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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2장 3~16절은 하나님의 지혜가 성령님으로 알려진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어져 있고 후에 성령님을 통하여 알려집니다. 하나님의 영(靈)이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계시하여 주십니다.1)
2장 1~2절은 ‘파울의 선포 내용’입니다.2)
2장 3~4절은 ‘파울의 선포 형식’입니다.3)
2장 5절은 ‘이 두 가지를 위한 이유’입니다.4)
1. 파울은 영(Spirit)과 능력 증명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5절에 “내가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에 만듦을 받고. 나의 말과 선포가 지혜의 말로 아니나 영(Spirit)과 능력의 증명으로니. 믿음이 사람들의 지혜로 아니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있기 위해서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파울은 “그리고 내가”라는 말로 선포 설명을 시작합니다(고전 2:3).5)
“약함(weakness)”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기는 불가능합니다. 아마 사도 파울은 어떤 눈에 띄는 육체적 상황을 뜻한 것 같습니다. 그에게 약함과 그 전하는 복음 간에 같은 특징인 바가 있습니다. 파울의 “약함”은 그의 메시지를 좀 더 분명하게 증언하여 줍니다. 심지어 파울의 메시지가 신적 기원을 가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파울은 늘 그의 “약함”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6)
파울은 약함과 두려움과 많은 떨림 안에 그들을 향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신비 말씀을 전도하는 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야만 합니다. 두려움과 많은 떨림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신비 말씀을 전하여야 합니다.
파울의 말과 선포는 결코 지혜의 설득력 있는 말로 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말과 선포는 성령(Spirit)과 능력의 증명으로였습니다(고전 2:4).
그는 자기 말을 “지혜의 설득력 있는 말들”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7) 그의 “말과 선포”는 “성령과 능력의 증명”으로 된 것이었습니다.8) “증명”이라는 용어는 ‘확실한 증거’(proof)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9)
이렇게 복음은 사람을 교묘히 설득하여 믿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진 사람은 논박하지 못하는 것이 왠지 찝찝합니다. 논리 과정에 오류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오류를 찾지 못해서 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문재인과 정은경의 궤변이 있었는데, 국민은 속았습니다. 그 궤변에 의할 때 코로나바이러스는 밥 먹을 동안에는 활동을 멈췄다가 식후에 계산하고 나갈 때는 바이러스가 활동하니 마스크를 써야 합니다.
턱에 종기가 나 병원에 갔는데 치료받을 때는 바이러스가 그냥 있다가 치료 마친 후에 대기실에는 처방전을 받을 때는 바이러스가 막 움직이니 치료실에서는 쓰지 않던 마스크를 대기실에서는 쓰고 있어야만 합니까?
바이러스가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에서는 전혀 활동하지 아니하였고 교회 예배할 때에는 너무 활동하여 대면 예배를 금지하여야 하였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지하철이나 버스 운행을 중단하지 아니하였고 바이러스가 지하철에서 맥을 못 추어 지하철 감염은 없다는 궤변입니다.
그들은 백신도 다른 사람을 위해 맞았다며 이타주의인 것으로 말하나, 알고 보면 자기가 먼저 접종하기 위해 새치기해 맞은 이기주의자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맞는다는 궤변을 누가 처음에 퍼트렸는지 신봉합니다. 어쨌든 사도 파울은 지혜의 설득력 있는 말로 선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파울의 말과 선포는 성령(Spirit)과 능력의 증명으로 되었는데, “증명(證明)”이라는 한자어는 “증거(證據)를 들어서 밝힘”을 의미합니다. 파울은 그의 말이 성령과 능력을 증거로 진실임이 밝혀진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복음이 진실임이 밝혀지는 것은 지혜의 말에 의한 것이 아니며 십자가 복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성령과 능력의 논증에 의해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를 전할 때 성령과 능력이 믿을 수 있게 합니다.
파울은 이런 것을 잘 알았기에 지혜의 말로 선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만을 앎으로써 그의 말과 선포가 성령과 능력의 증명으로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고전 2:5). 믿음은 사람들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Spirit)께서는 능력의 영(Spirit)이시며,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 사람들의 믿음이 있습니다(고전 2:4~5).
많은 교회가 복음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세속적 가치관을 섬깁니다.10) 파울의 단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만을 선포했습니다.11) 파울은 복음을 액면 그대로 전하였고 결과는 성령님께 맡겼습니다.12)
믿음은 사람들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까닭에, 파울은 지혜로운 수사학이나 웅변술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님께서만이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게 합니다. 전도하면서 나의 말이나 나의 지혜에 의존하여 전도하지는 않았습니까? 전도는 단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를 전하는 것입니다.
