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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ANS FOCUS 2020-17K(2020.9.14)
싼샤댐을 둘러싼 논란과 중국 정부의 대응
표나리 아시아태평양연구부 조교수
<목차>
1. 싼샤댐 건설의 배경: 창장 치수(治水)
2. 싼샤댐 건설을 둘러싼 논쟁과 2018년 시진핑 주석의 싼샤댐 시찰
3. 싼샤댐 붕괴 논란과 민심의 동향
4. 중국 정부의 대응 전망
지난 6월 초부터 내린 폭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음에도 중국의 홍수는 아직 진행 중이다. 8월 19일, 중국은 창장(長江·양쯔강) 싼샤(三峽)댐의 수문 10개를 열고 사상 최대 규모의 방류를 시작했다. 대륙 국가인 중국은 당장 비가 오지 않아도 저지대에 모인 물로 인해 강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기 때문에, 비가 그치면 한시름 놓을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몇 달간 마을과 논밭의 홍수 상태가 지속된다. 그래서 이미 싼샤댐 인근의 농경지와 안후이(安徽)성의 4개 도시가 수몰되는 등 5차례의 홍수가 발생했음에도, 창장은 여전히 높은 수위를 유지 중이다.
그런데도 신화사(新華社) 등 중국 언론들은 금년 홍수 피해가 예년 수준에 불과하다는 기사를 연일 보도하였다. 심지어 중국 응급관리부는 8월 6일 홍수에 의한 경제 손실이 예년에 비해 감소했다고 발표하였다. 5천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해 역대급 홍수 피해를 호소하고, 해외에서마저 싼샤댐의 안전성을 우려하고 있는데, 왜 중국 지도부는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것일까?
1. 싼샤댐 건설의 배경: 창장 치수(治水)
중국 현대사에서 대홍수 사례는 1931년과 1998년의 경우가 꼽히며,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22만 명을 넘어선다. 물난리의 중심에는 중국 대륙을 동서로 관통하는 창장이 있다. 창장의 관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중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쑨원(孫文)을 비롯해 장제스(蔣介石),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등 역대 지도자들의 숙제이자 꿈이었다. 이후 1994년 리펑(李鵬) 총리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싼샤댐을 건설하면서 꿈이 이뤄졌다. 954.6억 위안의 공사비를 투입해 착공 12년 만인 2006년 5월 20일 완공된 싼샤댐은 높이 185m, 길이 2.3㎞로 세계 최대 규모이자 전력 생산량 또한 전 세계 1위로 꼽힌다. 중국은 이 댐의 건설로 홍수와 에너지 문제가 동시에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전통적으로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중국에서 물은 곡식 생산과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직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지도자들은 물, 특히 중국 전체 식량의 40%가 생산되는 ‘창장’유역을 다스리는 문제를 천착(穿鑿)하게 되었다.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요순시대(堯舜時代)’의 우(禹) 임금도 치수의 공적을 인정받아 정권을 잡았다고 전해진다. 우 임금의 아들인 계(啓)가 건국한 신화적 국가가 ‘하(夏)나라’, 바로 중국인들의 정신적 모태인 ‘화하(華夏·중화) 문명’과 ‘화하 민족’을 낳은 선조 집단이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이 단일한 ‘민족 정체성’개념이 필요할 때마다 소환하는 것이 바로 ‘화하’이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100주년인 2049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개 민족을 하나의 중화민족으로 대단결시켜 중국 역량을 응집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 민족주의를 국가 발전의 레버리지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최근 중원(中原)보다 창장이 중국의 기원으로 강조되고, 그 중심의 ‘싼샤댐’이 주목받는 배경이다.
2. 싼샤댐 건설을 둘러싼 논쟁과 2018년 시진핑 주석의 싼샤댐 시찰
구상에서 착공까지 100년이 걸린 싼샤댐을 둘러싸고 중국의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환경 파괴 및 문화재 수몰에 대한 우려와 함께 특히 건설 능력 자체에 대한 의구심으로 공산당 내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결국 이 논의는 1992년 전국인민대표회의(이하 ‘전국인대’)에서 투표에 부쳐져 통과는 되었으나, 반대와 기권이 무려 31.5%(대의원 2,608명 가운데 반대 177표, 기권 644표)나 나오는 기록을 세웠다. 전국인대의 경우를 포함한 중국의 대부분 투표가 만장일치와 환영의 박수로 끝나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이지만, 1975년 허난(河南)성 반차오(板桥)댐의 붕괴로 17만 명이 사망한 트라우마를 겪은 중국인들에게 치수 문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을 것이다.
