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실제 김일성'의 형제(형인지 동생인지는 불분명함)가 김성주의 아버지라고 언급했다. 즉 김성주가 삼촌의 이름을 갖고 항일투사인양 행세했다는 지적인 셈이다.
자료는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와 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김일성)'로 가장했다고 기술했다.
미 군정 자료는 그러나 김성주(가짜 김일성)는 명석하고 차분하며, 일을 할 때 곧바로 핵심을 잡아 업무를 장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이와 함께 이 자료는 김성주가 훈련을 위해 시베리아로 건너간 한국인들 중 한 명으로, 1943년 소련에 의해 유럽에 건너가기도 한 인물이라는 또 다른 설도 있다고 소개했다.
자료는 제2차 대전 이후 김성주가 돌아와 북한 공산정권의 지도자와 만주의 조선의용군 지도자가 됐다고 소개하면서 조선의용군 지도자는 명목상의 지도자일 뿐이라는 얘기가 있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미 군정이 1947년 9월 1일자로 작성한 `유력 한국정치 지도자 약력'이라는 별도의 자료에도 김일성은 본명이 김성주라고 기술돼 있다.
다만 이 자료에는 김일성을 만주 국경지대의 유격대 지도자라고 언급, 이후 1년 사이에 김일성에 대한 미 군정의 인물정보 내용이 달라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 출처 :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8/12/0200000000AKR20090812047100071.HTML?did=1179m
金日成
김일성
연합뉴스가 12일(현지시간) 미 메릴랜드주에 위치한 연방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미 군정은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金英煥
김영환
김일성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6.25전쟁의 주범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이다.[2] 만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조선혁명군, 반일인민유격대(그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 등을 조직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북조선로동당의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남북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1940년 소비에트 연방령 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후 소련군 대위로 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 동안 복무하며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초 독일이 패배하고 일본제국의 패망이 임박하자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단장 : 최용건)을 결성하고 조국의 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비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다.[7] 뒤에 소련군 소좌로 승진했다. 조선공작단 대원 가운데 일부는 1945년 8월 8일 소련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석했으며, 나머지 조선인들은 9월 18일 원산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7] 8월 26일부터 김일성은 비밀리에 정치활동을 시작,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광복 직후 (1945 ~ 1946)
1945년 9월 19일, 김일성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사흘 뒤인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후 평양에서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벌였으며 곧 소련군 소좌로 진급했다. 당시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스티코프 사령관과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장 조만식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263173
金日成
김일성
1940년 소비에트 연방령 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후 소련군 대위로 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 동안 복무하며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단장 : 최용건)을 결성하고
조국의 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비하였다.
1945년 9월 19일, 김일성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사흘 뒤인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후 평양에서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벌였으며 곧 소련군 소좌로 진급했다.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스티코프 사령관과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장 조만식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원상항 입항, 9월 22일 평양 도착후 김영환(金英煥)이라는
이름으로 정치공작을 벌였으며 곧 소련군 대위에서 소좌로 진급했다.
소련군 대위 김일성(金日成)의 초기 정치 활동시 이름 ≒ 김영환(金英煥)
소련군 대위 김일성(金日成) ≒ 김영환(金英煥)
김일성(金日成) ≒ 김영환(金英煥)
金英煥
김영환
Vyatskoye
뱌트스코예
뱌트스코예(러시아어: Вя́тское, 영어: Vyatskoye)는 러시아 하바롭스크 크라이의 작은 어업 마을이다. 중심지 하바롭스크에서 북동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실제 출생지로 알려지고 있다. –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B%B1%8C%ED%8A%B8%EC%8A%A4%EC%BD%94%EC%98%88
Хаба́ровский край
하바롭스크 크라이
하바롭스크 크라이(러시아어: Хаба́ровский край 하바롭스키 크라이[*], 문화어: 하바롭스크 변강)는 러시아의 크라이로 극동 연방관구에 속한다. 중심지는 하바롭스크이다.
- 위키백과
Хаба́ровский
하바롭스크
김일성(金日成) 즉 김영환(金英煥)의 아들 김정일의 실제 출생지는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하바롭스크 크라이 뱌트스코예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金日成) 즉 김영환(金英煥)은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하바로프스크에서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金英煥
김영환
- 南朝鮮 -
남조선
남조선신앙 [南朝鮮信仰]
조선 후기에 퍼진 이상향을 동경하는 민간신앙.
