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선의 시 명상] 여인숙(잘랄루딘 루미)
'감정과 생각' 손님이 드나들다
인간이라는 여인숙에는 생각과 감정이란 손님이 늘 찾아온다. / 셔터스톡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들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짐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오늘 아침 아주 하찮은 일 하나로 짜증이 났습니다. 설거지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하나로요.
그리고 연달아 다른 것들이 보였습니다. 늘어져 있는 재활용품, 또 다른 것이 눈에 띠었지요. 물을 주지 않아 늘어진 화초잎.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연달아 눈에 띠었던 겁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그 일들이. 드디어 입 밖으로 불평을 꺼내고야 말았지요. 이내 후회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가 날 때 혹은 짜증이 날 때 그 감정을 당연시하고 그 감정을 정당화 합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문득 화가 나면 거기에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화를 밖으로 이끌어냅니다. 화에는 짜증에는 놀라운 폭발력이 있습니다. 에너지가 있어 한번 불붙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지요. 오죽하면 화를 활화산에 비유할까요. 내
친 김에 끝까지 밀고 가기도 합니다. 그 에너지가 크면 클수록 후회도 크지요. 걷잡을 수 없어지면 자신과 가족 모두를 파멸시키기도 합니다.
제 안에는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피곤하다는 것을 당연시하지요. 그러나 저만 그럴까요? 가족들은 다른 일로 인해 피곤하고 또 스트레스 받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상황으로 인해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자신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가족이라 해도 알 수 없는 것이지요.
그 이유를 알았을 때 얼마나 부끄러운지요. 조금전 화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감정은 약 30초에서 60초간 지속된다고 합니다. 그 짧은 시간만 지나면 수그러드는 것인데 그 순간이 어쩌면 그리도 긴지요. '여인숙'이라는 시는 감정이 내게 찾아오고 사라짐을 말하는 아주 좋은 시입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지요. 그건 깨달음이었습니다. 아 인간이라는 존재는 늘 이러한 감정에 시달리지. 매일 매시간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 감정이 들고 난다는 것을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지금도 이 시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위안을 주고 있을 겁니다. 오늘 아침, 이미 잘 알고 있는 시인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멈추었으니까요. 그리고 또 다시 위안을 얻고 깨달음을 얻었으니까요.
그렇지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입니다. 다양한 손님들이 드나들지요. 그 손님들은 감정이고 생각이고 깨달음입니다. 감정과 생각은 쉽게 손님으로 분류가 되지만 깨달음이 손님으로 분류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군요.
감정과 생각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감정은 생각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급속하게 떠오르지요. 아주 오랫동안 그 생각이 감정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습관이 되어 있다면 그 생각은 자동적으로 번개보다 빨리 감정을 불러 일으키니까요.
감정이 없다면, 생각이 없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감정과 생각은 깨달음을 가져오는 방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일. 우리는 매번 배우고 깨닫습니다. 감정으로 인해 생각으로 인해. 그렇다면 이들, 감정과 생각, 깨달음,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인 것이지요. 기쁨을 주는, 고마운 안내자들인 것이지요.
글 | 이강선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