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신앙의 결단
수 24:14-24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23 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수 24:14-24 / 자, 그러니 이제는 여호와를 모시고 살아가시오. 여호와를 섬기며 살되 온전히 여호와만을, 진실되이 여호와만을 받들고 살아가시오. 그대 선조들이 유브라데강 건너편에서 살 때, 또 애굽에서 살 때 다른 신을 섬기고 살았다고 해서 그들을 본받지 마시오. 그들을 뒤따르지 말고 여호와를 섬기시오. 15) 하지만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못마땅해한다면, 그것이 싫다면 지금 그대들이 누구를 섬기며 살아갈 것인지 분명히 선택하시오. 그대들의 선조들이 유브라데강 건너편에서 살 때 섬겼던 그 신들을 모시며 살 생각이 있소? 그도 아니면 지금 그대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아모리 사람들이 섬기고 받드는 신들을 모시며 살 생각이 있소? 그대들 마음대로 선택하시오. 어찌하든 좋소! 그러나 나와 나의 집안만은 여호와를 모시고 살아가겠소.' 16) [여호와만을 섬기리라] 그러자 백성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호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그분께 등돌리지 않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요.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입니다. 17)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야말로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올라오신 분 아닙니까? 우리 선조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고생하던 그곳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아니신지요? 우리는 그곳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분명히 보았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놀라운 표적을, 엄청난 표징을 베푸신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마다, 밟는 곳마다 우리를 지켜 주신 분 또한 여호와 아니신지요? 또 우리가 수없이 많은 뭇 백성들의 땅을 지나갔지요. 그때에도 우리를 보호해 주신 분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지요. 18) 여호와께서는 뭇 백성들을 또한 이 땅에 살고 있던 아모리 사람들을 몰아내 주기도 하셨지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들을 쫓아내셨지요. 그런데 우리가 어찌 다른 신을 따라가겠습니까? 우리도 또한 여호와를 섬기렵니다. 여호와는 분명히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19) [질투하시는 하나님] 백성들이 이렇듯 다짐을 보이자 여호수아가 다시 백성들을 향해 말하였다. `그대들이 여호와를 분명히 섬기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오. 또 그분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대로 넘어가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오. 그대들에게 허물이 보일 적엔 어지간해서는 눈감아 주시지 않을 것이오. 20) 그러니 어디 한번 여호와를 저버려 보시오. 아예 다른 신들을 따라가 보시오. 그분은 그대들을 본체만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오. 안중에도 두지 않으실 것이오. 철저하게도 경멸하실 것이오. 혹독하게 대하실 것이오. 아니, 아예 그분하고는 더 이상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마시오. 그분께서 혹시 따뜻한 눈길로 쳐다봐 주시기라도 해주실 것이라고 기대조차하지 마시오.' 21)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결단코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였다. 22) 그러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다시 다짐을 하였다. `그렇다면 좋소. 그대들이 분명히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결의한 일에 그대들 자신이 증인이오' `증인입니다.' 하고 백성이 대답하였다. 23) `그대들이 지니고 있는 이방신상들을 모두 없애 버리시오. 오직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만 향하시오. 그분께로 온 정성을 모으시오' 하고 여호수아가 다시 당부하였다. 24) 그러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만을 우리가 섬기며 그분의 말씀만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의 역사를 상기시킨 일을 근거로 오직 하나님만 섬길 것을 결단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신앙 결단의 촉구와 자신의 신앙 결단을 공개적으로 선언함(14-15)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라고 하면서 조상들이 섬기던 각종 우상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든지 아니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면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을 섬기든지 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당장 섬길 자를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과 그의 집은 오직 여호와 신앙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길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 신앙을 서약하다(16-18)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결단하라는 촉구를 받고서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16).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들과 자기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나오게 하셨고 큰 이적을 행하시고 모든 길에서 보호하여 주셨으며 가나안에 거주하던 모든 자들을 쫓아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좇아 여호와를 섬길 것이며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저주를 경고하며 다시 신앙을 고백하게 함(19-24)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이 대부분 농경지였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의 신들을 숭배하려는 유혹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선택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이방 신을 섬길 경우 복을 받은 후에라도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두 번째로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21). 또다시 여호수아가 그들을 향하여 이방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께 그들의 마음을 바치라고 하자 그들은 세 번째로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24).
적용: 당신은 조상적부터 섬겨오던 우상이 있거나 혹은 지금 섬기는 우상이 있습니까? 지금 당신이 여호수아의 권면을 듣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도자가 바뀌고 떠나게 되면 그 공동체는 어려움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충성스럽게 섬긴다면 지도자나 상황과 환경이 변하여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어도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모습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결단 순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고 다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이제는 선택할 시간
수 24:14,15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는 ‘이제는 선택 할 시간’입니다. 저는 오늘 ‘이제는 선택 할 시간’ 이라는 주제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위해 제가 기도드리겠습니다.
**서론**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과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어쩌면 우린 항상 선택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선택은 신중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여러 가지 일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해야 하고, 또한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야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갈보리 대안학교 안에 어린 학생들도 많이 있지만, 이제 커서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어떤 대학을 갈지, 어느 것을 전공해서 배울지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들, 혹은 주변 사람들 중에서 자신에게 조언을 해 줄만한 사람들과 교제도 하고 상담도 해 볼 것입니다. 그리고도 많은 시간을 깊고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학생들이 지금 이렇게 신중하게 생각하는 까닭은, 나중에는 그 선택한 것을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설사 바꾼다 하더라도,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어려움이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선택은 나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지혜롭고 잘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선하게 인도해 주신 하나님**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러한 ‘선택’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 여호수아기 24장 15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혹은 이 세상의 신들을 섬길 것인지 이제는 선택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 자신은 이미 하나님을 택했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을 택하고 그분을 섬겨온 것에 대한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돌아보길 원했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택한 삶을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금 결정을 내리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우리가 ‘나는 이미 하나님을 택하였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택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사실 지금껏 이방신들, 곧 세상을 택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까지 어떤 선택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와는 관계없이, 저와 여러분이 새로운 마음으로 결정을 내리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원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구를 섬길 것인지 택하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신의 가족과 함께 주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망설임도 없이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라고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같이 확신에 찬 마음으로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그가 지금껏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좋고 선하게 인도해 주셨는지를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에 있는 여호수아기 24장 1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기 24장 1절 말씀 저와 여러분이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였으며 열정적으로 주님만을 섬기던 자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며 주님을 원망하고 있을 때, 그는 갈렙과 함께 “주님께서는 저 가나안 땅의 백성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두려워 하지 말라(민14:9)” 라고 확신 있게 외치던 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모세가 죽고 난 뒤 지도자도 부르심을 받고, 모든 백성을 이끌고 가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나이가 들어 늙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죽기 전 에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격려하길 원하였습니다. 그는 온 백성을 세겜에 모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각 자신을 하나님 앞에 보이는 마음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다음 구절인 2절부터 13절까지에 걸쳐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브라함을 어떻게 인도하여 주셨는지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얼마나 선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주셨는지 다시 한 번 되새겨주었습니다. 5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보시면,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주셨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요 전능자이셨습니다. 400년 동안이나 노예 생활로 인해 고통 받던 그분의 백성을, 파라오의 손에서 구출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고통 받고 있었던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선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사 그들을 잊지 아니하시고 고통으로부터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하며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듯이, 수많은 시간을 사탄의 종노릇 하며 고통 받던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고통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길 원합니다. 새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살아가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각자 감사드리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제 본문 말씀 8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보시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까지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그분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선하게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신실하게 하나님만을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수차례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홍해 바다를 가르시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시며 그들을 구원해 주셨고, 광야에서 그들을 입히시고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우상들을 만들어 경배하거나,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께 불평하기 일쑤였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이방 백성들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신 분이었습니다. 모든 원수들로부터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셨으며, 가나안의 여정까지 모든 길에서 그들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대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족하고 어리석은 저와 여러분일지라도, 언제나 선하게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길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붙들어 주셨듯이, 본향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실 주님께 이 시간 나아가길 원합니다.
**이제는 선택하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이 지금까지 그들을 얼마나 선하게 인도해 주셨는가를 말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것을 다시 언급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다시 한 번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생각해 보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어떻게 인도해 주셨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찬양하는 시간되길 원합니다. 좋은 환경 가운데 날마다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 받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길 원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선택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과 이방신들 가운데서 이제는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읽었던 오늘 본문 말씀, 여호수아기 24장 14절과 15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 같이 여호수아기 24장 14절, 15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합당치 않아 보이면, 이방신들을 섬겨라. 너희는 누구를 섬기겠느냐? 라고 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대언자 엘리야도 언급하였습니다. 다 같이 찾아보진 않겠지만, 열왕기상 18장 21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8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가서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려니와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그에게 한 마디도 응답하지 아니하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저와 여러분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따르겠느냐, 세상을 따르겠느냐”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스스로에게 질문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따르는 것이 더 좋은가? 하나님인가, 혹은 세상인가?’ 대답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 여호수아기 24장 16절부터 18절까지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기 24장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 다 같이 큰 목소리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이스라엘 백성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오직 한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저희를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주셨으며, 모든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보존하여 주셨고, 우리의 원수들인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승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와 같이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경험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오늘도 새로운 아침을 주시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날마다 넘어져도 날마다 붙드셔서 일어나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선 매 순간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시고자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저와 여러분이 자격이 있기 때문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가 넘치시기에 우리가 값없이 누리는 것들입니다. 이 시간, 오늘 자신의 어떠함과는 상관없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하게 되길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런즉 우리도 주를 섬기리니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했다면 마음 속 이방 신들을 제거하라**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신들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상하게도 그들이 주를 섬기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기 24장 19절과 20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기 24장 19절과 20절 말씀 다 같이 큰 목소리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능히 주를 섬기지 못하리니..” 그는 왜 이렇게 말하였을까요? 도대체 왜 주님을 택하였어도 그분을 섬길 수 없다고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 마음속에 아직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거룩한 하나님이시고,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이 하나님을 택하였다면, 이방 신들 섬기는 것을 이제 그만 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오직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기 24장 24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기 24장 23절 말씀,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만약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된다면, 반대로 버리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선택하였다면 가장 먼저 그분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 곧,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 속 우상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쉬는 시간에 무엇을 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책을 자주 읽으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음악을 자주 들으십니까? 여러분의 휴대폰에는 어떤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은 항상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우상이며, 바로 이것들을 마음속에서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마음속 우상을 put away, 즉 저리 치워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택하였다면, 가장 첫 번째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삶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생각날 때 찾아보는, 그런 구석진 곳에 있는 오래되고 낡은 사진이 아니십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가득 채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왜 마음 속 이방 신들을 제거하라고 말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이 세상의 것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은, 감미로운 선율인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멋있고 화려한 빛들은, 참 빛이신 주님으로부터 저와 여러분의 시선을 빼앗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주님과 나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얼마나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선하게 인도하여 주셨는지 다시 한 번 되새기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택하였다면, 지금 마음속에 있는 우상들을 제거하길 원합니다. 마음 가운데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제거하고 온전히 주님께만 집중하고 그분만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길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여호수아기 24장 14절과 15절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14 그러므로 이제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기라.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다른 신들을 제거하고 너희는 주를 섬기라.
