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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신문도, TV 뉴스도, SNS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 소식을 주고받았을까
저널리즘의 출현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한 탁월한 연구서!
인터넷과 SNS가 없었던 시절, 더 나아가 TV 뉴스와 신문마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어떻게 소식을 주고받았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사실 엄밀한 의미의 신문은 17세기가 되어서야 등장한,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다. 하지만 신문이 있기 전에도 옛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가깝고 먼 곳의 여러 정보를 공유했다. 21세기인 현재 못지않게 당대에 그토록 다양한 매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누구나 놀랄 것이다. 언론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으로 보는 신문의 탄생 배경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이 책이 ‘신문’의 역사에 국한하지 않고 ‘뉴스’의 역사 전반을 다룬다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중세 시대 일부 지배층이 전령과 서신을 통해 소식을 교환했던 데서 시작해 신문으로 먼 곳의 소식까지도 대중에게 널리 읽히기까지 뉴스의 역사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인물에 의해, 당대인의 수요와 취향에 따라 매우 다각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했다. 이 책에서는 필사본 소식지, 팸플릿, 대판형 뉴스, 발라드, 아비지, 저널 등 무수히 만들어지고 사라졌으면서도 각각 독자적인 위상과 독자층, 어조를 유지하며 사람들의 일상을 차지했던 여러 매체를 시대순으로 낱낱이 살핀다.
🏫 저자 소개
앤드루 페티그리
영국의 역사가. 유럽의 종교 개혁, 책의 역사와 미디어 변화에 대한 전문가이다. 현재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현대사 교수다. 쓴 책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서적The Book in the Renaissance》 《16세기 유럽Europe in the Sixteenth Century》 《종교 개혁과 설득의 문화Reformation and the Culture of Persuasion》 등이 있다. 이 중 《르네상스 시대의 서적》은 2011년 필리스 굿하트 고든Phyllis Goodhart Gordan 도서상을 받았다. 이 상은 미국 르네상스학회에서 르네상스 학자였던 필리스 굿하트 고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한 해 동안 출간된 르네상스 관련 서적 중 가장 우수한 책에 준다.
📜 목차
서문: 뉴스가 될 수 있는 모든 뉴스
제1부 뉴스 발행의 시작
1 권력과 상상력
2 상업의 바퀴
3 최초의 뉴스 인쇄물
4 도시 국가와 민족 국가
5 기밀 통신원
6 장터와 선술집
7 승리와 비극
제2부 헤르메스의 시대
8 질주하는 우편 마차
9 최초의 신문
10 전쟁과 반란
11 찻잔 속의 폭풍
제3부 계몽되었는가?
12 진실을 찾아서
13 저널의 시대
14 신문, 사업에 뛰어들다
15 자체 특파원이 보내온 소식
16 자유를 부르짖다
17 새뮤얼 슈얼이 신문을 읽는 법
결론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이미지 출처
📖 책 속으로
중세 사회에서 유통된 뉴스는 대부분 여전히 입말로 전해졌기에, 실망스럽게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당시에 뉴스가 활발히 공유되었으며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연대기와 같은 다른 사료를 조사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중요한 예외는 국제 무역망이 확대되면서 작성된 서신들이다(이에 대해서는 따로 장(章)을 할애했다). 원거리 상거래에서는 판매자가 파트너와 대리인 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상대방이 서신에 쓰인 정보에 따라 행동하리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가지고 뉴스를 공유하는 시스템을 개발해야 했다. 이는 뉴스 수집의 역사에서 중대한 발전이었다.
---「권력과 상상력」중에서
상인들이 이처럼 미로같이 뒤엉킨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정보가 필요했다. 13세기에 특정 부류의 상인들은 자신이 직접 상품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중개인과 대리인을 통해 사업을 관리하는 방안을 찾았다. 이 시점이 되자 상인 통신망의 확대는 불가피해졌다. 가장 필요한 요소는 이미 갖춰져 있었다. 맨바닥부터 기반 시설을 마련해야 했던 군주들과는 달리, 상인들은 이미 배와 창고, 그리고 먼 거리의 중개상들을 잇는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매일 수레와 마차, 가축의 무리가 유럽의 주요 도시 사이를 오갔다. 그들은 뉴스도 함께 날랐으며 서신을 전달하는 경우도 점차 늘어났다.
