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 인생 (눅 4:1-13)
사단은 인생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생은 자신의 삶에서 자기 인생 전부를 건 거래에서도 쉽게 속고 쉽게 잃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인생은 영적 거래에서 실패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최초의 인생이 바로 이 거래의 덫에 걸려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잃고서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마귀는 항상 자신과 거래하면 이익을 볼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사람의 마음에 집어넣어서 그 덫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이 마귀는 예수님을 찾아와서도 거래를 하려고 했습니다. 천하 영광을 보여주면서 내게 한 번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거래 조건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이면 누구든지 다 넘어갈 수 있는 거래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이 얼마나 간교한 거래 조건인가를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말씀으로 이 마귀의 거래 조건을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은 영적 거래를 통해서 유혹하는 사단의 계략을 물리치셨습니다.
1. 영적 거래는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거래하자고 합니다.
영적 거래의 첫 번째 함정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거래하려는 것입니다. 사단은 항상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빼앗아 가기 위해서 영적 거래를 제안합니다. 인생 실패의 모든 원인은 보이는 것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잃는데 있습니다.
사실 신앙은 보이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때문에 이 원리는 신앙생활의 모든 것에 적용되는 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사건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원리에서 보면 많은 사건들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가운데 무엇을 선택했느냐 하는 주제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빼앗아 가려는 거래를 가지고 인생을 찾아옵니다. 때문에 성도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반드시 마귀의 거래 조건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보이는 것에 속아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구원의 은혜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심판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보이는 것에 속아서 보이지 않는 것을 잃어버린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성경은 항상 보이는 것이 가진 유혹 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잃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자식으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생들의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마귀는 예수님께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여 주면서 내게 한 번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항상 보여 주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빼앗기 위해서 유혹한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붙잡고 보이는 세상을 이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성경에 교회생활을 거래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먼저 감추인 보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가 있음을 알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진주 비유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진귀한 진주를 보았을 때 그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알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거래를 하지만 하나님이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거래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고 있어야 영적 거래에 실패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삶은 영적 거래의 현장입니다.
사탄은 인생을 속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기쁨을 아는 사람은 결코 보이는 것과 바꾸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그것과 바꾸지 않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보는 눈이 바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현재를 가지고 미래와 거래하자고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현재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보여 줄 수 없는 것들은 바로 미래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도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미래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가 마귀입니다.
(계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외쳤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고 했습니다. 그러면 믿겠노라 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유혹입니다. 무서운 거래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인내로 구원을 이루는 원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미래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 세상 뿐이라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단정했습니다.
믿음은 현재를 가지고 성공과 실패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때때로 현재가 핍박과 고난이 있어도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현재의 유혹이 아무리 커도 그 미래를 주고 현재를 사는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현재 누리는 것들이 미래를 지불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검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미래를 가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검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칭찬은 땅에서 상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누림을 가지고 섬김과 거래하자고 합니다.
마귀가 천하 영광을 주님께 주겠다고 했을 때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인생의 영적 거래에서 가장 실패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는 누림을 위해 섬김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끊임없이 찾아온 요구 가운데 하나는 섬김의 삶을 포기하고 누림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향해서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지지 마시도록 간청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고 엄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도에게 섬김은 삶의 주제입니다. 사탄의 그 삶의 주제를 빼앗아가기 위해서 누림을 가지고 영적 거래를 하자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누림의 삶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섬김으로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삶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실패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섬김을 포기하고 누림의 삶을 잡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누림의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섬김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현재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살지만 누림이 하나님 백성의 삶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그 백성을 섬기는 것이 진정으로 상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누림과 섬김의 차이는 누림에는 상이 없습니다. 섬김에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인생이 누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섬김의 기회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극작가인 입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근대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근대 연극의 새로운 경지를 연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민죽의 적이라는 희곡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82년 쓰여졌는데 지금부터 130년 전 사람인데도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은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술은 발달되고 생활은 새로운 세상이 되었지만 인생의 마음은 어느 세대나 다를 것이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민중의 적 줄거리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주인공으로 나오는 형제가 있는데 형 피터는 노르웨이 작은 도시의 시장이고, 동생 토마스는 의사로써 이 도시의 수질검사와 관리등을 포함하여 시의 의료와 위생 담당 책임자이다. 이 도시는 온천을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을 주 사업으로 도시였다.
문제의 발단은 동생이 대학 연구소에 의뢰한 이 도시의 목욕시설과 수실 검사의 결과를 알고 난 이후에 일어난다. 보고서에 의하면 온천수에는 인체에 치명적인 병균들이 득실거리고, 목욕 시설을 찾아온 방문객들 가운데 장티푸스나 위염에 걸린 환자가 있었다. 동생은 수질 오염 사실을 이 도시의 신문에 특별 기고 형식으로 발표하려고 한다.
신문사의 편집장과 발행인은 이런 사실을 시민에게 알리고 이 도시를 찾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아무리 방해가 있다해도 끝까지 힘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 일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겠지만 무엇보다 시민들이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동생을 향해서 민중의 친구라고 말하고 위대한 시민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장인 형이 나서서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도 이 도시를 찾지 않을 것이고, 이 도시는 황폐해 질 것이라고 설득한 결과 신문사 사장은 동생의 글을 실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게 된다. 이 때 동생은 시민들 앞에서 내가 폭로하여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한다. 마침내 시민 공청회가 모이고 동생 토마스가 이 사실을 자세하게 알리게 된다.
그러나 그를 뒤에서 벽처럼 지지한다고 믿었던 민중들을 그의 주장을 외면하게 된다. 토마스는 결국 민중은 정의 편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익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토마스는 민중은 그 사회를 살리는 집단이 아니라 그 사회를 병들게 하는 집단이라고 외치고 있다.
결국 그 도시의 민중들은 토마스를 향해서 민중의 적이라고 외치고 동생 토마스는 주민들의 투표에 의해서 민중의 적이라는 결의안이 통과되고 그는 그 도시에서 온갖 모욕을 다 겪게 된다 그 뿐 아니라 그의 딸은 학교에서 추방을 당하고, 그가 살고 있는 집에서도 내 쫓김을 당한다. 그는 이제 미국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조차도 끝까지 토마스를 돕는 사람에게 공격하므로 수포로 돌아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인간은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양심과 정직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과 인생은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과 인생은 누림을 위해서는 섬김의 삶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쥐 구멍에서 쓴 노트"라는 글에는 주인공이 이렇게 독백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고마워할 줄 모르는 두 발 달린 짐승이며 내 살 한 점을 10만 명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어떤 피조물 보다 극도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동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조병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