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16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이사야 7,1-9 마태오 11,20-24
은총이 많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
어떠한 판단을 내릴 때, 배가 부를 때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배고플 때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배가 부르면 교만해져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판단을 할 때 될 수 있으면 배가 고플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세상은 이전보다 많이 배가 부른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하는 선택들 때문에 결국 자멸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남태평양의 이스터섬이 있습니다.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던 이스터섬은 1,200년을 전후해 인구가 2만 명에 이를 만큼 번창했었습니다.
그러나 1722년 이들을 처음 본 네덜란드인들은 이스터섬이 황량한 모래로 가득 차 있었으며
3,000명 정도의 원주민들만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왜 풍요롭기만 했던 이들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일까요?
바로 높이가 20미터에 이르고 무게가 90톤이 되는 정교하게 조각된 거대 석상인 모아이를 운반하기 위해 수많은 나무를 베어 숲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사라지자 섬이 황폐해졌고 겨울엔 땔감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더 문제였던 것은 나무가 없으니 물고기를 잡을 카누도 만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풍요로울 때 거대한 석상들을 만들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 했고 그것이 멸망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나라나 모든 개인은 이런 식으로 망합니다.
인간은 배부를 때 어리석은 생각을 많이 합니다.
동식물이나 자연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 때문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오쩌둥은 1949년 정권을 잡았을 때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립니다.
당시 중국은 보건 문제가 심각하여 콜레라, 흑사병, 말라리아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그래서 ‘제사해 운동’을 시작합니다.
모기와 쥐, 파리와 참새를 박멸하려는 노력입니다.
모기는 말라리아를 퍼뜨리고, 쥐는 흑사병을, 파리는 성가시니까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새는 한 마리당 곡식을 4.5킬로그램이나 먹어치웠습니다.
전쟁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쥐 15억 마리, 모기 1,100만 킬로그램, 파리 1억 킬로그램, 참새 10억 마리가 소탕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새 10억 마리가 먹어야 할 해충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메뚜기 떼가 구름처럼 중국의 곡식들을 싹쓸이하였습니다.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중국에 대기근의 큰 원인이 이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1,500만 명, 많게는 3,0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교만해지면서 자연을 마구 훼손하게 되었고 그렇게 자신도 피해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능력이 향상돼서 자연을 좌지우지하게 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인간이 잘살게 된 것은 많은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 바로 뒤에는 멸망이 따라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은총이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은총은 죄에서 벗어나라고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선물들을 받으면서도 더 큰 죄로 빠져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코라진, 벳사이다를 꾸중하십니다.
당신께서 많은 은총을 부어주셨음에도 그들은 더욱 악한 길로 빠져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소돔’ 이야기를 하십니다.
소돔도 당시 있었던 도시 중에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동네입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심지어 두 천사가 다른 동네엔 안 들어가도 그 동네엔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 충만의 바로 뒤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은총이 충만할수록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합니다.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배고플 때 나쁜 짓 하는 것보다 배부를 때 더 많이 하고 더 크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은총을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은총을 주시면서도 그 결말이 안 좋을 것을 아시고 지금도 경고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더 잘살게 될수록 더 악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은총이 많은 시대에 멸망이 아닌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돔 꼴을 당합니다.
은총을 부여잡고 롯처럼 이 어리석음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카파르나움, 코라진, 벳사이다도 풍족한 동네였지만 지금은 돌무더기만 남아있습니다.
은총이 많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우리는 은총이 충만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언제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배부를 때를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6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11,20-2
우리네 삶 속에 때로 결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마음은 아직도 이팔청춘인데, 어느덧 세월에 흐르고 흘러버렸습니다.
그래도 제 혈관 속에는 살레시안의 푸른 피가 뛰고 있기에, 청소년 사목자로서 아이들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지만, 그게 참 여의치 않습니다.
정년이 지나면서는 청소년 시설이나 청소년 사목 현장에 남아 있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남아 있는다 치더라도 세월의 간극, 문화적 차이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해 한동안 좌절감이랄까 우울감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청소년 사목자로서 반드시 아이들 앞에 서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본격적인 청소년 사목터에서 아이들을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다른 형식으로 청소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일종의 사목적 회심이라고나 할까요.
찾아오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것, 아주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환한 얼굴로 인사하고, 환대하는 것도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예초를 하고, 꽃나무를 심는 것도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예초기를 돌리면서, 돈가스를 튀기면서, 안전 요원으로 보트를 운행하면서,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도시를 꾸짖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 21-22)
회개라는 것은 사도 바오로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처럼 아주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삶의 전환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의 회개도 있습니다.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되풀이해야 할 일상 안에서의 회개입니다.
우리가 매일 행하는 수많은 일들, 사건들, 만남들은 일상적인 회개를 위한 좋은 계기입니다.
오늘도 저는 신나게 예초기를 돌리면서 또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초기를 등에 지고 허리춤보다 높은 잡풀들을 시원시원 날리다 보니, 기분이 좋았지만, 순식간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습니다.
한 시간쯤 돌리다 보니, 더위와 갈증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다 벗어놓고 야외 식당 그늘에 잠깐 앉았습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맥주 하나를 꺼내 땄습니다.
얼마나 목이 말랐던지 원샷으로 끝냈습니다.
그 순간은 일종의 작은 천국 체험이었습니다.
모든 세포, 모든 기관과 장기를 통해 시원함을 받아들이는 그 맛이란...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몰려왔습니다.
우리네 삶 속에 때로 결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결핍을 느껴봐야 풍요로움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때로 갈증과 허기가 있어야 삶이 더 단단해집니다.
큰 병고를 겪으면서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가 회심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강론>
(2024. 7. 16. 화)(마태 11,20-24)
<“안 믿는 사람들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0-24)”
1) 이 말씀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특정 고을들을 꾸짖으신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고을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고을들로
그 세 고을들을 언급하셨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이라는 말은, 그 세 고을들에서만 기적을 많이 일으키시고, 다른 곳에서는 기적을 덜 일으키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말인데,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시고 뽑으신
이스라엘 민족의 특별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그들이 특별히 선택되고 뽑혀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으면서 살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은총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도, 성모님도, 사도들도 모두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유대인들부터 시작되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긴 한데, 그 특별함 때문에 그들의 죄가 더 커졌습니다.>
여기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입니다.
물론 그 믿음에는 회개도 포함됩니다.
2) 여기서 언급된 티로, 시돈, 소돔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언급하신 것은 그들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고, “너희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지만, 이방인들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냐?”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회개하였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심판 날에는 그들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믿었던 신앙인들은, 알 기회가 없어서 믿을 기회도 없었던 사람들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렇다면 차라리 안 믿고, 덜 엄한 심판을 받는 것이 낫겠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심판보다도 지금의 태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뭔가 아쉬운 일이 있을 때에는 주님께 간청하고 매달리다가, 그 일이 지나가고 나면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랬다가 또다시 아쉽고 급한 일이 생기면 주님을 찾고...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인가?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의 내가’ 선택하는 일입니다.>
3) 이스라엘을 꾸짖으신 말씀과 21장에 있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같은 가르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 말씀은, 은총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은총을 잃게 될 것이고, 그 은총은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갈 것이라고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이 경고는 그리스도교에도 해당됩니다.
<교회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고, 그리스도교의
각 신앙인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은총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역시
유대인들처럼 은총을 잃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니, 주님께서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21-22).”
여기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라는 말은,
이미 예수님께서 여러 번 강조하셨던 말씀에 연결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