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주일 중 내가 몸을 가장 깊게 숙이는 시간
일주일 중 내가 몸을 가장 깊게 숙이는 시간은 대개, 일요일 오전이다. 휴일 아침목욕을 마친 나는 거실 유리창 바로 앞에 토요일자 신문 한 장을 펼쳐 놓는다. 빛이 풍성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신문지 위로 아직 물기가 스며있는 발을 올려놓는다. 그런 다음 동그마니 몸을 숙인다. 최대한 숙여 얼굴을 발 가까이 갖다 댄다. 한겨울에도 나는 집에서 좀체 양말을 신지 않는다. 나의 발뒤꿈치에는 내가 얼마나 맨발을 좋아하는지 나타나 있다. 까칠까칠해도 무엇을 바르지 않는다. 무엇에 무엇을 덧대고 치장하고 감추는 것은 몸이건 마음이전 싫어하는 성질머리가 있다. 불쑥 튀어나오곤 하는 까칠 한 성격도 발뒤꿈치와 닮은 듯하다. 발뒤꿈치에는 죽은 피부가 일주일 사이 켜켜로 쌓여있다. 그것은 새 살에 의해 내부에서 밀려나 제거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내 살이었던 희고 보드레한 것 들이 타조알 모양 기계에 의해 벗겨져 먼지처럼 쌓인다. 나는 고개를 한껏 숙여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며 정돈한다. 기계의 미세한 동력 소리와 폴폴 날리는 각질의 모습이 나란하다. 행여 부드러운 살갗에 닿을까 조심조심 집중한다. 세상 잡사는 나와 발뒤꿈치 사이에 낄 틈이 없다. 서로 열렬히 대면한다. 발뒤꿈치는 전경이 되 고 다른 모든 것들은 배경으로 물러나 앉는다. 담담하게 온몸의 무게를 받아 험해졌던 그곳이 점점 원래의 모습을 찾아간다. 하지만 발톱은 이러한 관심을 받지 못한다. 까탈을 부린 적도 없고 좀 길어도 지내는 데 지장이 없다. 그것은 딱딱하니 발에 힘을 주어 씩씩하게 걷도록 잘 버텨주었다. 한 직립인간의 몸이 기우뚱거리지 않도록 일주일 동안 수고하였다. 그런데도 말썽을 부린 적 없으니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제쳐두었다. 부모가 자신들의 마음을 잘 아는 맏이를 그냥 믿고 그래서 살갑게 대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리라. 그래서 발톱에게 마음 빚을 갚는 내 몸은 그것에게 절하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 사 이의 무관심을 되새기며 손톱을 깎을 때보다 더 깊이 고개와 몸을 숙여 살핀다. 일주일 동안 위만 쳐다보고 타인의 얼굴만 보며 지냈었다. 이제야 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곳을 바라보고 제거하고 깎는다. 마음이 미치지 못했던 두 곳에 손이 미치고서야 비로소 목욕을 끝낸 기분이 든다. 일주일이 흘렀다는 느낌, 새로운 일주일을 시작한다는 기분이 스멀스멀 든다. 살아있어야 그러한 일을 일주일 마다 할 수 있다. 일요일 아침마다 삶의 한 평화롭고도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몸을 숙이고 마음을 숙인다. – 추선희 수필집 <어느 모든 마음, 명함>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