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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석할 교회를 어떤 기준으로 고를 것인가?
한국의 지하철에서 자주 듣던 말들 중의 하나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십시오! 였습니다. 그런데 집 가까이에 여호와의 증인 왕국회관을 두고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 교회에 나가야 할까요? 안식일 교회 집 근처에 있는 사람은 안식일교, 전도관도 기독교라고 주장하니까, 전도관 근처의 사람들은 전도관으로, 몰몬교회, 신천지다, 대성교회다, 안상홍이다, 옆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 교회에 나가면 되겠습니까? 간통목사의 교회 옆에 사는 사람은 간통목사네 교회로 가면됩니까? 그런 기준으로 교회를 고르라면, 아마 교통비는 조금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선택과 추구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출석할 교회를 선별하는 것은 영원한 집을 고르는 것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일반 주택을 고를 때에도 상당한 시간을 쏟아서 선택합니다.
영원한 집을 고를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1. 교회 선택에서 점검해야할 가장 기본적이며 필수의 요건은
그 교회가 구원의 진리, 거듭남의 진리를 증거하고 전파하고 있는가? 입니다. 이 점검 사항은 현대의 거의 모든 교회가 충족시키고 있는 줄로 많은 분들이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은 가보면, 예수님을 믿으라는 진리는 전하지 않고, 성경 몇 줄을 읽은 다음, 교회에 열심히 나오라, 헌금내라, 건축해야 한다, 교회에 사람들 불러오라, 목사에게 충성해라, 그리고 기독교 위인 이야기나, 세상 속담, 정치기사, 시사평론 등을 말해줍니다. 그들의 신념중에는 예배당에 다니기로 결심하면 이미 거듭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 개인과 하나님사이에 서로 아는 관계가 성립되는 거듭남이라는 것을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어쩌다 기독교 복음이며, 십자가 이야기를 말하기도 하지만 헌금내라는 말처럼 힘있게 전해주는 것도 아니며 별 특별한 해석을 해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교회들이 말하는 “ 예수 믿으세요!” 는 실제로는 교회당 나오세요! 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았고, 그분의 피가 죄값을 지불했다는 진리를 믿고 성령님을 모심으로 거듭나서 변화되는 삶을 사는 것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아를 못믿는다는 것이며, 자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 교회가 가르칩니까? 교회에서 참석자들에게 구원 얻어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하고 가르치는가? 아니면 예배당 다니기 시작하면 구원얻은 것이야!, 교회 다니기로 했으면 거듭난 것이야! 하고 가르칩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인간 내면의 문제이며, 성령님께서 내주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한 기본적 점검사항이 될 것입니다.
2. 다음으로 고려할 사항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중요하게 명하신 바가 지켜지고 있는지 여부일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침례와 성만찬입니다.
침례는 믿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음으로 선언하고 공표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세례로 대체될 수 없으며 그런 까닭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목숨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침례는 예수 믿는 믿음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첫 증거행사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유언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물을 이마에 몇 방울 떨어뜨리는 세례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됨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로마서 6:1-6)
빌립이 이 침례가 중요함을 가르쳤으므로 이디오피아 여왕의 신하는 침례를 받고자 하는 소망을 나타냈으며, 빌립은 침례의 조건으로 전심으로 믿는 믿음이 필요함을 말했고 그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물속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사도행전 8장
36 그들이 길을 따라 갈때에, 어떤 물에 이르니, 신하가 말하기를, “보라, 물이라. 무엇이 내가 침례받는 것을 막나이까? ” 37 필립이 이르기를, “ 당신이 온 마음으로부터 믿으면, 당신이 합당하니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것을 믿나이다.” 38 그가 병거(마차)가 서도록 명하고, 필립과 신하가 물속으로 둘이서 내려가, 저가 그를 침례하니라. 39 그러나 그들이 물속으로부터 올라왔을 때에, 주의 영이 필립을 취하여 가시니, 그 신하(내시)가 저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으나, 그가 자기의 길을 기뻐하며 갔더라.
그 신하는 세례로 충분하였다면 왜 물속에까지 들어갔다가 나왔겠습니까?