지도부의 곤혹스러움은 싼샤댐의 완공이 가까워져도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6년 5월 20일 창장 치수가 완성된 역사적인 싼샤댐 완공식이 당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물론 지도부의 핵심 인사 중 어느 누구도 참석하지 않은 채 단 8분 만에 종료되었다(그들은 2009년 준공식에도 불참했다). 심지어 이 프로젝트를 현실화시킨 당사자인 리펑 전 총리마저(사실상 이미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상태였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댐을 둘러싼 정치적 부담이 얼마나 컸는지를 역설한다. 문제가 발생할 경우 엄청난 파문을 불러올 프로젝트를 자신의 성과로 내세우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양날의 칼’과도 같던 싼샤댐을 처음 공개적으로 인정해준 지도자는 시진핑(習近平) 현 국가주석이다. 그가 2018년 4월, 국가지도자로서는 21년 만에 최초로 싼샤 프로젝트 시찰에 나서 “이는 중화민족 발전의 모범”이라고 칭찬하며, 싼샤댐과 ‘두 개의 백년(兩個百年)’및 ‘중국의 꿈(中國夢)’의 실현을 함께 거론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시진핑이 싼샤를 방문한 이유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나, 당시의 정황을 고려하면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시진핑 주석이 싼샤를 방문한 시기는 2018년 3월 전국인대가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을 폐지하는 헌법 개정안을 가결함으로써 재집권이 확정된 직후다. 공고한 권력에서 나오는 자신감으로 과거 지도자들보다 과감한 행보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면,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승인한 사업을 치켜세움으로써 전임 지도자의 체면을 세우고, 상하이방(上海幫)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보시라이(薄熙来) 전 충칭(重慶) 시장으로 상징되는 반부패 사정 문제가 일단락됨에 따라 자신의 권력이 공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였을 가능성도 있다. 싼샤댐이 시진핑과 일종의 후계 경쟁을 벌였던 보시라이의 세력권인 충칭시와 쓰촨(四川)성 인근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통해 국가개발과 대외확장이 본격화되는 집권 2기를 맞아, 중국의 기술발전으로 상징되는 싼샤댐을 방문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보인다.
표1(뉴스레터에서는 생략)
분명한 것은 역대 지도자들이 모두 정치적 논리와 이익에 입각해 싼샤댐 담론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장제스는 전후 재건을 노렸으며, 리펑에게는 천안문 시위의 유혈 진압이 가져온 충격을 잠재울 이벤트가 필요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내적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시진핑 주석 역시 정치적 손익 계산을 마친 후에 창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싼샤댐은 전력 확보 측면에서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내륙수로 건설 측면에서도 향후 ‘일대일로(一帶一路)’해상 실크로드와 연계 시 큰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문제는 홍수조절이다. 댐이 건설되지 않았을 경우와 물리적인 비교는 어렵겠으나, 연간 수차례의 홍수 피해를 막지 못했고, 최근에는 붕괴 가능성마저 거론되며 회의적인 여론이 확산되었다. (앞의 <표> 참조)-뉴스레터에서는 생략
3. 싼샤댐 붕괴 논란과 민심의 동향
시진핑이 2013년 국가주석에 취임하며 ‘중국의 꿈’이라는 비전을 제시했을 때, 보통의 중국인들(老百姓)은 이것을 ‘선진국 수준의 삶을 누리는’단순하고도 현실적인 꿈으로 이해했다. 이후 소득의 증가와 기술 발전이 이뤄지면서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채널로 민심을 표출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싼샤에 관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담론이 제기되는데, 주로▲강바닥의 토사 적체, 녹조 현상 등 환경 문제와 ▲날림공사로 인한 댐의 균열을 비롯한 그동안 우려돼왔던 기술적 문제들, 그리고 ▲130만 이주민의 희생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이 가운데 부정적인 의견들은 중국판 트위터 격인 ‘웨이보(微博)’와 같은 대안적 공간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7월 23일 등장한 ‘싼샤댐 붕괴 이후 시뮬레이션’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다. 싼샤댐 붕괴 시, 댐에 저수된 393억㎥의 물은 최대 시속 100㎞의 속도로 30분 내에 인구 410만의 후베이성 이창(宜昌)시를 20m의 물속으로 가라앉히며, 후베이성 성도인 우한(武漢)시에서 장쑤성 성도 난징(南京)시까지를 집어삼키는 데에 만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보다 앞선 6월에도 중국건축과학연구원 황샤오쿤(黃小坤) 연구원 명의의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말한다. 이창 아래 지역은 달아나라.”는 글이 소셜미디어에 확산되며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바 있다. 황샤오쿤은 본인이 쓴 글이 아니라고 해명했음에도, 해당 글이 정부의 발표를 불신하는 중국인들의 불안과 함께 계속해서 전파되었다. (현재는 모든 영상과 글이 삭제되었다.)
