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의 원리 : 보조국사 '권수정혜결사문'
<수행의 원리>
[첫번째] 밖에서 안으로
우리는 흔히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세상일이야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는가.
그렇지만 깨달음을 얻고 나면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자유가 생긴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든
성품을 등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물과 불의 성질을 잘 아는 사람은
이것을 이용하여
인간에게 이롭게 활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근본성품을 볼 수 있으며,
대자유인, 대해탈인이 될 수 있는가.
먼저, 그동안 밖으로만 내달리던
모든 관심을
안으로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바깥의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생각하는 가운데
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좋은 것은 붙들려고 하고,
싫은 것은 거부하며,
그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진다.
여기에서
모든 번뇌와 집착과 무지는
시작된다.
모든 것은
이렇게 지각된 바탕 위에
감정과 생각과
논리와 판단이 따라 붙는다.
이렇게 만든
하나하나의 이미지들로
이 세계는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그 세계는
당연히 나의 번뇌에 의해
세워진 환이며
물거품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거다 저거다 정해놓고
쫓아가는 삶은
신기루를 쫓는 것과 같이
끊임없는 갈증만 증가시킬 뿐
영원한 휴식과 편안함은
주지 못한다.
외부의 어떤 것에 얽매어
붙들고, 거부하고, 외면했던 삶을
안으로 돌려
붙들려고 하는 마음을 놓고
거부하려는 마음을 쉬고,
외면하는 마음을 알아차림으로써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깨어있을 수 있다.
외부로 향하던
관심을
안으로 돌려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 등의 지어감을
알아차리고
깨어 있음으로써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의 첫 번째 원리이다.
[두 번째] 있는 그대로 보기
이렇게 해서
마음이 쉬고 편안해지면
사물을 대할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신다.
그러나 과연 물맛을
제대로 느끼면서 마시는가.
아니면 그냥 마시는가.
물을 마실 때
있는 그대로
그 맛을 느껴보라.
소리가 들리면
그것이 욕하는 소리이건,
칭찬하는 소리이건
그냥 소리 그자체로 들어라.
그리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느껴보아라.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 주어라.
이것은
'욕'하고 분별하는 순간
듣기 싫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그러니 판단분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껴보아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직관의 힘을 키운다.
분별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한 측면만을 보고
판단하기 쉽다.
반면 직관은
그것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통찰력과도 같다.
물은 화학자에게는
H2O 이기도 하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갈증을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고,
수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두렵고 원망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물을 한 측면만이 아닌
통째로 파악한다.
이러한 직관은
고정관념과 욕심과 경험 등의
장애요소들이 사라지고
무심의 상태에서
그것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해 진다.
어떤 사물이나 감정이나 상황이
닥쳐올 때
일체의 판단분별을 떠난
무심의 상태에서 그대로 바라보면
그것이 되어서
그대로 느껴지기도 하고
진실이 알아지기도 하며,
모든 것을 대할 때
나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고
곧
하나가 되어버림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직관력에 의해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진실과 만나게 된다.
우주와 나의 본성은
이러한 직관에 의해서 터득된다.
[세 번째] 알아차림
수행의 또 다른 원리는
알아차림이다.
현재 자신의 안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그것이
일어남과 유지됨과 사라짐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진실로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들뜬 의식으로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고요 속에서 여실히 아는 것이다.
우리는 한 순간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런데 이 숨쉬기에
얼마나 깨어있는가.
숨 쉬고 앉고 서고 걷고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밥 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몸 가는데
마음 가도록 하여야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 중에
알아차림을
잃지 말라고 하셨다.
선지식을 구하고
선호조(善護助)를 구하는 것은
생각을 오롯하게 하여
알아차림이
지속되게 하는 것만 못하다.
만약
알아차리는 상태가
흩어지지 않고 지속하면
모든 번뇌의 도적이
능히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항상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念을 거두어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잘 살펴야 한다.
만일 알아차려
각찰(覺察)하는 힘을 잃어버리면
모든 공덕을 잃어버릴 것이며,
만일 알아차리는 힘이
굳고 강하면
비록 오욕의 도적 속에 들어가더라도
해침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유컨대
갑옷으로 무장하고
적진에 나아가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네 번째] 지금 여기
알아차림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음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라고 하는 것도
한 순간도
머무르는 바가 없으니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나는 여기에 있다.