성만찬 또한 십자가의 사실을 증거하며 기억하게 하는 믿음의 행사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자주 실행하였음을 가르쳐 줍니다(고전 11:25, 26)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은 이 주님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행사를 자주 실행하기를 거부하여 일년에 두번 정도로 줄이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성경 번역은 이 성만찬을 드물게 실행하기 위해 자주라는 단어를 고전 11:25절과 26절에서 두번 빼버렸습니다. 그러나 영문 킹제임스 성경은 As oft as 등의 표현으로 자주라는 뜻을 반영하였습니다. 이는 원어문 그리스어의 호사키스라는 단어에 자주의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일요일에 모이는 목적이 떡을 떼기 위함이었음(행 20:7)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대신 인간들의 설교들로 대체해버렸습니다.
저는 여기까지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최소한의 점검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사항들도 잘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 출석할 교회를 택함에 있어서 인간이 머리가 되어 있는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로 계시는지를 분별해볼 수 있다면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골 1:18, 엡 1:22, 23, 엡 4:15, 골 2:19)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들이 앉아있습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무슨 결정을 할 때에 주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묵상해보겠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고, 목사님이 무어라 하시는데요? 혹은 목사님께 여쭈어 보았어요? 합니다. 그안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서 찾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일인목회는 사탄이 들여온 술책에 불과합니다. 목사제도와 신학교는 성경에 전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상세는 본 카페의 공지에 나와 있습니다.
4. 교회의 강단은 성령님께서 쓰시는 사람에 의해 사용되어 성령님께서 전달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전달될 수 있어야 합니다.고린도 전서 14장 29-30절은 예언하는 자(설교하는 자)는 두 세사람이 말하고 다른이들은 분별하라고 하셨으며,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하던 이는 잠잠하라고 말씀하심으로, 강단이 어느 특정인에게 독점되지 않는 것임을 알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에서 강단은 목사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으며, 그러한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오신다 해도 설교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신학교 졸업자도 아니고, 신학교 중퇴자도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런 교회들에서 예수님의 영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심을 찾아보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5. 교회는 헌금에 관하여 올바른 교훈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헌금이란 예배행위의 일부로서 진정으로 주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십일조를 강조하며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강도라고 공갈 협박하는 교회는 나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십일조는 폐해졌습니다!
십일조는 성전제사에 관한 율법의 일부로서 모든 성전제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되고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레위제사장들이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과 죽으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귀한 제사장들입니다( 벧전 2:9, 계 1:6, 5:10) 따라서 성도들 모두가 제사장들이므로 어느 특정인물을 위하여 십일조할 필요도 없고 대신 교회 전체를 위하여 넉넉한 연보가 실행되면 되는 것입니다.
우선 헌금액을 공개하여 교인들에게 헌금을 은근히 강압하는 형태를 취하는 교회, 헌금의 종류를 여러가지로 만들어 영업하는 교회, 헌금자 명단을 기록하는 교회 등은 맘몬( 재물 숭배)교회로 타락한 것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왼손이 하는 구제를 오른손이 모르게 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헌금은 고후 9장 7절에 나왔듯이 1)마음에 정한대로 2) 인색함으로나 억지로가 아닌 3) 즐겨 냄으로 드리는 것이며 또한 고전 16장 2절에서 말씀하신 바처럼 규칙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헌금은 성도들을 평균케 하기 위하여 쓰여져야 합니다(고후 8:14-15).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헌금의 40% 가량을 교회 목사와 교역자들의 급여로 쓰이고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은 각자가 자기 손으로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가르칩니다(살전 4:11,12, 살후 3:8-11) 즉 각자는 자기가 일하며 전도하는 것이 원래 성경의 기본이었습니다.
물론 교회가 여유가 생겨서 교회안에 전심사역자를 둘수 있게된다면 그들의 생활비를 공급하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이것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그 경우에도 교회 성도들의 평균 소득을 상회하는 수준에 그쳐야지, 오늘날 군림하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처럼 거액을 지불하는 한편 그런 교회안에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전혀 돕지도 않고, 그들에게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돈을 강탈하는 것이라고 공갈 협박하는 형태를 취해서는 하늘에 계신이가 웃으실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한국의 형제모임들은 교회 뒤에 헌금함을 놓고 일년내내 한번도 헌금을 독촉하는 설교도 없고, 모든 헌금은 무기명으로 실시하면서도 그들의 모임들이 성경적으로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일입니다.
