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정 계곡에서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다보니 어느덧 해질녘이다.
혼자 떠난 여행길엔 언제나 그랬듯이 잠자리를 찾아야 할 시간이다.
계곡길을 되짚어 내려오는데 다리 건너로 방성애산장이란 팻말이 보인다. 산장에 자기 이름을 붙인 게 특이하여 핸들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돌려진다.
방성애산장(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낙천2리 750. 전화 033 563 6665 , 011 9738 5652)
언뜻 보기엔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대충 지은 듯한 집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와 황토로 시공한, 정성이 가득 깃든 집임을 알 수 있다.
산장주인 방성애씨
15년 전에 이곳으로 들어와 집을 짓고는 틈틈히 가꾸고 살폈단다.
요즘 유행하는, 돈을 많이 들여 지은 펜션이 아닌 구석구석에 오랜 세월토록 들인 정성과 생활이 보여 더욱 좋았다.
집주인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닿은 내부.
요란하게 꾸미지 않고 숲에서 나는 것들로 그냥 수수하게 장식(?)한 여러가지가 눈길을 끌었다.
여기는 시끌벅적한 걸 즐기는 사람들 말고 이름 그대로 그냥 쉬러가는 곳이다 싶다.
요즘 사람들은 휴식도 다시 싸우기(? , 살기) 위한 재충전, 어떤 목적의식을 갖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無爲自然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푹 쉬었다 오는 곳으로 가면 제격이다 싶다. 아름다운 산천에서 맑은 공기 마시면서 아무 생각 없이 며칠 푹 쉬고 싶은 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곳이다.
秘景을 찾아가는 길이라 들뜨서 그랬는지 밤을 보내는데 요긴한 술을 사지 못했었다. 산장여주인에게 술 있으면 한병만 팔라고 했더니 소주 한병을 건네준다. 돈을 주려했더니 손님들이 남기고 간 거라 받지 않겠다고 극구 사양하여 고맙게 받아들곤 잠자리를 찾아갔다.
벌써 꽉 차고 넘치는 8년을 함께 다닌 내 애마.
이렇게 사진 찍히기는 처음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수라도 좀 시켜줄 것을....게으른 주인을 만나 한달에 한번 씻기기도 어려우면서 산길로 바닷길로 팔도 구석구석을 안달린 데가 없으니 녀석의 팔자도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내 침실.
혼자 가는 여행길은 언제나 이렇게 차 안에서 잔다. 산으로 산으로 숲으로 숲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서 내가 켜는 불빛 말고는 달빛별빛만 있는 곳에서 밤을 보낸다. 방 정리가 안되어 있다. 얼른 정리(?) 해야지.
차안에는 야외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다.
오른쪽 차창에 매단 50L배낭에는 등산용품과 여행에 필요한 여러가지가 담긴 채 늘 차에 실려있다. 그래서 아내가 '언제나 집 나갈 준비가 돼있는 사람.'이라며 놀리곤 한다. 차 곳곳에 2인용 텐트, 야전삽, 톱, 전정가위, 약초괭이, 휴대용숯불구이판 등등등 하여간 필요한 모든 것이 있어 야외생활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
동행석에 떠억하니 자리한 내 벗들.^^
안으로부터 카메라가방, 오카리나가방, 중형 핫셀카메라가방이다. 물통은 야외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이다. 야외에선 일일이 물 뜨러 다니는 게 보통 번거러운 일이 아니므로 미리 한통을 채워두면 편하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좋은 물이 있으면 돌아올 때 한통 가득 받아와 차를 마실 때 쓰기도 한다.
저녁준비를 한다. 밖에선 김치 하나만 있어도 모든 음식이 맛있다. 그렇지만 산행경력 30년의 베테랑인 내가 그냥 김치 하나로 저녁을 끝낼 순 없다. 내가 개발한 야외메뉴인 쇠고기고추장찌개를 끓이고 새하얀 쌀밥도 짓는다. 산에서 먹는 밥맛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맛이다.
