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이백, 그게 뭐죠?" [김수종]
2022.03.04
작년 봄엔가 '메타버스'란 말을 방송 뉴스 시간에 처음 들었습니다. 거리를 지나다 TV 화면 자막에 비친 그 말을 보는 순간 '새로운 형태의 버스'가 나왔나 하고 무식하게 생각했습니다. 딴에는 영어 'Meta-bus'를 상상해서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후 신문에서 이 단어가 나오는 걸 보고 인터넷을 뒤져 보고서야 Meta와 Universe의 합성어인 것을 알았습니다. 최근에는 전문가연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방송이나 글에서 미래 한국경제가 이것에 달려 있는 듯이 얘기하는 걸 보며 많이 익숙해진 말이 됐습니다만, 여전히 디지털 세대가 아닌 사람에게는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대통령 후보 TV토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알이백' 과 '이유택소노미'라는 말을 꺼내, 질문을 받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황하는 모습이 연출됐습니다.
요즘 거의 방송을 시청하지 않다가 선거토론이니 들어보자고 채널을 돌렸습니다. 이재명 후보가 '알이백'이란 말을 다짜고짜 꺼내는 순간 무심결에 "R200이란 약품이 있는 건가"라고 생각했습니다. 'RE100'이란 자막이 나온 후에야 탄소배출 문제란 걸 알았습니다.
RE100은 Renewable Energy(재생에너지)100%를 약칭하는 용어로서 2050년까지 개별 기업들이 재생에너지 100%를 쓰자는 캠페인입니다. 이 용어가 매스컴에 본격 등장한 것은 2014년 유엔총회기간에 뉴욕시의 '기후주간' 행사 때 영국의 민간단체가 RE100캠페인을 주관하면서부터입니다. 2021년 초 SK가 RE100 멤버로 가입해서 한국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일반인들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기업을 상대로 한 민간 캠페인이지 행정이 개입하는 제도는 아닙니다.
이유택소노미(EU Taxonomy)에 대한 윤석열 후보의 당황한 반응 "그게 뭐죠? 모르는데 좀 가르쳐주세요."는 지지자들 사이에 엇갈린 논란을 빚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유권자 0.01%도 이 용어를 듣고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용어는 작년 11월 글래스고 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26)에서 언론에 비치기 시작한 말입니다. 인터넷에 뜬 외국 신문 기사를 읽다가 처음 보는 'Taxonomy'라는 단어가 나와서 무식하게 '세금경제라는 말도 있나' 생각하며 사전을 찾아보고 '분류 체계'란 뜻임을 알았습니다. 영어권에서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유택소노미는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금융기관의 투자 가이드로 규정해 놓은 녹색 활동의 분류체계입니다. 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는 당연히 포함되고 석탄과 석유는 배제되었습니다.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놓고 유럽연합 안에서도 논란이 계속되다가 지난 연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가스와 원자력을 포함시키는 개정안을 마련하면서 전세계 에너지 시장에 파장을 일으킨 사안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으로 비판받던 터라 EU택소노미 개정안은 한국에서도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재명 후보가 다짜고짜로 용어의 뜻을 묻는 방식도 신사답지 못했지만, 탈원전 폐기를 강력히 주장하는 윤석열 후보가, 비록 용어는 모를지라도, 유럽의 원자력 논란이 탈원전 논쟁에 줄 영향력에 대한 이해는 하고 있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RE100이나 EU택소노미는 기후변화문제가 더 심해질 것이므로 중요한 환경 용어로 자리 잡을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아마 오는 5월 10일 취임하는 대통령은 그가 알았건 몰랐건 국무회의에서 이와 관련된 국정현안을 놓고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용어가 너무 어렵다는 겁니다. 될 수 있으면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하거나 용어를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환경부)는 탄소중립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EU택소노미를 본떠서 'K-택소노미'를 마련했습니다. 한류가 세계적인 추세가 되면서 한국과 관련된 모든 현상에 K를 붙이는 것이 또한 유행이 되고 있지만 행정 용어에 그렇게 할 필요까지 있나 생각합니다. '한국형 녹색 분류표'라고 하면 국민이 이해하기 더 쉬울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K를 붙이고 싶어 'K-녹색분류체계'라고 하면 덜떨어져 보이는 건가요.
이제 한국도 너무 세계화되어서 공무원들이나 기업 관계자 및 전문가들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를 영어 그대로 쓰는 게 편리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또 의문이 생깁니다. 왜 코로나19(Corona-19)는 세계보건기구의 공식명칭인 코비드19(Covid-19)로 통일하지 않았는지 혼란스럽습니다.
'3차원 가상세계' '재생에너지100%' 'EU녹색분류체계'. 이런 표현도 많은 사람들이 쓰면 좋을 듯한 용어 같은데 무시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방송이나 신문 기사를 보면 생소하고 혼란스러운 기술 관련 외래 용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뉴스를 듣거나 읽는 게 불편합니다. 청·장년기를 20세기에 보냈던 기성세대의 문제일 거라고 생각되지만, 과연 2030 MZ세대 청년들도 이런 외래어를 접하고 그들의 인식능력이 자연스럽게 작동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30년 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얼마나 생소한 용어였는지를 생각하면 자라나는 세대는 새로 생겨나는 용어를 감각적으로 익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급속한 사회 및 기술변화가 계속되면 우리말도 기본동사와 토씨만 남아서 세종대왕이 환생한다 해도 한마디도 못 알아 듣는 국어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미래 세대는 변화된 언어 세계에 편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한국적 언어감각에 맞는 용어를 편하게 쓸 수 있게 해주는 게 사회 주류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국립국어원을 확대하든지 아니면 외래어를 연구하고 정리하는 기관을 신설해서 외래 전문용어를 다듬어내는 국가 서비스를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전문가들의 세계에선 그들이 효율적으로 쓸 전문용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외래 전문용어가 쓰이는 분야가 일반 시민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라면 용어 정비가 필요합니다. 특히 일반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기사를 쓰려는 기자들의 서비스 정신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 이런 언어 변화에 적응 못하면 산속에 들어가 살라고요? 글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