---「상업의 바퀴」중에서
인쇄 산업은 아직 전통적인 고객들을 위한 대형 서적의 생산에만 주력했을 뿐 당대 사건에 대한 보고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인쇄업자들은 한 단계씩 새로운 시장으로 나아갔다. 먼저 인쇄공들은 소책자를 대량 판매용으로 싸게 인쇄함으로써 박리다매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이후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면서 신대륙 발견에 대한 뉴스를 배포하는 데 인쇄 기술을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세계가 언론을 통해 처음으로 대규모 사건을 경험하게 된 일은 구텐베르크가 성경을 펴낸 지도 70년이 지난 16세기 초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바로 독일의 종교 개혁이다.
---「최초의 뉴스 인쇄물」중에서
16세기는 인쇄술이 국가의 건설에 필수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한 시기였다. 유럽의 군주들은 세심하고 주의 깊게 뉴스 인쇄물을 활용하여 정치적 국가에서 신민의 믿음을 더욱 폭넓게 얻고, 왕가의 야심에 대한 애국적 충성심을 고취했다. 국가는 조례를 인쇄함으로써 정부 기능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고, 사회의 모든 계층에 규제나 과세의 필요성을 알릴 수 있었다. 이것은 사회를 형성하는 데 뉴스 문화가 활용된 가장 인상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유럽의 시민들이 뉴스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인쇄물에서 공식적으로 보고된 내용과 거리에서 들은 내용을 서로 비교했다. 시민들은 독자적인 뉴스 가치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이윽고 상업 뉴스 시장의 맹아를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규제되지 않는다면 국가가 촉진하고자 한 섬세한 질서를 위협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위험한 시대의 전조였다.
---「도시 국가와 민족 국가」중에서
필사본 통신사는 특권층을 위한 도구였다. 이런 측면에서 상업 필사본 뉴스의 경우 가격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은 권력자들이 찾고 있는 정통한 정보원의 권위를 보장했다.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좀 더 잡다하고 산만한 매체인 뉴스 팸플릿 인쇄물에서 많은 정보를 계속 얻을 수 있었다. 이제 팸플릿은 광범위한 일반 독자에게 시사 뉴스를 제공하는 데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초창기의 근대 뉴스 문화에는 무시해서는 안 될 세 번째 흐름이 있었는데, 바로 입소문이다.
---「장터와 선술집」중에서
발라드는 오늘날 명확히 대응하는 사례가 없는, 근대 초기 뉴스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에서 이러한 노래는 당시 글을 읽지 못하는 많은 대중에게 소식을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뉴스를 노래하는 사람 중 일부는 눈이 보이지 않았으며 대체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이들은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를 노래한 후 그 인쇄본을 판매했다. 스페인에서 발라드 작가들은 눈이 먼 행상인 무리에게 노래를 가르친 뒤 거리로 내보내곤 했다. 행상인들은 나무판에 빨랫줄 같은 끈으로 인쇄본을 매달아 전시했다. 따라서 발라드는 종종 ‘끈 문학(cord literatur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터와 선술집」중에서
신문의 1세대는 가치 있지만 제한된 실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새로운 발명품은 유럽 대륙에서도 일부 지역에서만 번성했으며, 그러한 지역에서도 먼 곳의 사건을 건조하고 다소 일상적인 어조로 보고하는 데 그쳐 당대 독자들의 피를 들끓게 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연속 간행물의 디자인과 현실적 문제에 지역마다 서로 다른 해법이 등장했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정기 간행물 서비스의 탄생을 향해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동안 실제로 이룬 성과에는 무엇이 있는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짧고 볼품없는 초창기 신문들을 볼 때, 이들 신문은 자칫 시시해 보일 수 있다.
