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추천] 조선희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

[가출소년]

"에세이는 누드의 장르라 한다. 픽션에서처럼 상상력의 가공도, 저널리즘에서와 같은 객관성의 포장도 없다. 읽는 이 앞에 그냥 생긴 그대로 나서는 일이다. 자기를 공개한다는 것이 대단히 아슬아슬하고 흥미진진한 작업이며, 그것이 바로 에세이 장르의 매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씨네21 편집장 조선희의 에세이 머리말 처음에 나오는 말이다. 정말 맞는 말인 거 같다. 요즘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내 삶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누드'라는 말이 실감난다. 자신의 생활, 생각을 보이는 거 쉽지 않다.

소위 말해 성공한 사람들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보통 사람에게는 참 기죽는 일이 많다. 자서전이 그렇듯 자기에게 좋은 얘기만 하는 게 대부분이고, 그 성공 밑에 있는 고통과 어려움은 그 영광을 위한 보조장치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성공한 여성들의 얘기는 전여옥의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되라'가 처음인 듯싶다. 이 때만 해도 다소 과격한 제목이더라도 '이렇게 공격적이어야 할 만큼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가 힘들구나' 정도로 수용됐다. 여기서 잘난 여성들에게서 느끼는 거부감(페미니스트를 자청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가부장사회의 한 남성이다)을 크게 가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전여옥이 '386의원 광주술자리 사건'에서 보여준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않고, '여성권리'라는 하나의 잣대로만 싸잡아 칼을 들이댈 때, 의도했던 아니었든 그의 우익성을 발견하곤 놀라고, 실망했다. 그의 정치성향이 어떤지, 그의 본의가 어떤 것인지 잠깐 스친 신문칼럼 기사로 판단하고 있지만.

어쨌든 전여옥은 처음에 느꼈던 호감이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있다. '제대로 된 여성 권리'를 다소 과격하게 주장하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직접적으로는 '여성이여, 느껴라 탐험하라'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무지를 깨웃치고, 능동적으로 나설 것을 주장하면서부터였는 것 같다.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갑다.


그러다 씨네21에서 '구보씨의 영화구경' 후속으로 '아줌마의 영화읽기'를 보다 깜딱(!) 놀랐다. '아줌마'라는 그리 우아하지 못한 명칭을 기사 타이틀로 내건 데에서 보듯, 내용 또한 철저히 여성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고, 또 공격적인 문체를 휘둘렀다.

공격적이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것 같은 문체는 사실 씨네21에서 처음 느꼈다. 내가 다양한 글읽기를 못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사적인 글쓰기가 그리 대중화되어 있지 않던, 씨네21 창간 시기인 95년은 인터넷도 생활화되지 않을 때였다. 지금이야 인터넷 때문에 전국민의 칼럼니스트화, 네티즌이 모두 칼럼 하나쯤은 쓰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옆길로 샜지만, 그 동안 대부분의 사회체제가 그렇지만, 영화평도 으례 남성의 입장에서 써져왔고, 영화도 남성의 입장에서 평가되어 왔다. 그게 당연한 듯이, 모두들 그렇게 학습되어왔다. 어쨌든 그 칼럼을 보면서 많이 놀라고, 사실 약간의 거부감이 생기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점잖지 못한 느낌,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자리나면 멀리서라도 엉덩이부터 들이밀고 보는' 전형적인 아줌마의 악다구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만큼 남여의 성역할이 왜곡돼 있다는 것이, 피해자인 여성의 발악(?)을 통해 느끼게 됐다.

알고보니 이 칼럼을 쓰는 사람, 최보은은 조선희와는 60년생 동갑이고 두번의 이혼경력을 가지고 있다. 역시나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에는, 더구나 속박의 결혼제도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큰 열정과 합리성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내는 두 번이나 결혼한 것이 용하단다. 자기같으면 두번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거란다. 한번으로 족하단다. 나하고의 결혼을 후회하는 거는 아니라는 전제를 붙이면서. 암튼 대단한(긍정적 의미로) 여성이다.


조선희의 에세이에는 여성으로 치열하게 살아간 얘기, 말하자면 여기자가 드문 80년대 연합통신 수습기자를 거쳐 문화부 기자로 옮겨간 얘기, 무엇보다 그가 한겨레신문의 사활이 걸린 씨네21을 주간지로 성공시키기까지 겪었던 고통과 열정의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창간을 전후해 신문사 내에서의 몰이해와 어려움, 영화시장이 폭넓은 유럽에도 없는 고급 영상 주간지를, 한국어권 시장밖에 없는 우리의 시장에 비춰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매주 찾아오는 기사마감의 압박은 오히려 애교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부산, 부천, 전주 등 일년에 4개의 영화제 기간 동안에 현지에서 일간지를 함께 만들 때는 소속기자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상황도 맞는다. 한 때 운동권이었던 그가 냉혹한 자본주의 시장의 최전선 잡지시장, 그것도 일주일마다 판매부수가 발표되는 그 험한 경쟁시장에서 창간 이후 5년 동안 편집장을 하면서 잡지를 꾸려가기는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시사주간지처럼 기존 시장에 뛰어드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 것임에랴. 비슷비슷한 영화 주간지가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폐간되는 사례를 보면, 그 성공의 이유가 한겨레신문의 후광 때문이란 설명은, 아주 부인할 순 없지만 그 성공의 전부를 설득하지는 못한다.

어쨌든 맨 먼저 새로운 길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처음 개척하는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성공의 길을 담보한 것이기도 하다. 벤처기업처럼. 내가 관심이 부족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씨네21은 흔히 한겨레의 적자사업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5개 시사주간지의 판매부수보다 씨네21의 판매부수가 더 많다고 한다.


영화, 그것도 잡지시장에 대한 얘기는 나에게 매력적인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회사에서 매달 나오는 단행본 사보 1년, 신문형 사보 2년을 취재, 편집하면서 그 세계의 맛을 조금 보아온 나이기에. 참신한 기획이 돈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잡지는 몇 사람의 정예 필자로도 꾸려갈 수 있음을, 더 나아가 인간이 못할 일이 없음을 그를 보면서 느끼게 된다.

앞으로 철저히 고독할 수밖에 없는 소설쓰기, 그는 그 길을 위해 성공한 잡지의 편집장, 신문사의 부장 자리를 내놓았다. 이제 그도 일상에서의 재미, 일 아닌 생활에서의 재미를 조금은 느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일에서의 성취가 삶의 모든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영화와 관련한 주변의 얘기에 관심있는 사람, 전문직 여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궁금한 사람은 보면 좋을 책인 것 같다. 나도 아직 반 밖에 보지 못했다. '독후감'이라기 보다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은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좋지만, 책 중간중간에 느꼈던 흥분과 동조를 놓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전체 내용을 판단하기에는 이르지만 지금의 느낌을 적는다. 왠지 지나면 잊어버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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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