남조선이란 현실 세계에 욕구불만을 가진 일반인 ·사상가가 설정한 이상향이다. 이것은 당시의 잇따른 내우외환과 위정자의 무능무책으로 말미암은 현실세계에 대한 염오에서 생긴 사상으로, 초현실적 관념의 세계로 전향하여 희망을 미래에 두는 이상사회만을 동경하였다. 《정감록(鄭鑑錄)》도 남조선신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 앞에는 남조선이 있어서 때가 되면 진인(眞人)이 나타나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여 이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한다 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은 당시 민간의 확고한 신념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하여 언제, 어디서, 누가 이상세계를 실현할 것인가에 대하여도 여러 가지 설이 나왔다.
홍경래(洪景來)가 서도(西道)의 민심을 선동할 때 “이제 국세가 창황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는데 하행(何幸)으로 제세(濟世)의 성인이 일월봉 대군왕포상가야동 홍의도(日月峰大君王浦上伽耶洞紅衣島)에 강생하여 철기(鐵騎) 10만으로써 세상을 징청(澄淸)하게 되었다”라 함도 남조선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더욱 세태가 어수선해지자 인심을 현실세계에서 이탈시켜 남조선신앙을 기틀로 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나아가서 그 실현을 꾀하는 혁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남조선신앙은 중국의 화서국(華胥國) ·봉래도(蓬萊島), 인도의 희견성(喜見城), 헤브라이인의 에덴 동산, 도교의 상청옥경(上淸玉京), 불교의 안양정토(安養淨土), 영국의 인문주의자 T.모어의 《유토피아》 등과 비교해 보면 첫째 외국의 것이 주관적 ·관념적 산물임에 비해 우리의 것은 객관적 사실의 충동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성립되었다는 점, 둘째 안정(安整)되고 고정된 것에 대해 불안정 ·가변동의 것으로서 언제든지 필요한 수정과 보충을 가할 수 있는 점, 셋째 다른 것이 공중누각에 지나지 않는 데 비해 진보한 형태에 있는 민족 운명의 개척을 의미하는 것으로, 행동으로써 실현해야 한다는 점 등의 특색을 가진다. – 두산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35906
南朝鮮
남조선
대한민국 [South Korea, Republic of KOREA, 大韓民國, 대한민주공화국, Rok, 남선, 남조선, 남한]
대한민국(듣기 (도움말·정보), 大韓民國, Republic of Korea)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남부에 자리한 공화국이다. 서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동쪽으로는 일본이 있으며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맞닿아 군사적으로 대치중이다. 수도는 서울이다.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 이후 피폐해진 국토에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발전을 하여, 2008년 명목 국내총생산 기준 세계 15위(실질 국내총생산 기준 세계 13위)의 경제 규모로 성장했다.[2]
지리적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몽골, 중화민국 등과 함께 동아시아에 속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南朝鮮)이라고 부르고, 반대로 대한민국에서는 북한이라고 간단히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 또는 북한, 北韓)과의 구별을 위해 대한민국을 남한(南韓)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일상에서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3](韓國)이라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1942년2월에는 대독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자 하였다. 1942년에는 좌파계열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세력이 임시정부에 합류함에 따라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기틀이 마련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기간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자 하였는데, 1943년에 버마 전선의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고자 공작대를 파견하여 일본군 포로심문 및 암호번역, 선전전단 작성, 대적 회유방송 활동등 하였다. 이어서 한국 광복군은 미국 OSS와 연합하여 1945년 9월에 국내진공 작전에 준비하고자 하였으나,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런 일본제국의 항복으로 이를 이루지 못했다. 임시정부 주요인사들은 1945년 12월에 개인자격신분으로 국내에 귀국하게 된다. –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XX249
北朝鮮
북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南朝鮮)이라고 부르고, 반대로 대한민국에서는
북한이라고 간단히 부른다."
南朝鮮
남조선
남조선[南朝鮮] [명사]<북한어,지명>
1. 광복 후 미군정(美軍政) 때에, 중부 이남의 한국을 이르던 말.
2. [북한어, 지명]북한에서 ‘남한’을 이르는 말. - 다음국어사전
남조선과도정부[南朝鮮過渡政府]
광복 이후 미군정청이 장악한 행정권을 한국 국민에게 이양하기 위하여 세워진 과도기적 정부. 민정 장관으로
안재홍이 임명되었으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흡수되었다. – 다음국어사전
南朝鮮
남조선
"남조선(南朝鮮)이라는 단어는 광복 후 미군정(美軍政) 때에,
중부 이남의 한국을 이르던 말이다."
北朝鮮
북조선
1945년 소군정(蘇軍政)
1945년 미군정(美軍政)
南朝鮮
남조선
남조선(南朝鮮) ≒ 울진현(蔚珍縣)
울진현(蔚珍縣) 38선 이북 ≒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관방
울진현(蔚珍縣) ≒ 서울(Seoul)
朝鮮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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