15 만일 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나쁘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혹은 너희가 거하고 있는 땅의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하매)
여호와만 섬기라
수 24:14-28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평소 하나님을 신앙하는 삶에 대해서 마음을 두면서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쓴 분이라면 어렵다고 할 것이고, 믿음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교회 출석과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본이라고 생각되는 기초적인 행동만으로 신자로 자처하고 살았던 분이라면 믿음에 대해서 전혀 어렵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뭔가 여러분의 현재 신앙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 같은 말투로 들려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기도 하지만, 저는 지금 여러분의 현재 신앙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대해 확인 작업을 하자는 의도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 자신의 현재 신앙이 어떤 것인가가 학인 되어져야 내가 무엇에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이 교회 안에서만 국한된 문제라면 믿음에 대해서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유는 일단 교회는 교인들에게 크게 어려운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실한 교회 출석과 신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 생활의 철저함과 그 외 교회에서 행하는 여러 행사에 가급적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좀더 첨가한다면 이웃에게 친절히 대하고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만 열심을 내준다면 그는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있는 자로 얼마든지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의 생활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문제가 대다수의 교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의 활동의 여부로 결정되어지는 것이라면 믿음은 결코 어렵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교회 안에서의 요구는 우리들의 결심과 노력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고 지냈다면 그런 분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하등의 어려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열심의 정도이기 때문에 좀더 열심을 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교회 안에 국한 된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여러분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믿음을 생각하고, 교회를 나가면 믿음은 잠시 잊어버려도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일년 365일 믿음의 문제에서 떠나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가 어렵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합시다. 여러분은 분명 주저 없이 '예'라는 답을 내릴 것입니다. 여호와만 섬겨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려운 문제인지 쉬운 문제인지 점검할 필요조차 없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마치 지금껏 여호와만 섬겨왔던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껏 여호와만 섬겨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전혀 의심도 없이 '나는 다른 신을 섬긴 적도 없고 또 앞으로도 다른 신은 절대로 섬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호와만 섬길 것이다'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까?
물론 교회 안에서의 신앙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하는 것은 예배고 기도고 헌금이고 봉사이지 않습니까? 그 속에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이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여호와만 섬긴다'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은 교회 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말합니다. 삶 자체가 믿음의 삶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삶은 과연 여호와만 섬기는가?'라는 물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의 신들을 섬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만 섬겨오던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애굽에서 애굽인과 똑같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그 모습이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을 때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섬기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애굽에서 봤던 것을 그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모세가 사라진 불안한 상황에서 힘이 되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고 살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 것이 아니라 모세를 의지하고 살았던 이스라엘이기에 모세가 사라진 상황에서 다시 힘이 될 것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게 된 것이나, 애굽에서 나오게 된 모든 것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모아 놓고 하나님에 의해서 오늘날 너희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이스라엘의 힘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을 도운 것이 아니었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가나안을 차지하기까지 그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많은 고생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으며 애굽의 종으로서 430년의 세월을 지내야 했던 모든 삶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약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게 되었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로 나타났으며 결국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는 오직 '내가'라고 말씀하는 하나님의 개입만이 있을 뿐 그 어떤 세상의 힘도 인간의 노력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더러 '이제부터 우상을 섬기지 말고 성실과 진정으로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교회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 자체가 오직 여호와만 힘이요 도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여호와를 힘으로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만 나의 도움이시오 힘이시라는 고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되는 것을 좇아가고 의지하는 것이 곧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를 선포하고 나서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섬기든 우상을 섬기든 섬길 자를 택하라'는 말을 합니다. '지금까지 너희들을 도우시고 힘이 되시고 인도하신 분은 여호와다. 따라서 너희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싫다면 우상을 섬기든 말든 너희들이 알아서 섬길 자를 선택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보면 지금껏 우리들이 들어왔던 설교 내용과는 뭔가 느낌이 다른 말이 있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들어왔던 믿음이란 우리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들 스스로 선택을 해서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믿게 하시고 그런 인해서 천국가게 되어지는 것으로 들어왔던 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여호수아의 말은 마치 하나님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지옥가게 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지금껏 우리가 들어왔던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믿게 되었다는 말'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여러분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경위를 말하고 나서 '섬길 자를 택하라'고 요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무턱대고 '너는 하나님을 섬길래 우상을 섬길래'라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지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건축치 아니한 성읍에 거하고 심지 아니한 것을 먹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는 것을 설명하고 '누구를 섬기겠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여호와만 섬기겠다'라고 나설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모두가 우리들의 힘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는 것이 믿어지고 인정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을 섬길 자로 정하고 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그 믿음이 하나님을 섬길 자로 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의지와 생각과 판단으로 여호와를 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그 믿음으로 인해서 새롭게 된 지식과 생각으로 인해서 여호와만이 섬길 자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경험이 없습니까?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 맞다. 내가 지금까지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내가 왜 세상 것으로 염려하는가? 돈 보지말고 하나님만 보고 살아야지'라는 결심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아마 말씀을 들으실 때마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결심은 누가 하게 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러한 결심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자라면 자기만 생각할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 이번 일만 잘되게 해주세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이 '실패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심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아는 앎이 하나님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결단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섬길 자를 택하라'는 여호수아의 말은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앎은 우리들로 하여금 날마다 여호와를 섬길 자로 선택하게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씀 앞에서 마치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사라져 버리는 듯한 느낌을 가집니다. '내가 안해도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이니까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발생하거나 문제가 있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잘되고 안한다고 해서 잘못되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 대해서 마음놓고 네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네가 오늘 섬길 자를 택하라'는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자는 날마다 여호와만 섬길 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여호와를 섬길 자로 택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된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삶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가 어려운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날마다 여호와를 섬길 자로 택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날마다의 삶에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있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고, 직장이 있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 돈도 직장도 모두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길 자로 택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된 여러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결단을 16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7-18절에서 말하기를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의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말을 듣고 자신들이 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결단을 합니다. 여호와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이것만 보면 이스라엘은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다짐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합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19절)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결단코 우상을 섬기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는 이스라엘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가 능히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상황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 누구를 섬기겠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우상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러분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라고 다짐을 합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웃기지 마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렇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다짐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다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의 결심처럼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하였는지를 모두 목격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 살면서 환경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고 나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에 들어와서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 부딪히자 '왜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었는가?'라고 하나님을 원망을 합니다. 이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원망을 하면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부족한 것이 있으면 원망을 합니다. 이러한 삶이 반복되었던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두 알고 있는 여호수아로서는 이스라엘의 다짐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다짐과 결심을 가지고 믿음을 유지할 수 없는 자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희의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할 것이다'는 이것이 곧 여호와를 섬길 수 없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수아가 장차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을 미리 예견한 말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에게 보다 더 강한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있는 여호수아가 보다 더 강한 말을 함으로서 그들의 신앙을 철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이란 스스로 다짐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연약함이지, 강한 말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그런 연약함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 여호수아가 단지 앞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을 것임을 미리 예언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지금 앞으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견해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질투하시는 분이고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않으실 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는 인간들이 섬기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해서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룩을 요구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오직 여호와만 사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에서 벗어나는 것을 죄로 보시고, 그러한 죄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 분이 여호와이십니다. 이런 여호와를 과연 섬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하나님을 과연 섬길 수 있으십니까?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말에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라고 다짐을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그들의 생각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자신감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자신감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감도 세상 현실이라는 문제에 부딪히면 무력해지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섬길 자를 택하라고 해 놓고 섬길 수 없다고 하고 자신감이 있다고 해도 안된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 해답이 바로 '증인'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했으니까 이제 너희가 너희에게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증인입니까? 20절에 보면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는 말씀에 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즉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길 때에는 복을 받은 후라도 돌이켜서 화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큰돌을 세워서 증거로 삼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돌이 증거가 되어서 앞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을 때는 그들을 멸하심으로서 죄와 허물을 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어버린다면 그들은 우상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십니까? 은혜를 아신다면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귀한 은혜가 나로 인해서 짓밟히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만약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허물과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에게 임하여도 좋습니다'라는 다짐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택하라
여호수아 24장 14-24 / 조약돌 묵상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 언약 갱신의 실제적인 이행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결단과 서약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인 결단을 재촉하는 내용입니다. 둘째 단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제의에 따라 오직 하나님만을 택하고 그분만 섬기겠다는 서약과 맹세를 하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단락은 만일에 있을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경고의 말과 그에 따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여호수아가 말한 것은 백성들을 저주하고자 하는 의미가 아니라, 백성들의 연약한 심령을 감안하여 철두철미한 신앙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말입니다. 여기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다른 신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그분의 성품을 묘사한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말이 그 다음에 나온 것입니다. 즉, 일반적인 범죄가 아닌 하나님을 버리는 죄는 결단코 사함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계속하여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고했습니다. 정복전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중에 이방 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곧 사람들의 마음을 겨냥해서 한 말입니다. 너희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는 말이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보이는 외부의 우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 갈라져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 뜻에서 사도 바울은 ‘탐심 그 자체가 우상 숭배'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모리 족속들의 신들이든지, 혹은 여호와 하나님이던지 누구를 섬길 것이지 택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섬기던 신들은 강 저쪽에서 섬기는 신들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말합니다. 강 저쪽은 유프라테스 강 맞은 편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말하며, 그 지역의 신들은 보편적으로 달의 신(월신)을 말합니다. 또한 애굽의 신들은 애굽인들이 문명의 시초부터 섬겼던 태양신을 가리킵니다. 아모리 족속은 보통 가나안 사람들을 대표하여 지칭하는 말로서, 그들이 섬기던 신들은 바알, 아스다롯, 아세라 등입니다.
