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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고린도전서 1장 26~31절에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지혜로운 자들이 많지 아니하며 할 수 있는 자들이 많지 아니하나. 그가 미련한 것을 선택하셨으니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고, 그가 약한 것들을 선택하셨으니 강력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고. 하나님께서는 비천하고 업신여겨지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선택하셨나니 있는 것을 무효로 하시기(to nullify) 위해서니. 모든 육체가 그 하나님의 목전에서 자랑하지 아니하도록 하기 위해서라. 그러나 그에서 너희는 크리스트 예수 안에 있으니(are in) 하나님부터 나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성화와 되찾음이 되신 자니. ‘자랑하는 자는 주를(in) 자랑하라’라고 기록된 것에 따르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1장 26~31절은 하나님이 미련한 자들을 선택하신다는 내용입니다.1)
“지혜로운 자들”은 학식이 있고 경험이 많은 자들입니다(고전 1:26).2)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 가운데는 지혜로운 자들이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혜와 힘과 부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행위들을 아는 것을 방해합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부유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힘을 믿는 오만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지 아니합니다.
크리스천들에서 지혜로운 자들과 할 수 있는 자들이 많지 아니합니다. 이유는 자신의 지혜와 힘을 신뢰하는 자들은 믿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통 그가 선택하신 자들에게 먼저 약함을 주십니다.
그가 미련한 것을 선택하시니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고, 그가 약한 것들을 선택하시니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천하고 업신여겨지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선택하셨으니 있는 것들을 무효로 하시기 위해서입니다(고전 1:28).
육체가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고전 1:29). 유대인은 하나님을 자랑하고(롬 2:17) 율법을 자랑하였습니다(롬 2:23).
1. 예수님께서는 지혜와 의로움과 성화와 되찾음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그에서 너희는 크리스트 예수 안에 있으니, 하나님부터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성화와 되찾음이 되셨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에서”는 근거(그의 행동을 통하여)나 ‘기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원’의 뜻은 주석자들이 대부분 동의하고 있는 해석입니다.3)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그것의 기초이십니다.4)
“그에서”는 “그를 통하여”(Through him)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는 크리스트 예수 안에 있다는 해석입니다.5) 이 세상과 달리, 우리는 우리의 실존을 하나님의 행동에 빚집니다.6)
사람이 크리스트 예수 안에 있지 아니하다면 그에게 영생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몸에서 잘린 팔다리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몸에서 잘린 팔다리는 자기 힘으로 살 수 없으므로 썩습니다.7)
1) 그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에서부터 지혜가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 가운데 보면 “그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에게”(to us)는 “우리를 위해”(for us)라는 유익을 뜻합니다.8)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에서부터 지혜가 되신 것입니다.9)
전반부의 “너희”에서 후반부의 “우리”로의 전환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크리스트께 속한 모든 이들을 포함하려 관점이 넓어집니다.10)
“지혜”는 크리스트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된 인간성은 온전히 “참된 사람”이신 주 예수님 안에 나타납니다. 참된 지혜는 예수 크리스트의 유일무이한 길 안에 있습니다.11)
크리스트의 가르침이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지혜롭게 할 것입니다.12) 예수 크리스트께서 마음에 임재하여 계시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13)
“하나님의 지혜”는 미리 정하신 구원 계획이라는 의미에서 지혜인데, 크리스트께서는 구원 계획을 이룬 자로서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14)
2) 그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에서부터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계속 보면, “의로움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인격적으로나 행위적으로나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합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와 선행은 마치 다 더러운 걸레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의로움과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15)
그런데 크리스트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의로움이 되셨습니다.16) 하나님의 의(의로움)가 복음 안에 믿음에서 믿음 안으로 나타남이니, ‘의로운 자는 믿음에서 살 것이라’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롬 1:17).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그 복음 안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그 복음 안에 나타나니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 안으로(to) 나타납니다. 기록된 것에 따르니 ‘그 의로운 자는 믿음에서 살 것이라’라는 것입니다. 그 의인은 믿음에 의해(by faith) 살 것입니다.
