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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7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루카 21,12-19
박해가 아니라 박해 받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저는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신부들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기 있던 대부분 신부들이 저를 안 좋게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살이 아니라 ‘순교’라고 어떤 분은 저를 야단치듯 말했습니다.
저는 어쨌거나 ‘자살은 자살 아닌가?’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더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미국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낙태를 찬성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성체를 거부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 사제는 분명 바이든 대통령의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비난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도 저도 아닌 입장으로 박해를 피한 태도가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이런 일이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진짜 걱정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박해를 두려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박해를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당신의 제자들이 박해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 진정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 만약 마지막 때 원숭이들이 믿음이 생겨서 성당에 모여 성체조배를 한다면 박해할까요? 신기해서 구경하기 위해 많이 몰려들 것입니다.
박해받는 이유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주장함으로써 말입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2017)는 이런 세상 말기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세속-육신-마귀를 거의 신적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사랑의 계명을 말하고 실천하는 이는 박해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말을 못 하는 장애를 가진 비밀 정부 시설의 청소부입니다.
이때 그 정부 시설에서는 아마존의 수륙양용 인간형 생물을 포획합니다.
이 생물은 지역 주민들에게 신으로 숭배되지만,
가학적인 리차드 스트릭랜드 대령이 대표하는 미국 정부에 의해 잔혹한 실험을 당합니다.
엘리사는 그 생물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그녀는 수화, 음악, 음식을 통해 그것과 소통합니다.
점점 더 커지는 그들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 생물의 지능과 감정을 드러냅니다.
미국은 그 생물을 죽여 해부하여 군사력을 증가시키려 하고 러시아는 몰래 스파이를 시켜
그 생물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 엘리사는 청수부에 불과하지만, 그 생명체를 몰래 빼내는 작전을 수행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과 러시아의 적이 됩니다.
결국 리차드 대령의 총에 맞아 그 생물도 죽고 엘리사도 죽습니다.
조선시대 때 가톨릭교회를 믿는 이들이 왜 박해받았습니까?
그들이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하느님 뜻 때문이었습니다.
평등은 사랑입니다.
믿음은 곧 그 믿는 대상의 뜻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기득권들이 그들을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더 종말이 가깝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수많은 박해가 일어납니다.
20세기에 순교한 이들이 19세기 동안 순교한 이들을 다 합친 수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은근슬쩍 진리를 말하지 않고 그들 편에 서서 박해를 피해야 할까요, 아니면 박해 때 성령께서 말씀하시도록 우리를 맡기는 연습을 해야 할까요?
이때 주님 편이 안 되면 적들 편에 서게 됩니다.
이 시험의 때가 가깝습니다.
요즘 교회의 모습도 참 진리보다는 내가 믿는 정당에 더 큰 표를 주는 듯하기도 합니다.
박해가 아니라 박해를 두려워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더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7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21,12-19
강력한 경고의 배경에는 우리를 향한 간절한 사랑이 깔려있습니다!
같은 연배의 형제들이 모여 앉을 때마다 참 재미있습니다.
순식간에 세월이 흐르고,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세월의 폭탄을 제대로 맞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낄낄대며 웃기도 합니다.
한번은 탈모가 급격히 진행된 한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을 안 지키셨다고. 왜? 무슨 일인데?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안 지키셨다고.
그러나 시편 한 구절을 묵상하면서 위로를 받았다고. 또 무슨 일인데?
“제 죄악 머리카락보다 많사오며...” 나는 머리숱이 많이 사라졌으니 죄도 별로 없는게 아니냐고?
주님의 날, 종말, 재림 때의 최후의 심판...이런 단어들을 떠올릴 때마다 다가오는 느낌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공포, 두려움, 걱정, 안절부절...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예수님께서 지니신 두드러지게 우세한 특징 편안함, 따뜻함, 친절함,
포근함과는 전혀 거리가 머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래서 종말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보다 긍정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어찌됐던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잘 되기만 바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멸망하기보다 구원되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인내의 주님이십니다.
진정으로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아버지, 자녀를 극진히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자녀에게 어떻게 대합니까?
물론 자녀가 지닌 장점, 성공, 성취에 대해 크게 칭찬도 할 것입니다.
자녀의 부족함을 큰마음으로 감싸 안으며 격려와 위로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로 나아갈 때,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바보같이 처신할 때,
몹쓸 짓을 할 때는 당연히 강하게 혼도 내고, 불같이 화도 내고, 빨리 돌아오라는 마음에서 경고도 하고 질책도 할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때로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 안으시기도 하고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시기도, 때로 우리가 좀 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라고, 좀 더 크게 성장하라고, 그래서 더 확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라고 경고도 하시고 채찍질도 하시는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여러 가지 경고성 발언 앞에 두려워하기보다 그분 말씀 뒤에 감추어진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의 등 뒤에 서셔서 우리가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뒤에서 든든한 지지가 되어주시며,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8)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1. 27. 수)(루카 21,12-19)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2-19).”
1) 여기서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더라도 굴하지 말고 신앙을 증언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을 증언할 기회를 만
들어 주려고 일부러 박해를 일으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 박해는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복음 선포를 방해하고, 신앙의 증언을 막으려고 하는 범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는 곧 기회다.” 같은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데, 예수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박해와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굴복하지 말고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위기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전파됩니다.>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당시 신자들의 모습이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1ㄴㄷ.4).”
박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흩어졌지만, 신자들은 숨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 일은, “박해 덕분에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된 일”이 아니라,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한 일”입니다.>
2)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는, “인간적인 말재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하지 마라.”입니다.
<우리는 말재주가 아니라 ‘삶’으로 신앙을 증언해야 합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라는 말씀은, 어떤 특별한 말재주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노력할 때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도와주시겠다는 뜻입니다(마르 13,11).
따라서 이 말씀은, “너희가 ‘삶’으로 신앙을 증언한다면, 어떠한 적대자도 인간적인 언변이나 인간적인 지혜로는 너희의 증언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말’을 잘한다고 신앙을 더 잘 증언하는 것은 아니고, 복음 선포를 더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답게 잘 사는 것, 그것이 곧 신앙을 증언하는 것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삶’이 안 되면 ‘말’에 힘이 없습니다.
또 만일에 신앙인의 ‘삶’과 ‘말’이 다르면, 그것은 ‘위선’이고, 그 경우에는 복음 선포도, 신앙의 증언도 모두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3)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는, “미움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과 초대교회 공동체가
처음부터 미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ㄴ-14).”
만일에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이라면, 숨어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있겠지만, 선교활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만일에 실제로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신앙인을 미워하고, 박해자들에게 넘기려고 한다면, 아예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종말이 다가올수록, 믿는 사람들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가 더욱더
멀어지면서 박해와 탄압이 심해질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4)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어떤 고난과 박해를 겪더라도 참고 견뎌라.”입니다.
<신앙생활이 언제나 항상 고통만 있는 생활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인내해야 할 상황을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만일에 힘들 때에는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편안할 때에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 때에나 편안할 때에나 변함없이, 꾸준히, 끝까지 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