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총장 시절인 2019년 10월 자신은 검찰주의자가 아니라 헌법주의자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2022년 3월 대통령에 당선되자 윤 대통령은 "공정과 상식을 되찾고 통합의 정치를 지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 취임 후 2년 7개월은 헌법주의자와 공정과 상식 통합을 모두 내팽개친 자기부정의 시간이었다. 이 기간 내내 곳곳에서 퇴행을 보이던 우리 사회는 마침내 대통령의 위헌위법적 비상계엄 선포로 45년 전 군사독재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14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됨에 따라 퇴행은 일단 멈췄다. 이날 오후 대통령실에 탄핵소추 의결서가 전달돼 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됐다. 윤 대통령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며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에 따른 복귀를 공언했지만 이날 국회 주변을 가득 메운 200만명(주최측 추산)의 인파는 탄핵소추안 가결에 환호했다.
■ 'V0' 앞에 무너진 공정과 상식
문재인 정권의 검찰총장에서 야권 대선후보가 된 윤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은 문재인 정권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앞세운 공정과 법치의 이미지였다. 2019년 8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수사와 2020년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과의 치열한 갈등으로 정치적 입지를 구축한 윤 대통령은 2021년 3월 검찰총장직을 사퇴한 뒤 같은 해 6월 29일 대선 도전을 선언했다. 출마선언문에서는 상식을 무기로 무너진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공정의 가치를 반드시 되찾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 여권의) 국민의힘 대선후보(2021년 11월)가 돼 이듬해 3월 10일 0.73% 포인트 차로 대통령에 당선된 윤 대통령은 5월 10일 대통령에 취임한 뒤 자신의 상징이자 자산이었던 공정과 상식을 스스로 내팽개쳤다.
특히 부인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여러 의혹 앞에서 공정과 상식은 늘 무력했다. 김 여사 명품백 받아,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은 검찰의 '특혜 조사'라는 비판 속에서도 기소를 면했다. 윤 대통령은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 세 차례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김 여사가 (대통령을 뜻하는 VIP보다 더 힘을 갖고 있는) V0(제로)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자신의 직권남용 혐의가 제기된 '(순직 해병대원) C 상병 특검법'도 잇따라 거부했다. 윤 대통령에게 의혹을 제기한 언론인들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 3월 'C상병 순직사건 수사 외압 의혹'의 주요 피의자인 이정섭 전 국방부 장관을 호주 대사로 임명한 것은 공정과 상식, 법치를 모두 내팽개친 상징적 장면이었다. 윤 대통령 부부의 공천 개입 의혹 사건의 핵심 인물인 명태균 씨의 폭로로 드러난 국정농단 정황도 마찬가지다.
■ 통합 외면 독단적으로 막무가내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소수여당 꼬이기 국회 상황에 처했다. 당연히 국정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국회와 소통하고 야당과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취임 첫해부터 당무에 개입해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를 몰아낸 데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야당을 비롯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 모두가 반국가 세력이나 공산 전체주의 세력이라고 비난했다. 410 총선 참패로 4월 29일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취임 후 처음 만나 일대일 회담을 가졌지만 평행선을 달렸다.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독단은 국민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취임 첫해 5세로 취학 연령을 낮추고 지난해 6월 수능시험에서 킬러 문제 배제를 지시한 데다 의대 증원을 밀어붙이는 등 체계적인 준비와 전략도 없이 내놓은 정책은 국민을 혼란에 빠뜨렸다. 4대 개혁(연금, 의료, 노동, 교육) 추진을 강조했지만 사회적 숙의 과정이 없는 개혁 논의는 공허했다.
공정과 상식에 국익과 실용도 국정의 원칙으로 내세웠지만 이념에 치우친 외교와 막다른 국정운영으로 이름뿐인 구호로 끝났다. 국내외의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미일과 북중러의 진영 대결로 기울어진 외교는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강제동원을 불허하는 일본 정부의 사도광산(사도 섬의 가나야마) 추모행사 등에서 굴욕외교라는 비판을 받았다.
독단과 내 갈 길을 가는 국정운영에 대한 비판에 윤 대통령은 귀를 막았다. "바이든-날리면" 발언을 둘러싼 비어 사용 문제(2022년 9월), 이태원 참사(2022년 10월) 등을 둘러싼 의혹과 국민적 분노에 대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문화방송(MBC) 기자의 전용기 탑승 배제", "도어 스테핑(출근길 가두리 취재)의 돌연 중단" 등을 놓고 몸을 돌리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 '헌정질서 파괴하는 괴물'
12일 대국민담화에서 윤 대통령은 공무원 탄핵 추진, 예산 삭감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야당은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괴물이자 국헌문란 세력이라며 적개심을 드러낸 뒤 자신의 비상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강변했다. 그런데 헌법은 비상계엄 선포 요건을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로 정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지 않는 3일 밤 비상계엄 선포에 따라 많은 국민은 윤 대통령이 야당에 한 말을 그대로 윤 대통령에게 돌려주고 있다. 거대 야당의 반국가적 패악을 알리고 이를 멈추라고 경고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주장하는 윤 대통령을 막기 위해 수사기관은 내란 피의자로 입건했고 국회는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윤 대통령은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 입장문을 내고 "나는 지금 잠시 멈추지만 지난 2년 반 동안 국민과 함께해 온 미래로 가는 길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된다"며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으로 인한 국가적 혼란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없었다.
8년 전 이맘때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재의 탄핵 기각을 기대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의 열성 지지층인 태극기 부대가 거리로 나와 헌재를 압박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는 윤 대통령의 12일 담화 직후 용산 대통령실 주변은 탄핵 반대 화환으로 가득 찼고, 8년 전 그 태극기와 그 계승자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깊은 흉터가 하나 더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