부정적인 민심이 확산되면서 중앙의 지도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시진핑 주석은 두 차례 “방재에 힘쓰라”는 언급만 한 후, 7월 22일 돌연 동북부의 지린(吉林)성을 찾아 “옥수수 증산을 독려”하는 행보를 취하였다. 중국에서 산사태, 홍수, 지진 등 재난 발생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민심을 챙기는 것은 보통 총리의 역할인데,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한 달이 지난 7월 6일에야 처음으로 우한(武漢)시 홍수 피해 현장을 찾았다.
4. 중국 정부의 대응 전망
중국의 대내외 관심이 고조되는 만큼, 중국 지도부는 싼샤댐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전력투구하였다. 지난 7월 20일 안후이성 추허(滁河)강의 제방 두 곳을 폭파해 싼샤댐의 붕괴를 막았던 것만 보아도 그렇다. 중국 인터넷상에서는 창장 상류와 경제적으로 중요한 장쑤성 보존을 위해 안후이성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음모론이 난무하지만, 비난과 일부 지역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정치적인 의미가 큰 싼샤댐의 붕괴는 막아야 했을 것이다.
중국은 ‘국가 발전’이라는 싼샤댐의 상징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붕괴 가능성으로 대표되는 민심의 이반도 수습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도 8월 20일에는 결국 홍수 피해 현장을 찾았다. 그가 왜 3개월 동안 방문을 미뤄왔는지는 의문으로 남지만, 이 시간차는 창장과 싼샤댐을 두고 내부적으로 많은 고민을 거친 흔적으로 생각된다.
2018년 4월, 시진핑 주석이 싼샤 일대를 방문한 시간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시찰 일정으로는 제법 긴 3일(24~26일)이었다. 시찰 기간 중 방문한 이창 생태보호사업 현장, 싼샤댐 이주민 마을, 싼샤댐, 광케이블 제조기업인 펑훠(烽火)그룹 등을 보면 중국 지도부가 역점을 두는 분야가 드러난다. 특히 당시 시진핑 주석이 핵심기술의 자력갱생을 수차례 당부했던 펑훠그룹은 2년 후인 현재 중국 네트워크·디스플레이 부문의 선도 기업이 되었으며, 지난 5월 미국의 대(對)중 3차 블랙리스트에도 오른 바 있다. 이 성과는 ‘창장경제벨트(長江經濟帶)’의 추진이 ▲당 중앙의 결정이자 ▲국가의 전반적 발전을 위한 중요 전략이라는 시진핑의 2018년 발언을 상기시킨다.
올해 중국은 창장에 대한 조업 금지계획(향후 10년)과 환경보호 노력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것이 여러 경로로 표출되는 민심을 의식해 국가 주도의 발전보다 민생을 더욱 강조하려는 의도인지, 더 나아가 최근 생태환경 분야에서 글로벌 주도권을 쥐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는 중국의 의도된 전략일지, 향후 동향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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