파울은 편지 서두에 “말의 지혜”(1:17),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1:19), “세상의 지혜”(1:20), “사람들의 지혜”(2:5)를 철저하게 부정하였습니다. 이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지혜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2. 파울은 이 세대의 지혜를 이야기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6절에 “지혜를 우리가 그 완전한 자들 가운데 말하나, 이 세대의 지혜를 아니고 무위로 될 통치자의 그것도 아니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6~16절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성령의 계시’에 관한 내용입니다.13)
6~9절은 ‘선포된 지혜의 초자연적 기원’에 관한 내용입니다.14) 하나님의 지혜가 성령에 의해 알려진다는 내용입니다.15) 성령에 대한 언급은 다음 논의의 주제로 이끕니다.16) 파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17)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의 복음이야말로 신뢰할 수 있는 지혜인데, 고린도 교인들이 추구하는 “이 세대의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18)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의 도움으로 신자들만이 분별할 수 있습니다.19)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대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이 생각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20)
파울은 하나님의 지혜가 가진 것을 말하며 시작합니다(고전 2:6~10). 하나님의 지혜는 “신비”로 베풀어졌고 통치자들에게는 감춰졌습니다.21) 성령님에 따라서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습니다.
파울에게 성령은 모든 것의 열쇠며 시대를 바꾸는 종말적 실재입니다. 성령님을 받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님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 일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입니다.22)
파울은 영적으로 완전한 자들 가운데 지혜를 말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영적이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지혜로서 인식하지 못합니다.23)
파울은 이 시대의 지혜를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이 시대의 통치자들의 지혜도 그러하지 아니하니 그들은 무효로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최초의 신자와 오래된 신자 양쪽에게 같은 내용이니,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곧 완전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 시대의 지혜”를 타당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24)
“통치자”는 땅 위의 지도자들이며, 악마적 의미를 전하지 않습니다.25)
그렇지만 은밀한 세력들이 세상 통치자들의 행위 배후에 있습니다.26)
그런데 악은 그 자신을 파괴하는 씨를 그 자신 안에 품고 있습니다.27)
3. 파울은 신비 안에 하나님의 지혜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7~8절에 “우리는 신비 안에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니, 우리의 영광 안으로 그 시대들의 앞에 예정하신 숨겨진 것이라. 이 시대의 그 통치자(ruler)들의 아무도 알지 아니한 바니, 만일 그들이 알았으면 주(主)를 십자가에다 못을 박지 않았음이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지혜를 이야기하지 아니하나, 우리는 신비 안에(in a mystery) 하나님의 지혜를 이야기하니, 우리의 영광 안으로 그 시대 앞에 예정하신 숨겨진 것입니다(고전 2:7).
“신비”는 숨겨져 왔던 십자가에 못 박히신 크리스트에 대한 말입니다. 이 메시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서만 알려지게 되는 신비입니다.28)
파울은 “우리의 영광 안으로”라는 말로 하나님 계획 범위를 봅니다.29) 현재의 시대는 장차 영광의 시대가 임하는 때 그 결말을 볼 것입니다. 현재의 시대는 완성, 곧 “우리의 영광을 위해”를 기다립니다.30)
파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신비 안에” 싸여 있는 것으로 말한 것인데, 하나님의 지혜는 곧 미스터리 안에 있는 불가사의하고 비밀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광을 위해 시대들의 앞에 예정하신 숨겨진 지혜입니다.
사람들의 눈길이 세상을 향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숨겨져 있습니다.31)
이 시대의 통치자들의 아무도 알지 아니한 바니, 그들이 알았으면 주를 십자가에 매달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고전 2:8).
이 시대의 통치자들의 아무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는 이 시대의 통치자들에게 숨겨진 채로 남았습니다.32)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에 대한 개념은 구약시대에 이해되지 않았고, 파울의 시대에 예수님을 배척하던 자들에 의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33)
이 통치자들은 예수님이 “영광의 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자신들의 지혜와 다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34) 이 단락의 중심은 8절의 “십자가”로,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35)
이 시대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았으나 그것이 그들의 파멸과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게 됨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악의 무용함과 미련함을 폭로합니다.36)
“이 시대의 통치자들”은 참 지혜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의 지혜에 따라서 행하였습니다.37) 영광의 주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38)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거나 들을 수 없으며 마음에 오를 수 없나니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바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앞에 8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들이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9절에서도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오를 수 없다고 병행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마음에 오를 수 없습니다.