따라서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도록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모음으로써
언제나 깨어있을 수 있다.
상념과 온갖 환상에
속지 않고
진실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일심으로
어떤 일이든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의 과를
증득하는 해법은
열심히 하는데 있다.
그것은
일심이 됐음을 의미한다.
일심으로 해서
안 되는 일이 없다.
기도가 이루어지고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화두를 타파하는
모든 것이
모두 일심이 되었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일심이란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하며
어떤 하나에 집중되어
다른 생각이 없음을 말한다.
즉, 염불이면 염불,
진언이면 진언,
화두면 화두에
일념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 자체가 되어버릴 때
무지가 자리를 비껴나고
본성광명이 드러나는 것이다.
일심을 방해하는
탐심, 진심, 치심, 의심, 산심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면
일심이 될 수 없다.
특히 진심은
마음을 격동시키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잘 경계해야 한다.
또한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나를 가르치는 사람은
진짜 깨달음을 얻었을까? 등의 의심,
수행을 해서
뭘 어떻게 해봐야겠다거나
빨리 이루고자 한다거나
결과에 연연하는 것 등의
욕심, 수면욕 · 식욕 · 성욕 등의
습관적 욕구
(본능적 욕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실은 욕망이라는 습관적 의식작용이
결부될 때가 많음),
그리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일심을 방해한다.
이럴 때에는
적절하게 그것들에 대해
대처할 필요가 있다.
각각에 대해서는
참선편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여섯번째] 계ᆞ정ᆞ혜의 통일
계정혜 삼학은
불교수행자들이 갖추어야 할
수행의 세 가지 측면이다.
먼저 계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여
수행자들이
마음에 안정을 유지하며
생활할 수 있는 지침이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안정되면
선정을 통해
더욱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맑게 한다.
그리고 고요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정진하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드러난다.
이렇게 '계'는
'정'의 바탕이 되고
정은 '혜'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선적으로 끝나지 않고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혜가 생기면
어떤 것은 해야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지
스스로 알게 된다.
또 정이 깊어지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계를 지키게 된다.
또한 정과 혜는
통나무의 양끝과 같아서
어디서부터 어디 까지라고
가르기도 힘들고
어느 한쪽만 취하기도
어렵다.
늘 함께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분들도
정혜쌍수라 하였다.
<익진기(翼眞記)>에 말하였다.
“선정과 지혜 두 말은
바로 삼학의 준말로서
갖추어 말하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다.
계율이란
잘못을 막고 악을 고친다는 뜻으로서
삼악도에 떨어짐을 면하게 하는 것이요,
선정이란
이치에 맞추어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 잡는다는 뜻으로서
여섯 욕심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며,
지혜란
법을 가지고 공을 관한다는 뜻으로서
묘하게 생사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성인이
처음에 수행할 때에는
다 이것을 배웠기 때문에
삼학이라 하는 것이다.
또 삼학에는
상을 따르는 것과
성에 맞추는 것의
구별이 있다.
상을 따르는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고,
성에 맞음이란
이른바 이치에
본래 <나>가 없는 것은
계율이요,
이치에
본래 어지러움이 없는 선정이며,
이치에
본래 헷갈림이 없는 것은 지혜다.
이 이치만 깨달으면
그것이 곧 진정한 삼학이다.”
그러므로 조계스님이
“본마음에 잘못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율이요,
본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선정이며,
본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지혜다.”
한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선정과 지혜의 그 이름은 다르나
요는 그 당자의 신심이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데 있다.
<지도론>에
“세상의 보통일에 있어서도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으면
그 일을 이루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위없는 도를 배움에 있어서
선정과 지혜에
힘쓰지 않아서 되겠는가?”
하고 그 게송에,
선정은
금강의 갑옷이라
능히 번뇌의 화살을 막고
선정은
지혜를 지키는 고장으로서
온갖 공덕의 복밭이라
'분주한 티끌이
하늘 해를 덮으면
큰 비가 그것을 능히 씻고
망상의 바람이
마음을 흩으면
선정이 능히 그것을 없앤다.
고 하였다.
ㅡ 보조국사 '권수정혜결사문'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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