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다 / 박헬레나
차창 밖엔 가을색이 완연하다. 시월상달, 그 이름에 걸맞게 하늘은 푸르고 울긋불긋한 산야에 쏟아지는 가을빛이 눈부시다. 궁금해하지 않아도 오고 가는 것이 계절이고 뭇 생명이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거늘 가을이 깊어지면 단풍 안부에 몸이 달아오른다. 팔공산 단풍 길은 시월 하순부터 십일월 초순이 절정이다.
파계사 터미널에 도착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곳까지 와 보기는 처음이다. 만만찮은 길이다. 아침에 두어 번 단풍 구경 가자고 채근을 했다. 남편은 미사 참례할 준비를 하고 시간을 재고 있는 중이었다. 생각 없으면 나 혼자라도 갈 수 있다고 엄포도 놓았다. 평일 미사는 40분 정도면 끝이 나니 기다리라는 대답을 기대했으나 그는 묵묵부답으로 나가버렸다. 신앙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그의 청교도적 생활태도는 가끔 나를 혼란에 빠트린다.
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입이 없는 사람이니 내가 묻고 반응이 없으면 내가 대답을 내는 경우가 처음이 아니다. 긴 세월 수없이 겪었다. 단풍 길은 혼자 걷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이제 한 번쯤 궤도를 이탈하는 몽니를 부려보리라. 낙엽을 밟으며 한 삶의 궤적과 내려놓음의 의미, 그 안에서 나의 시간도 헤아려 보고자 나선 길이다.
배꼽시계가 정오를 알린다. 혹시 기별이 있을까 하고 가방에서 전화기를 꺼내 겉옷 주머니에 넣고 파계 네거리에서 동화사를 목적하여 걷는다. 금년에는 단풍이 유난히 곱다. 한생의 찬란한 마무리다. 초록 잎이 변색을 하는 것은 휴업 준비, 본체를 위한 노동인 광합성을 그만두겠다는 선언이다. 싸한 바람 한줄기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하던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사람에게는 인생 한 막을 접는 사건이다. 은퇴는 죽음을 의미한다고 탄(歎)한 예술가도 있지 않은가.
노동의 현장은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세상 한복판이다. 힘겹지만 자기를 표현하며 세상과 대화하는 링이다. 일이란 돈만이 목적이 아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감을 증명하는 도구다. 열기 넘치는 일터에서 한적한 변방으로 밀려난 노년, 의무가 소진되어버린 존재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단풍잎 처지에 다를 바 없다.
현란한 색의 잔치에 숨이 막힌다. 때가 찬 잎들은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린다. 고요한 낙하, 침묵의 행진이다. 떨어지는 것이 나뭇잎뿐이랴. 잎에 새겨진 시간도, 비바람과 햇살이 엮어낸 역사도 함께 내려앉는다. 쥐고 있는 나뭇가지도 떨어져 내리는 잎도 어느 것 하나 거부의 몸짓이라고는 없다. 아름다운 퇴장이다. 문자가 왔다.
“뜨르르.”
“당신 정말 혼자 가는 거요?”
설마 했던 모양이다.
“파계사에 내려 동화사 쪽으로 걷고 있어요.”
“기다렸다 같이 가지….”
“두 번이나 물어도 대답 안 했으면서….”
일단 나의 가출을 정당화하고 볼 일이다.
“….”
대책 없는 출발이었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배가 고파왔다. 과일과 야채, 우유 한 잔으로 때운 아침식사는 원래 근기가 없다. 배 채울 곳을 살피며 내처 걷는다. 한 시간 이상 걸어도 그 거리에 밥 먹을 곳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남은 길이 까마득한데 시장기가 심해지자 다리가 후들거린다.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인간이 신선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맛난 점심 사먹고 즐기다 와요.”
또다시 문자다.
“혼자라서 좀 그러네요.”
짐짓 어깃장을 놓아보는 건 그의 습관적인 묵언(默言)에 대한 항변이자 나의 입지 굳히기다.
“점심 거르지 말고… 사랑해요~~~.”
반세기 넘은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처음 겪는 아내의 가출에 남편은 당황하는 눈치다. 메아리 없는 대화, 말 귀양 보낸 이의 참담함, 그 폭력성을 그가 짐작이나 하는가. 머리 다 희어진 나이에 받아보는 느닷없는 사랑 고백에 나 역시 당황스럽다. 우리가 엮어온 나날이 사랑이었던가, 그냥 충실한 생활이었던가, 그도 아니면 거룩한 헌신이었나. 이 질문에 맞닥뜨리면 나도 미궁에 빠진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다. 동사다. 서로를 위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수시로 서로에게 반응하는 움직임이 바로 사랑이다. 거기까지면 된다. 약간의 성의만 있으면 가능한 연출을 그는 하지 않는다.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지만 차를 가지고 나에게 달려오는 일은 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고요하고 느리고 무겁다. 그의 과묵한 언행은 수시로 내 인내심을 시험한다. ‘임은 바위같이 꿈쩍 않는데 바람아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의 시를 패러디하며 하늘 한번 올려다보니 우리가 꽤 괜찮은 연인이나 된 듯하다.
꼿꼿이 서려고 안간힘 쓰는 마음 위에서 몸이 갑질을 한다. 적절한 때에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면 이제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 이쯤해서 발길을 돌려야 하나, 목적한 길을 완성하지 못한 열패감에 머뭇거리고 있는데 내 위(胃)는 계속해서 꼬르륵거리며 속물근성을 드러낸다.
배고픔에 꺾여들었을까, 생경한 사랑 타령에 무장해제 당한 것일까. 나의 유치한 기(氣)싸움은 흐지부지, 생애 최초의 무모한 반란은 중도에서 무참하게 막을 내렸다. 부부란 신뢰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공유하며 책임과 의무로 엮어진 가족애(家族愛), 그것이 부부 사랑의 본질 아닐까. 평생 극복이 되지 않는 어긋남을 ‘다름’으로 받아들이며 멍울진 마음을 가을볕에 툭툭 털어 말린다.
소슬바람에 색색의 나비 떼가 춤을 춘다. 섭리에 순응하는 적멸(寂滅)에 나의 오기와 패배감도 함께 아울러 내려놓는다. 가던 길을 꺾어 돌아서는 것, 그것은 회심(回心)이다. 정직하게 말하면 한 번도 길 끝까지 가보지 못한 용기 없는 자의 변명인지도 모르나 그것이 오늘까지 내 삶을 지켜온 규범인 걸 어쩌랴. 천성(天性)이란 절대불가침 영역이라는 긍정적 해석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나는 지금 팔공산 단풍 길을 접어 반환점에 서 있다. 시월의 마지막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