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시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은 탁상시계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잠언 같은 동화 한편을 올려드립니다.
내 이름은 시계입니다. 이름이 어찌 고유명사가 아니고 보통명사냐고요? 그럼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면 내 이름은 탁상시계입니다.에게 게! 똑같은 이름이라고요? 그렇다면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셔요?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을 것입니다. 이런 사자성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홍길동이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동명 다인입니다. 구청, 군청, 시청, 도청, 법원, 등기소, 세무서, 경찰서... 이런 관공서의 민원봉사실에 가보셨나요? 그런 곳에 가보면 필기 대가 있고, 그 필기대 위에는 두꺼운 유리가 놓여있고 그 유리 밑에는 그곳에서 발급하는 서류들의 견본들을 전부 진열해 두고 있는데 그 서류마다 성명 난에 홍길동하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홍길동이가 한 사람일까요? 그렇다고요?
그렇다면 한 사람 홍길동이가 전국 세무서를 다니면서 서류 발급을 받았단 말입니까? 한 사람 홍길동이가 전국 경찰서마다 다니면서 고발장을 올렸단 말입니까? 한 사람 홍길동이가 전국 구청마다 다니면서 출생신고를 했단 말입니까? 한 사람 홍길동이가 전국의 구청이나 민원센터를 돌아다니면서 혼인신고를 했단 말입니까?
제 말에 왜 입을 다물지 못하십니까? 제가 너무 억지를 부린다고요? 그래서 기가 막혀 입을 다물지 못하시겠다고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가장 억지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아니던가요?
빗물은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바위가 있으면 돌아가고 계곡을 만나면 계곡을 타고 내려가고 댐을 만나면 가두는 대로 머무르고 그러다가 흘려보내주면 흘러가고, 농부가 만들어 놓은 도랑도 마다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물은 자연과 사람들이 흘러가라는 대로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강을 만나면 강을 따라가고 바다를 만나면 짜다는 말 한마디 없이 바다에 들어가 옛적부터 살아온 것처럼 불편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잘 살지 않습니까?
바람도 그렇습니다. 가정을 두고 이상한 짓을 하는 남자를 바람피운다고 하시더구먼요. 이런 걸 두고 어불성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봄바람이 가을에 부는 것 보셨던가요? 겨울 북풍이 여름에 부는 것 보셨던가요? 바람은 사람처럼 그런 식으로 오락가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정을 두고 다른 여자나 다른 남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사람을 두고 바람을 핀다라니요? 바람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물통 몇 개를 깨어 부수 고도 남의 집에 들어간다면서요?
바람이 별난 구석은 있어도 그렇게 비양심적이지는 않습니다. 바람은 머리를 숙이는 상대에게는 매몰차게 기어이 목을 꺽지는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갈 때 머리를 숙이는 갈대에게 바람이 지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기어이 목을 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번 적은 영원한 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선거 후에는 상대방 후보였던 사람에게 꼭 앙갚음을 하더구먼요. 용서했다고 말은 하면서도 훗날 그 문제를 끄집어내어 후려치려 하더구먼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남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자기 생각부터 하지 않았던가요? 나는 사람들의 이런 마음탓에 혼이 난 적이 있었지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온몸이 오싹합니다. 나는 한 번도 그 사람의 명을 거역한 적이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나는 그의 충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사람에게 멱살이 잡혀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무슨 일로 그런 봉변을 당했었는지 들어봐 주시렵니까?
나는 도련님 한 분과 함께 살고 있었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방에는 우등상장과 개근상장 수십 장이 벽에 걸려 있었답니다. 이 상장들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도련님이 받은 것들이지요. 우리 도련님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도련님은 거의 매일 나에게 깨워달라 부탁을 합니다. 도련님이 보통 새벽 1시나 2시까지 공부를 하다가 잠자리에 듭니다. 아침에 깨어나는 시간은 5시경입니다. 도련님은 항상 잠이 모자란 듯 피로해 보이는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도련님을 나는 참 안쓰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련님이 깨워달라는 시간이 되면 나는 나의 맡은 사명과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어김없이 도련님을 깨웠습니다. 도련님이 알았다면서 내 머리를 꾹하고 한번 만져줄 때까지 나는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제발 일어나세요라고 울며 불며 도련님을 깨웠습니다.
어떤 날은 도련님이 정말 일어나기 싫었던가 봐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그런 날은 내 목이 다 쉰다니까요? 내가 내동댕이 쳐진 그날 새벽의 일을 말씀드릴게요.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하던 도련님이 아침 5시에 깨워달라시더군요. 도련님은 눕자마자 그대로 잠에 빠져들더라고요.
내가 도련님을 새벽 5시에 깨워주려면 나는 5시까지 잠들 수 없지 않습니까? 방안에는 도련님의 숨소리와 내 심장이 뛰는 소리만이 새벽을 향해 가고 있었지요. 드디어 5시가 되려 하였지요. 그런데 도련님을 깨우기가 너무나도 민망스럽더라고요. 잠든 지 겨우 3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지금 한창 맛있게 자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나의 사명이 도련님을 깨워드리는 것인걸요.
나는 길게 숨을 한번 들이마신 후 도련님을 깨워드리기 위하여 따르릉따르릉따르릉하고 가장 요란한 소리로 도련님을 깨웠습니다. 예상은 하였지만 도련님이 쉽게 일어나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거기서 그만두면 안되잖습니까? 나는 계속하여 따르릉따르릉따르릉 소리쳐 도련님을 깨웠습니다.
얼마나 고함을 쳤던지 목이 아파왔습니다. 결국 나는 뜨으르르 뜨으르르라는 소리를 내면서 힘에 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도련님은 그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지요.
그날 도련님은 내게 깨워달라던 시간보다 2시간가량 지난 후에야 일어났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거반 죽다시피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도련님이 늦게나마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안심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심도 잠깐이었습니다. 도련님이 일어나더니 맨 처음 나를 보더군요. 나는 참 반가웠지요. 하지만 그 반가움도 잠시... 도련님이 갑자기 고함쳤습니다.
“이 고물 시계 5시에 깨워 달랬더니 뭐 했어!” 하면서 내 멱살을 잡더니 휙 하고 나를 사정 없이 내동댕이 쳐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 배신감, 그 억울함에 나는 오랫동안 가슴 앓이를 했습니다.
지금은 도련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도 아물어졌습니다. 그러나 내동댕이쳐질 때 수정같이 맑았던 내 얼굴에 3.8선이 쭉 하고 그어졌는데 그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온몸이 쑤십니다.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몸속에서 따갈 따갈 하는 소리까지 납니다. 이 상처는 없어지지 않겠지요? 그래도 나는 지금도 도련님이 깨워달라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깨워 드리기 위하여 새벽닭소리 훼를 치듯 소리칩니다. 도련님이 나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이 일에 충성하려 합니다. 내 이름은 탁상시계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