눈이 보지 못하고 귀가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오르지 못한 바니,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for those) 준비하셨던 바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그를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준비하셨습니다.39) 7절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와 9절의 “준비하신” 바들이 병행되며 그가 우리의 영광 안으로 그를 사랑하는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그가 그 영(the Spirit)을 통해 드러내셨으니, 그 영(the Spirit)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찾으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7절의 “하나님의 지혜”는 10절에 그 영(the Spirit)을 통해 드러나는데 그 영(the Spirit)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 찾으심입니다.
앞에 7절에 “하나님의 지혜”는 신비 안에 숨겨진 것으로 표현되었는데 10절에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를 계시하여 주시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십자가”야말로 파울이 염두에 둔 “신비”의 핵심 실재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인격 속에 드러난 “신비”가 언급됩니다.40)
고린도전서 2장 10~16절에 “그 영(the Spirit)이 모든 것을 찾으시니. 이는 사람의 그 영(the spirit)이 아니면 사람의 것들을 누가 알아봄이냐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그 영(the Spirit)이 아니면 아무도 몰랐으나. 그 세상의 그 영(the spirit)이 아닌 하나님에서 그 영(the Spirit)을 받으니 하나님에 의해 은혜를 베풂을 받은 것들을 우리가 알아보았기 위해서라. 이것들을 영적인 것들에 영적인 것들을 비교하는 우리가 말하는 바이니,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 안에 아닌 영(Spirit)의 가르치신 것들 안에나. 혼적인 사람은 그 하나님의 그 영(the Spirit)의 것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 미련한 것이고 그가 알 수 있지 아니함이니 그것들이 영적으로(spiritually) 분별 받기(discern) 때문이나. 그 영적인 자는 모든 것을 분별하나 그는 누구에 의해 분별 받지 않으니. 이는 주의 정신(mind)을 누가 알았으며 그를 논증할 자임이냐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트의 정신(mind)을 가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눈으로도 귀로도 마음으로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 영(the Spirit)을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그 영(the Spirit)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찾으심입니다(고전 2:10).
사람 속에 있는 생각은 그 사람의 영(spirit)이 아니라면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의 그 영(the Spirit)만이 알 수 있으십니다.
세상의 그 영(the spirit)이 아닌 하나님에서 그 영(the Spirit)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은혜를 베풂을 받은 것을 알아봅니다(고전 2:11).
이것들을 영적인 것들에 영적인 것들을 비교한 우리가 말하는 바이니,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라 성령의 가르치신 것들로 그러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혼적(魂的)인 사람은 성령님의 것들을 받지 아니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혼적인 사람은 성령의 것들을 받지 아니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 미련한 것이고 그가 알 수 있지 아니함이니 그것들이 영적으로(spiritually) 분별 받기 때문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Spirit)의 가르치신 것들 안에 이야기합니다(고전 2:13). 즉 영적인 것(말)들 안에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는(express) 자들입니다.
혼적인(natural) 사람은 그 영(Spirit)의 것들을 받지 아니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 미련한 것이고 그가 알 수 있지 아니함이니 그것들이 영적으로 분별 받기 때문입니다.
“혼적인(natural)”(프쉬키코스)는 “육에 속한”으로 번역되며, “영혼”이라는 명사(프쉬케)에서 나온 형용사입니다.
영혼(soul)은 있으나, 영(spirit)은 죽은 불신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성품 그대로의 다시 나지 아니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두 번 태어나야 하는데 혼적인 사람은 거듭나지 아니하였습니다.
혼적인 사람은 관능적인(sensual) 사람입니다. “관능(官能)”의 의미는 “생물이 생명을 영위하는 모든 기관(器官)의 기능”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육체의 기능인 오관 및 감각 기관의 기능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영혼의 기능이 포함되어 지성적, 감성적, 의지적 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인 까닭에 죽어 있는 것입니다.
혼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그 성령(the Spirit)의 것들을 받지 아니하니 이는 그에게 어리석음이고 알 수 있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고전 2:14). 그 성령의 것들은 영적으로야 분별 받고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2) 영적(靈的)인 사람은 모두 분별하나 분별 받지 아니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 “그러나 그 영적인 자는 모든 것을 분별하여도 그는 누구에 의해도 분별 받지 아니하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영적인(spiritual)”(프뉴마티코스)은 “신령한”을 말하며 “영(spirit)”이라는 명사(프뉴마)에서 나온 형용사입니다.
“~에 속하는”(pertaining to)이라는 의미의 접미사(티코스)가 “영(spirit)”이라는 의미의 명사(프뉴마)에 붙어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영(spirit)에 속하는”, “영적인”(spiritual)을 의미합니다.