“의로움”은 “올바름”이라는 뜻이고 “의로운”은 “올바른”이라는 뜻인데, “올바름”이라는 말은 법정에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에 쓰인 말입니다.
의로움의 전가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확고하게 인정받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자라면 예수님의 의로움이 우리의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신자들을 의롭다고 칭하십니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신자들은 실제로도 의로워집니다.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죄판결과 형벌을 내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움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은 존재하기를 그쳤고 우리의 죗값은 지급되었습니다.18)
그가 우리로부터 우리의 반역을 멀리 있게 하신 것입니다(시 103:12). 그가 모든 우리의 죄들을 바다의 깊음 가운데에 던지셨습니다(미 7:19). 그러므로 모든 우리의 죄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멀리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우리의 죄들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우리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죄를 끝내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의로움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땅에서 머무를 그 날만큼 성스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로움은 하늘나라에서 의로운 모습과 똑같습니다. 믿는 자들은 그 은혜에 믿음을 통하여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고,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19)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의로움이 이제 크리스트 안에 존재합니다.20)
3) 그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에서부터 성화가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계속 보면, “성화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의로움(righteousness)과 성화(sanctification)는 늘 함께 갑니다. 의로움과 성화는 2개의 주제지만, 그것들은 서로 엮어져 있습니다.21)
우리가 성화의 기초를 가지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이며 그 성화의 기초란 성별된 것에 있습니다. “성별”은 하나님을 섬길 목적으로 “신성하게 구별”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별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선택이 성화의 기초입니다. 우리를 구별되게 만드는 능력은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하여 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주 예수님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일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신성하게 구별되는 것은 새로운 생명입니다. 옛사람은 병원에 보냄을 받지 아니하며 십자가에 보냄을 받습니다.22)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무덤에 묻힌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크리스트께서 사신 것입니다.
신유(神癒) 운동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으며 찰스 컬리스(Charles Cullis)를 통하여 시작된 신유 운동은 장로교회에 영향을 미쳤습니다.23)
윌리엄 보드만(William E. Boardman, 1810-1886)은 뉴욕에서 났고, 그는 컬리스를 만나고 치유 사역을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24) 컬리스는 북미 신유 운동의 개척자입니다.25)
컬리스는 자살 충동을 극복한 후에 초조, 근심, 걱정에 싸였습니다. 그는 불치병 선고를 받은 환자를 볼 때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가 투신할 사업은 그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크리스트께만 순복하는 이상적인 병원 설립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신앙 원리로 직원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인류 역사 개입을 선포하고자 했는데, 미국 내의 소시민들이 그의 운동에 동참했습니다.26)
그는 시내의 거리에서 1864년에 결핵 환자들을 위한 집을 시작했는데 결핵이 전염병이니 환자가 격리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없었던 것 같으며, 바이러스 예방 백신과 항생제가 발견된 것은 19세기 후반입니다.27)
완전주의는 그 뿌리를 근본적으로 신비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에 두며 펠라기우스(Pelagius)는 사람의 의지가 절대 능력을 갖추는 핵심 원리며 ‘자력 구원’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28)
윌리엄 보드만은 구원론에 있어 자신이 루터의 견해와 같다고 말했고, 그는 루터가 종교개혁자들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29)
그가 출판한 『더 높은 크리스천 삶』(The Higher Christian Life)은 더 높은 삶 운동의 지도자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30)
자유주의신학이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에 의해 태동하였으며 새로운 신학은 ‘진노’, ‘죄’, ‘십자가’, ‘심판’ 없음을 주장하였습니다.31)
벤저민 워필드(Warfield)는 개혁주의 전통을 배우며 성장하였습니다. 그가 성장한 19세기는 자유주의신학 사상이 강하게 불어 닥친 시대였고, 그는 그 시대에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에 사력을 다하였습니다.32)
