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 달에 줄잡아 대여섯 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 아주 많은 건 아니다. 더러 사서 보기도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보내오는 책이 적지 않다. 개중에는 내 관심사도 있지만 아닌 것도 더러 있어 당황스러울 때도 가끔 있다. 때로는 200쪽 안팎의 책 한 권 읽기를 끝내기가 버거울 때도 있지만 혹가다가는 이책은 두고두고 아껴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책도 있다. 그런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인태 시인의 <시가 있는 밥상>이다. 7월초 오 시인으로부터 책을 받았는데 7월의 마지막 날에야 책장을 덮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근 4, 50년 전의 유년기, 청소년기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오인태 시인의 <시가 있는 밥상> 표지
밥상 한 상에 추억 한 자락, 사연 한 토막, 분노 한 다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읽고 난 소감을 나는 이렇게 압축하였다. 생면부지의 오인태 시인과 나는 뜻밖에도 인간적 접점이 여럿 있었다. 오 시인은 경남 함양 출신인데 나랑은 동향인 셈이다. 진주교대의 전신인 진주사범 출신인 우리 자형의 후배이기도 하다. 오 시인과는 비교할만한 주제는 못되지만 나도 젊은 시절 ‘문청’이었으며, 별 볼일 없는 비주류로 살면서도 제 멋에 사는 꼴도 나랑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나이로 치자면 오 시인이 나보다 세 살 아래(62년생), 내 여동생과 동갑이다.
처음 책을 받고 표지를 보고선 무슨 요리책 같은 것인 줄 알았다. 물론 시인이 쓴 책이니 시가 구색으로 있으려니 하는 생각은 했지만. 그러나 본문 첫 장을 열자마자 나의 그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리고 마주친 건 오 시인과 내가 공감한 오래 전의 자연언어들, 말하자면 대주, 장골, 짠지나물, 수제비, 정구지, 고들빼기 등등. 이어서 마주친 건 이제는 아스라이 멀어진 '아버지에 관한 기억들'이었다. 오 시인의 부친은 위로 누나 넷을 낳고 마흔에 장남인 그를 얻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백발에 가까운 초로의 노인네로 어머니는 쪽진 머리의 중년 아낙네의 이미지로 인상되어 있다. 어릴 적 늘 부러웠던 친구는 돈 많은 부모를 둔 친구가 아니라 젊은 부모를 둔 친구였다...”
내 아버지는 오 시인의 부친보다 열 살이나 많은 오십에 나를 얻었다. 내가 열 살 때 아버지가 환갑잔치를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내 나이 오십 여섯, 그 시절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더 늙었었다. 오 시인은 밑으로 세 살 적은 아우가 있다고 했다. 내게도 세 살 적은, 오 시인과 동갑내기 여동생이 있다. 오 시인은 동생에게 “참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나도 내 여동생에게는 참으로 할 말이 없다. 어찌 이것까지도 우리는 닮았을까 싶다.
자갈논 몇 마지기는커녕 빚까지 물려준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했다. 그 점, 나랑도 엇비슷했다. 그러나 나이 사십에 들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고 했다. 남한테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독립심과 당당함을 물려주셨고, 나쁘지 않은 머리, 멀쩡한 사지육신, 흉하지 않은 얼굴을 물려주셨으며, ‘부당한 방법을 써서라도 남을 이겨야 한다’고 윽박지르지 않으셨단다.
“전교조 포기각서를 쓰지 않고 끝까지 버틸 때도 아버지는 단 하 마디도 나무라거나 만류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생명에 대한, 사람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주셨다. 무욕의 마음을 주셨다. 늘 ‘사람한테 못할 짓 하지마라.’ ‘잘했다. 그 정도면 됐다’고 말씀하셨으니...”
고교 3년을 문예 특기장학생으로 다닌 그였지만 신춘문예는 안중에 없었다고. 91년 진보 문예지 <녹두꽃>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한 그에게 붙여진 꼬리표는 ‘민중시인’ 네 글자. 출발부터 그는 문단에서도 비주류로 시작한 셈이다. 그의 말마따나 “어차피 세상은 비주류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세상을 움직이는 주류가 정의로운 적도 없었다. 어쩌다 한번 비주류가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 적이 있었지만, 그 일로 비주류는 멸문지화의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
<비주류의 시>
완강한 주류에 밀려 가장자리쯤에서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가 물가의 풀들을 키우고 작은 물고기들을 품어 기르는 법이니, 죽을 때까지 내가 비주류 시인인들 불만 없다.
퉤!
책 속표지에 한 저자 서명
‘적소(謫所)의 땅’ 경남 남해에 살고 있는 오 시인은 현직 교사다. 전교조 교사로, 간부로 활동하면서 적잖은 시련도 겪었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불의한 시절, 교사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도 적잖았으리라. 권력에 굴종하여 ‘영혼 없는 교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가? 싸우려면 든든히 먹고 힘을 길러야 한다. 세상사로 가슴이 휑해질 땐 뜨겁고 매워서 가슴까지 얼얼해지는 어탕국수를, 또 때로 사는 일이 힘들어 몸도 마음도 추운 날에는, 메밀국수를 삶아 건져 따뜻한 국물에 말아 느닷없이 먹고 싶단다. 문득 나는 지난해 남해 팸투어 갔다가 맛본 물메기탕이 눈에 삼삼하다.
'밥상 차리는 시인', 오인태. 그가 작정하고 밥상을 차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대선이 끝난 직후부터라고. 할 말을 잃은 자신과 이웃들에게 말을 거는 수단이 바로 밥상이었던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삶을 같이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한 밥상에서 밥을 먹는 사람을 ‘식구(食口)’라고 부른다. 오 시인이 매일 밥상을 차리는 이유는 공동체 복원에 대한 염원에서다.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도 함께 나누면 그게 곧 공동체인 것이다. 눈 감아도 혼자 바다요, 눈 떠도 혼자 바다인 남해에서의 나날. 선선한 바람 불면 오 시인이 차려준 밥상 맛보러 남해엘 한번 가야겠다. 돌아올 며느리는 없어도 꽃게 된장국에 전어무침을 차려 내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