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의 태안사,
나라 안에 이름난 절들이 많이 있지만 고적하면서 옛 정취가 물씬 나는 절이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 자리 잡은 태안사일 것이다.
태안사 대웅보전
태안사의 들목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신숭겸의 영정비각이다. ‘장절공태사신선생영적비(壯節公太師申先生靈蹟碑)’ 중의 ‘신선생’은 고구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을 말하며, ‘장절(壯節)’은 태조 왕건이 내린 시호이다. 그는 죽곡과 인접한 목사동면 출신으로, 동리산에서 수련을 쌓은 뒤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웠다. 그러나 공산전투에서 왕건이 죽게 되는 절대절명의 순간을 맞게 되자 외모가 비슷한 그가 왕건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왕건이 타고 있던 수레에 올라타 왕건으로 행세하며 김낙과 함께 싸우다 죽고 말았다. 신숭겸은 머리가 잘린 채 시신만 다시 돌아왔으나 왼쪽다리 아래 칠성(七星)처럼 새긴 문양을 보고 신숭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머리 목각을 새겨 제사를 지내고 장례를 치룬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슬퍼하여 숭겸의 동생 늘걸과 아들 보(甫)에게 원윤(元尹)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지모사를 세워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곳에는 신숭겸의 죽음 이후가 전설로 내려오는데, 김낙과 함께 신숭겸이 전사하자 그의 애마는 머리를 물고 신숭겸이 그 옛날 무예를 닦았던 태안사의 뒷산 동리산(棟裏山)으로 와서 사흘 동안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태안사의 스님이 장군의 머리를 묻어주고 제사를 지냈으며, 훗날 이곳을 ‘장군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숭겸은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곡성의 서낭당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고려의 예종은 김낙과 신숭겸의 후손들에게 상을 내리고 시 두 편을 지었다. 두 장수를 애도한다는 뜻의 「도이장가」는 이두문으로 된 향가 형식의 노래이다.
님을 온전케 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
넋이 가셨으
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
직분 맡으려 할 자분이 맘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이여
오래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 저
능파각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
태안사로 오르는 산길은 호젓하다. 나무숲들이 우거진 계곡의 물길은 깊고 세차게 흐르며, 산길을 돌아갈 때마다 피안으로 가는 다리들이 나타난다. 자유교‧정심교‧반야교를 지나 해탈교를 돌아서면 제법 구성진 폭포가 있고, 그 폭포를 아우르며 백일홍꽃이 한 그루 만발해 있고, 능파각(凌波閣) 아래에 나무다리가 있다.
김존희의 글씨로 ‘동리산 태안사(棟裏山 泰安寺)’라고 쓰여진 동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인 봉황문을 들어서면 부도밭이다. 태안사를 중창해 크게 빛낸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의 부도(보물274호)와 부도비(보물275호)를 비롯하여 다른 형태의 부도가 몇 개 서 있고, 부도밭 아래 근래에 들어 만든 큰 연못이 들어서 있다.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탑을 세웠으며, 그 탑에는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나무다리를 만들었다.
태안사 능파각
광자대사 윤다는 8세에 출가, 15세 이 절에 들어 33세에 주지를 맡았다. 신라 효공왕의 청을 거절한 윤다도 고려 왕건의 청을 받아들여, 이후 고려 왕조의 지원을 받아 크게 부흥 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적인선사 혜철의 비를 그대로 빼닮은 윤다의 부도비는 비신이 파괴된 채로 이수와 귀부 사이에 끼어 있다.
구산선문의 하나였고, 동리산파의 중심사찰이었던 태안사는 한때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만큼 세력이 컸으나, 고려중기 순천의 송광사가 수선결사(修禪結社)로 크게 사세를 떨치는 바람에 위축되었다. 조선초기 숭유억불정책에 밀려 쇠락한 채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였는데, 그나마 절이 유지된 것은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원당사찰이 된 것에 힘입은 바 컸다. 숙종과 영조 때에 연이어 중창하여 대가람이 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일주문과 부도탑뿐이었다.
안마당에 들어서기 전에 만나게 되는 큰 건물이 보제루(普濟樓)이고, 문이 시원스럽게 열려진 대웅전은 전쟁 중에 불타버린 것을 봉서암(鳳西庵)에서 20년 전에 옮겨왔다. 그 뒤 태안사가 여러 채의 건물을 새로 짓고 청정한 도량으로 이름이 높아진 것은 우리 시대의 고승 청화선사가 수십 년을 이 절에 주석(駐錫)하면서 이룩한 성과일 것이다.