---「최초의 신문」중에서
천상의 계시는 뉴스 시장의 모든 부문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혜성과 다른 천체가 이례적으로 함께 등장하기라도 하면 이 사건은 뉴스 팸플릿을 통해 널리 보도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전체적인 진행 상황을 좀 더 착실하게 전달하는 매체는 도판이 들어간 대판형 뉴스였다. 독일의 시인 제바스티안 브란트가 1492년 엔시스하임 운석에 대한 극적인 (그리고 매우 정치적인) 시로 포문을 열었으며, 16세기 후반 언론의 역량이 확장되면서 이런 형태의 대판형 뉴스가 큰 인기를 끌었다. 1577년에 나타난 혜성 같은 경우는 대판형 뉴스 4종 이상에서 보도했다. 그밖에 별똥별, 한낮의 암흑, 해와 달의 동시 출현 또는 여러 개의 태양이 기록되었다. 이러한 관측 중 일부는 1580년과 1590년의 오로라(북극광)에 대한 설명처럼, 인식할 수 있는 자연 현상에 대한 미지의 상상력이 낳은 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늘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동물이나 말을 탄 기수, 아니면 괴물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진실을 찾아서」중에서
뉴스 보도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은 물론 뉴스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중세 사회 통치자들의 모든 셈속에도 이러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보원이 제한되고 불완전한 상황에서 그 가치를 저울질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적어도 이전 세대에 비교적 잘 정의되어 있었다. 예컨대 전령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소식을 가져온 사람은 이해 당사자인가? 소문에 얼마나 무게를 실어야 할까? 물론 뉴스 수신자는 확증을 얻을 때까지 전령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누가 믿을 만한 충복인지, 이전에 좋은 정보를 가져다준 소식에 밝은 정보원인지, 공정한 거래를 보증할 수 있는 정직한 통신원인지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뉴스는 원칙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계층의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는 신뢰와 명예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진실을 찾아서」중에서
슈틸러는 신문을 접하는 것을 제한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참지 못했다. 모든 사람은 천성적으로 배우려는 본능이 있으며, 이러한 본능은 가장 최근의 사건에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슈틸러는 언론 비평가들에게 직접 답하고자, 신문을 읽음으로써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계층을 열거했다. 먼저 교사와 교수는 최신 정보를 얻기 위해 뉴스를 읽을 필요가 있었다. 성직자는 신문에서 얻은 정보를 설교에서 언급함으로써 인간사에 깃든 신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상인과 떠돌이 일꾼은 유럽의 위험한 도로 상황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시골 귀족들은 지루함을 쫓기 위해 신문을 읽을 것이다. 그들의 부인들도 신문을 읽어야 한다.
---「진실을 찾아서」중에서
저널의 부상은 사회 현상으로서, 그리고 뉴스 시장에 미치는 영향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좀 더 사적인 논조의 장문의 기사를 특징으로 하는 저널이 성장하면서 지금까지 뉴스 보도에서 피해왔던 저널리즘 전통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사실 오늘날 저널리즘의 본질로 여겨지는 비판적이고 양식적인 특징들 중 상당수가 이 18세기 저널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저널은 대중에게 전장이나 궁정 알현식의 중요한 소식을 나열하면서 그때까지 신문이 놓치고 있던 것을 보여주었다. 저널은 위협조의 정치 평론 신문보다는 좀 더 가벼운 어조로 비판과 취향, 판단을 제공했다. 저널은 독자들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시간을 들여 논쟁이 되는 사건을 설명하고 논변을 전개했다. 재미있고 즐길 거리로 삼기 좋았다. 무엇보다도 저널은 18세기의 [스펙테이터]에서 선보인 기분 전환용 잡문처럼 독자들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제공했다. 매주 독특한 목소리로, 독자들의 거실에 친숙한 인물과 새로운 패션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매혹적이고 중독성 있는 혼합물이었다.
---「저널의 시대」중에서
여성 독자를 위한 에세이는 거슬릴 정도로 가정, 예법, 사회적 에티켓, 연애 문제에만 국한되곤 했다. 이러한 선입견은 1759년 프랑스에서 창간된 [주르날 데 담(Journal des dames, 부인들의 잡지)]이 독자들에게 ‘리앵 델리시외(riens delicieux)’, 즉 ‘사소함의 맛’이라는 식단을 제공하겠다고 선언할 때도 명시적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놀랍게도 [주르날 데 담]은 곧 오락지 이상의 역할을 하며 계몽주의를 지지하고,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는 문화 기관과 각료 정책을 활발히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혁의 원동력은 강인한 여성 세 명에게서 나왔다. 이들은 차례로 저널을 관리하며 독창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주르날 데 담]은 1769년과 1776년, 두 차례에 걸쳐 성난 목사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저널의 시대」중에서
돌이켜보면 혁명기 신문은 뉴스 제작에 주의해야 했던 두 차례의 안정된 언론 통제 시기 사이에 비교적 잠깐 등장한 간주곡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신문은 유럽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진정한 이정표를 나타낸다. 의심할 바 없이 프랑스 혁명은 정기 간행물이 진정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했던 유럽 최초의 사건이었다. 비록 잠깐일지라도 신문은 그들의 훨씬 귀족적인 선조인 서적은 물론, 정치 담론에 좀 더 특화된 매체인 팸플릿을 대체해 처음으로 지배적인 인쇄 매체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는 시대를 앞서갔다.