그는 영국의 신앙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온 영국 청교도의 후손으로서 그의 집안은 ‘살아 있는 경건’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앙의 터를 가졌으며, 엄청난 유산을 가진 부유한 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33)
그는 ‘더 높은 삶(Higher Life) 성화론’의 모순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예정론과 제한적 속죄에 대해 칼뱅주의의 태도를 보인 자였는데, “완전주의(Perfectionism)”라는 완전주의자를 향한 비판을 썼습니다.34)
성화는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35) 성화는 사람의 의지적 결정이 아닌 성령님께서 일함에 달렸습니다. 더 높은 삶 성화 교리는 근본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에 기초하고 있고, 성화의 과정이 사람의 의지적 결정에 달렸다고 주장하는 교리입니다.36)
성화는 거듭나는 때 성령님께서 일으키신 마음과 삶의 근본적 변화며, 성화는 신자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점진적인 형태로 일어나는 사건이며, 성화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그 완성이 진정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37)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은 성화를 ‘변화’라는 단어로 표현하며, 이것은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칭의와 성화는 모두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고 있다는 진리입니다.38)
결정적 성화는 성화가 사람의 의지적 결정에 따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지의 결단으로 성화를 이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성화는 사람의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사역입니다.39)
스미스 여사는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의 협력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위치시키기 전까지 하나님은 성화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피력했습니다.4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삼자의 입장처럼 보고만 있는 분이 아니시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는 것이 바로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섭리는 하나님의 눈 못지않게 그의 손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미리 보시는 하나님께서 문제를 언제나 해결하여 주십니다(창 22:8).41)
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은혜며, 이 은혜의 역사는 점진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한 성화가 현재에 즉각 주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완전 성화’를 확증함 때문에 그 죄를 끝내길 원하는 때 ‘정욕’의 죄를 부인함으로 그 시작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42)
그들은 죄에서 깨끗게 하는 것이 지속적 행동에 의한 것임을 주장했고 웨슬리도 “크리스트의 피가 깨끗하게 해주었다”로 과거시제로 읽었는데,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으니 완전 성화가 가능하다고 오해한 것입니다.43)
그러나 회개는 사람의 뜻과 의지 때문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며 구원이 사람 자신에게서 생긴다는 교리는 이방 종교의 교리일 뿐입니다. 즉 완전 성화에 이를 수 있다는 교리는 이방 종교의 교리인 것입니다.44)
4) 그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에서부터 되찾음이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 끝에 “되찾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되찾음(redemption)”이라는 단어(아폴뤼트로시스)는 개역 성경에 “구속”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에게 질문하면 이 용어를 “구속(拘束)”으로 오해합니다. “묶을 속(束)” 자를 쓴 “구속(拘束)”은 “체포하여 신체를 속박함”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구속”은 “속바칠 속(贖)” 자를 쓴 “구속(救贖)”입니다. 속(贖)바친다는 말은 죄를 면하기 위하여 돈을 바친다를 뜻하는 말인데,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제받는다”를 뜻합니다.
예를 들면, 죄를 범하여 옥에 30일 갇혀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옥에 갇히는 대신 30만 원을 주고 갇히지 않은 것이 속바치는 것입니다.
“속바칠 속(贖)”이라는 글자는 크리스트교에 가장 중요한 글자입니다. 속바친다는 말이 죄를 면하기 위해 돈을 바친다는 뜻인 것을 꼭 압시다! “속바치는 돈”, “죄를 면하려는 목적에 바치는 돈”이 “속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명을 속전으로 주셔서 믿는 자를 되찾으신 것입니다.
이 단어(아폴뤼트로시스, redemption)는 한국어 개역 개정에 “구원”으로 번역되었으나 “구원”이라는 단어(소테리아, salvation)와는 다른 말입니다.
어쨌든 저는 “구속(救贖)”을 “구속(拘束)”으로 오해하는 일을 피하고자 “되찾음(redemption)”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속박(욥 39:5)과 결박(사 58:6)과 수갑(렘 40:4)을 여시고 속박된 자들을 되찾으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봉사함을 받기 위해 오지 않으셨으나, 봉사하시기 위해서고 영혼을 속전으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마 20:28).
예수님께서는 그 영혼을 많은 자의 속전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영혼”이 여기에서는 “생명”, “목숨”(life)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 “속전(ransom)”(뤼트론)은 “석방금”(price of release), “몸값”, “속전”(ransom), “배상금”(ransom price)을 의미합니다.