5. 이외에도 다음의 사항들을 고려하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묘히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교회들, 지옥 형벌이 없다고 가르치는 자들, 종교 다원주의를 가르치는 교회등 또한 당연히 피해야 할 것입니다.
출석을 검토하는 교회의 과거 역사가 깨끗하였는가? 그들의 교리는 역사적으로 검증되었는가? 이것은 결국에는 오늘날 모든 진정한 기독교의 뿌리가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카톨릭 밖에 있던 수많은 교회 모임들이 있어서 항상 카톨릭에 저항하며 맥을 이어왔다는데까지 이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교회들로는 당연히 침례교회들을 들수 있습니다. 형제단, 소위 형제모임이라는 모임들도 결국은 이러한 침례교도들의 한 분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마 23:8)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니라, 하신 말씀대로 형제 자매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집사님, 집사님 하고 부르는 교회이며, 목사에게 형제님이라고 불렀다가는 그 목사가 눈을 부릅뜨는 것을 보아야 하는가? 이 점도 고려 대상입니다만 많은 침례교회들은 목사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거부한 모임들이 바로 형제모임들입니다.
목사제도는 원래 성경에 없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로는 장로와 집사가 있을 뿐입니다. 이들의 자격요건은 디모데전서 3장 1절부터 13절까지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자격요건에 따라 사람들을 선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자격요건이 없어도 신학교 출신이면 성경에 있지도 않은 목사가 되고, 목사로서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가? 또 딤전 3장의 자격 요건을 갖추었어도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으면 감독( 장로)의 사역을 맡을 수 없는가? 도 점검 사항이 될 것입니다. 여자들은 교회의 예배시에 머리위에 덮어쓰라고 가르치십니다(고전 11:1-16) 이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머리를 빡빡 밀라고 가르칩니다(고전 11:6). 오늘날 이 말씀을 순종하는 교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소위 형제모임이라 불리우는 교회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뿐아니라, 형제모임들을 방문해보면, 위의 모든 점검사항들에서 방문자는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성령님께서 끊임없이 개혁하시고 변화시키시며 바로 잡아가는 교회를 좇아야 할 것입니다.
위의 1,2항을 고려하시면 최소한 침례교회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머지 부분들에까지 충실한 모임들로는 형제모임을 들수 있겠습니다. 신약교회 2천년 동안 성령께서는 카톨릭 밖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들을 헤우셨으며 그들은 몬타누스파, 파울파, 노바티안, 도나티스트, 네스토리안, 보고밀, 알비, 서부독일 형제단, 재침례파, 왈덴지안, 모라비아 형제단, 메노시몬파, 등 수많은 침례교도들과 형제단들을 보전해오셨으며 이들은 로마 카톨릭에 굽히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역사배경을 알고 교회를 선택한다면 현명한 판단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최종 선택에는 개교회, 지역교회를 직접 방문해보고 교제한 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2013. 3. 30. 하토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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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친 것으로 나오는데 그러한 주장 자체도 잘못이지만 어떤 교주를 두는 식의 조직 운영 부터가 잘못이라 믿어집니다. 우리의 교주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소중한 대답, 감사합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쭙니다. 사도들로부터 직접 복음을 전해받았던 디모데 등의 세대까지는 성경 기록으로 보건대 "아무개 집에 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집에 있는 교회"가 별도의 모임 장소를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어느 때 부터였고 또 거기서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종전의 신앙생활 등과 어떻게 달라져 있었는지도 혹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저는 교회가 좋은 건물을 소유해야 하느냐? 가정집에서 모이는 모임의 형태를 유지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가정집 모임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살펴보고 옹호해왔지만 그렇다고 모임이 가정집의 모임을 유지해야 하고 건물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공격적 입장에서는 살펴보지도 않았고 주장하여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에 몇가지를 더 밝히는 것이 독자 여러분들에게 유익하리라고 생각되어 써봅니다.
신약교회가 맨 처음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전에도 역시 주님의 만찬을 다락방 카타루마에서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카타루마에 있을 곳이 없어서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룩 2:7) 그런 그분께서 마지막 만찬을
카타루마에서 가지신 것은 기억할만 합니다(룩 22:11) 카탈루마는 여관이 아니고 가정집의 손님방을 말함이 고대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를 연구한 고고학자 고든 프란즈의 증언이었고 일반적 사리로도 납득이 가는 해석입니다.
