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들이 '왕의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 [칼럼] / 12/15(일) / 한겨레 신문
현직 대통령의 윤석열이 주도한 12.3 내란은 여러모로 놀랍다. 군을 동원해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정치인들을 다 잡고 정리하고 국회와 언론사를 무력화해 모든 권력을 손에 넣겠다는 살벌한 꿈을 품었기 때문이다. 4월 총선 결과가 선거부정 때문이라고 믿고 선거관리위원회 전산시스템을 열어 내란을 정당화하려는 발상의 황당함은 가엾을 정도다.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출판부가 올해의 단어로 무분별한 인터넷 콘텐츠 소비에 따른 '뇌 썩어라'(brain rot)를 택한 것 같지만 당분간은 이보다 더 딱 맞는 사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 나라 국민의 민주정치 역량은 윤석열 정권이 경제와 삶을 망치는 것을 막지 못했지만 내란은 곧 진압했다. 오랜 세월 피 흘리며 쌓아온 힘이다. 1898년 겨울 종로 거리에 쌀가게 백정 기생 구두 수선 등 수천에서 수만 명의 백성이 모여 42일간 밤샘 의회 설립을 요구한 만민공동회의의 기록은 지금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것이 1천 명 가까운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온 나라에 독립을 선포한 1919년 3·1운동의 원동력이자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어냈다. 광복 이후에는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져 독재자에게 빼앗긴 주권자 국민의 권리를 되찾아 왔다. 권력이 길을 벗어날 때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이 바로 잡아왔다.
이번 내란도 헌법이 정한 길에 따라 해결될 것이다. 국회가 윤석열을 탄핵하고 특별검사가 체포 구금해 기소하며 대선을 거쳐 새 정부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주권자인 국민이 곧 승리한다.
그런데 그래서는 개운치 않은 사태의 심각한 측면이 있다. 이번 내란을 둘러싸고 사람들은 1979년 전두환 신군부가 일으킨 1212 군사쿠데타를 거론한다. 대규모 살상을 감행할 수 있는 무력을 동원한 점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왕이 되려던 친위 쿠데타라는 점이 가슴을 더욱 짓누른다. 이승만의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박정희의 1972년 10월 유신이 그와 비슷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게 국민주권을 또다시 유린당할 뻔했다.
나는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12년 1월 왕을 뽑는 나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이 지면에 쓴 적이 있다. 우리는 이름이 대통령이지만 사실 왕을 선거로 뽑는 나라에 살고 있으며 5년마다 (정치적으로) 죽이고 새로 뽑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썼다. 왕을 뽑는 나라라는 표현은 칼 아우구스트 위트포겔의 오리엔탈 데스포티즘(아시아적 전제주의)에서 따온 것이다.
왕을 세습하지 않고 선거로 뽑는다고 전제의 정도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대통령에게 너무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다.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성군 개혁 군주의 관념은 아군의 승리를 중시할 뿐 제왕적 대통령제의 위험성과 약점을 가볍게 여긴다. 그 결과는 왕의 실패의 반복이었다.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보다는 주로 지난 정권의 실패에 기대어 집권에 성공하는 대통령은 조만간 국민을 실망시키고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문제 해결의 정치는 사라지고 대신 격렬한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이번 내란은 너무 빨리 실패가 확인돼 권력 상실 위기에 처한 윤석열이 대통령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폭군의 얼굴을 드러낸 사례다. 이로써 한국은 성장잠재력 추락, 양극화, 저출산 등 나라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3년 가까운 시간을 또다시 잃었다.
정권교체는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의 경찰,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가 그랬던 것처럼 윤석열 정권에서 완전히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 검찰의 개혁이 시급해졌다. 이를 넘어 민주적 절차를 거쳐 주권자의 의사를 반영한 정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정치개혁이 시급하다. 우리 머릿속의 성군을 지우고 삼권분립이 명확하도록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예산 편성과 심의가 주권자 국민의 감시 통제 아래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철저히 양극화된 우리 정치권을 보면 멀고 험한 길일 수도 있지만 가야 할 길이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크게 키우기 위해 더 이상 백성의 피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왕의 피는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란의 주모자와 핵심임무 종사자를 법에 따라 엄단하고 절대 사면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왕 노릇을 하는 사태의 재발을 막는 최소한의 예방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