---「자유를 부르짖다」중에서
전체적으로 볼 때 18세기 신문 사업에서 필자들에게 지출하는 비용은 놀랄 만큼 적은 비중을 차지했다. 자신들의 신문에만 독점적으로 기사를 쓰는 필자를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는 신문사는 거의 없었다. 법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특종 냄새를 맡는 기술은 분명 인정받았지만, 이러한 기술은 비천하게 여겨졌으므로 공개적으로 인정받기는 기대할 수 없었다. 시사에 정통한 관찰자로서 저널리스트의 개념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이름 있는 저널리스트들이라도 신문 기사의 바이라인(byline)에 자신의 이름을 싣기는 어려웠다. 필사본 소식지에서 이어진 익명의 관행은 여전히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언론이 급성장하는 동안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작가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체 특파원이 보내온 소식」중에서
신문은 독자들에게 일상의 경험을 넘어 세상을 엿볼 기회를 제공했다. 실제로 독자들은 평생 가보지 못할 나라를 엿보고, 감사하게도 그들이 참전하지 않아도 되는 전투를 엿보고, 살면서 결코 만나보지 못할, 실제로 만난다고 해도 자신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권력자와 군주 들을 엿볼 수 있었다. 과거에는 역사책이나 여행기에서 잠시 맛볼 수 있던 그러한 세상을 이제는 신문을 통해 복잡한 서사 없이, 예측할 수 없는 갖가지 사건 속에서 헤엄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단지 파이 한 조각이나 맥주 한 잔 값으로 누리게 되었다. 신문이 없어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지만 일단 등장한 이후 신문은 고상한 삶의 상징이자, 한 시민이 특정한 사회적 지위에 도달했다는 증표가 되었다.
---「새뮤얼 슈얼이 신문을 읽는 법」중에서
신문이 더 신속하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가지 이유는 분명하다. 정기 간행물은 이미 입말, 서신, 비정기 인쇄물, 선언문, 팸플릿 등 다양한 방식으로 다소 효과적으로 뉴스가 전파될 수 있었던 복잡한 통신 환경에서 활로를 개척해야 했기 때문이다. 많은 소비자가 보기에 기존의 뉴스 전달 방식이 이처럼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 신문은 기존의 방식보다 그다지 나아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신문은 퇴보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 점을 확인하려면 기존에 정기적 뉴스의 특징으로 간주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된다. 바로 주기성과 규칙성, 동시성, 다각성(뉴스의 다양한 측면을 다룸) 그리고 가격 적정성이다. 그러나 학자들이 중대한 진보로 묘사한 특징은 모두는 당대 소비자들의 눈에는 단점으로 보였다.
---「결론」중에서
🖋 출판사 서평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얻는 자만이
부와 권력을 손에 넣으리라!”
과거 유럽에서 웬만한 재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의 우편 서비스는 이용하기가 까다롭고 무척 비쌌다. 그럼에도 권력층이 이러한 비용과 노력을 감수하면서까지 빠르고 정확하게 소식을 주고받으려고 한 이유는 정치·외교와 상업 분야에서 정보가 승기를 잡는 핵심적인 열쇠였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1490년에 창설한 ‘제국 우편 제도’를 근본으로, 유럽의 우편 네트워크와 시스템은 18세기까지 이 제도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확장되고 정교해진다. 뉴스 시장의 변천은 무엇보다 통신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으며, 통신 체계의 발달은 인쇄술과 제지술, 운송 수단의 발전 등 당대의 첨단 기술이 집약된 결정체였다. 순례 등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면 여행조차 쉽지 않던 시대에 1 대 1로 이루어지던 뉴스의 전달이, 절대다수에게 정기적으로 배포되는 신문의 형태로 확립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는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현대 신문에 비하면 디자인과 구성이 다소 엉성했다고 해도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뉴스 인쇄물들은 종교 개혁, 신대륙의 발견, 레판토 해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등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서도 인쇄술은 뉴스 매체와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각종 뉴스 발행물은 이를 접하는 사람에게 부와 권력의 원천이 된 동시에 진지한 사업의 대상이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그토록 다양한 뉴스의 세계
뉴스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매체는 다름 아닌 ‘입소문’이다. 지금과 달리 중세 시대에는 문자로 쓰인 소식보다 전령이 입말로 전한 소식을 더 신뢰하는 문화가 퍼져 있었다. 또 특권층이나 상인 계급이 큰돈을 지불해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필사본 아비지와는 달리, 서민들이 무료로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경로는 장터와 선술집, 여관에서 이웃이나 여행자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였다. 그뿐 아니라 범죄자를 공개 처형하거나 각종 공적인 명령이나 새로운 법안을 공표했던 광장, 심지어 교회의 설교단까지도 뉴스가 전달되는 훌륭한 장(場)이 될 수 있었다. 기록되지 않았기에 지금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이러한 ‘구술’ 매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뉴스의 역사에서 큰 부분을 간과하는 셈이다.