“풀다”(뤼오)에 “방법”을 뜻하는 접미어(트론)가 붙었으며, ‘푸는 방법’, ‘석방하는 방법’이라는 뜻의 “속전”(ransom)이 됩니다.
포로를 되찾기 위해서, 노예를 석방하기 위해서, 채무를 갚기 위해서, 또는 신(神)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지급된 돈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2.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하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 “그것이 기록함을 받은 것에 따르기 위해서니, ‘자랑하는 자는 주를(in) 자랑하라’라는 것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 9장 23~24절에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에 자랑하지 말고 강력한 자는 그의 힘에 자랑하지 말며 부자는 그의 부에 자랑하지 말라. 나 야훼가 자비 정의 공의를 행하는 자인 것을 아는 것에 자랑할 것이니, 이는 이것들 안에 내가 매우 기뻐함이라 야훼의 말씀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미련한 자들과 경건치 않은 자들은 자신들을 자랑합니다(판 7:2). 현명한 자들과 경건을 지닌 자들은 하나님을 기뻐합니다(시 5:11).45)
우리 크리스천 가운데 자랑할 만한 자들이 많이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 믿음과 구원이 사람의 지혜로 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간접 증명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지혜에 따른 것이니 우리는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자랑하라”라는 말은 “주를 자랑하라”라고 번역하여야 하는데 이유는 “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in”은 여기에서 “안에”를 뜻하지 않으며 “자랑하다”라는 자동사를 타동사로 변화시키는 기능을 가진 까닭입니다. 새 번역과 공동번역 성경은 “주님을 자랑하라”라고 잘 번역해 놓습니다. 고전 1장 31절의 명령은 “주 안에 어떤 것을 자랑하라”라는 것이 아니라, “주를 자랑하라”라는 명령입니다. 자랑할 대상이 바로 “주”인 것입니다.
로마서에 “하나님”(롬 2:17)과 “율법”(롬 2:23)을 자랑한다고 할 때도 역시 전치사 “in”이 사용되었습니다.
자신의 지혜나 힘이나 부를 자랑하는 자는 믿음을 가지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지혜나 힘이나 부를 자랑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하여야 합니다.
3. 파울은 예수님만을 알기에 결정하고 선언하였습니다.
코린트전서 2장 1~2절에 “너희에게 하나님의 증거를 선언하는 내가 말(speech)이나 지혜의 탁월을 따라서 오지 아니하였으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가 아니면 무엇도 알지 않았기에 결정함이고”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2장 1~5절은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대조합니다.46)
파울은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께 대한 근본 선포로 돌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미련한 지혜를 한층 더 예증합니다.47)
파울은 십자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의 영원한 진리를 드러냈으며, 코린트 교인들은 하나님의 영(Spirit)과 능력에 설득당했습니다.48)
1~2절은 ‘파울의 선포 내용’입니다.49)
본문 2장 1~2절은 1장 17절과 대칭 병행되어 단락을 끝맺습니다.50)
파울은 앞에 1장 17절에서 복음을 전도하게 파송되었다고 말하였는데 2장 1절에서는 코린트 교인들을 향하여 왔다고 말하였습니다(고전 2:1).
파울은 1장 17절에서 말의 지혜에 파송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였는데 2장 1절에서 말이나 지혜의 탁월에 따라서 오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들을 향하여 말이나 지혜의 탁월을 따라서 오지 아니하였으니, 사람이 말이나 지혜의 탁월에 따라 구원함을 받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코린트전서 2장 1절에 “증거”라는 말은 “신비”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헬라어로 “마르튀리온”과 “미스테리온”으로 형태가 비슷합니다. 필사하면서 “미스테리온”을 “마르튀리온”으로 잘못 베꼈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도하게 파송된 그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신비를 선언합니다.
