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방 이야기
튀르키예를 감동시킨 그림 한장
그리고 튀르키예는 왜 우리에게 형제의 나라인가?
2023. 2. 19. 20:12
명민호 작가가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를 돌봐주는 튀르키예 군인의 모습과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 아이들을 돕고 있는 한국 긴급구조대의 활동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튀르키예를 감동시킨 그림 한장
만화 일러스트레이터 명민호 작가가 SNS올린 한장의 그림이 강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 국민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감동을 전하고 있다. 그림의 내용은 70여년전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를 돌봐주는 튀르키예 군인의 모습과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 아이들을 돕고 있는 한국 긴급구조대의 활동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게시물에 대한 좋아요 수는 35만이 넘었으며 댓글 또한 1만 3000여개가 달렸다. 특히 튀르키예 현지 네티즌들도 해당 게시물에 튀르키예어와 한극어로 댓글을 남기고 있다. 그 댓글들을 보면 “도와주셔서 감사하다” “눈물이 났다. 이 그림을 프린터 해서 일기장에 붙였다. 이 그림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서로 형제의 나라라는 것을 매우 잘 표현했다. 서로를 절대로 잊지 말자” 등 진한 감동과 감사의 뜻을 전했디.
뿐만 아니라 퀴르키예 매체들도 이 그림을 소개하며 한국의 일러스트레이트가 73년전 한국전쟁에서 튀르키예의 지원을 그림으로 표현해 튀르키예 국민들을 위로했다고 보도 했다
1.4후퇴 직후 UN군 반격 작전의 일등 공신 터키군
군포 수리산 전투에 참여중인 터키군의 모습
터키는 6.25전쟁 당시 1만5천여명 규모의 군대를 파병했다. 참전한 국가들 가운데 미국과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규모였다. 처음에는 파병이 늦어지자 터키의 고등 학생들이 왜 형제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 면서 데모를 벌였다고 한다.
터키는 휴전까지 총 2만1212병을 파병했고, 전사자 966명과 부상자 1155명을 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UN군은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1.4후퇴 이후 한강이남까지 밀리게 된다. 이후 썬더볼트작전, 라운드업작전 등을 통해 재반격해 서울을 재탈환하게 되는데 이 중 1차반격작전인 썬더볼트작전 중에 벌어진 전투가 수리산 전투다.
이 수리산 탈환에 큰 공을 세운 부대가 바로 터키군이었다. 터키군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공격하는 불리한 전투조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수리산의 대부분 고지를 점령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전투가 중요했던 이유는 수리산 전선을 승리함에 따라 다시 한강 이북으로 전선을 북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현재의 휴전선 까지 전선을 다시금 북상 시킬수 있었던 교두보 역할을 한 셈이다. 또한 터키군은 정전협정 후에도 잔류병력을 계속 주둔시키며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위해 보육시설 ‘안카라학원’(현재 수원시 농촌진흥청 자리)을 세우고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기도 했다.
“저의 그림이 계속 나비효과같이 퍼져나가 사람들로부터 공감과 감동을 일으키는 것처럼
감당하기 힘든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리아 튀르키예에도
행운과 기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구조대원들이 최선을 다해 구조활동을 하는 데에도 크나큰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
터키교과서에 실린 돌궐의 전성기 영토 지도
원래 우리에게 터키로 잘 알려져 있는데 2022년 튀르크인의 땅이라는 의미로 국호를 튀르키예로 변경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튀르키예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가?
한국과 터키의 인연은 역사적으로 보면 무려 1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 터키공화국의 주요 구성원인 투르크족은 기원전 2000년 전후 중앙아시아 알타이 산맥에서 태동했다. 투르크족은 여러 세월 동안 여러 대륙에서 훈(흉노), 돌궐, 위구르, 킵차크, 셀주크, 티무르, 오스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투르크족과 한민족의 공식 접촉 기록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역사에서 처음 확인된다. 572년 돌궐의 왕이 사망했을 때 고구려가 사절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 수나라와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돌궐 등과 외교 관계를 맺으며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세계가 대한민국을 코리아(고구려 또는 고려)’라고 하는 것처럼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 우리 역사의 고구려 시대까지 올라가면 그 동시대에 돌궐(突厥)’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우리 한민족과 같은 우랄 알타이족으로, 고구려 전성기엔 글안여진(숙신)과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돌궐인이 고구려의 기층(基層)민중에 속했다.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고구려가 멸망한 후(668년)돌궐은 고구려의 유민을 많이 받아들이면서 우리 민족과 더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부분의 서민은 초기엔 당(唐), 후엔 신라의 지배를 받으면. 한반도에서 살아갔다. 일부 귀족계급은 당에 포로로 잡혀가고 나머지 고구려 유민은 몽골, 글안 돌궐 등 타민족에 섞여 살다가 682년에 동돌궐이 현제 몽고의 수도 올란바토르에 돌궐 제 2제국을 수립할 때 바로 여기에 참여 하게 된다.
참여한 유민의 숫자가 전체 돌궐 제국 인구의 절반인 20만명이 넘었다고 하니 돌궐 제 2제국은 고구려의 후예라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것이다.
이렇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하다가 수많은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 들을 여전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있다. 이처럼 터키가 한때는 고구려의 기층 민중이었고, 고구려 멸망 후에는 우리가 돌궐 제2제국의 기층 민중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신(오른쪽 첫째·둘째)이 등장하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사마르칸트는 6세기 돌궐 칸국 때부터 존재했던 고도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2002년 한일 월드컵 3,4위전에서 펼쳐진 대형 터기 국기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인연이라면 2002년 한일 월드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터키와 함께 월드컵 4강의 반열에 올랐다. 모두 월드컵 결승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3.4위전에서 명승부를 펼치며 형제의 나라라는 우애를 아낌없이 나누었다
6·25 참전으로 피를 나눈 혈맹이라는 점만으로도 그들의 한국사랑을 접한 우리는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를 아낌없이 열광적으로 응원했다.
하이라이트는 당시 한국과 터키의 3, 4위전이 열렸을 때 자국에서 조차 본적이 없는 대형 터키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 보던 수많은 터키인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경기는 승부를 떠나 한국선수들과 터키선수 들의 어깨동무로 끝나고 터키인들은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 비를 안 받던 나라,
월드컵때, 우리가 흔든 터키국기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대한무역진흥공사에 따르면 터키 수출이 2003년 59%에서 2004년에는 71%나 늘어났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진 인연을 계기로 터키는 교과서에 한국을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한국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덮친 강진은 지금까지 튀르키예에서만 3만9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다. 시리아 측 사상자 집계를 포함하면 양국 전체 사망자 수는 4만3000여명에 이른다.
골든 타임은 이미 지났지만 아직도 기적의 생환소식이 들려 오고 있다. 희망이라는 이름 하에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많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재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서방의 많은 나라들의 폭 넒은 지원이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