한편 뉴스는 향유 계층과 필요에 따라 전혀 다른 경로로 유통되기도 했다. 중세 시대 이탈리아 외교관들이 주로 활용한 기밀 급보 서비스나 첩자 활동으로 얻어낸 정보가 대표적이며, 이러한 정보는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을 넘어 전쟁의 승패, 번영과 파멸의 차이를 가르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쩌면 지금보다도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소식을 교환한 14~18세기 유럽에서 항상 문젯거리였던 것은 정보의 진실성과 신뢰성이었다. 이 때문에 옛 유럽인들은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짜 뉴스를 가려내야 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SNS에서 ‘가짜 뉴스’에 신음하는 우리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유와 검열 사이의 줄다리기가 만들어낸
언론과 저널리즘
우리가 아는 언론과 저널리즘의 기능이 정부를 감독하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과거의 매체는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익명으로 작성된 풍자적인 정치 팸플릿이나 길거리에서 노래로 불린 발라드 같은 매체가 있기는 했지만, 당시 문서로 작성된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계층은 아주 소수의 특권층이었다. 따라서 매체는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들의 효율적인 통치와 권력을 뒷받침하는 도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관영(官營) 매체나 다를 바 없었던 이러한 매체를 위해 글을 쓰는 기자라는 직업은 천시되었고, 독립적인 편집권이나 저널리즘이 설 자리는 없었다. 과거 유럽 국가들의 정부에 언론은 통제와 감시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정치에 대한 언급이나 의견 개진은 언제나 매우 조심스럽게 이루어졌으며, 민중이 정치로 눈을 돌리는 매우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각 매체는 왕이나 권력자에 대한 찬양이나 국내가 아닌 나라 밖의 외교 급보로 채워지곤 했다. 이러한 탓에 국내 뉴스를 주로 싣는 일간 신문의 등장은 더딜 수밖에 없었고, 언론이 광범위한 여론을 형성하기까지는 18세기 말까지 기다려야 했다.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정보의 유통을 통제하려는 세력과 그 가운데서도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고자 한 세력 간의 지난하고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언론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을 거치며 다수의 대중에게 향하는 전기(轉機)를 맞이한다.
뉴스에 대한 갈망은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었다
지금까지 뉴스가 보편적인 관심사로 이어져 온 기저에는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본능적인 열망이 깔려 있다. 초창기 신문이 예상외로 대중 사이에서 지금처럼 보편적인 매체로 자리 잡는 데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도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뿐 아니라 흥밋거리로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사건을 몇 줄로 간단히 ‘보고’하는 형식의 글이 관심을 끌지 못한 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가령 과학적인 사고가 보편화되기 전까지, 18세기까지도 혜성의 출현 등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기이한 자연 현상을 다룬 뉴스가 많이 발행되었다. 지극히 종교적이었던 당대의 세계관과 맞물려 이는 신의 뜻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흔히 해석되었다. 심지어 지금은 믿기 힘든 고양이를 낳은 여인의 이야기나 하늘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동물이나 말을 탄 기수, 아니면 괴물을 목격했다는 사람의 증언이 진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예사였다.
뉴스의 역사에서 신문이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다면 대중이 언제 어디서든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잡다한 이야기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단돈 몇 푼으로 새로운 소식의 바다를 헤엄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