그런 곳에서 제자들이 모여서 첫 집회를 가졌고 그 이후에도 가정집에 모엿음은 행 2장 42-46절을 볼때 뒷받침된다 할 것입니다. 이후로 골 4장 15절에 나오는 뉨파의 집과 필레몬 1장 2절의 가정집 모임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의 모임(고전 16:19) 등에서 가정집 모임은 충분히 변증된다고 믿어집니다.
따라서 건물이 커야 주님을 섬긴다거나 건물이 아름다워야 주님을 잘 섬긴다는 주장은 오늘날 타락한
현대교회를 감안할 때 설득력도 없거니와 오히려 반증된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누군가가 모임이 가정집에서만 모여야 한다고 그것을 공격적으로 주장한다면 그런 사고 방식은 형제모임들중 배타적 모임들이 취하던 편협한 사고라고 방어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그분의 진리와 정결함과 사랑과 온유함과 은혜 그리고 정의의 심판과 사법 정의가 실행되고 충족되는 한 풍요하고 넉넉함을 누리게 함에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리라고 믿어집니다.
이제 몇 가지 예를 들면,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기록합니다(행 11:26) 이들이 가정집에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큰 무리라는 말을 축소시키는 해석이며 잘못된 해석입니다. 다음으로 행 21장 20절에 보시면 예루살렘에도 믿는 자가 수만명에 이르렀다고 증언합니다. 그 많은 무리들이 꼭 가정집들에서만 모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
이제 더욱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한 증거는 야고보서 2장 2절에 있습니다. 분명히 그 회당이라는 단어는 시나고게의 번역입니다.
이것은 가정집이 아닙니다!
반대로 카탈루마는 가정집의 손님방, 사랑방, 객실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회당이 오늘날에도 건재하듯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던 사람들이 회당을 사용했음은 분명히 증거됩니다.
역사적으로 초대교회 이후부터 노바티안까지의 기간들중에 모임들이 어떤 장소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까지 충분히 살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몇가지 아는 것은 오늘날 카톨릭의 모체가 되는 많은 교회들은 로마 제국내의 미트라 사당이나 점쟁이들의 신당 등을 물려받아 혹은 그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건물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증거들이 로마시내의 건물 지하등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노바티안등의 무리들은 적은 무리로서 가정집에서 모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나름대로의 건물들을 소유하였을 것입니다.
도나티스트들은 북아프리카에 큰 기반을 몬타니스트들 때부터
물려받았다고 하는데 그들은 북아프리카에서 큰 무리들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아침례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밀레비 공의회가 그 지역에서 열렸고, 유아침례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아나떼마 ( 저주를! ) 가 내려졌습니다. 도나티스트들이 성전 절도죄니 여러 비방을 들은 것은 그들에게 회당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사상 어느 유력한 그리스도인도 교회의 모임이 반드시 가정집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고 믿어집니다. 대신 가정집에서 모임을 시작하고 상당기간 유지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믿어집니다.
형제모임에서 모임의 규모를 크게 유지하지 않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영적으로 타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큰 모임 규묘를 유지하면 그 안에서 성도들간의 교제가 깊이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수가 많으면 너는 왔니? 나는 간다. 로 끝납니다. 또한 기여하고 참여함도 부족해지며 영적 성장을 빨리 이루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모임이 작은 경우에는 참여자들이 한결같이 헌신해야 하며 서로의 사정을 훤히 알고 만찬 예배시에 모든 형제들이 찬송과 기도와 말씀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모임에서 모임 규모를 대략 100- 200 명 미만의 침례받은 자들로 생각하는 것은 타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건물을 임차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들이 오직 작은 건물만 사용해야 함도 아닙니다. 만일 아주 큰 규모로 교회가 유지되어도 성도들간의 교제가 원활히 유지될 수만 있다면 그리해도 될 것입니다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점에서 적정선을 유지하면 되는 것이며, 모임들이 너무 세세한데까지 규제하거나 규제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어집니다. 많은 부분들은 지역모임들의 자유 재량에 맡겨져야 한다고 믿어집니다.
여기 앞서의 댓글들에서 익스클루시브 형제모임의 분열상에 대해서 언급되었습니다. 그것들이 주는 역사적 교훈은 익스클루시브 모임들은 너무 세세한데까지 간섭하고 믿음의 자유를 박탈한데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은 믿음의 세부적인 것까지를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믿어집니다.
