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동학’하면 3ㆍ1독립운동이나 6ㆍ10 만세운동, 동학 혁명 등을 떠올린다. 종교단체인지, 사회단체인지 헛갈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동학의 본질은 그런 게 아니다. 계급투쟁이라든가, 외적인 사회 구조를 바꾸는 혁명에 있지 않다.
동학의 본질은 자기 안에서 우주의 근원을 만나는 내면의 혁명이다. 외적인 사회 혁명은 한계가 명백하다. 피지배자가 지배자에 저항해 사회구조를 바꾸었다고 하자. 그다음에는 어떤가. 또 다른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겨난다.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도 그랬다. 혁명 후에는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생겨났다. 외적인 혁명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동학에서 말하는 ‘한울’은 우주를 말한다. 이 우주가 지기(至氣ㆍ지극한 기운)라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우주가 살아 있다. 우주는 의인화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 같이 생겼다느니,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한울님도 의인화시킬 수가 없다. 한울님은 이치와 기운으로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운 선생은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고 했다. 오심(吾心)은 한울님 마음이고, 여심(汝心)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과 한울님 마음은 처음 태어날 때는 같은 마음이지만, 살아가면서 달라진다. 그래서 수련을 통해 한울님 마음을 회복하는 거다. 동학 운동은 원래 그런 운동이다.
기독교에는 천사와 악마가 있다. 천도교는 악심과 선심이 따로 있지 않다(不擇善惡). 내가 사악한 욕심으로 빌면, 사악한 욕심으로 한울님이 들어온다. 또 올바른 마음으로 빌면 선한 마음으로 한울님이 들어온다. 선심이든 악심이든, 둘 다 한울님의 작용이다. 그래서 나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내 마음이 바를 때 한울님도 바르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1824~1864)는 경주 최부자집의 비조인 최진립의 7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신분이 천한 사람이 동학교도가 되고자 찾아와도 대문 밖까지 나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 또 집에 있던 두 여종의 종문서도 태워버렸다.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 나머지 한 사람은 자신의 며느리로 맞았다. 그 바탕은 사회적 계급을 타파하는 외적 혁명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을 회복하자는 내적 혁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