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4. 큐티
여호수아 22:7 ~ 12
요단 가에 제단을 쌓은 두 지파 반
관찰 :
1) 두 지파 반이 큰 축복을 받고, 많은 물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다
- 7절.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모세가 바산에서 기업을 주었고 그 남은 반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요단 이쪽 서쪽에서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기업을 준지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 여호수아는 므낫세 지파가 요단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서 거주하게 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모세가 바산에서 요단 동편 땅을 나누어 줄 때 므낫세 반 지파가 받게 된 사건을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의 땅, 자신들의 장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때,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7년여의 가나안 정복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수많은 전리품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 외에 다른 성에서 얻은 탈취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지파들은 그러한 풍요로움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두 지파 반은 그러한 전리품을 챙기고 나눌 가족들이 모두 요단 동편에 있었기에 그런 물질들을 챙겨둘 수 없었습니다. 이들 두 지파 반은 자신들이 요단 동편의 비옥한 땅을 차지한 것에 대해서 모종의 책임감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전리품에 대해서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요단 동편에서의 전쟁의 승리로 많은 축복을 누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랬을지라도 여호수아는 이들을 축복하고, 말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유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 8절.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 => 이스라엘은 땅만 배분한 것이 아니라 전리품을 나눔에 있어서도 함께 배분했습니다. 아이성 전투를 제외하고는 패배가 없었던 전쟁, 그 주민들을 진멸하는 전쟁이었기에 그 전투에서 얻게 된 전리품은 더욱 많았을 것입니다. 가축, 은, 금, 구리, 쇠, 옷 이렇게 정리하고 있는 수많은 전리품들을 함께 나누어 가질 권세가 있다고 인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 9절.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 =>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치고 영광의 귀환을 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두 지파 반의 용사 40,000명은 여호수아를 따라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 후 얼마나 많은 사망자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용사들이 귀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회막이 있던 실로에서 아홉 지파 반의 환송을 받고 길을 떠나 그들의 집(home)이 있는 길르앗으로 갔습니다.
2) 요단 가에 제단을 쌓다
- 10절.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 이들은 길르앗에 이르러 흩어지기 전에 모종의 합의를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 두 지파 반의 용사들은 가족이 없이 7년여 간의 쉼이 없고 목숨을 건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누렸던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인생에서 너무나 위대한 시간을 보냈음을 스스로가 고백하고 하나님의 크심을 체험적으로 경험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요단강이 갈라져 건넜던 그곳에 이르러 제단을 쌓기로 합의를 본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엄청난 전리품이 주어졌기에 제단을 쌓거나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일하신 그 역사를 잊고 싶지 않았기에 번제단 형태의 제단을 쌓아서 기념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열심히 지나쳐서 너무 크고 위풍당당한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여호수아나 다른 지파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사게 되었습니다. 두 지파 반은 좋은 동기로 큰 일을 하고자 했지만, 그로 인해서 하나의 해프닝이 발생했습니다.
- 11절.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 아홉 지파 반에게 두 지파 반이 요단 동편에다가 위풍당당하여 멀리서도 충분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제단을 쌓았다는 소식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요단강은 그 폭이 그렇게 까지 넓은 강은 아니기에 강건너에서 이쪽 편의 사정을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요단 동편에서 발생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아홉 지파 반이 몰랐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사정은 이스라엘 아홉 지파 반의 지도자들의 귀에 까지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 때는 그 제단을 다 쌓은 뒤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두 지파 반이 얼마나 열심히 그 단을 쌓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 12절.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 두 지파 반이 제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들은 아홉 지파 반의 이스라엘은 흥분했습니다. 실로의 회막 앞에서 모였기에 이들이 모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이들은 여호수아와 더불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 것을 선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여 제단을 쌓은 것이라고 여기게 된 아홉 지파 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거나 저주가 따를 수 있는 일이었기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상 숭배하고자 하는,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렇게 불신앙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에 대해서 싸워서 이겨서 그들을 선도하겠다는 작정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두 지파 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리게 되는 성급한 결정이었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지 않고자 하는 이기적인 동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소식을 듣자마자 싸움부터 하고자 달려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였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는 나뉨이 있었고, 하나 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가르침 :
1) 하나님은 두 지파 반이 빈손으로 요단을 건너 돌아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풍성함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쩨쩨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얻은 요단 동편의 땅이 풍족하고 좋은 땅이었기에 그것을 족한 줄로 알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두 지파 반의 수고를 치하하고 그들에게 가나안 서편 전쟁에서의 탈취물을 동일한 배분으로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기본 정신이었습니다. 하나됨에 대한 실질적인 모습이었습니다.
2) 돌아가던 두 지파 반은 자신들이 경험한 황홀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그냥 그렇게 끝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돌아오는 길에서 두 지파 반의 지도자들은 모종의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제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이 합의를 여호수아를 떠나오기 전에 했다면, 그것을 알리고 오해가 없이 이 일은 진행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도자에게 말하지 않고 결정을 했습니다. 도중에라도 사람을 보내어 그러한 사정을 말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행위를 드러내는 일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나 생각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을 할 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 인해서 전쟁 직전까지 치닫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충정어린 마음을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사용하셨습니다. 처음부터 혹은 중간이라도 그러한 사정을 지도자에게 아뢰고 나누었더라면 이런 오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3) 요단 서편에 거하는 아홉 지파 반에게 있어서 두 지파 반에 대한 오해, 즉 요단을 건너간 두 지파 반이 돌아가자마자 우상숭배에 빠져서 제단을 쌓았다는 것을 듣자마자, 이들은 싸우고자 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가서 그들을 제압하고 한시라도 우상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금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들은 여기에서 여호수아의 의견을, 하나님의 뜻하심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 보기에 옳은 대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진노가 두려웠던 것이고, 실제로 믿음이 부족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수아 혹은 엘르아살에게라도 묻고 그 응답을 통하여 행동을 결정했어야 했습니다.
4) 오늘 본문의 사건은 두 지파 반이나 아홉 지파 반 모두가 하나님의 큰 일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제단을 쌓은 것일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향후에 밝혀지게 되어 문제가 해결되지만 소통하지 않은 문제는 자칫 파괴적인 결과로 흐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 :
1) 하나님은 인과응보(因果應報)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상필벌(信賞必罰)로 일하십니다. 인과응보는 비인격적 실존이 이 세상을 주도해 가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신상필벌은 인격적인 존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잘하면 분명히 상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존재에게는 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두 지파 반은 믿음으로 행동했고, 가족을 떠나 고된 행군을 함께 했습니다. 그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은 말로만이 아니라 물질로도 그들에게 채워주도록 여호수아를 통해서 명하시고 응하게 하셨습니다. 참된 지도력은 분명히 신상필벌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실력입니다.
2) 어떠한 열심도 리더십과 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요없는 논쟁과 분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소통의 장을 언제나 만들어야 하고, 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들에 대해서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언제나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공식적인 조직이 또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정치제도의 이유입니다. 선교사로서 사역을 하다보면 교회의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교회 정치에 대해서도 잘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래봅니다. 한국의 장로교 정치가 전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교회 정치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에 겸허한 마음으로 다른 교회 정치에 대해서도 잘 배워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