파울은 웅변(eloquence)이나 지혜를 보이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파울의 관심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웅변이나 그리스의 지혜로운 철학에 매이지 아니한 것입니다.51)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파울은 예수 크리스트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가 아니면 그들 가운데에 어떠한 것도 알지 아니하기에 결정하였습니다(고전 2:2). 그는 예수 크리스트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만 알기에 결정하였습니다.
세상에는 만물 박사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대화거리가 많이 있고 모임에서 늘 대화를 이끌어 나갑니다.
오늘날에 많은 설교자가 강단 위에 올라가서 자기의 경험을 말합니다. 그들의 말을 들을 때에 여러 가지 배울 점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예수 크리스트에 대해서는 얼마나 말하던가요?
많은 사람이 강단 위에 올라가서는 세상 지식과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가 자기계발 강사들의 강연과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많은 설교자가 연설과 이 세상 지혜로써 교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알맹이 없는 그러한 설교가 좋다고 설교 잘한다고 칭찬합니다.
파울 때에도 청중을 확 사로잡는 뛰어난 웅변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도 잘하고 지혜에 있어서도 탁월하게 보였습니다.
반면 사도 파울은 연설이나 지혜의 탁월을 따라서 오지 아니하였으며, 이것저것 많이 아는 것처럼 그 경험한 것을 떠벌리지도 아니하였습니다.
파울의 관심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크리스트뿐이었습니다. 파울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크리스트를 전한 것입니다(고전 1:23).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가 아니면 알지 아니하기에 결정하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그들에게 선언한 “하나님의 신비”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웅변에 익숙한 자들은 파울의 설교에 실망하였을 수 있으나, 파울은 연설로 그들을 향하여 와서 사로잡으려고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파울은 오직 그가 선언한 하나님의 신비의 내용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파울은 “예수 크리스트”라는 한 가지 주제만 알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알기에 결정한 지혜는 세상 지혜가 아니라 예수 크리스트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크리스트”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라는 신앙을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데 우리는 이 신앙을 매주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때에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만을 알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파울은 당시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세상 지혜를 전하지 아니한 것이며, 파울은 화려한 웅변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는 말이나 지혜의 탁월로서가 아니라 예수 크리스트만을 안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는 그들을 위해 못 박히셨습니다(고전 1:13). 그러므로 그들은 오직 크리스트의 것이며, 크리스트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파울이나 아폴로 파로 나누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파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도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되었습니다. 말의 지혜로 아니니 십자가가 무효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의 지혜가 십자가를 무효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고전 1:17).
세상의 지혜로는 십자가의 말씀이 미련하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18).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십자가의 말씀을 전파하여도 설득시킬 수 없으며,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 미련한 것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게 된 우리에게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말씀은 말의 지혜로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만드신 것입니다(고전 1:20). 지혜로운 자들이 그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고전 1: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함으로 구원하셨기 기뻐하셨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습니다(고전 1:22).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크리스트를 전도합니다(고전 1:23).
십자가에 못 박히신 크리스트께서는 유대인들에게는 장애물이십니다.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받았다”라고 기록되었기 까닭입니다(갈 3:13).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는 저주로 죽은 사람일 뿐입니다.
지혜로운 그리스인의 관점에 이 복음은 미련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신(神)들은 사람의 손에 의해 극형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파울은 신(神)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전하였으니, 파울이 전도한 복음은 그리스 사람에게 미련한 것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파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크리스트를 전도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름을 받은 자들에 하나님의 지혜시기 때문입니다. 부름을 받지 못한 자들에 “미련함”이 부름을 받은 자들에 “지혜”입니다
파울은 연설이나 이 세상 지혜의 탁월을 따라서 오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가 아니면 알지 아니하기에 결정하였습니다. 이유는 크리스트께서 바로 “하나님의 지혜”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혜의 탁월을 따라서 왔다면 그리스인의 관심을 끌었을 것인데, 그러나 파울이 그처럼 하였다면 그는 생명을 전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 세상 지혜는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어도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크리스트만을 알기로 하면, 부름을 받은 자는 들을 귀를 가진 까닭에 듣고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파울은 설교의 주제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로 잡았습니다.52)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은 그들에 단지 조롱거리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파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만을 알기로 하였습니다.53) 여러분은 미련하다고 들을 각오를 하고 크리스트를 알기에 힘씁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크리스트만을 알고 전할 것으로 결정하였습니까? ‘너는 아직 그런 미련한 말을 믿냐’고 손가락질당할 각오를 하였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크리스트만을 알고 전할 것으로 결정합시다!