혼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the Spirit)의 것들을 받지 아니하지만, 영적인 자는 모든 것들을 분별하나 누구에 의해도 분별 받지 않습니다.
혼적인 사람은 영적으로 분별 받는 성령의 것들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영적인 자는 성령에 속한 “모든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자며, 그 자신은 누구에 의해도 분별함을 받거나 판단되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세상의 지혜에 있어서는 혼적인 사람이 영적인 자보다 뛰어날 수 있고 영적인 자가 세상의 지혜에 있어서는 혼적인 사람보다 못할 수도 있으나 성령의 것들에 있어서는 모든 것들을 분별하는 능력을 소유한 것입니다. 그 안에 성령님께서 계셔서 하나님의 성령의 것들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혼적인 사람이 분별할 수 없는 성령의 것들을 영적인 자는 분별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6절에 “주의 정신을 누가 알며 그를 논증할 것임이냐 그러나 우리는 크리스트의 정신(mind)을 가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3) 육적(肉的)인 사람은 크리스트 안에 젖을 먹는 유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4절에 “내가 영적인 자들에게처럼 말할 수 없었고, 육적인 자들에게처럼 크리스트 안에 어린아이들에게처럼 그러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젖을 마시게 주었으며 음식을 주지 않았으니, 이는 너희가 할 수 있지 아니하였고 아직 지금도 할 수 있지 아니함이라. 이는 아직도 너희가 육적임이니 이는 너희 안에 질투와 분쟁이 있음이고 너희가 육적이고 단지 사람을 따라 너희가 걷고 있지 아니하느냐? 어떤 자는 ‘나는 파울의’라고 하나 다른 자는 ‘나는 아폴로의’라고 함이니 너희가 사람들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7절은 하나님의 종들 사역을 평가한 것입니다.41)
파울은 고린도전서의 수신자들에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계속합니다. 사도 파울은 그들에게 영적인 자들에게처럼 말할 수 있지 아니하였으나, 육적인 자들에게처럼 크리스트 안에 어린아이들에게처럼 말하였습니다.
여기 “육적인(carnal)”이라고 번역한 헬라어(사르키노스)는 “육체(flesh)”라는 의미의 명사(사르크스)에서 나온 형용사입니다. “육체의”(fleshly), “육체적인”, “육욕적인”, “세속적인”이라는 뜻입니다.
“육적인”이라는 말이 한글로 “육신에 속한”이라고 번역되어 2장 14절에 나오는 “육에 속한”과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장 14절은 혼에 관한 것이지만, 3장 1절은 육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2장 14절의 “육에 속한”은 “혼적인”으로 번역하여야 합니다. 2장 14절에 나온 “혼적인 사람”은 크리스트 밖에 있는 불신자를 말하나, 3장 1절에 나온 “육적인 자들”은 크리스트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입니다.
육적인 자들은 육체에 속한 까닭에 육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불신자는 아니나 신앙이 너무 유치하여, 크리스트 안에서 유아들입니다.
그들은 초등학교를 들어가지 아니한 어린아이(infant) 정도가 아니라, 젖을 먹는 유아(乳兒)들이요 젖먹이(suckling) 아기(baby)들입니다.
파울이 그들에게 젖을 마시게 주었으며 단단한 음식을 주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이 할 수 있지 아니하였고 아직 지금 할 수 있지 아니함입니다.
파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말할 때 모든 것들을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파울은 그들에게 영적인 자들에게처럼 말할 수 있지 아니하였던 것이며, 그는 갓난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젖처럼 부드러운 것들만 말하였습니다.
젖먹이들은 치아가 나지 아니하여 단단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습니다. 억지로 입속에 집어넣어 삼키게 만들지라도 그것을 소화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트 안에 어린아이들도 하나님의 지혜를 모두 소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화할 수 있는 젖과 같은 부드러운 것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라지 아니하고 아직 지금도 젖먹이들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모든 것들을 분별하는 영적인 자들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단단한 음식을 먹고 소화할 수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아직 그들이 육체적임이니 그들 안에 질투와 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육체적이고 단지 사람을 따라 그들이 걷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거듭나지 아니한 자연의(natural) 사람처럼 아직 걷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듭나지 아니한 영혼의 사람처럼 아직도 행(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듭나지 아니한 불신자처럼 아직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파울파와 아폴로파로 나뉘어 질투와 분쟁을 일삼고 있었는데, 그들이 아직도 사람을 따라서 걷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고전 3:4).
