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옷 한 벌 못 사줬어
나는 요즈음 옛날의 일기장을 뒤적거린다. 만났던 사람들이 툭 던지듯 한마디 한 것들이 의외로 강한 깨달음이 되어 돌아온다. 몇년전 친구의 집을 찾아갔을 때 친구부인이 내게 하소연하듯 던진 이런 한마디를 일기장의 귀퉁이에서 봤다.
“남편은 지금 이 나이에도 앞으로 돈이 없어 힘들지도 모르니까 긴축해서 살자는 거예요.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저이는 어려서 가난하게 살아서 그런지 그 버릇을 늙어서도 고치지 못하는 거예요.”
왜 일기장의 구석에 밑도 끝도 없이 그 한마디가 쓰여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부부는 둘 다 금융권 출신으로 억척같이 일해서 제법 재산을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가지고 있는 빌딩과 상가 임대료로 살고 있다고 했다. 부인은 커리어우먼이었다. 영어 실력이 뛰어나 외국계 금융회사의 뉴욕 본사 임원까지 승진했던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처녀때 은행원으로 있다가 금융회사에서 일하던 친구와 만나 결혼을 했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그 부인은 남편에게는 절대복종하는 순종적인 여성이었다. 혹시나 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항상 조심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 됐다. 그러면서 남편의 심정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오래전 친구인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말이야 아버지가 정치 바람이 들어 온 가족이 고생을 했어. 아버지가 의원으로 출마하는 바람에 우리집이 가난해 진 거야. 끼니가 없어 콩죽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그런 아버지가 쉰여덟살 때 암에 걸렸어. 여러 장기로 암이 전이됐는데 마지막에 너무 아파하셨어. 지금 우리보다도 나이가 훨씬 어릴 때 가신 거지. 어머니하고 형제들만 있는 집에서 난 장남이었어.”
친구는 고향 부근에서 천재로 소문이 났었다. 독학으로 서울의 명문고와 명문대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금융회사에 들어가 무섭게 일을 했다. 카리스마가 있던 친구였다. 사람들이 그 주위에 모이면 자연스럽게 부하가 되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피를 받았는지 나름대로 야망이 커 보였다.
그는 생활에도 무서운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십년 만에 그를 만났을 때였다. 그는 자기가 밥을 해 줄테니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동네 재래시장에 가서 장을 보았다. 대파부터 고기까지 세심하게 품질도 살피고 가격도 따졌다. 살림꾼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어려서 돈이 없어 콩죽을 먹었다는 그는 돈 쓰는데 무서웠다. 그 버릇은 부자가 되어서도 버려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아내의 하소연이 그거였다. 그런데 그 무렵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아내에게서 암이 발견되고 몇 달 후에 그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음을 막연히 예감하고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그 부인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매일 아내의 텅 빈 방을 보고 운다고 했다. 우리 세대의 한 모습일 것이다. 죽은 뒤의 돈은 의미가 없다.
삼십대 중반 무렵 내가 가끔 보던 고교 선배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들은 가정보다는 직장이 우선이었다. 사회에서의 지위가 먼저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날 그 선배가 슬픈 표정으로 내게 털어놓던 이런 얘기가 내 기억의 창고 구석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집사람이 아직 젊은데 암에 걸렸어. 입원해 있는데 내가 퇴근하고 매일 병원으로 가고 있어. 아내가 장작개비 같이 바짝 말라서 누워있는 걸 보면서 자꾸만 눈물이 흘러. 일한다는 핑계로 맨날 술 먹고 밤에 늦게 들어갔어. 밖에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아내한테 막 해대기도 했지. 시간을 내서 어디 외식을 하러 가지도 않았어.
나는 나만 아는 철저한 이기주의자였지. 그런데 막상 죽어가는 아내를 보니까 왜 제대로된 옷 한 벌 사주지 않았나 하고 후회가 막심한 거야. 아내는 영원히 내 옆에 있을 줄 알았지. 그리고 아직도 젊잖아? 난 매일 병원 앞에 있는 벤치에 가서 울어.”
그의 슬픔이 그대로 내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 정말 중요한 게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가는 아내에게 옷 한벌 못 사입힌 게 후회가 된다는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입지 않고 먹지 않고 지독하게 살았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미군 부대에서 버린 옷을 사다가 입었다. 그렇게 사 온 어머니의 외출복이 특이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간호사복이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는 옷이 없어 학부형 모임에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학교로 온 걸 한번 본 적이 있다. 장농속에 있던 낡은 한복의 접힌 선이 어머니의 등 뒤에 그대로 나 있었다. 옷을 넣어둔 장농의 좀약 냄새와 옷을 접은 선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왜 자신을 위해서는 옷한벌 제대로 사입지 않았을까. 아들인 내가 어머니의 옷을 사준 적이 없다. 생각을 못했었다. 어머니는 항상 주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내가 변호사를 개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하루는 아내를 데리고 명동의 고급 의상실로 갔었다. 고교동기의 누나가 경영하는 곳이었다. 이름난 패션디자이너인 친구 누나는 신상품을 몇 벌 앞에 펼쳐놓았다. 아내는 고르기를 주저했다.
“여기 내놓은 것 다 주세요”
내가 의상실 사장에게 말했다. 그 순간 아내는 당황하고 의상실 사장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나는 돈을 움켜쥐지 않기로 했다. 쓸려고 버는 것이다. 쓴 만큼만 내 돈이다. 이 글을 쓰는데 딸에게서 안부 전화가 왔다. 문득 생각이 떠올라 말했다.
“이제 학기가 시작되면 강의하러 갈 텐데 아빠가 옷 한 벌 사주면 어떨까?”
[출처] 아내에게 옷 한 벌 못사줬어|작성자소소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