달의 신, 태양 신, 바알, 아스다롯, 아세라 등은 실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로 단지 나무나 돌 등으로 빚어져 사람의 제사 대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으로 불려진 것은 그것 자체는 아무 능력이 없지만, 대부분의 우상들이 물질 세계와 영적인 세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들을 매개로 마귀가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일도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마귀 곧 사탄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사탄은 천상의 타락한 천사로서 사악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라 그렇습니다. 즉, 사람이 그를 선택할 때 힘을 얻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우상숭배를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상을 통해 연결된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임으로 사람들을 열광시키지만, 결국은 그의 추종자로 만들어 사람들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것도 모른 채 불가사의한 도움을 받아 감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탄의 별명은 속이는 자, 거짓의 아비, 귀신의 왕, 대적자, 어두음의 세상 주관자입니다. 그의 특기는 미혹, 유혹, 시험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선택하도록 만들기 위한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들을 자기 임의로는 할 수는 없어서입니다. 여호수아가 우상들을 섬기던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지 선택하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상은 꼭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변장할 수 있습니다. 돈이던지, 탐욕이던지, 명성이든지, 성적인 욕망이든지 어떤 형태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하던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목적만 달성하면 다 우상이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것들이 우리의 현실적인 삶 여기 저기에 포진해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일회적이 아니라 끓임 없이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미혹이 일단 시작되면 이길 확률이 극히 적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전쟁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이기는 것이고, 마귀를 선택하면 마귀가 이기는 전쟁입니다. 실은 마귀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미혹을 우리가 선택하므로 마귀가 이기게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마귀 편에 드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 매개체는 돈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선택하므로 마귀의 편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와가 원래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옛 뱀인 사단이 탐욕으로 유혹했던 것이지요. 하와는 단지 그것을 택함으로 사단의 편에 서서 된 것입니다.
선택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 많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때마다 내가 선택하므로 내가 어느 편에 서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선택은 바로 우리가 우상을 선택한 것이고 곧 사악한 세력의 지지자가 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택할 것인가? 여호와를 택할 것인가? 여호수아의 외침은 오늘도 우리들 삶 속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선택과 결단이 삶을 바꾼다
수 24:14-18 / 이규현 목사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하는 선두에 섰던 백전노장의 여호수아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 가기 직전, 고별 설교를 하는 대목입니다. 누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과거와 현재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숱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면서 이스라엘을 이끌어온 여호수아는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감지했습니다. 다가온 축복 속에서 마냥 기뻐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어떤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누구를 섬길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교의 문화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호와만을 섬길 것인가의 문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선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아마 오늘 아침에도 수많은 선택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무엇을 먹을 것인지, 차를 타고 갈 것인지 걸어갈 것인지, 어떤 옷을 입고 갈 것인지, 아이들을 데리고 갈 것인지 등.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것도 선택입니다. 좋은 선택은 좋은 인생을 만듭니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선택도 있지만 어떤 선택은 우리 인생에 아주 중요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예수를 죽인 사람, 악인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한순간이었지만, 어려운 선택을 함으로 생명의 위협 속에서 절대진리를 붙들어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의 선택은 인류 전체에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은 자유입니다. 이 선택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바른 선택을 할 때 축복이 됩니다. 신앙생활 역시 선택과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삶도 선택과 결단을 통해서 찾아옵니다. 그 선택의 자유를 잘 행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고별설교를 통해서 선택과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합니다. 가나안의 문화는 오늘날과 흡사합니다. 폭력적이고 음란하고 농경문화에서의 풍요의 신, 다양한 신을 섬겼습니다. 특히 물질주의로 가득한 그 땅에 맘몬의 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지배하게 하셨지만, 그 문화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계속 이어갈 것인지, 빼앗길 것인지의 기로에 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비기독교적인 환경입니다. 반 하나님적인 문화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한 요소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실제 사회생활을 하는 것에는 긴장과 대립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순순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분명한 선택과 결단을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명목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대로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땅은 정복했는데 영혼은 정복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하는 문화로 가득 찬 그 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의 문화에 흡수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의도를 놓치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바라보면서 염려하는 마음으로 선택과 결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14절부터 24절까지를 보면, ‘섬기다’라는 동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복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섬길 것인가? 섬김의 대상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운명을 가르는 문제입니다. 대충 생각하고 넘어갈 그런 주제가 아닙니다. 이 선택과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선택과 결단이 돋보입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한한 은혜는 우리가 선택하고 결단할 때, 그 위에 부으시는 은혜가 큽니다. 이것이 분명할수록 은혜의 강도는 깊고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선택과 결정은 우리의 마음의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입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선명하고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타협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신앙이고 절대순종입니다. 다른 길,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를 섬길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선택에 따라 다른 모든 선택이 따라옵니다. 우리의 행동과 선택은 누구를 섬기는가에 따라나오는 확고한 기준점입니다. 여기에는 YES 또는 NO밖에 없습니다. 19절에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른 신들과 철저히 구분되는 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향하고자 하는 결단이 없다면 타협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일에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의 너무 빠른 변질이 문제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늘 발견하는 문제입니다. 너무 빨리 세상의 영향을 받고 변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결단하게 하십니다.
선택과 결단에서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선택의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분별입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더욱더 그렇습니다. 결혼과 같은 중대한 선택을 너무 쉽게 하면 두고두고 고통이 됩니다. 조금 미루더라도 시간을 두고 신중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이해와 확신입니다. 잘 모르면서 몇 번 만나보고 결혼한다면 일종의 도박입니다. 내가 믿는 대상에 대한 불분명한 이해는 두고두고 후회를 남길 수 있습니다. 비싼 물건 하나를 살 때도 꼼꼼하게 살펴보고 고릅니다. 그래서 선택을 할 때는 집중력과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다른 여러 신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선택에 앞서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왜 이렇게 촉구하고 있을까요? 이미 이방 신들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결단의 촉구에 대한 백성들의 일차적인 반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16절에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수 24:16)」
그들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굳은 결단으로 화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여호수아 24장에서 한 장을 넘기면 사사기가 도래하는데,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이스라엘은 아주 빠르게 영적 어두움의 시대로 진입하고 맙니다. 여호수아 앞에서 했던 그들의 결단의 흔적은 너무 빨리 지워져 버렸습니다. 영적 혼란기의 사사 시대가 오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각오는 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 순수한 마음만으로 결단한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확신의 근거는 감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믿고자 하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 속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모른다면 하나님을 등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나안이라는 기름진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점점 희미해지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에만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더 마음을 쏟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는 참여를 하지만 정작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지면 배교의 위험성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선택과 결단은 확고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새해에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결단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는 강력한 이교도적 문화가 너무나 많고, 그것이 우리를 삼키면 타협해버리고 변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쌓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냥 입으로만 고백하고, 헌신을 다짐하는 것은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에도 나의 내적 동기를 늘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할 때도 받은 선물 때문에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정작 주신 분은 쳐다보지도 않고 받은 것 자체만 기뻐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인격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내가 남편이 준 돈으로 다른 남자를 사귈 수 있게 되어 고마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많은 행태가 하나님에 대한 관심보다 일상의 것에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문화에 익숙해지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믿고 섣부른 신앙고백으로는 신앙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내 마음에 드는 신을 찾아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반 하나님적 문화가 아주 강해지고 빨리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력하게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입니다.
세상에는 내 마음에 드는 신들이 널려 있습니다. 리처드 포스터가 말한 대로 돈, 권력, 성이라는 신이 버젓이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변화를 경험하며 신앙이 깊어가는 신자들은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깊이 경험하면서,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봉사하며 살아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한 해 동안 여러분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선택은 뚜렷한 행동의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선택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선택은 언제나 포기를 가져옵니다. 여호와를 선택한다는 것은 수많은 신들에 대한 유혹을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이방 신들을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이스라엘 안으로 밀고 들어온 배교적 문화가 중요한 쟁점이 된 것입니다. 한 사람과 결혼을 염두에 두고 사귀기 시작한다면 그동안의 다른 이성적 관계는 끊어야 합니다. 양다리는 갈등을 심화시키고 모든 관계를 깨는 요인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출발은 과거와 깨끗한 결별을 해야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의 일부도 가나안으로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과거전력이 무서운 것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되어서 과거에 나를 붙잡고 있는 족쇄를 분명히 끊지 못했다면 캘린더만 바뀐 것일 뿐 변화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 안에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우상이 생깁니다. 매일, 순간순간,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부부간에도 서로에 대한 신실함을 계속 확인하지 않으면 틈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려고 하면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이방의 신들을 내버려야 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변질되고 충성은 희미해집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은 공존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 일편단심이십니다. 동시에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 일편단심을 원하십니다. 사랑은 ‘하나만’ 입니다. 여럿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선택과 결단은 우리가 계속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세상에 등을 돌려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겠다는 의도적 행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선택과 결단에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선명한 기준이 정해져야 합니다. 기준은 선명할수록 좋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백성들에게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하고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적당주의는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피곤한 삶은 애매한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눈치를 보게 됩니다. 신앙이면 신앙, 세상이면 세상이어야 합니다. 느슨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색깔이 회색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온도는 미지근한 것입니다. 신앙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정확한 선택이어야 합니다. 이 선택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변질하게 됩니다. 신앙적 선택과 결단을 할 때는 매섭게 해야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정확하게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도 한 해를 시작하면서 신앙에서 올곧은 선택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 해를 축복해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선택은 시간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 택하라”입니다. 선택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있으니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급하게 촉구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스며드는 악한 문화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어떤 특별한 순간이 왔을 때 특별한 선택을 한다면 전혀 다른 인생이 되고, 인생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특별한 기회를 주실 때를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구원의 사건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역사의 어느 시간을 자르면서 일어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단의 때를 미루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때를 감지합니다. 영적 감각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타이밍을 알고 만사를 제치고 행동합니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때에 맞게 반응하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미루면 위험합니다. 마귀가 가장 잘 쓰는 전략이 “내일 하라”는 것입니다. 교묘한 심리전입니다. 미루다 보면 결국엔 못하게 됩니다. 미루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무섭지 않은 사람이 내일 하겠다는 사람입니다. 오늘, 지금,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예수를 믿게 된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시점이 되었을 때 그 때 반응하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2013년이 밝아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결단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 알고 결단하십시오. 머뭇거리는 삶은 인생을 낭비합니다. 특히 영적 결단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결단을 놓치면 모든 악한 것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게 됩니다. 가나안의 악습과 문화들, 이방신들, 애굽에서 섬겼던 신들도 따라왔습니다. 가나안의 풍요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선택을 미루고 머뭇거린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전망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이때와 너무나 비슷합니다. 단단히 영적 결단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마음이 약간이라도 느슨해지면 세상과 얽히게 됩니다. 세상에 한번 얽혀 빠져들면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의 세속화 현상이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의 차이가 모호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얼마든지 열려있습니다. 축복을 받은 이후에 축복 자체에 빠져들 때 세속화되고, 그 세속화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나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했던 여호수아는 정확한 판단으로 여호와의 신앙이 온전히 심겨지기를 갈망했습니다. 선택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내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신앙은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는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전쟁은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것입니다. 끊임없이 신앙의 위협을 받게 하고 타협하게 하는 것이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관심을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정조준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최고의 선물은 사랑하는 사람 자체입니다. 그런데 선물에 따라 마음이 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사준다고 마음이 바뀌는 것, 자꾸 마음을 바꾸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단단한 결단을 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십시오. 타협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마음을 유지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넘어지고 타협하고 흔들리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한 분을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최고의 선택입니다. 하나님도 좋고 돈도 좋은 것이 아니고, 여러 순종 중의 하나도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결단으로 내 마음에 파고드는 마음의 변절을 경계하면서 단호한 태도로 유일 신앙을 유지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게 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호와만 섬기라
수 24:14-18 / 주병열 목사
멕시크시티의 대형 시장 그늘진 한 구석에 인디언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파 스무 줄을 놓고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한 미국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양파 한 줄에 얼맙니까?” “10센트입니다.”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두 줄에는 얼맙니까?” “20센트입니다.” “세 줄에는요?” “30센트입니다.” 그러자 미국인이 말했습니다. “별로 깎아 주시는 게 없군요. 25센트 어떻습니까?” “안됩니다.” “스무 줄을 다 사면 얼맙니까?” 미국인이 물었습니다. “스무 줄 전부는 팔 수 없습니다.” “왜 못 파신다는 겁니까? 양파 팔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 미국인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 나와 있는 거요.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서라피(멕시코 남자가 어깨에 걸치는 모포)를 사랑한다오.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한다오. 친구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요 ---- 자기 아이들이며 농작물 얘기 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오. 바로 그걸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 스무 줄을 파는 거요. 한 사람한테 몽땅 팔면 내 하루는 그걸로 끝이오.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래서 다 팔 수는 없소.”