“분쟁(strife)”이라는 단어(에리스)는 “다툼”, “불화”를 뜻합니다. 영어 성경들에는 “투쟁”(strife), “논쟁”(debate)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인간 사회는 가족 안에서도, 가령 부부 사이에도 몰이해로 인한 갈등, 형제 사이에도 부모의 편애로 인해 시기와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42)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떤 모임이든지 다툼이 생겨나기 쉽습니다. 누군가가 탁월하면 부러움과 동시에 시기심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43)
현대사회에는 협력보다 경쟁이 개개인을 더욱 발전시킨다는 신념으로 우리를 무한 경쟁에 내몰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파울은 경쟁이나 분쟁을 좋은 덕목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경쟁보다 서로 협력관계가 더 유익한 것입니다. 파울은 “시기”와 “분쟁”이야말로 공동체를 와해하는 문제로 봅니다.44)
아폴로를 따르는 자들과 파울을 따르는 자들 사이의 분쟁이 있었는데,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폴로에 호감을 느끼고서 따랐던 것입니다.45)
그들은 아폴로를 통하여 원하던 지혜를 얻게 되었다고 자랑을 했으며, 그러자 다른 쪽에서는 자신들이 파울에 속했다며 분쟁이 생겼습니다.46)
아폴로는 필로의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필로는 그 당시 최고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사람입니다.47)
아폴로는 그 당시 문화적 중심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사람으로서, 그는 언변에 능하고 지혜도 풍부하였을 것입니다.48)
이방인 고린도 사람들이 지혜로운 말을 전하는 아폴로의 매력에 빠져, 자신을 아폴로파로 자칭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49)
파울과 아폴로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그룹의 지도자들이 아닙니다.50)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는 두 파로 나뉘어 다투고 있었습니다.
1) Kenneth E. Bailey,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김귀탁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7), 149.
2) David E.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BECNT 성경주석, 조호영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9), 123.
3)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23.
4)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23.
5) Gordon D. Fee, 『NICNT 고린도전서』, NICNT 성경주석, 최병필 역 (서울: 솔로몬, 2019), 143.
6) Fee, 『NICNT 고린도전서』, 144.
7) 권연경, 『오늘을 위한 고린도전서』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22), 106.
8) Bailey,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150.
9) 권연경, 『오늘을 위한 고린도전서』, 108.
10) 권연경, 『오늘을 위한 고린도전서』, 110.
11) 홍인규, 『바울 신학 사색』 (용인: 킹덤북스, 2010), 272.
12) 홍인규, 『바울 신학 사색』, 274.
13)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35.
14)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35.
15) Fee, 『NICNT 고린도전서』, 149.
16)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35.
17) Fee, 『NICNT 고린도전서』, 151.
18) Fee, 『NICNT 고린도전서』, 151.
19)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35.
20) Fee, 『NICNT 고린도전서』, 151.
21) Fee, 『NICNT 고린도전서』, 152.
22) Fee, 『NICNT 고린도전서』, 154.
23)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37.
24)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38.
25)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39.
26)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40.
27)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41.
28)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42.
29)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43.
30) Fee, 『NICNT 고린도전서』, 160.
31) 권연경, 『오늘을 위한 고린도전서』, 117.
32) Fee, 『NICNT 고린도전서』, 160.
33) Roy E. Ciampa and Brian S. Rosner, 『바울서신』,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이상규 옮김 (서울: CLC, 2012), 76.
34)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43.
35) Bailey,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157.
36)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43.
37) Fee, 『NICNT 고린도전서』, 161.
38) Bailey,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163.
39) Bailey,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157.
40) Bailey,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159.
41)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53.
42) 김판임, “바울파와 아볼로파, 고린도교회 분쟁의 실상에 관한 연구”, 『대학과 선교』 제20집 (2011): 183.
43) 김판임, “바울파와 아볼로파, 고린도교회 분쟁의 실상 연구”, 183.
44) 김판임, “바울파와 아볼로파, 고린도교회 분쟁의 실상 연구”, 184.
45) 김판임, “바울파와 아볼로파, 고린도교회 분쟁의 실상 연구”, 195.
46) 김판임, “바울파와 아볼로파, 고린도교회 분쟁의 실상 연구”, 195.
47) 김판임, “바울파와 아볼로파, 고린도교회 분쟁의 실상 연구”, 195.
48) 김판임, “바울파와 아볼로파, 고린도교회 분쟁의 실상 연구”, 197.
49) 김판임, “바울파와 아볼로파, 고린도교회 분쟁의 실상 연구”, 198.
50) Garland, 『BECNT 고린도전서』, 160.

첫댓글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으니라(잠 26:10).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