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권혜정 기자 = ‘세상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전모(42)씨는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5월12일 밤 10시50분쯤 술에 취한 채 어머니 임모(70)씨가 있는 서울 중구의 한 임대아파트로 발걸음을 옮긴 전씨의 머릿 속에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나 나를 버린 이유를 들어야겠다”고 생각만이 담겨 있었다.
20여년 전 이혼으로 헤어졌던 아들을 마주한 어머니는 술에 잔뜩 취한 아들의 모습에 안타까움 섞인 쓴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전씨는 어머니의 안타까움을 읽지 못했다.
어머니의 잔소리에 분노한 전씨는 어머니의 얼굴 등을 주먹으로 때리다 급기야 어머니의 허리춤을 잡고 아파트 18층 복도 밖으로 어머니를 밀쳐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상체가 아파트 복도 밖으로 나왔을 때 극적으로 도착한 경찰은 전씨를 저지했고 어머니는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가까스로 사건이 진정된 다음날 술에서 깬 전씨는 더욱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는 이미 결심했던 자살을 실행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살던 아파트 안에서 옷걸이에 줄을 걸어 목을 맸다.
그러나 죽는 것 역시 전씨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씨가 목을 맨 줄은 끊어졌고 전씨의 자살기도는 실패로 끝났다.
20여년 만에 어머니를 18층 밖으로 내밀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전씨에게는 복잡하게 얽힌 과거가 있었다.
“어린 시절 행복한 기억이 없다”고 전한 전씨는 초등학생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으로 약 20여년간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혼 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전씨는 중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와 신문배달 등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이어왔다.
힘들게만 살던 전씨의 삶에도 잠시 행복이 찾아 온 순간이 있었다. 성인이 된 전씨는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갖는 등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게 됐다. 그러던 중 지난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운영하던 식당은 문을 닫았고 전씨는 부인과 갈라섰다.
이혼 조건으로 자녀를 보지 않기로 했던 전씨는 이후 깊은 상실감에 우울증에 빠져 하루하루를 술로 연명했다. 지난 6년 동안 일용직을 전전하던 전씨는 삶에 대한 회의감을 이기지 못하고 20년 만에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의 집에 함께 살기 시작하던 전씨의 가슴에는 “죽기 위해, 죽을 때는 어머니 옆에서 죽어야 겠다”는 포기감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그러나 전씨가 자살을 기도한 그날 현장을 찾은 경찰의 눈에 밟힌 것은 다름 아닌 전씨의 여동생(39)이었다. 전씨의 여동생은 방 한 구석에 마치 죽은 채 누워 움직이지도, 숨을 잘 쉬지도 못하고 있었다.
여동생 역시 전씨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이혼으로 중학교때부터 전국을 떠돌며 생활해왔다. 그러다 알코올중독과 우울증, 거식증 등을 앓기 시작했고 이미 삶을 포기한 7년 전부터 어머니의 집에서 함께 생활해 왔다.
여동생은 매일을 담배와 술로 이어가며 삶에 대한 희망을 모두 잃은 상태였다.
어머니의 삶도 역시 아들·딸과 다를 것 없었다. 어머니는 전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20여년 전 아이들을 둔 채 도망치듯 집을 떠났다.
이후 혼자서 외롭고 힘들게 삶을 이어가던 중 몇 해 전 딸이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어머니 앞에 나타났다. 딸을 보살피며 살던 중 아들마저 삶을 포기한 채 어머니를 찾았다.
20여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딸, 아들 등은 모두 삶에 대한 회의감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각자 기구한 삶으로 엮인 이 가정에 서울 중부경찰서 가정폭력 전담경찰관들이 찾았다. 가정폭력 전담경찰관들은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은 물론 가해자의 관리까지도 목적으로 삼는 ‘런닝맨’ 제도를 운영 중이다.
전담경찰관들은 전씨 가족을 물심양면으로 돕기 시작했다. 경찰의 수차례 설득 끝에 마음을 연 전씨는 알코올 중독 치료 등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경찰은 전씨의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 치료비 등을 지원하는 한편 여동생의 심리치료와 어머니의 우울증 치료까지도 도왔다.
병원에 입원한 전씨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경찰이 간식을 사들고 병문안을 가기도 수차례, 약 2개월간의 집중 치료를 끝낸 전씨는 경찰이 연계한 직업교육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됐다.
경찰은 또 이 가정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인근 교회와의 종교적 지원을 연계하고 가족들이 기초수급자로 선정될 수 있도록 서류를 접수해주기도 했다.
경찰의 이같은 노력 끝에 마침내 새삶을 꿈꾸게 된 어머니 임씨는 “나와 아들과 딸은 함께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그런데 하늘에서 천사를 보내주셨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머니는 “대한민국 경찰이 이렇게까지 도움을 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며 “고집 세던 아들이 경찰관을 믿고 의지하는 모습이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아들 전씨도 역시 “경찰관이 아니었으면 지금 나는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며 “지속적으로 경찰관과 연락하며 지내고 싶고 직업교육을 통해 새롭게 살아보고 싶다”고 다짐했다. 여동생 역시 알코올중독과 우울증 치료를 받아 경찰의 이같은 도움에 보답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경찰은 해당 가족과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지원을 이어갈 예정이다.
전씨 가족을 전담한 허배석 중부경찰서 여성보호계 경장은 “전담경찰관 일을 하며 많은 사건사고를 접하고 지원하고 있지만 전씨 가족의 경우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더라면 누군가 한명이 목숨을 잃는 등 비극적인 상황이 올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며 “절박했던 그들이 불과 몇 개월만에 지금의 단계로 나아졌다는 사실에 경찰관으로서 보람이 크다”고 전했다.
허 경장은 “당연히 할 도리를 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4대 사회악 중의 하나인 가정폭력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적 관심이 많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가정폭력 피해자만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으로는 가정폭력의 근본적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며 “가해자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가정폭력 재범을 막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