만약 양파 20개를 파는 것이 그날 그의 삶의 목적이었다면 그는 몽땅 미국인에게 팔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인생은 그 미국인에게 종속되는 것입니다. 즉 그 미국인에 의해서 그는 기쁠 수 있고, 그 미국인으로 인해 횡재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 날도 그는 또 다른 미국인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 기쁨과 감격을 줄 사람을 찾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미국인이 나타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기쁨과 인생의 목적을 구걸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인디언 노인에게 삶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그 미국인에게 종속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쁨의 원천은 놀랍게도 양파 20개를 파는데 있지 않고, 양파를 팔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따뜻한 햇볕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바라보면서 산들거리는 바람을 피부로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인의 인생의 주인은 그 자신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매일 매일 매상을 보면서 웃고 울어야 하는 비즈니스 현장에 있습니다. 저가 쓰러지지 않으면 내가 쓰러지는 혹독한 경쟁구도로 짜여 진 직장에서 살아갑니다. 학위를 얻기 위해 피나는 공부의 현장에서 교수의 기대치에 닿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혹은 자녀에게 한껏 기대를 가지고 자녀가 가져오는 성적표에 기쁨과 삶의 목적을 다 걸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양파 한 줄씩 팔면서 양파 사가는 사람과 사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기쁜 일이 있었으면 함께 웃어 주고, 힘들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고객이라면, 그의 등을 한 번 두드려 주면서 힘을 내라고, 내가 덤으로 하나 더 주겠다고, 집에 가서 가족들과 따뜻한 저녁을 먹으면서 기쁨을 회복하라고 할 만한 여유가 있습니까?
이 노인과 보통의 사람들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 노인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아갑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합니다. 하지만 내일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일은 언제나 내일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잘 압니다.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언제나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은 내일도 누리지 못합니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라는 사람은 ‘소명’이라는 책에서 인류역사상 현대사회는 ‘목적을 위해 살기가 가장 어려운 시대’라고 표현했습니다. 현대사회는 모든 영역에서 선택과 변화의 기회를 최대로 제공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목적을 성취하며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을 한층 더 높여주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오히려 더 큰 무지와 혼동과 갈증만이 더 증폭되고 있습니다. 왜 현대사회가 선택과 변화의 기회가 전보다 더 많이 주어지고,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더 많이 줌에도 불구하고, 더 큰 무지와 혼동이 오는 것입니까?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적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내가 태어나면서 그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나에게 그 목적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인디언 노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 노인이 지닌 인생의 목적이란 시장 통에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햇볕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보면서, 살 곁을 스쳐가는 바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이 노인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들은 그냥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면 사람들이 시장 통으로 몰려옵니다. 때가 되면 바람이 불어 줍니다. 그 바람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줍니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려주는 것은 이 노인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노인은 그것을 그냥 누리고 즐기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그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감사하게 하고 기쁘게 합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소명은 내가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이 소명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인생의 정체성을 줍니다. 이 정체성이 분명하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노인이 양파의 판매량에 따라 기쁘거나 슬프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습니다. 율법의 요약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 서두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2).”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서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출애굽의 꿈을 주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합니다. 해방의 감격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라.’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삶의 소명이며,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끝난 정복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을 날이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모세를 통해 받은 계명을 백성들에게 다시 부탁합니다.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인생의 목적입니다. 본문을 24절까지 보면 ‘섬기다’는 단어가 14번이나 나옵니다. 여호와를 섬김이 오늘의 주제이며 인생의 목적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인생의 목적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결코 우리 자신이 우리 인생의 목적을 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발견할 뿐입니다. 인디언 노인이 시장 통에 나가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산들거리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으며, 따뜻한 햇볕이 있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말은 항상 어려움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홍해 앞에서 주눅들어하고, 이젠 다 죽었구나 하고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어 사흘이나 물을 마시지 못할 때는 정말 온 무리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위험에도 직면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이 없어 죽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폭동으로 다 죽어버릴 것 같은 위기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언제나 그들 가운데,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 그들의 인생이 풍요로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 수퍼볼을 보기 위해 친구들 모임에 갔다 온 딸이 초인종을 누르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모임 어땠니?’라는 아빠의 물음에 ‘좋았어요.’라고 대답하지만, 왠지 슬픔에 잠겨있는 듯한 딸의 모습을 아빠가 알아차렸습니다. 아빠가 딸을 감싸 주면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딸아이는 눈물부터 흘리면서 말합니다. “학교 애들이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요.” 아빠가 말합니다. “그렇지 않을 거야. 널 좋아하는 애들도 많잖니.”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아요. 어쩌다 말을 해도 내가 불쌍하니까 그저 한 마디 해주는 거예요.” 아이의 이런 말을 듣고 있는 엄마 아빠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잠시 후 딸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자 아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거절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합니다. 고향에서도, 친구들과 가족들도 예수님을 따돌렸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미쳤다고 잡아가려고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 중에 한 부분은 바로 ‘거절당하심’이라는 사실을 딸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당한 거절을 통해 딸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절의 정도야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약했지만, 어쨌든 딸은 그것을 통해 이 땅에서 당하신 주님의 고난과 아픔, 외로움과 슬픔을 좀 더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만약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였다면 결코 배우지 못했을 교훈을 배운 것입니다. 이 말이 딸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딸을 욕조에 않 하고, 기독교 작가인 아버지는 딸에게 자신이 거절당한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썼는데, 출판사에서 “선생님의 글은 우리 회사 출판 계획과 맞지 않습니다. 다른 출판사를 통해 좋은 결과 있기 바랍니다.”라는 거절의 답장이 받습니다. 그 때 느끼는 거절의 아픔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런 답장을 받을 때, 아빠는 이런 생각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이 내 글의 일부라도 읽어보고 결정한 거야. 원고 안에 정말 소중한 말이 얼마나 많은데....’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절당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오랜 세월 직업 작가로 지내 왔는데도 그런 일이 아직도 상처가 되고 있다고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딸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욕조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오늘 밤은 평생 잊지 못할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될 거예요.”
딸은 예수님의 거절당함의 경험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거절당하는 경험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와 같은 경험을 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나의 마음과 나의 언어를 완전하게 이해하심을 경험합니다. 나의 아픔을 그 분도 느끼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합니다. 자기 인생의 목적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오늘밤이 내 인생에 평생 잊지 못할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될 거라고 말하게 됩니다. 완전한 자기발견입니다.
본문 14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 여호와만 섬기라.” 왜 여호와를 섬겨야 합니까? 왜 여호와만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까? 그 분 안에 들어가면 나를 발견합니다. 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 분을 섬길 때 그 안에서 내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 분이 지금만이 아니라 실은 전에도 나와 함께 있으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창세전에 나를 택정하셨다고 고백하기까지 합니다. 그 분 안에 들어가면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발견합니다. 겉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 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가 그 분 안에 있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은 양파 한 단을 더 파는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더 높은 지위를 얻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먼저 회복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에 필요한 악세사리 정도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을 만날 뿐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과 풍성함과 은혜가 성도님들 삶 가운데 있기를 소원합니다.
