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장사 선발전
박윤일
특별히 너에게만 들려줄게. 자정 넘은 퇴근길 눈꺼풀이 무거울 때 버스 뒷좌석에서 알고리즘 따라 보았던 이야기. 멋쟁이새가 귀룽나무 새순 따먹는 장면에서 잠이 들어 퇴근마다 처음부터 다시 보는 이야기
설악 바위산에 힘센 장사壯士 여럿 있는데, 그중 내가 뽑은 베스트 장사를 소개할게. 태백급 장사는 복수초란다. 쉽게 오지 않는 봄을 알리며 들배지기 기술로 얼어붙은 땅을 힘껏 들어 올리지. 금강급 장사는 개미야. 제 몸보다 몇 곱이나 큰 깽깽이풀 씨앗을 배지기 기술로 멀리까지 끌고 가지. 그다음 한라급 장사는 솔잣새란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높고 단단한 솔방울을 조그만 부리로 깨뜨려 독차지해. 백두급 장사는 목숨 내놓고 절벽만 상대하는 산양이야. 근육 섞인 몸집이 낭떠러지에 매달린 그림자보다 훨씬 크단다. 이제 마지막으로 무제한급 장사가 남았는데, 이 체급의 승자를 우리는 천하장사라 부르지.
가장 높은 곳에 사는 바람꽃이 가장 낮게, 가장 늦게 피는 것을 아는 설악산 짐꾼이 있는데, 그가 내가 뽑은 무제한급 우승자야. 85킬로그램 냉장고를 지게에 지고 두 시간 거리 울산바위까지 괭이밥꽃 질 무렵에서야 배달한단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계조암까지 300개의 계단이 더 남았을 때쯤 나는 또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깜빡 졸지만, 지팡이와 한 몸이 된 짐꾼의 거친 숨소리에 다시 눈을 뜨곤 해.
그런데 말이지, 이보다 더 힘센 장사를 나는 알고 있어. 천하장사도 세상에서 제일 무겁다는 눈꺼풀을 매일 밤 장미란이 역기 들어 올리듯 번쩍 들어 올리는 작은 꽃. 빨리 퇴근하려고 콜라 시럽을 두 박스나 한꺼번에 들어 옮길 때마다 나는 생각해. 태산만 한들 들 수 있는 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던 작은 꽃봉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 그 버거운 짐을 지고도 꼿꼿하게 서서 자정을 넘기며 말없이 빵을 굽는, 너도 알고 있는 그 꽃.
계상정거도*
밤새 근육통을 앓은 날씨
먹다 남은 두부가 식탁에 놓여 있다
이황이 머물던 진경산수를 헐값에 장만했다더니
그는 천원 속 암자까지 신발도 없이 걸어갔다
빈센트의 구두 한 켤레 문 앞에 그대로 있다
그는 폐지를 줍는 사람
손수레 가득 빈 상자들의 자리싸움
사발면 위에 초코파이까지 얹으니 천원이 석 장
언제 저리 관직 마다한 귀한 소나무 심고
물고기 뛰노는 전원주택 지었을까
식탁에 놓여 있는 정원 한 장은 낙화의 시간을 지나왔다
폐품 넘쳐흐르는 밤의 강가에서
나룻배 가득 지폐 석 장 싣고 당도한 곳은 먹빛 바랜 집
창문에 방충망 걸어놓은 거미가 밤새 먼지 세는 곳
미처 끄지 못한 변방의 촛불을 읽는 곳
상한 두부는 그 자리에 두어도 좋다고 적혀 있다
그는 풍경화의 소실점 되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
꼬깃꼬깃 구겨진 구름 한 점과
허공의 소유권 다투고 있을지도 모를 일
*溪上靜居圖 겸재 정선의 그림. 천원 뒷면에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