밥을 먹고나니 벌써 캄캄한 밤이다. 취사준비를 하며 밝혔던 가스등불빛이 어둠 속에서 화안하다.
숯불구이판을 꺼내어 갖고 간 햄을 은근한 숯불로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술안주다. 고기를 구우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많아 햄으로 대신한다. 평소엔 소주 석잔이면 다른 사람들 세병 마신 것과 같은 현상이 오기에 잘 마시진 않지만 이런 밤엔 아니 마실 수 없다.
산과 계곡과 술을 나누어 마시고 달과 바람과 별에게 오카리나를 불어줬다.
별이 총총했다.
아우라지에 들렀다. 정선군 북면 여량리.
굳이 행정구역을 들먹이는 이유는 여량,餘糧 때문이다.
산첩첩 골중중한 산골 중의 산골인 정선에는 논이 귀해서 처녀가 시집 갈 때까지 쌀 서말을 못먹고 간다는 곳인데 아우라지강변 옆으로 그나마 평지가 조금 있어 벼농사를 지을 수 있기에 여량, 곡식이 넉넉하다고 했단다.
예로부터 논 한마지기라 할 때 일반적으로는 이백평을 한마지기라 하지만 평야가 넓은 곳에선 삼백평을 일컬었고 평야가 좁은 곳에서는 백 오십평을 한마지기라고 했다고 한다. 심한 곳은 백평을 한마지기라고 했다는데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온통 뼝대(절벽)와 베루(낭떠러지기)인 정선이 그런 곳임에 틀림없다. 그런 곳에서 餘糧이란다. 양식이 남는단다.
아담하고 예쁜 아우라지역
아우라지역의 어름치카페, 기차 두칸을 이어 만들었다.
임계쪽에서 흘러 온 골지천을 가로지르는 아우라지강변의 다리.
구절리 쪽에서 흘러온 송천에 놓인 커다란 돌덩이로 만든 장검다리.
옛날에도 이 징검다리가 있었다면 아우라지처녀의 애절한 사연이 없었을 텐데.....
아우라지처녀 동상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강 건너 총각과 사랑하던 처녀가 동박 따러간다며 남 몰래 정을 나누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 총각을 못만나게 되자 안타까운 마음에 불렀다는 정선아라리다.
아우라지는 골지천과 송천 두 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다. 두 강이 만나 조양강이란 이름을 얻고 정선을 흘러간다. 영월쪽으로 갈 무렵 서강이란 이름을 갖다가 영월부터 동강이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충주쪽에서는 남한강을 이룬다.
돌아오는 길.
멀리 산쪽에 비구름이 가득하다.
한굽이 돌면 비가 오고 또 한굽이를 돌면 햇볕이 쨍하다.
어릴 적 경상도에 살 적에 해 나면서 비가 오면 '호랭이 장개간다.'고 했는데 중부지방으로 오니까 '여우가 시집간다.'면서 여우비라고 한 그 여우비다.
옛 적 우리 선인들이 범처럼 씩씩하고 믿음직한 서방, 여우처럼 꾀 많고 현명하여 살림 잘 하는 색시를 이상적인 가시버시로 생각하였음 보여주는 말이기에 씨익 웃고는 툭하면 길을 나서는 내가 그런 서방인가 생각해본다.
평창을 지난 무렵 막둥이에게 전화하여 안흥찐빵을 먹겠냐고 물었더니 신나라 한다. 안흥찐방을 사려면 길이 더 예쁜 38국도를 포기하고 42번 국도로 가야하지만 우리 예쁜돌이가 좋아할 걸 생각하니 덩달아 애비도 좋아 먼길 달려 면사무소앞 원조집에서 두 상자를 샀다.
차창에 어리는 빗방울이 도회의 그것과는 달리 맑은 초록이다. 이런 초록비 속의 운전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초록물 배어나는 산위에 걸린 구름들. 이 구름들이 초록을 실어가 곳곳에 초록을 뿌릴 것이다.