청화스님은 이후 옥과(玉果)에 있는 성륜사를 일으켜 세웠고 미국에 한국불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다양한 종교와 화홍(和弘:진리를 통한다는 것)을 위해 힘쓰다가 십여 년 전에 타계하였다. “불교든 기독교든 역사적으로 위대한 철학이라고 검증된 것이라면 믿어볼 만합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하나된 우주의 법칙으로 불교나 기독교는 수행법이 서로 다른 방법일 뿐 궁극적으로는 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청화스님의 모든 수행은 ‘정견(正見)’을 바탕으로 ‘선오후수(先悟後修:먼저 깨달아 버리고 수행하는 것)’하는 것이었다. 불성체험에 역점을 두고 정진하는 것을 강조한 그는 “정견(正見)은 바른 인생,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과 같은 뜻이며 진리에 맞지 않는 업으로 우리가 고통을 받으므로 행복을 위해서는 바른 가치관을 확립해야 하고, 거기에 따른 행동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태안사 들목
송광․화엄사의 본산이던 태안사
태안사는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28년까지 대안사로 불려오다 조선 이후 태안사로 불렸다. 이는 절의 위치가 ‘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이 머물기에 고요하다. 용이 깃들이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여름이 시원하고 겨울에 따듯하여 심성을 닦고 기르는데 마땅한 곳이다.’라는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 비문처럼 ‘대’와 ‘태’의 뜻은 서로가 통하는 글자이고, 평탄하다는 의미가 덧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 처음 절이 지어진 것은 신라 경덕왕원년 세 명의 신승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태안사가 거찰이 된 것은 신라말기에서 고려초기에 걸쳐 적인선사 혜철과 광자대사 윤다가 이 절에 주석하면서부터였다. 적인선사의 법명은 혜철이고 자는 체공으로 경주에서 원성왕 원년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 한 스님이 서서히 걸어들어 오는 것을 보고 태기가 있어 낳았으므로 날 때부터 출가할 그릇임을 알았다고 한다. 적인선사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냈으며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고 절을 찾기를 즐겨 했다. 그는 15세에 출가,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했다. 그것은 그 당시 널리 읽히던 사상이 화엄사상이었으며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부석사가 해동 화엄종찰이었기 때문이었다.
22세 되던 해 혜철은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되었고, 계를 받기 하루 전 꿈에 소중하게 생긴 오색구슬이 홀연 소매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혜철은 “나는 이미 계주(戒珠)를 얻었다.”고 하였다. 그 뒤 마음과 행동을 깨끗이 하여 계율을 엄격히 지켜나가던 혜철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부처는 본래 부처가 없는데 억지로 이름 지은 것이고, 나도 본래 내가 없는 것이라. 일찍이 한 물건도 있지 않는 것이다. 자성을 보아 깨달아야 깨달은 것이고 법이 공(空)하다고 말하면 공한 것이 아니다. 고요한 지혜가 지혜이다.”라고 말한 후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인물이 없다고 탄식하며 중국에 가서 공부하고자 헌덕왕6년(814) 30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남종선 계통의 지장선사에게 배움을 받았다.
지장의 제자 네 사람 가운데 셋이 신라인이었는데, 도의선사와 실상산문의 개창자 홍척, 그리고 혜철이었다. 혜철은 55세에 귀국하여 화순 쌍봉사에서 9년 동안 머물렀다. 63세에 동리산문을 열어 선풍을 펴다가 77세에 입적하였는데,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道詵)이 그의 제자였다. 그가 돌아간 7년 후 경문왕은 시호를 ‘적인’이라고 하고, 탑호를 ‘조륜청정’이라 내렸는데, 다만 부도와 탑비가 새겨진 연대는 불투명하다. 그의 선풍은 광자대사로 이어졌다. 혜철의 부도와 부도비는 절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배알문(拜謁門)에는 조선후기 호남의 명필로 알려졌던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의 글씨로 된 현판이 걸려 있는데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배치한 운치 있는 문으로 유물을 향해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부도(보물273호)는 전체 높이가 3.1미터에 달하는 팔각원당형으로 ‘적인선사 조륜청정탑(寂忍禪師 照輪淸淨塔)’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철감선사(澈鑑禪師) 부도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부도처럼 철저한 비례 속에 구현된 화려함은 덜하다. 그러나 땅 위에서 상륜부까지 팔각을 기본으로 삼아 조용한 장엄함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도 옆에는 혜철의 행적을 비롯하여 사찰에 관계된 여러 가지 내용을 적은 부도비가 서 있는데, 1928년에 파손된 비신을 새로 세울 때 광자대사 부도비의 이수와 바뀌었다고 한다.
이 절에는 이 외에도 몇 개의 소중한 유물이 있다. 단종2년에 만든 대 바라 한 쌍(보물956호)이 그것이고, 대웅전의 종은 세조4년에 만들었다가 종이 깨어져 선조 때 다시 고쳐 만들었다고 한다.
언제나 가도 마치 고향에 온 듯 나를 반기는 절, 동리산 자락의 태안사도 지금 나를 그리워 하고 있을까?
[출처] 곡성의 태안사,|작성자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