파울은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알기로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꾸미지 아니한 본래 모습 그대로를 보이기로 하였습니다.54) 파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가 가려지기를 원하지 아니한 까닭에, 연설이나 지혜의 탁월을 따라 그들에게 오지 아니한 것입니다.
파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만 알았고 그것이 충분하였습니다.55)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는 파울이 알기로 한 유일한 내용이었습니다. 파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를 전할 때 파울이든 아폴로든 상관없습니다. 파울의 파와 아폴로의 파로 나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파울과 아폴로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전하는 내용이 같기에 하나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가 우리의 주제여야 합니다.56)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57)
어떻게 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를 드러낼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자신이 크리스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믿는 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들어 올린 후 예수님 뒤에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미련하게 여겨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가 전파되게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들어 올리는 자기희생 없이 크리스트를 전하지 못합니다.
1) David E.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BECNT 성경주석, 조호영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9), 111.
2)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12.
3) Gordon D. Fee, 『NICNT 고린도전서』, NICNT 성경주석, 최병필 역 (서울: 솔로몬, 2019), 134, n. 167.
4) Anthony C. Thiselton, 『NIGTC 고린도전서』, NIGTC 성경주석, 신지철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22), 346.
5) C. H.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28, 모수환·김원주 옮김 (서울: CH북스, 2020), 31.
6) Fee, 『NICNT 고린도전서』, 134.
7)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33.
8) Fee, 『NICNT 고린도전서』, 135, n. 169.
9)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36.
10) Fee, 『NICNT 고린도전서』, 135, n. 170.
11) Thiselton, 『NIGTC 고린도전서』, 351.
12)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37.
13)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39.
14) Thiselton, 『NIGTC 고린도전서』, 352.
15)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41.
16)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40.
17)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41.
18)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42.
19)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42.
20)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20.
21)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43.
22) Spurgeon,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43.
23) 한동수, “19세기 미국 장로교회 사역자들의 신유 운동과 그 영향”, 『한국개혁신학』 제71권 (2021): 277.
24) 한동수, “19세기 미국 장로교회 사역자들의 신유 운동과 영향”, 278.
25) 이연승, “체념에서 치유로: 북미 신유 운동의 개척자, 찰스 컬리스(CharlesCullis, 1833-1892)”, 『영산신학저널』 제35권 (2015): 151.
26) 이연승, “체념에서 치유: 북미 신유 운동의 개척자, 찰스 컬리스”, 157-162.
27) 이연승, “체념에서 치유: 북미 신유 운동의 개척자, 찰스 컬리스”, 163.
28)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갱신과 부흥』 제21권 (2018): 158. (151-187)
29)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59.
30)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60.
31)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57.
32)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53.
33)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55.
34)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53.
35)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63.
36)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64.
37)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65.
38)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65.
39)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66-167.
40)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68.
4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Ⅰ. 16. 4.
42)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70-172.
43)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73.
44) 조윤호, “워필드의 “The Higher life” 성화 교리에 대한 비판”, 174.
45)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21.
46)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23.
47)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23.
48)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23.
49)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23.
50) Kenneth E. Bailey,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김귀탁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7), 107.
51) Fee, 『NICNT 고린도전서』, 142.
52) Spurgeon,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52.
53) Spurgeon,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54.
54) Spurgeon,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55.
55) Spurgeon,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56.
56) Spurgeon,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63.
57) Spurgeon,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스펄전 설교전집, 67.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이 즐거워야 행복해 진다고 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모든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게 되므로
얼굴엔 늘 미소를 짓게되고 밝고 유쾌하게 된답니다.
얼굴에 환한 웃음과 함께 오늘도 멋지게 시작하시고요.
항상 웃음이 있는 그런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으니라(잠 26:10).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