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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5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이사야 1,10-17 마태오 10,34─11,1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나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삶에는 의미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삶에는 본래 의미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 이라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 삶의 의미가 생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삶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찾았다면 삶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이란 영화에는 죽고 싶었던 두 남녀가 살아있어야 하는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강동원 씨가 연기한 사람은 사형수입니다.
강동원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맞아서 눈이 먼 동생과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엄마를 찾아가도 아빠에게 맞으니 그냥 고아원에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고 동생은 길거리에서 얼어 죽게 됩니다.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자궁외임신이라 돈이 급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형과 도둑질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강동원은 애인이 자신을 배신했음을 알고,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살인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나영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14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신은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 오빠는 결혼해서 잘만 살아갑니다.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았더니 엄마는 딸의 탓을 합니다.
사촌 오빠가 밉고 엄마도 미워 3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수녀님인 이모의 소개로 사형수 강동원과의 만남을 이어가며 서로의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이제 살고 싶어집니다.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두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그 삶의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기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면 살아야 할 의미를 잃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신은 존재 자체이시기 때문에 언제부터 존재했느냐고 묻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 이유는 신의 존재와 함께합니다.
존재 이유가 없으면 존재의 의욕을 잃고 그러면 진짜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생존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이유를 모르고 살면 생존이고, 이유를 알고 살면 비로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서로를 위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존재 이유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아주 가끔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겠다는 분을 만납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을 사랑해서 부모님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사랑할 줄을 알아 사랑하는 사람을 많게 만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이들이 컸는데도 부모가 아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살아주기를 바란다면 아이들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까요?
그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주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저절로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려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위해 살면 자살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살면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 가족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을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당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여기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살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영원한 존재이듯, 이 삶의 의미를 찾을 때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마태 10,34-11,1
모든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 행하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는 꽤 납득하기 힘든 의아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심사숙고해서 잘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행간에 숨겨져 있는 말씀의 진의를 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들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 안에서 극진히 섬겨야 할 세상 안의 하느님입니다.
그들을 미워하고 배척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강조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위치를 가장 중심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제 삶 안에서 하느님의 입지가 참 많이도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이 하느님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중심에 계셔야 할 하느님께서 밀려나고 또 밀려나서 제일 구석진 곳, 한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로 주방에서, 때로 들판에서 일하면서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 안으로 끌어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스프를 주걱으로 저으면서 깊은 묵상에 잠겼습니다.
형제들의 구두를 수선하면서도 하느님과 깊이 일치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큰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모두 성인의 길을 걸어갈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 놓이는 작고 궂은 일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 매일 반복되는 별 의미없어 보이는 일들, 그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 역시 성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저도 라우렌시오 수사님 비슷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형제들과 아이들을 위한 식단을 짜고, 시장을 봐오고, 지지고 볶고, 끓이고 튀기고 있습니다.
열심히는 하지만, 더 노력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단순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아주 훌륭한 묵상기도요 관상 기도가 됨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 가운데,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시어머니 같은 용어들을 들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 형과 동생, 누이는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 확실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이 세상사는 동안 연을 맺어주신 선물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서로를 보살펴줘야 합니다. 무한한 인내로 서로를 참아내야 합니다.
서로의 성장을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창조주이자 절대자이신 하느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당연히 그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최고선이신 하느님보다 우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하느님을 우리 삶의 가장 한 가운데로 끌어와 모시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신다는 진리를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강론>
(2024. 7. 15. 월)(마태 10,34-11,1)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예수님은 ‘참 평화’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34-42).”
1) 예수님은 ‘참 평화’를 주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ㄱㄴㄷ).”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0-21).”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이 갈라서게 되고, 안 믿는 사람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마치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오신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 분열과 갈등은 가정에서도 일어나고, 가족이 박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마태 10,21).
2)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가족은 사랑하지 말고 ‘나만’ 사랑하여라.”도 아니고, “나를 가족보다 더 사랑하여라.”도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세속의 물질적인 복만 찾으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외면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의 가정이 신앙 때문에 해체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성가정’을 이루기를 바라십니다.
교회는 큰 가정이고,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모순 관계도 아니고, 대립 관계도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식구들의 종교와 신앙이 서로 다른 경우가 있고, 가족의 갈등을 극복하는 일이 힘든 고난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신앙인답게 살면서, 인내하고,
식구들을 감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만 찾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이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우리는 가족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심판 날에 이산가족이 된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도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고,
떨어져 나간 가족들 때문에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3)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는, 제자들의 신원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 활동은 곧 예수님께서 하시는 활동입니다.
<이 말씀은, 앞의 5절에서부터 시작된 ‘파견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 말씀은,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예수님의 복음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만 전해야 합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예언자가(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주는 이와 전해 받는 이가
‘같은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 라는 말씀에서 중요한 말은 ‘제자라서’인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제자들을(신앙인들을) 맞아들여서 접대하는 것은
곧 그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을 맞아들여서 접대하는 것입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여기서 ‘손님’은 ‘낯선 나그네’이고, ‘천사’는 ‘하느님’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