15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제 우리가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어떻게 하면 그 삶을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하면서, 이제는 그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우리가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 즉 소명을 따라 살 때, 인생이 얼마나 풍성해지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양파를 파는 인디언 노인이 양파 스무 줄을 다 사겠다는 미국인의 제안에 귀가 솔깃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장은 좋아 보이고, 좀 더 편한 길처럼 보이지만, 그러는 순간 이 노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의 기쁨을 얻게 하는 참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방신은 늘 그런 순간적인 유익을 주는 것들입니다.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전에 가서 그들의 제사 행위를 보면 정말 금방 행복해질 것 같고, 금방 무엇인가 나올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하나님 여호와보다 훨씬 더 육감적이고 감각적이며 가시적입니다. 농사철이 되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전에 가서 신을 대신하는 제사장과 육체적 관계를 맺습니다. 그것은 생산을 의미합니다. 생명이 낳는 의식입니다. 농사를 짓고 짐승을 키우고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들은 늘 풍성한 출산이 필요했습니다. 몇 날 며칠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습니다. 흉년의 조짐이 보입니다. 답답합니다. 그럴 때 이런 신전의식은 그들의 마음을 솔깃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유혹을 받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삶의 방법은 늘 현대적 삶의 양식에 뒤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양파 스무 줄을 동시에 팔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다 팔고 또 스무 단을 가지고 와서 다시 팔게 되면, 그는 이틀분량의 인생을 하루에 살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앙적 가치관과 삶의 방법은 늘 세상 앞에 우스개가 되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늘 마음의 위안만을 삼기 위한 수단처럼 취급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많이 팔지 못해도 ‘주님의 뜻이 있을 거야’ 라고 말하는 수단이 됩니다. 즉 삶의 악세사리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현대인에게 결코 삶의 능력이나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현대 기독교가 왜 이렇게 약할까요? 그것은 말씀이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신앙에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나 오늘이나 신앙은 그냥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딸아이가 아빠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받고 자기 인생의 목적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기 인생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소망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학교는 가야 합니다. 친구들의 태도는 여전히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딸아이는 전에 아빠로부터 받은 그 소중한 교훈을 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순간 다시 옛날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다시 낙심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호수아는 결단하라고 촉구합니다. 오직 여호와만을 섬길 것인지 아닌지를 결단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나와 나의 가족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어도 삶의 자리에 나아가면, 비즈니스 현장에 고객들이 줄어들고, 회사에 가서 여전히 상존하는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되는 것 같고, 학업은 원하는 것만큼 성취되지 않고, 자녀는 내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쉼을 포기합니다. 사람들과의 대화도 포기합니다. 양파 사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직 팔려나가는 양파 수만 헤아립니다. 그럴 때 다시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단하십시오. 누구를 섬길 것인지를 정하십시오. 양파 스무 줄을 다 팔라는 미국인을 만나더라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유혹은 인디언 노인으로 하여금 시장 통에 있는 사람들을 보는 여유와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산들거리는 바람을 느낄 수 없게 할 것이고, 사람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성도가 어떻게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주일예배는 하던 일을 중단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느껴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양파 스무 줄을 다 파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파 스무 줄을 팔면서 주님을 경험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들어오신 주님을 만나십시오. 자신의 결단을 통해 주님께로 한 발 다가갈 때 주님 안에서 발견하는 놀라운 은혜와 복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필연적 선택
수 24:14-28 / 행복충전소†대명교회 (김종일 목사)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청산하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복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죽음을 앞두고 앞으로 백성들에게 다가올 새 시대를 위해서 비장의 고별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서 23-24장에 나옵니다.
특히 여호수아 24장은 아브라함의 소명부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회고하는 내용(1-13절)이며,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간의 일종의 신앙 서약식입니다(14-28절). 그리고 그의 죽음을 기록하므로(29-31절)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구속사의 한 단락을 종결짓습니다.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며(14,15절),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잘 섬기겠다는 의미의(16-18절) 증거의 돌을 세웁니다(26-27절). 본문은 우리들의 믿음 생활에 다음 몇 가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양자택일 :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15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신 중 하나를 선택하여 섬길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 백성이 ‘참으로 섬길 자이신 여호와를 택하는 것’입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자율적인 선택을 유도하고 있는 것 같으나 실은 강력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선언은 이미 수 십 년 동안 지켜 온 그의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그의 촉구는 참 하나님, 진리, 정의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라는 요구인 것입니다.
이 선언은 여호수아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이 함께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처럼 온 가족이 같은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일은 지도자로서 여호수아의 좋은 신앙적 모범과 배경이 됩니다.
그는 주위의 분위기나 체면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뒤서거나 멀찍이 따르지 아니하고 때로는 고독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힘 있게 앞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의 신앙은 다수의 군중심리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체험적 삶의 결정체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런 권고가 있게 된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을 그대로 숭배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간 많은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많이 체험하였고, 우상으로 인하여 수차례 경고와 징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애굽의 우상을 취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상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있는 이방신이나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불경건한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우상 숭배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육에 대한 지나친 소욕으로 말미암아 듣고 보고 만지는 사욕을 좇는 결과로 빚어진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둘 다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물과 불이 공존할 수 없듯이 누구도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에도 신앙과 불신앙을 공존할 수 없습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은 전혀 다른 두 가치관이 서로가 충돌하며 갈등하며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호수아의 촉구는 매우 합리적 귀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므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살거나 멀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필연적 선택인 것입니다.
베스트셀러 중에 기독 여성 실업인(패션 유통업계인 성주 인터네셔널 사장)인 김성주씨가 쓴 “나는 한국의 아름다운 왕따이고 싶다”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부패 공화국’ 한국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서인 동시에 이 낡은 시스템을 왕창 바꿔야 한다는 혁명적인 메시지인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당장은 요령 있게 적당히 사는 것이 손쉽게 보이고 편할 수 있지만 긴 안목을 보여 강력한 자기 성찰과 강력한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여호수아의 신앙처럼 주변의 사람들이나 환경이 나를 극소수의 편협된 사람인 냥 몰아넣어도 여기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바로 서 있는 믿음의 태도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왕따가 되더라도 우리는 꿋꿋하게 우리 자신의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2. 필연적 선택 : 질투하시는 하나님(16-21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양자택일 선택의 제의를 듣고 결국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큰 이적으로 보호하시며 가나안 땅에 거하던 이방 족속들을 물리쳐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선택은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은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바로 생각하게 합니다.
(수 24:16)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결단을 할 수 있는 자는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고 은혜를 느끼는 자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경외한다는 것을 고백하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또 성도들은 말로만 하나님을 운운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자신의 삶 속에서 그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올바로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을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어떤 젊은 부부가 다른 집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집의 부부는 어찌 그리 서로 애정 표현을 잘하는지 이 손님에게는 아주 어색할 정도로 쑥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아내는 생각하기를 “나는 도대체 어찌 이리도 남편의 따뜻한 말과 다정한 사랑의 표현 한번 못 듣고 살았는가?”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서 남편에게 막 대어 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따뜻한 한마디의 말에도 크게 감동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능히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지만 질투하시는 분이므로 그는 조그만 범죄도 용서치 않으십니다.
(수 24:19)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을 내려 주셨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면 그 축복의 손길을 거두시고 저주를 내려 그들을 멸망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은 죄인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며, ‘질투하다’는 말은 자기 이외에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치 않기 때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수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입니다.
3. 결단적 행동 : 증거의 돌(22-28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그들 중에 있던 우상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결단에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분명히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이 혼미합니다.
(약 2:28)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세겜은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던 곳이며 또 야곱이 이곳에다가 이방신을 묻고 그의 뼈가 묻인 곳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온 후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엄숙히 낭독한 뜻깊은 곳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백성들에게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하였습니다.
여기서 ‘율례’(קח,호크)는 문서화되고 법령화된 성문법을 말하고, ‘법도’(טפשׁמ,미쉬파트)는 법률적인 성격을 지닌 ‘지시’, ‘명령’ 곧 ‘불문법’을 말합니다. 이 둘은 일반적으로 지켜야 될 모든 규례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례와 법도를 베푼 여호수아가 마지막으로 한 행동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해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웠습니다.
(수 24:26,27)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이것은 백성들의 신앙의 결단을 행동으로 나타낸 증거의 돌인 것입니다. 일종의 하나님과의 계약이며 확고부동한 서약인 것입니다. 이는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행동과 태도 나아가 삶에서 의지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결단의 시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집을 찾거나 살집 혹은 가구나 물건을 택할 때, 찾는 물건이 마음에 들게 되면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먼저 계약을 합니다. 이 계약의 의미는 타인에게 빼앗기기 않으려는 의도가 있으며, 또 사고자 하는 것을 안전하게 확보하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이런 뜻에서 여호수아는 언약을 갱신할 때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록으로 보관하고 또 큰 돌무더기를 쌓음으로서 후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 돌무더기를 보고 하나님을 떠나거나 범죄치 않토록 증거로 삼았습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한창일 때, 한 농부가 윗도리는 북군의 군복을, 바지는 남군의 군복을 입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한 쪽 편으로 가장하면 안전하리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남군과 북군의 격전이 벌어졌을 때, 그는 가운데서 양쪽 군의 사격을 받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소속이 불분명했던 것입니다.
‘토끼 블레어’라는 외국의 동화가 있는데, 어느 날 토끼 블레어는 두 집으로부터 똑같은 시간에 만찬 초청을 받았습니다. 일찌감치 집을 떠난 블레어는 두 집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두 집의 음식 솜씨를 재어보다가 이리저리 방황하던 블레어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결국 파티가 다 끝날 때까지도 그 곳에서 계속 뛰어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 론
우리 나라에 기독교 성직자 4만 여명에 비하여 무속인이 4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또 이를 찾는 사람도 나이와 직업, 학식의 유무와 상관없고 종교와도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컴퓨터에도 무속 열풍이 불고 있고, 전화로 사주나 궁합을 봅니다. 컴퓨터에도 물론 스포츠 신문에도 오늘의 운세를 보는 난이 있습니다.
무속인을 찾는 사람은 1년에 연인원으로 약 1억 4천 만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복채를 1회에 만원만 쳐도 1조 4천억원이 됩니다. 전문가들은 우리 나라가 선진 시대에 이르러 이런 기이한 현상을 보이는 원인은 “우리의 사회제도나 문화적 분위기가 아직도 안정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증거이다.”라고 했습니다.
물질문명은 인간에게 참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채워져야 할 하나님의 자리가 있는데, 이것이 종교성이요 신적 자리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자리를 메우지 못하여 방황하며 허전해 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이 자리를 채우기 전에는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해 줘서 채워 줘야 할 것입니다. 많을 사람들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참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증거하여 모든 백성이 우상에게서 구원받아 참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우상을 섬기든지 가부간에 결단을 촉구하였고, 이에 백성들은 이방신을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결단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반드시 양자택일 하여야 합니다. 신앙적 결단은 강요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스스로의 결단과 체험 가운데 자발적으로 이루어 져야 할 것입니다. 이 결단은 새로운 삶의 각오로 나타내며 복된 생활에로의 결단적 행동이 요구됩니다. 이 결단적 행동은 선택에 따른 증거의 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수 24:14-18 / 유명근 목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인간에게 최고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창 1:28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조건이 있었습니다. 창2:16,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고 생육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그것을 선택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단해야 하는 자유 의지도 동시에 주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 것인지와 같은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선과 악, 그리고 우리 삶의 최선과 차선 등과 같은 중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택은 이렇게 현실적인 삶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영적인 문제를 선택하는 것은 삶 속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선택의 결과는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생명이냐 사망이냐를 가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최조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그들은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기회 속에서 잘 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져 죄와 사망 가운데서 심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잘 못된 선택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영적인 문제를 선택할 때 신중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번의 선택으로 생명과 승리의 삶이 여러분에게 펼쳐질 수도 있고, 사망과 패배의 삶이 엄습할 수도 있습니다. 신명기 30:15절에 보면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의 말년의 사역과 죽음 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종결 부분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으로 소집하여 아브라함의 소명으로부터 가나안 정복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한 사실을 다루고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신앙 서약 식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들을 세겜에 불러 놓고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보면 ‘여호와를 믿든 다른 우상을 섬기든 상관 않겠으니 너희 마음대로 해라’라고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 절 14절에서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강력하게 명령한 사실을 볼 때 15절의 말씀은 반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냥 여호와만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우상을 섬기려면 섬겨라, 그러나 그 길은 죽음이다. 그래서 나와 내 집만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하는 말씀은 결국 1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만 섬기겟다는 긍정적인 응답을 이끌어 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주장과 하나님 사이에서 양쪽을 다 바라보고 욕심을 내는 자는 마치 롯의 아내와도 같이 멸망의 벌판에서 서성거리며 지체하는 자입니다. 이는 그 자신의 어리석음을 더하는 것 밖에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6:24절 말씀입니다.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자신을 누구에게 바쳐야 하느냐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죄의 종이면 죽음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면 의의 길로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러한 선택 앞에 결단을 보여 줍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는 자신의 결정을 그들의 백성들 앞에서 자신 있게 외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경건하고자 하는 자에게 자신의 뜻을 공개적으로 알게 하여 주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을 택하신 하나님의 공개적 선포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그가 자기의 자녀들과 후손들을 잘 인도하여 의롭고 선한 일을 하게하며 경건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창18:19)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가족 전체로의 신앙이 개인적인 결단을 배제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당연히 하나님을 선택하고 결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묻듯이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하였다 하더라도 여호수아는 오늘 우리 자신, 각각 개인에게도 주관적이고도 내면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질문이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개인적인 성격으로서의 답을 해야 합니다.