성경은 분명히 목사제도와 세례를 배격합니다. 또한 주님의 만찬의 자주실행과 머리수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호칭도 가르치는 바입니다. 또한 성경적 복수 장로제와 그 선임요건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지키는 외에 가급적 자유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무지한 저를 위해 기꺼이 수고를 해주신 것에서 감동을 느낍니다. 궁금함의 대부분을 풀었습니다. 저 역시 "~집에 있는 교회"를 이상적으로 고집한 면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교회"에는 분명 '있어서는 안되는 것'과 '없으면 안되는 것'이 있는데 "~집에 있는 교회"에서 "교회당 교회"로 옮겨가는 동안 그 두 측면이 심화되었으리라는 유추를 합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외부적 핍박이 목숨까지 요구했던 초대교회 시대와 그렇지 않은 오늘날의 "교회"의 존재형식에 대해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할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에 더 천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카타콤도 그것이 거주지였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곳에 예배와 모임을 위해 모였을 것입니다.
제가 시나고게 를 증거로 제시한데는 얼마전 메시아 유대인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기독교가 잘못 오해하는 것들을 바로 잡아가고 있는데 상당부분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나고게는 분명 에클레시아와 구분되는 말이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거듭난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지만 시나고게는 바로 그 거룩한 모임이 소유하는 부동산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고, 가정집은 아님이 분명하거니와 유대인들의 모임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기록도 분명합니다.
세힘님 덕택에 몇가지 측면에서 교회가 건물이 아닌 사람들임은 더욱 분명해졌거니와 큰 건물 지향이 아닌 것과 가정집이라도 모임 장소로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등은 더욱 분명해졌으리라고 믿어집니다. 제가 그런 가정집 모임체제에 충분한 길을 열어놓고 싶어하는 큰 이유는 앞으로 다가올 크나큰 환난의 시대에는 건물 중심의 대형 교회들로는 결코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대신 가정집 중심의 작은 모임들이 끝까지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형 건물이나 건물 중심의 교회 형태는 지속적이라기 보다는 허용되는 시대에 누릴 수 있는 한 형태 정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무리한 제재가 될 것입니다. 허용된다면 굳이 못 누릴 이유가 없지만 교제에는 너무 크면 인간적 교제는 사라진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대환난 이전에도, 오늘날 가정집 집회 체제가 유효한 곳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우디 아라비아 입니다.
그곳의 형제단들은 수없이 산재해 있는데 가정집에서 모인다음 조용히 사라집니다. 그것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별 문제 없이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고 건물 짓고 간판 건다면 당장 충돌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미트라 사당은 바로 페르시아의 미트라 종교를 의미합니다.
로마 카톨릭이 미트라 종교를 많이 닮았다는 지적은 무수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아마 건물 면에서 그러할 것입니다. 의식 예식 면에서는 이집트 종교와 바빌론 종교를 닮았고 건물면에서는 아마도 미트라 종교를 닮았을 것입니다.
바티칸은 원래 점쟁이의 집이었으며 그 이름의 뜻이 점집이었다는 글은 여기에 올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뱀으로 점을 쳤던 곳으로 보입니다.
하토브 님의 원모심려에 경의를 표합니다. 제가 "거듭난 무리의 존재형태"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히 여기시는 뜻"이 무엇일까 하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다"는 믿음이 맞다면, 오늘날 성경 말씀에는 거론조차 되지 않은 "교회당"과 교회당이 없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는 "목사"에 의해 수많은 영혼들이 짓밟힘을 당하는 일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현재 교회당 건물과 목사를 보유하는 모든 "자칭 교회"들은 요14:26, 요일2:27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들입니다. 성경의 다른 말씀들 특히 십일조 관련 말씀은 과장과 억지를 부려서라도 금과옥조로 믿는 자(=목사)들이 왜 유독 이 말씀은 무슨 성경강해니 할 때에 "이 말씀은 교회에서 배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하느냐 말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자로서 양심이 화인 맞지 않은 목사라면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라는 말씀 앞에 굴복하고 그 '목사'라는 호칭을 내려 놓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목사가 아니어도 얼마나 훌륭한 형제자매님들이 많이 계십니까?