정선의 비경을 찾아 간 여행이 초록비를 맞으며 초록 속으로 다녀온 길이었다.
그 초록들 속에서 난 마음껏 행복했고 세상은 살아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참 화사한 날이었다.
첫댓글 와.... 이렇게 사진을 올려 주시는 마음에 일단 감사함을 전하구요, 가는 것 만큼이나 생생한 느낌을 살려 주신 글에 한번더 감사합니다....... 저도 혼자 어디든 잘 싸돌아 댕기는 채질이지만, 차 상태가 많이 다른데요? 제 차는 만6년 됐는데, 아직 세차 한번 한적이 없다는.... ㅋ ㅑ ㅋ ㅑ 맨날 뭔가 다득 실려서 타이어 펑퍼짐해 보이고... 쩝.....
그래, 세차 않은 게 퍽이나 자랑이다.ㅎㅎㅎ 거창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많을 텐데 꼭 가마. 사진찍기보단 불바비 보러!^^
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되는건데....................ㅜㅜ
어떻게?^^ 모든 인생은 나름대로의 가치와 즐거움이 있지 싶다.
한 일주일 혼자 그 곳에가서 푹 쉬고 싶네요~ 그냥 자연과 함께 말입니다~ 덕분에 너무 좋은 구경했어요~ 감사합니다
남의 눈 의식 않고 편히 쉬기엔 정말 좋은 곳이다 싶더군요. 여건 되면 한번 다녀오세요. 좋은 휴일 보내시구요.^^
와.. 우리나라에 저런 멋진곳이 있었군요.. 잘 보고 갑니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더구나.^^
오~ 너무 멋있어요~^^ 막 ... 떠나고 싶네요..^^
케빈맘님, 오랫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부군이랑 한번 떠나보세요.^^ 아, 방성애산장은 느낌이 여주인 혼자인 듯 싶더군요. 그래서 여자 혼자 가도 편하실 듯 해요.^^
네~ 꼭 그럴께요~~^^
저도 신랑이랑 한 번 떠나고 싶어지네요~~ 우리 아이들 다 키우면 전국여행을 떠나보자고 했는데...
'다 키우고'는 안되더라구요.^^ 억지로 짬 내어서라도 두분이서 다녀보세요. 부부 간의 정도 더 커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을 보는내내 마치 여행을 다녀온 것 같습니다. 좋은 풍경과 마음을 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요~
네, 고맙습니다.^^ 좋은 연주 잘 듣고 있습니다.^^
제 차에는 산에서님 장비에 삽, 곡괭이, 빠루, 오함마, 쌀푸대, 겨울잡바등이 더 있습니다. 언젠가 시골 가다가 검문에 걸렸는데.. 경찰이 내리라고 합니다. 한껀 잡은줄 아는 경찰이 신원조회 후에 한마디 하더군요~~ "저 혹시 도굴하러 다니는거 아니세요???"
이쁘게 정리해서 다니셔요~ 그럼 도굴꾼으론 안볼 것 같아요~ ㅎㅎㅎㅎㅎ
쇠꼬챙이까지 나와야 영락 없이 도굴꾼으로 몰리는건데..ㅎㅎㅎ 저도 산을 다니면서 간첩으로 오인 받아 한번은 지서까지 끌려 간 적이 있어요.-.-;;
산에서님께서 도~^^*
ㅋㅋㅋㅋㅋㅋㅋ 대장님 너무 우껴요ㅎㅎㅎㅎㅎㅎㅎ
와우~~~~ 멋지십니다 ^^ 마음에만 품고 있는 여행을 ...그리 맘껏 하시다니요....부럽기만합니다...^^ 근데 어떤분이신지 궁금해지네요....ㅎㅎ
사실 이렇게 떠나면 정말 좋아요.^^ 그냥 보통 중늙은이(?)이구요, 글번호 2067에 사진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