#도마의 신앙고백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7,29)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중심이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라는 자세가 되어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냐? 너의 깊은 곳,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 둔 것은 너 자신이냐? 아니면 나냐?’
둘째, 결단코 다른 심을 섬기지 아니하노라
본문 16~18절을 보면 여호수아의 신앙 결단 촉구에 대해 백성들이 응답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여호수아의 결단 촉구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결단을 내리는 과단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절에 ‘이는’ 하나님만 섬기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우리들을 그분은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광야를 지나 여러 나라를 지나오는 동안 우리를 모든 대적의 오른 손으로부터 지켜 주신 분입니다. 또한 이곳의 이방 민족들을 포함한 아모리 족속들을 모두 쫓아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그분이야 말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우리 하나님)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혼란기에서도 여호수아의 신앙 촉구에 신앙적으로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이 어떤 원리나 이론 체계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출애굽과 광야의 생활, 그리고 가나안 정복과 같이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모든 역사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피부로 느꼈던 체험적 신앙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체험은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며 우리가 고난과 환난 중에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구원 역사를 잊지 말라고 하시며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셨습니다.
☛신명기 32:7절 말슴입니다.
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그러므로 오늘도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현저히 줄어든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체험적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특별한 체험도 우리로 체험적 신앙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체험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뚜렷하고 극대화 되어 나타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얼굴을 맞대고 만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면서 죄인과 같이 낮아지셨고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은혜를 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여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체험적 신앙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를 열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런 체험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어떤 고난이 와도 이 신앙을 의지하여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더욱 신앙을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많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결코 복음을 버리지 않은 것은 이런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체험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고 약간의 고난만 있어도 그 뿌리가 말라 죽는 신앙이 되기 싶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욥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는 고난과 함께 그를 괴롭혔던 것은 세 친구와의 대화에서 각각의 주장에 대한 이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에서 여호와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중단하지 않고 욥기서 42:5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아멘
요한복음 9장에는 맹인이었던 사람이 주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여 씻었더니 눈이 정상이 되었을 때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그에게 누가 너의 눈을 뜨게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안식일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하는 사람들은 출교 당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그의 부모도 사람들도 함부로 답을 하지 못할 때에 소경이었던 본인이 27절에서 답을 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적 신앙을 소유하도록 힘쓰십시오. 이 체험적 신앙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게 하고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4-25 / 장재효 목사의 목회 칼럼 / 서울 성은교회
1. 여호수아의 당부의 말씀
14절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는 1절부터 13절까지 출애굽의 과정과 모세의 시종으로서 보고, 듣고, 체험하며 지난 역사를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말하기를 여호와만 성실과 진정으로 섬겨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 저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모든 것들을 다 제하여 버리시고 가나안 땅의 원주민을 쫓아내시고 그 땅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패를 자기 이름으로 달고 자기의 소유로 삼고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지덕지하면서 감사와 찬송가운데 더 잘 섬기며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살지를 않고 유브라데스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을 다시 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는 참된 영적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마음을 슬프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아직도 제사 드리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보면 제사를 드리는 것은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파티를 열어주는 것이며 자신의 집에 귀신들이 더 많이 와서 자신들을 더욱 못살게 괴롭히다가 결국 지옥으로 끌고 가라는 행위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고린도전서 10장 20~21절의 말씀을 처신의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10:20~21)
참으로 염치없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제사도 참여하고 성찬에도 참여하면서 하나님께 해달라는 온갖 요구와 주문만 있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달라고 보채는데 과연 하나님이 주시겠습니까? 왜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순수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의 순수성을 배우고 순수한 신앙인이 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앙은 순수하고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듣고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목자는 그래서 애가 탑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권력있는 사람들 더 의지하여 우상을 만들고, 물질에 대한 기대가 하나님에 대한 기대보다 더 커서 또 우상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우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고,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환란이나 핍박이나 고문을 당해도 하늘나라 신령한 소망을 가지고 죽을 각오로 하늘의 소망을 결신하려는 목적으로 살 때 하나님이 기대를 걸고 그때 우리를 요긴하게 들어 쓰십니다.
15절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2. 여호수아의 믿음
여호수아의 믿음을 하나님은 공인하시고 보증하셨고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신실한 지도자로 쓰임받습니다. 그는 사심이 없었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따라 생각과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후 2대 지도자로 쓰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이 아니어서 여호수아의 마음은 애타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우상을 버려야 한다. 버리기 싫으면 차라리 멸망의 길을 택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선포합니다.
16~18절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의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여호수아의 설교는 매우 놀라운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설교를 듣고 여호수아의 말씀대로 하나님만을 섬기며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강력한 질책을 합니다.
19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즉, 너희들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직도 하나님께서 보시고 또 여호수아 자신이 보고 알고 있는 것처럼 일편단심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믿음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안타까워하며 책망하며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자가 안타깝게 부르짖고 책망하며,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시는 시각과 목회자의 바라보는 시각이 동일하기 때문에 목자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애타게 부르짖는 것입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줄 알기에 그것을 아는 목자가 양떼의 잘못된 신앙을 볼 때 불안하게 보여지며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부르짖고 애타는 심정으로 양떼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에 마음을 두고 그것에 더 정열을 쏟는다면 틀린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게 분명한데 엉뚱한 것에 마음을 두고 다른 것을 섬기며 사는 이율배반적이고 배은망덕한 삶은 멸망을 재촉하는 삶이요 어리석은 삶인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권면의 말씀에 따르며 여호와만 의지하고 살겠노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지저분한 생각과 오염된 처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지금 이대로는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3.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잠들어있지 않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도 생리가 우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시켜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고 기업의 후사로 우리를 가꾸시며 다듬어 가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날 때 그 인생의 결과가 비참할 것을 하나님은 두려워하여 그 사람을 그냥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정성과 애정을 성도들에게 집중하셔서 그들이 다른 것들을 정성스레 섬기면 질투하시고 그냥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투는 성도에게 유익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채찍질 하고 징계하심은 아직 우리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다는 증거이며 기대가 있고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하여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 회개하고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으로 새출발하시기 바랍니다.
21~25절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여호수아가 가로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한지라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여호수아는 다짐하는 백성들과 더불어 세겜에서 언약을 세웁니다. 약속이 헛되지 않기 위해 짐승을 죽여 하나님을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죽은 짐승은 짐승 하나의 생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음을 대신한 것이며 이 언약은 죽을 지경에 순교의 자리에 가더라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언약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다른 뜻을 좆는것은 영적인 간음입니다. 믿음의 정절을 지켜 하나님께 인정 받으십시오.
바른 경배
여호수아 24장 14-18절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적군을 하나도 남김 없이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만약에 그들을 남겨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가나안의 문화에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진멸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 땅에는 여전히 우상숭배하는 자들이 많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섬길 자를 택하라고 권면 했습니다. 만일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신이 좋아 보이면 그를 섬기라고, 그러나 자신과 그의 가족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여전히 거짓된 이방신을 섬길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대상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은 누구십니까? 우리의 창조자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우상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상 둘 중 하나만 고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담대하게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신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시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 섬기는 사람이 참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경배의 대상입니다.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수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이전에 섬기던 신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에 섬기던 신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우상 숭배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지 못한 상태 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렇게 두 가지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택하기 위해서는 우상 숭배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의 주제가 바로 “이제부터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성실하게 섬기는 것입니까?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 가나안 땅에서 섬기는 우상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 기 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 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 기 지 못하느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긴다면 그 신앙은 위선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것, 교회 생활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중요한 요소 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열심 있는 교회 생활을 하는 와중에 여전히 세상의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도 세상의 즐거움을 우상 삼아 살아가고 있다면 결코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서는 마음에 자리 잡은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억지로 섬기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억지로 드리게 한 예배는 예배가 아닐 뿐더러,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있는 섬김을 원하십니다. 믿음은 강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결단하고 드리는 것이야말로 참 신앙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백서들로 하여금 스스로 섬길 자를 선택하라고 결단을 촉구한 것입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국가나 공권력의 힘으로 혹은 정책이나 권위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믿음을 고백하는 참된 신앙을 원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2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수 24: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권고를 듣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가나안 땅에서 얻을 복은 사라질 것이며, 그들 앞에서 멸망한 가나안 족속 같이 그들도 패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 였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 무엇입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동시에 다른 우상을 섬겼던 죄를 범했습니다. 결국 우상 숭배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경배의 대상을 확실히 하나님으로 정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의 물질?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 외에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다짐했던 여호수아의 담대한 믿음처럼, 하나님 한 분 만을 경배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일을 선택하라
여호수아 24:14-18 / 이홍열 목사
“내일을 선택하라??
우리들의 삶은 선택하는 결단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이 교회를 나오실 때에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어떤 넥타이를 맬 것인가 하는 작은 선택이 있는가 하면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장래에 대한 진로의 선택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여기 젊은 분들도 계신데 어떤 배우자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결혼 상대자의 선택이 있습니다. 이런 작은 선택에서부터 대통령 직선제냐 내각 책임제냐 하는 한 민족의 사활이 걸린 민족적 정치적인 선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선택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선택을 잘한 사람은 축복의 생애가 보장이 되지만 선택을 잘못한 사람들은 슬픔과 좌절 속에 살게 됩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롯에게 선택의 권리를 양보했습니다. 롯은 풍요로와 보이는 요단 들판을 선택했지만 결국은 소돔 고모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선택했는데 그 땅이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옳은 것을 바르게 선택해야 됩니다.
