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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루카 21,1-4
봉헌은 고통스러워야 효과가 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입니다.
예수님은 액수로는 얼마 안 되지만, 전 재산을 바친 과부를 많은 재산 가운데 일부를 봉헌하는 부자들과 비교하십니다.
봉헌의 더 큰 효과를 누가 더 받을까요? 봉헌의 효과는 무엇일까요?
사랑을 실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976년은 중국 전체가 먹을 것이 없어서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중국 탕산시에는 인구 70만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지진이 일어나 23초 만에 24만2천 명이 죽었습니다.
가히 저주라 할 만한 대재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었던 일본대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 참사 속에서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없었고 남을 해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에 처한 이웃의 생명과 재물을 구하러 서로 불 속에 뛰어들었으며 자신이 먹기에도 부족한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더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강제된 행위가 아니라 자유의사에 의한 행위였다는 데서 외국인 목격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같은 해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미국 뉴욕시에서 1977년 12시간의 정전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신문, 방송에서는 그 상태를 ‘연옥’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전등이 꺼져서 자기 얼굴이 타인에 의해서 식별되지 않게 되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남의 재산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방화하고 강간하고 서로 찌르고 죽였습니다.
불만 들어오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도시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것 일부를 주님께 봉헌하며 나의 모든 것이 주님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왜 탕산시의 사람들은 이웃을 돌볼 줄 알았고 뉴욕 시민들은 남의 것을 약탈했을까요?
이는 봉헌이란 것이 자신의 마음을 먼저 아프게 만들지 못하면 이웃에게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대 일본의 전설 중 하나입니다.
이 전설은 산골 마을에 살던 한 여인이 두 아이가 있었는데, 한 명은 건강하고 잘생긴 아이였고, 다른 한 명은 장애가 있는 아이였습니다.
어느 날, 마을의 관습에 따라 강에 제물을 바치러 가야 했는데, 사람들은 여인이 장애가 있는 아이를 바칠 것으로 생각했지만, 강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건강하고 잘생긴 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장애가 있는 아이와 함께 돌아왔다는 내용입니다.
한 선교사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종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저희는 신에게 더 좋은 것을 바쳐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바칠 때는 더 마음이 아픕니다.
더 마음이 아플수록 내가 가진 것의 가치에 대해
더 알게 되고 그러면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커집니다.
이것이 탕산시와 뉴욕의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봉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면 그 봉헌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증가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MC인 방송인 윤택은 개그맨을 하기 전에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가
망해서 30세가 넘어 8억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개그맨으로 데뷔하여 돈을 다 갚았지만,
다시 침체기에 들어섰습니다.
이때 맡게 된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중의 가장 인상에 남는 분은 재개발로 300억의 돈을 벌었지만, 방탕과 사기로 모든 돈을 잃게 된 자연인이었습니다.
그가 밧줄을 사서 산에 올라 나무에 걸치고 목을 매었을 때 멀리서 석양이 지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 예뻐서 하루를 더 살아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 밧줄을 베고 자고 나서 아침에 뜨는 태양을 보고는 너무 감사해서 그 땅에서 눌러앉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렇게 마음이 아플 때 비로소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봉헌이라면 그 봉헌이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조금은 아프더라도 십일조를 봉헌하며 자아를 매번 밟아주고 이웃 사랑을 키워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5일 [연중 제34주 월요일]
복음: 루카 21,1-4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극히 작은 봉헌과 희생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언젠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왔을 때가 기억납니다.
사실 아이들이 자원 봉사 활동을 하러 오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성가시고 번거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적절한 봉사 활동거리도 찾아야 되고, 주의 사항을 잘 설명해야 되고, 옆에 붙어서 관리도 해야 하고 복잡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뭔가 도와보겠다는 그 마음이 가상하고 기특해서 기쁘게 함께 하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더라도, 잘 했다, 고생했다고 칭찬하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함께 나누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 인간이 그분을 돕겠다고 나름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뛰어다닌다 할지라도, 사실 그분 보시기에 웃기는 일이거나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 대단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 별 도움도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도 우리의 그 작은 마음, 그 작은 봉헌, 그 작은 노력을 눈여겨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감격스러워하시고 행복해하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 3-4)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 렙톤 두 닢은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금액입니다.
렙톤은 당대 통용되던 화폐들 가운데 가장 가치가 낮은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 하루 품삯의 144분의 1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5~600백원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 렙톤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겨우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 마실 수 있는 금액입니다.
성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5만원권이나 10만원, 100만원짜리 수표 정도는 넣어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딸랑 동전 두 개를 봉헌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 우리의 보잘것없는 봉헌, 오늘 우리의 아주 작은 희생, 오늘 우리의 티끌만한 봉사도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드릴 작은 봉헌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강론>
(2024. 11. 25. 월)(루카 21,1-4)
<“사랑받고 있으니 사랑하여라.”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1) ‘사랑’에 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받았으니 주어라.”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9-11).”
요한 1서에 있는 이 말들은, 사실상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9-10.12-14).”
하느님(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도 사랑을 실천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2) 가난한 과부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모두 봉헌한 일은,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한 일입니다.
<그 헌금은 아마도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에 대해서 묵상할 때,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 그 ‘사랑’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바치는 행위와 온 마음을 다 바치는 사랑은 따로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정 때문에 마음으로는 다 바치고 싶어도 그렇게 못하고 일부만 바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자신의 봉헌을 과시하고 자랑하려고 가진 것을 다 바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넣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겉모습일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아니라, 과부의 마음속을 보셨습니다.
3) 예수님 말씀에서,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이라는 말씀은, 부자들이 마음을 다 바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온 마음이 아니라, 약간의 선심 정도.>
어쩌면 부자들 가운데 일부는, 그날의 생활비를 전부 다 바친 경우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있었다면 그 액수는 상당히 큰 액수였을 텐데, 그들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바쳐도, 풍족함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계속 부유하고 풍족한 생활을 할 것입니다.
반대로, ‘궁핍한 가운데에서’ 라는 말씀은, 가난한 과부가 온 마음을 다 바쳤음을 나타냅니다.
동전 두 닢을 바친 다음에, 그 과부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다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고, 믿음이 있었으니까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마태 6,34).
그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어떤 체험을 통해서든지 묵상이나 기도를 통해서든지 간에,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라고 깨닫고, 감격하고, 기뻐하게 되면, 사람이 변하게 되고,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4)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것일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고, 그래서 변화되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도 있고, “나는 한 번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적 없다.” 라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기는 것인지?
이 질문에 대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받고 있는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된다.” 라고 말하면서 ‘사랑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상투적인 대답이고, 위선자들의 경우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 차이는 ‘믿음’의 차이일 수도 있고, ‘성품’의 차이일 수도 있고, 부족한 것이 없어서 하느님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 ‘풍족함’과 하느님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는 ‘궁핍함’이라는 각 개인의 ‘처지’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