여기 쉐카이나 한 곳만 해도 얼마나 많은 귀하고 맑고 밝은 형제자매님들이 많으십니까. 또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얼마나 대단들하십니까. 목사제도가 성경과 관련 없다면 목사 그 자체는 얼마나 성경과 멀어진 것이겠습니까.
그런 그들이 "자칭 교회"를 꾸려내고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종 부리듯 하면서 그 뼈골을 빼먹는지 소위 교단을 꾸려낸 수완 좋은 자들은 대기업 회장들 보다 더 호의호식하며 무소불위, 무소불능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이 "교회당"이라는 건물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특히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작은 교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집단최면이 작동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들도 성경에 명시적으로 단 한 번도 거론한 적이 없는 "교회당"과 "목사"가, 진실로 참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고 또 믿는 모든 영혼들을 얼마나한 거짓과 궤휼로 속여왔고 또 속이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교회당이 없는 목사, 목사가 없는 교회당"은 언제든지 존재불능이므로 오롯이 "작은 교회 곧 지체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루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되찾고 되살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의 절대 명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저 스스로도 이 "교회의 존재형식"에 대해 성경 말씀을 따라 더 많은 묵상이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세힘님의 견해에 공감이 갑니다.
지난 일요일 낮에 전철 역에서 나오자니까, 중고등 학생들로 보이는 소년소녀들이, 삶은 달걀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몇 개 받아 쥐고 오면서도 (쟤네들이) '부활'에 대하여 알았으면 참 좋겠다고 하다가 마침내 그런 일을 위해 헌금한 부모들에 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아~, 거듭남이 없는 교회당!
삶은 달걀은 부화랄 수 없습니다..생계란이 오히려 타당할 듯합니다ㅎㅎ..달걀 나눠주는 행사는 대개 교회 차원에서 이벤트로 진행하는 것입니다..아이들은 그냥 길거리로 동원이 되지요.
일종의 봉사로 생각하겠지요..학생들은 주로 젊은 전도사의 지시를 따릅니다.
대형교회이면서 앞서 본문글에서 언급한 최소한의 요건들을 갖춘 교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제가 더 자세히는 모르지만, 부산 서교회라고 들었습니다. 그곳은 참석자가 2만명이 되는데,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백목사라는 분이 정신병자의 칼에 숨지는 사고가 있었던 것은 목사라는 한 사람에 의존하는 교회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목사는 분명히 복음을 잘 전했고 그곳의 어린 학생들까지 가족들의 구원에 대해 고민하였던 것을 보면 하나님은 그러한 모임을 사용하셨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외에 영국의 스펄젼이 설교할 때 2-3만명씩 모인 사실 또한 참고가 됩니다.
스펄젼은 분명히 복음을 잘 전했으며 그의 수백개 이상의 설교가 오늘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설교는 다음날 인쇄되어 전철역 등에서 1 페니에 팔렸습니다. 그가 서레이 대음악당에서 설교할 때 누군가가 불이야 소리쳐서 12명이 압사한 사고는 그의 평생 지우기 어려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영혼들이 그의 설교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그외의 다른 사람들이 영적으로 분발하지 못하였음에 비해 그는 부지런한 영을 소유했음을 말해준다고 믿어집니다.
그보다 작은 수이지만 존 번연이 모일 때 런던의 추운 1월 달 새벽 아침에도 1200 명 가량 모였다는 사실은
가정집에서 모이지
않았음을 증거한다고 믿어집니다.
존번연의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사역에 성령님께서 함께하셨다고 믿어집니다.
이제 성경에 충실한 모임들에 대하여 영적 제한이 명백하지 않는 한은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건물과 물질을 더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물질 거품들이 빠지고 나면 오늘날 거대한 기독교는 푹 줄어들 것입니다. 그것은 환난이 올때 쉽게 드러납니다.
교회 건물에 관하여 가정집이 아닌 회당 곧 시나고그 형태가 성경 야고보서 2장 2절에서 언급된 것을 보면 시나고게 가 교회 건물로도 활용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게된 것중의 하나는 1605년 중국의 카이펑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이는 것에 대한 허가를 받았고, 그 카이펑에 시나고그를 건설하였는데 건물은 안남았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림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카이펑에 가시는 분은 관광차 들르시면 좋을 것입니다. 제가 그림으로 본 카이펑 시나고게는 2층으로 한국의 대궐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청나라 시대에도 유대인들의 중국 집단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