저는 7살 때 뇌신경 마비라는 병을 앓은 적이 있습니다. 약국과 많은 병원을 다 돌아다녀 보았는데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거의 죽게 된 지경에 저의 어머님이 저를 업고 충주도립병원에 찾아갔습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찾아갔는데 의사 선생님의 하시는 말씀이‘때가 늦었다. 이제는 늦었으니 이 아이는 고칠 수가 없소. 집에 데리고 가서 아이가 먹고 싶다는 것 해주고 해 달라는 대로 해주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포기했습니다. 사형 선고가 내렸습니다. 저를 업은 어머님이 눈물이 앞을 가려서 병원문을 걸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겨우 겨우 병원문을 걸어나와서 병원 계단 층계에 걸터 앉으셨습니다. 뒤에는 축 늘어진 7살 짜리 이홍열이가 정신을 가물가물하고 있습니다. 그때 저의 어머님께서 저에게 물었답니다.??홍열아! 이제 오른쪽으로 가면 집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가면 마지막 한 병원 더 충주 제중병원이라고 있는데 그 병원으로 가는 길이다. 어느 길로 갈래???그때 무의식 속에서도 아마 제가 왼쪽을 가리켰던 모양입니다. 저의 어머님은 저를 데리고 제중병원을 찾아갔습니다. 마지막 소망을 두고 찾아간 그 병원에서 뇌신경 마비를 치료해서 죽어 가던 일곱살 소년이 살아났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신앙도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선택하는 결단에 승리해야 참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일 아침 여러분들이 친구와 교회밖에 나가서 놀 것이냐? 아니면 예배하러 교회에 나올 것이냐? 이 자리에 여러분들은 최소한도 하나님과 교회를 선택하신 승리하는 결단을 내리시고 나오신 줄 믿습니다.
오늘 여호수아 24장 본문을 보니까 오랜 출애굽의 광야 시대가 끝났습니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어려운 발등의 불도 껐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나안 땅에서 오랜 축복의 세월을 누리기 직전에 여호수아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 땅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연설을 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연설과 설교의 핵심은 오늘 전도사님이 봉독해 드린 여호수아 24장 15절입니다.‘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던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던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선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위해서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선택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아침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 결단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떠한 믿음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아침 저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삶과 신앙에 승리하는 선택의 기준을 몇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주님이 없는 넓은 길보다 주님과 함께 하는 좁은 길을 선택합시다.
멸망에 이르는 길은 넓습니다. 편합니다. 사람이 많습니다. 생명으로 이르는 길은 좁습니다. 협착합니다. 선택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어떤 신학생이 여자를 사귀었습니다. 결혼할 단계가 되었는데 그 여자가 그렇게 말을 합니다. 목사의 길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나는 도저히 당신 따라서 목회자 아내의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나와 결혼하기를 원하면 목사의 길을 포기하던지 목사의 길을 걷기를 원하면 나를 포기하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시오. 불행하게도 그 신학생은 목회의 길을 포기하고 여자를 선택했습니다. 넓은 길이었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돈도 있었고 재물도 있었습니다. 편한 길이었습니다. 고통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학생은 한평생 주님께 서약하기로 작정했던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 됩니다. 주님이 안 계시는 넓고 편하고 영광스럽고 호화스러운 길보다 주님과 함께하는 좁은길 고난의 길, 우리는 그길을 택한 사람입니다.
일제시대 때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루는 일본 경찰들이 주기철 목사님과 교인들을 전부다 경찰서 마당에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널판지에 못을 박아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삐죽삐죽한 못이 널판지 위로 푹푹 솟아 있습니다. 그리고는 주기철 목사를 그 앞에 세워 놓고 일본 경찰이 교인들에게 협박합니다.‘여러분들이 만일 신사참배를 한다고 하면 주기철 목사님을 놓아 줄 것이요, 그렇지 않고 여러분들이 끝까지 주 목사를 따라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여러분의 사랑하는 담임목사, 주기철 목사를 이 널판지, 못 박힌 널판지 위를 걷게 만들 것이요. 신사참배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담임목사를 맨발로 널판지 위를 걷게 하겠습니까???선택의 순간입니다. 이 때 주기철 목사님이 사랑하는 자기의 교우들을 위해서 말씀합니다.??교우 여러분! 나 주기철 목사를 보지 마시오. 여러분이 오늘 여기서 지면 우리는 영원한 패배자가 됩니다. 주님이 없이 일순간 생명을 연장하는 길보다 우리 주님과 함께 죽는 길을 택합시다.??그리고는 스스로 맨발로 못이 박힌 널판지 위를 걸었습니다. 못이 발등을 뚫고 올라옵니다. 피가 흔건하게 고입니다. 한발자국 두발자국 걸어가신 자국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 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주님없는 넓은 길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걷는 고난의 길 십자가의 좁은 길을 선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두번째로 세상의 수많은 영광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선택하며 삽시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을 보니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너희의 섬길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만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선택하고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갖던지 하나님을 택하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한 분만을 선택했습니다.??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하는 책을 쓴 유명한 사람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을 하고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을 했던지 어느날 하나님이 토마스 아 켐피스의 꿈속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아 켐피스를 부릅니다.??아 켐피스야! 내가 네게 무엇을 해줄까? 원하는 것을 구하라. 내가 네게 해 주겠노라.??이때 아 켐피스는??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한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니야. 그래도 네가 참으로 충성을 하고 헌신을 하니 내가 네게 꼭 무엇인가 해주고 싶구나. 오늘 내게 네가 원하는 것을 구하라.??이때 아 켐피스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하나님! 저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주님이 제게 계신데 다른 것은 더 소용이 없습니다.??세번씩이나 아 켐피스가 거절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아 켐피스를 향해서??아 켐피스야! 너는 참으로 좋은 것을 가졌도다. 참으로 바른 것을 선택했구나.??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이세상의 그 어떠한 수많은 영광과 보화보다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 라고 하는 이 신앙고백이 오늘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신앙계 잡지에 이런 간증이 실렸습니다. 여러분 모나미 볼펜을 보면 거기에 숫자가 쓰여 있습니다. 무슨 숫자인가 하면 153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나미 회사 사장님이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은 했는데 나이롱 신자였던 모양입니다. 그저 사업상 한잔 하시기도 하고 또 교제한다는 명목으로 가서는 안될 곳도 가시고 뭐 또 주일은 적당히 지키면서 그래도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신앙이 있다고는 하지마는 정말 목숨걸고 책임있게 열심히 믿는 그런 신앙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모나미 볼펜을 만들어서 문구사업에 진출을 했는데 인간적인 사업수단, 인간적인 교제, 인간적인 그런 방법을 가지고 사업을 했습니다. 그 사업이 몽땅 망했습니다. 폭삭 망했습니다. 파산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 양반이 그제야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울면서 금식기도를 했습니다.‘하나님! 살려주시옵소서. 천부여 의지없어서 내가 손들고 옵니다.??금식기도하는 과정 중에 꿈인지 환상인지 153이라고 하는 숫자가 나타났습니다. 이 양반이 하도 신기해서 자기 담임목사에게 쫓아 갔어요.??목사님! 내가 금식기도를 하는데 153이라는 숫자가 나타났습니다. 이 숫자가 뭡니까???목사님도 당장 알수가 있나요.??제가 연구를 해볼테니까 좀 기다립시다.??목사님이 기도하시며 연구하시는 가운데 요한복음 21장이 생각이 났습니다. 배드로가 고기를 잡을 때에 밤새도록 잡았으나 헛수고였거든요. 주님 말씀 의지해서 오른편에 그물을 내렸더니 잡힌 고기의 숫자가 153마리, 목사님이 모나미 사장님에게 충고를 했습니다.??사장님! 인간의 지혜라고 하는 왼쪽을 버리시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사업하려고 하는 왼쪽을 버리시고 하나님 한 분만을 택하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오른쪽을 선택하시오.??오른쪽은 하나님만 믿는 길입니다. 오른쪽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길입니다. 오른쪽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소유하는 길입니다. 사장님이 세상을 버렸습니다. 세속적인 사업수단을 버렸습니다. 하나님만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의 영광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볼펜이 모나미 153볼펜입니다. 한국 최고의 문구류 메이커가 되었습니다.
어리석게 보이지만 세상보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요 미련스러워 보일지라도 세상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현명한 판단입니다. 누가복음 10장 42절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접대하는 일을 택했습니다. 그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접대하는 귀한 일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예수님 자신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더욱 귀한 일입니다.‘마리아는 이 좋은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하나님을 선택하는 것 그것보다 현명한 선택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세상 그 어떠한 것보다도 세상의 그 어떠한 영광과 자랑보다도 하나님 한 분 모시고 선택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번째로 편협한 이기적인 욕심보다 먼저 대접하는 이타적인 사랑을 선택합시다.
오늘의 사회는 개인적으로 볼때 이기주의가 팽배할 때로 팽배해 있는 사회입니다. 국가적으로 볼 때는 자국 이익이 최우선하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남보다 나만을 생각하는 그런 시대 풍조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그러한 사회 속에서 시대풍조 속에서 신앙인의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해 보이는 것일 겁니다. 교회 안에서 이기주의가 팽배할 때에 나만을 위하려는 그런 마음이 싹틀 때에 교회는 삭막해지고 사랑은 식고 교회는 문제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이타적인 삶을 살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만의 유익을 택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 바치는 이타적인 삶의 길을 선택하셨던 분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이타적인 마음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어 돌아옵니다.
