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루카 21,5-11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을 때 종말이 오는 이유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기후 위기는 없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다만 해수면이 좀 높아져 오션뷰가 좋은 부동산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옳을까요?
저희가 살던 곳은 장마 때만 되면 물난리를 치러야 하는 시골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도 물난리가 나서 저는 포대기에 싸인 채 집 지붕을 뚫고 헬기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비행기를 타 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른들은 장마 때는 초긴장을 하셨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피난을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른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것보다도 냇가가 불어나서 그것이 제방을 무너뜨리면 큰일이었습니다.
동네에 비가 그쳤더라도 그 물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밤새 제방이 안전한지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자정이 넘었는데 제방이 무너지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군가가 계속 그 제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엔 제방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징조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신과 세상이 어때야 하는지 명확한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 멸망 이전에 올 징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세상엔 전쟁과 반란, 자연재해와 전염병, 하늘의 무서운 표징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표징은 왜 미리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표징을 보고 우리가 회개하고 뒤로 돌려놓을 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준비하며 희망을 품고 주님을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완전히 망가지지 않도록 표징을 보여줍니다.
표징이 거의 없는 병들이 무섭습니다.
아프면 거의 말기인 췌장암 같은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아픈 것이 표징입니다.
그러면 미리 대처할 수 있습니다.
큰 사고가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거의 드뭅니다. 제방이 한 번에 터지는 일은 없습니다.
조금씩 물이 새어 나오다가 그것이 더 커지면서 제방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틈이 생겨 물이 새어 나올 때 재빨리 대피하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징후’라고 합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도 건물에서는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직원들은 그런 소리를 이미 여러 번 들었다고 합니다.
성수대교 사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다리가 갑자기 내려앉을 리는 없습니다.
누군가 작은 문제점이 있을 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면 큰 사고는 면했을 것입니다.
우리 죽음과 세상 마지막 때도 표징을 잘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21,34)
우리는 왜 표징에 무관심할까요?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몸이 망가지면서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픈 것을 다시 술로 마취시키기 때문입니다. 돈을 버는 것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이들도 몸이 망가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과로로 사망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표징을 잘 인식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준비할 것은 준비할 방법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란 새로 태어남입니다.
태어날 때 부모가 나에게 바란 몸과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세례는 그것을 알아채는 시간입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하느님께서 나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바라던 모습의 원형을 간직하기에
조금만 이상해지면 바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희생한 밀러 대위는 죽어가며 “잘 살아야 해!”(“James, earn this…. earn it.”)라는 말을 합니다.
자신들의 죽음의 가치를 삶에 이용하라는 뜻입니다.
라이언은 평생 자신을 위해 희생한 밀러 대위와 다른 대원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그들이 자신이 어떻게 살기를 바라며 죽었는지를 묵상해야 했습니다.
세례는 밀러 대위가 피로 라이언 일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규정해 준 그 순간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면 라이언은 자주 자기 모습을 돌아보며 그 본래의 모습과 어긋나는 표징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이 들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 경례를 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매일매일 당신이 그날 다리 위에서 나에게 했던 말을 생각합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눈에는 나는 여러분 모두가 나를 위해 해준 희생을 낭비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I hope that, at least in your eyes, I've earned what all of you have done for me.)”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린 피 값으로 하느님 모상을 회복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 자주 되돌아보며 주님 희생의 값을 허비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이들은 아주 작은 잘못되어 가는 표징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믿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과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실 때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끓는 물의 개구리처럼 자신과 세상이 어때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을 가진 이들이 거의 없어서 징조를 읽을 줄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 21,5-11
불멸의 성전을 건립합시다!
연중 시기 마지막을 향해 가는 즈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 우리 눈 앞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언뜻 보기에 공포스러운 분위기입니다.
사방에서 전쟁과 환난이 일어나고, 대재앙과 함께 그간 인간이 쌓아올린 높은 탑들이 산산이 허물어질 것을 예고 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무척이나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가르침 앞에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자지러지겠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간 쌓아온 신앙의 내공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해석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성전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낡고 빈약한 성전을 허물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지상 성전의 덧없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아름다움, 청춘의 푸르름, 인생의 화려함은 절대 영원하지 않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보다 영속적이고 가치있는 대상, 불멸의 성전, 영적인 성전을 건설할 것을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전 파괴와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벌써 우리 한국 교회에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수십 수백억을 들여 정성껏 건립한 대성전, 신자들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성전들이 인구 절벽 시대에 진입하는 동시에 가톨릭 교회에 대한 호감도 급하락으로 인해 텅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불과 십 년 뒤면,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을 것이 자명합니다.
사람들은 더이상 성전에 오지 않습니다.
그나마 서구 교회는 문화재에 등록되어 볼거리라도 있어 관광객들이 찾아오지만, 우리 본당들은 그런 요소도 없습니다.
무용지물의 성전들은 애물단지처럼 방치되다가 서구의 수많은 성전들처럼 매각되어 허물어지고,
다른 용도의 건물로 탈바꿈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는 불멸의 성전을 건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충만한 한 영혼이 곧 새로운 성전입니다.
지극정성으로 성체를 영한 한 그리스도인이 불멸의 성전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주님의 성전을 건립합시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강론>
(2024. 11. 26. 화)(루카 21,5-11)
<진심으로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종말은 ‘기쁜 날’입니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21,5-11)”
1)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영원한 것은 없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5-6).”
인간들이 자랑하는 온갖 업적들은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새 예루살렘’에는, 즉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는 성전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성전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인간 세상에 있는 모든 성전들은
임시 건물일 뿐입니다.
<특히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해버린 예루살렘 성전은(루카 19,46)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재난들은 ‘종말의 표징’이 아니라, ‘종말 전의 재난들’입니다.
9절의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그 재난들이 종말의 표징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거짓 메시아와 종말론자들의 등장,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등은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일들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그 일들을, 종말이 오기 전에 회개하라는
경고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재난들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종말 전의 재난들’이라는 말과 ‘인류 역사에서 늘 있는 일’이라는 말을 합하면, “인류 역사는 종말을 준비하는 짧은 기간의 역사”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함을 생각하면, 인류 역사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역사입니다.
‘영원’이라는 시간과 비교한다면, 글자 그대로 ‘찰나’입니다.>
3) ‘거짓 메시아의 등장’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있었던 일이고, 예수님 승천 후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생기는 일입니다.
<마귀가 장난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리석은 인간들의 허영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거짓 메시아에 관한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6-39).”
‘테우다스’ 라는 사람과 ‘유다’ 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메시아라고 자처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했던 자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칭 메시아’들이 참 많고, 그 거짓 메시아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회개는 말하지 않고 복을 받는 방법만 말하면, 신자들이 바친 헌금이 ‘사랑 실천’에 사용되지 않고 자기들의 세력 확장과 부의 축적에만 사용된다면, 하느님 말씀은 전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한다면, 사이비 종교입니다.>
4)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진짜 재난이 남아 있다.”, 또는 “진짜 재난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뒤의 25절에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고, 26절에는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들은,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재난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재난들이 종말의 날에 닥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들은,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말씀도 아니고, 위협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하면, 종말의 날은 무서운 날이 아니라, 구원받는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