여러분! 기러기가 날아다닐 때에 기러기는 항상 V 자로 날아다닙니다. 떼를 지어서 V 자로 날아다니는데 조류 학자들이 연구를 했어요. 왜 기러기는 날아갈 때마다 V 자 대형을 지어서 날아다니는가? 그리고 어떻게 기러기는 서울에서부터 저멀리 남쪽까지 쉬지않고 그렇게 먼길을 날아갈 수 있는가? 기러기의 날개에 어떤 특수한 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멀리 날 수 있는가? 연구를 했습니다. 알고 보니 비밀은 간단합니다. 기러기가 날면서 날개를 내렸다가 위로 드는 순간에 앞에 있는 기러기 날개에 바람을 불어 줍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기러기가 쉽게 날개를 들 수 있습니다. 또 뒤에 있는 기러기가 앞에 있는 기러기의 날개를 올려 줍니다. V자로 대형을 지어서 날아가면 이처럼 날개를 퍼덕거릴 때마다 앞에 있는 기러기의 날개를 바람으로 받쳐 주기 때문에 혼자 날 때의 힘보다 71 % 의 힘이 덜 든다는 이야기입니다. 혼자 날면 1Km를 갈 수 있다면 여럿이 떼지어 날면 2Km 이상을 날아갈 수 있는 그런 힘이 절약된다 하는 얘깁니다. 나만을 위하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날개를 바람으로 받쳐 주는 기러기이기 때문에 그들은 쉬지 않고 먼 여행을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다 하는 얘깁니다. 남을 대접하려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내게 유익이 돌아옵니다. 신앙인들은 나만의 이익을 선택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사랑을 나누어주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미국의 대부호 강철왕 카네기가 있습니다. 그 양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나는 부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우리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저금통장을 가지고 예금을 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공장을 운영합니다.??오늘 한국의 사장님들하고는 근본적인 기업경영 철학이 다릅니다. 돈을 벌겠다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그 기업을 통해서 사원들과 사회에 유익을 주겠다고 하는 이타주의, 남을 위하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축복이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노사분쟁도 결국은 기업주의 이기주의 때문에 발생합니다. 사원을 위해서 기업을 경영한다는 나누어줌의 경영철학을 선택한다면 그 회사의 문제가 없을 겁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성공적인 삶을 위한 신앙세미나를 했습니다. 그래서 한 60~80명 가량의 성도가 참석을 해서 은혜를 받았는데 우리가 이 세미나를 한 것은 교인 하나를 더 얻겠다는 이기적인 욕망보다 무엇인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세미나를 마련했습니다. 건전한 목적으로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비록 오늘 그 열매가 없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미래의 열매가 되어서 돌아올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교인들에게 받을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교회와 사회에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꿈을 주는 교회가 되고자 원하는 것입니다.
4. 오늘의 무사함보다 내일의 소망을 선택합시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당장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자세히 분석하고 평가해 보면 내일의 소망을 완전히 차단시키는 말입니다. 오늘만 볼 줄 알았지 내일을 보지 못하는 맹목입니다. 오늘만 살고 내일은 살지 않으려고 하는 근시안적인 무지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위해서 곶감을 빼어 먹기 보다 내일을 위해서 남겨 두는 지혜를 선택해야 합니다. 천만 선교헌금은 내일의 소망을 저축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내일의 꿈을 위한 저축의 투자입니다. 고통스러운 오늘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미래 때문에 오늘을 인내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오늘 보다 내일을 선택하며 삽시다. 현재보다 미래의 꿈을 택하며 삽시다. 내일의 선택하는 사람은 오늘을 실망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선택하는 사람은 현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오늘의 만족보다 내일의 소망을 선택하며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 전라도 고창군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가난한 시골 교회를 섬기다가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은 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 하나 가지고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목회를 했습니다. 때로는 굶고 멸시를 받아가면서 헐벗으면서 열심히 목회를 했습니다. 교회가 점점 부흥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돼서 한 100-150명 성도들이 모이다 보니까 교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우리 목사님은 신학교 졸업장이 없어. 그리고 평생 전도사밖에 안돼. 그러니 우리 교회가 이만큼 컸으니 우리도 목사님 모십시다. 전도사님 개척하느라고 수고하셨지만 우리도 이제 목사님을 모셔야 겠사오니 신학교 졸업장이 없는 전도사님은 다른 데로 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갈 곳이 있나요. 그 교회보다 더 약한 농촌교회 몇몇을 떠돌아다니면서 전전하다가 결국은 먹지 못하고 영양실조 걸리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전도사님과 한평생 목회를 위해서 고생하다가 홀로된 사모님과 자녀들이 아버지의 상여를 붙들고 통곡을 합니다. 전도하다가 굶고 헐벗고 이제 병들어 죽다니, 여보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할 데가 있습니까? 어쩌다가 당신이 목회를 한다고 해서 이름없는 농촌목회 목사도 아닌 전도사가 목회를 하다가 이렇게 죽어야만 합니까? 울다가 울다가 사모님이 눈을 들어보니 하늘에서 한줄기 빛줄기가 남편의 관을 비췄습니다. 사모님이 생전에 남편 전도사님이 자기에게 하시던 말씀이 울려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행복이나 부귀를 택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일의 소망 미래의 저 천국의 영광을 선택한 사람이요. 그러니 오늘 고생스럽다고 너무 원망하지 마시오. 죽어서 가는 길 미래의 영광을 우리는 택하지 않았소. 사모님이 그러한 남편의 들려 오는 말씀을 듣고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새롭게 눈물을 닦고 일어서서 생각을 했습니다. ‘여보! 당신 말이 옳아요. 억울하고 원통해도 우리는 미래의 소망에 사는 사람.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남편의 관을 향해서 ‘여보! 잘 가시오.’라고 말하고는 새 용기를 가지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남부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내일을 선택합시다. 오늘의 영광을 버릴 지라도 미래의 소망을 선택합시다. 미래를 선택하면서 오늘을 이기고 사는 신앙인,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여호수아처럼 하나님 한 분만을 선택하게 하시고 주님처럼 좁은 진리의 길을 선택하게 하시고 오늘의 만족이나 부귀보다도 내일의 꿈과 소망을 선택하며 사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 멘.
여호수아 신앙의 매력
여호수아 24:14-18 / 이용호 목사
여호수아는 진정 우리에게 신앙의 매력이 있는 사람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여호수아서를 묵상하면서 여호수아는 누구보다 신앙의 매력이 강렬한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을 늘 실천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 믿음에는 여호수아가 두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성실과 진정으로 섬기라.” 여호수아서의 문맥을 보면, 이 말은 모든 일에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할 때 여호수아는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이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성실과 진정이란 것은 한 마디로 정성을 다하여 섬긴다는 말인데 정성이라는 것은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이 될 때 하나님을 향한 성실과 진정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라” 우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새 옷을 입으려면 헌 옷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 버렸습니다.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났습니다. 애굽의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버렸습니다. 김유신 일화 중에 말이 항상 다니던 기생집을 향하고 있는 그 광경 앞에 김유신은 그 애마의 목을 잘랐다고 합니다. 버려야 됩니다. 믿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버릴 것은 버려야 됩니다. 우리가 욕심의 집착하는 한 결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욕심의 끈을 끊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크게 네 가지 업무를 추진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24장에 와서 자기의 생애를 되돌아 볼 때 하나님이 맡긴 네 가지 과업을 이룬 사람입니다. 첫째는 요단강을 건너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아이성에서 패배한 것을 만회하는 일입니다. 네 번째는 지파별로 가나안땅을 분배하는 일입니다. 이 네 가지 어려운 일을 믿음으로 감당한 사람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면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행했습니다. 믿음을 실행한 귀한 매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선택이 바른 사람
그는 선택이 올바른 사람입니다. 15절에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선택의 사람입니다. 인생에 중요한 선택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생관의 선택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인가? 인생의 가치관의 선택입니다. 종교적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직업의 선택입니다. 세 번째는 배우자 선택입니다. 어떤 배우자를 선택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성경에 보면 선택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담도 영생이냐 타락이냐에서 그만 선악과를 따먹는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주거선택을 잘못했습니다. 아합은 이세벨을 잘못 선택했습니다. 배우자를 잘못 선택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신앙의 선택을 바로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의 도전 앞에서 살아갑니다. 오늘도 선택해야 되고 매일매일 선택해야 됩니다. 선택의 원리는 성경에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직업을 선택하든, 배우자를 선택하든 내가 어떤 문제를 두고 이렇게 할 것인가? 저렇게 할 것인가? 선택해야 될 때 꼭 세 가지 원리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첫 번째, 하나님 편에서 선택하기 바랍니다. 말씀에 맞게 선택하기 바랍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우리가 선택을 할 때 이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개업을 하든지, 투자를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가야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선택을 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양심에 맞게 선택해야 됩니다. 양심이 불편하게 선택하면 안 됩니다. 선택을 하고나서는 마음에 평안이 와야 됩니다. 믿음의 한쪽 날개가 양심입니다. 양심이 상하면 믿음도 함께 상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양심에 맞도록 선택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선택을 해야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유익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내 욕심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은 피해를 봐도 좋은 그런 선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익을 위해서 선택할 때는 후회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 가지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선택에 실패한 사람을 보면 전부 이 세 가지 안에 다 걸립니다. 오늘 우리가 선택을 할 때는 하나님 편에서 한다는 말은 신앙적 영역입니다. 말씀에 맞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 영역이고, 양심에 맞게 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거리낌이 없다는 말이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다는 말은 이웃을 위해서 유익하다는 말입니다. 선택은 잘못해도 이 세 가지 피해가 옵니다. 잘못된 선택은 자기를 상하게 하고, 이웃에게 손해를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택이 세 가지 면에서 원리를 좇아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도와 보호의 복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았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우리를 보호하셨으며” 여러분, 한 평생 동안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사는 은혜는 대단히 큰 은혜인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는 길에는 위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임마누엘의 은혜는 그냥 함께 한다는 그런 소극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한다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극적인 개입을 말합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는 강하게 해 주시고, 우리가 부족할 때는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우리가 깨닫지 못할 때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우리를 점점 좋은 곳으로 이끌어 가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함께 하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끝까지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입은 은혜의 매력입니다. 그는 110세에 죽었는데 마지막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아침마당’이라는 프로에 전국노래자랑의 MC 송해씨가 출연했는데 이 어른의 나이가 팔순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인상적입니다. 내가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나를 그토록 필요로 하는 데가 많다는 것입니다. 부르는데 다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국노래자랑이란 프로그램은 송해씨 만큼 어울리고 멋지게 그 프로그램을 맡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재능 있는 젊은 MC도 송해씨 만큼 토속적인 멋을 풍기면서 그렇게 진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세가 들어도 계속 방송국에서 쓰는 것입니다. 아마 기력이 다할 때까지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주 복 있는 노인입니다. 나이 들면 누가 씁니까? 연예인들도 나이 들면 쓰이지가 않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맺는 말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입니다.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이 역사 속에 하나님 앞에는 모세보다 더 큰 지도자가 없습니다. 모세라는 그 큰 거목 앞에서 그는 후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다 못하고 간 그 과업을 이어가지고 그는 사명을 다했는데 그것을 거뜬히 해내고 마지막까지 주님 앞에 쓰임을 받는 만년 청년의 이미지를 우리 앞에 남기고 갔습니다. 진정 여호수아의 신앙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싱싱하고, 더 활기차고, 더 은혜 충만한 아름다운 매력을 보여주는 신앙입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수아의 이 신앙의 매력, 살아갈수록 향기가 나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 인도하심, 사용하심과 같이 우리 모두가 쓰임 받고 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