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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7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이사야 10,5-7.13-16 마태오 11,25-27
똥파리는 꽃밭의 한 무더기 똥을 보며 꽃밭을 안다고 말한다
가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분들은 “나도 그 사람 알아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의 좋은 점보다는 자신이 아는 단점을 쏟아냅니다.
그 사람의 단점만 말하며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완전히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꽃밭에 어떤 짐승의 똥이 있습니다.
그러나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 그 똥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여기를 지나가던 한 똥파리가 좋은 똥을 발견하고는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똥을 발견했어!”
꽃밭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가 그 꽃밭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 안에 있는 단점들을 몇 가지 안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번엔 꿀벌이 날아가다가 그 꽃밭을 봅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꿀을 발견했어!”
물론 그 꽃밭 안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는 알지 못합니다.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본질이 ‘꽃밭’이기에 똥파리보다는 꿀벌이 그 꽃밭을 잘 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꽃은 더러운 습지에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우리는 그 습지를 보지 않고 그 꽃의 아름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가서 연꽃을 보았다고 말하지 시궁창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보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보시지 않고 우리 선한 면을 보시며 키워주십니다.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를 똥파리로 만듭니다.
아담은 하느님을 보면서도 하와를 왜 만들어줘서 죄를 짓게 만드느냐고 한탄합니다.
완전한 선이시고 아름다움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분에게서 더러운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게 빛 가운데서 어둠을 찾아내고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부모를 잘 아는 때는 언제일까요?
아이일 때일까요, 아니면 사춘기 반항의 시절일까요?
제니스 캐플런의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에 이런 예가 나옵니다.
한 어머니는 15살 아들을 비싼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에 보내며 고마운 마음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일주일에 몇 번 정도 전화를 걸어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 뭘 고마워해야 하는데? 애들을 캠프에 보내는 것은 부모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야?”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한 어머니는 딸을 학교에 차로 태워다주며 그 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애잖아. 운전을 못 하니까 당연히 엄마가 데려다줘야지!”
사춘기 아이들은 무엇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엄마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커져 버리면 눈이 멀어 사람 안에서 사랑을 찾아낼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됩니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 자신도 부모가 되면 그제야 겸손해져서 부모의 마음을 볼 줄 알게 됩니다.
가수 김진호 씨의 ‘가족사진’처럼 부모가 자신들을 위해 거름이 되어주었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부모님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부모가 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것만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군가를 제대로 알게 될 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아담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불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온전히 아시는 분이시기에 항상 감사하십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사춘기 때는 그 감사를 잊기 쉽지만, 어린이는 부모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할 때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사랑을 보고 감사해야 그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 사랑의 선물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주시는 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사랑을 볼 눈을 잃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보아도 잘못 보게 됩니다.
그 증거로 감사가 사라집니다.
아버지의 철부지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에 집중합시다.
아는 만큼 감사해합니다.
모든 사람 안에 어느 정도씩은 사랑이 있으므로 반드시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 감사해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안다고 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7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1,25-27
작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참 재미있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 철부지입니다.
철부지의 어원은 절부지(節不知)입니다.
절은 계절을 뜻하니, 절부지는 계절(season)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년 농사를 성공하려면 절기를 잘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철부지는 사리를 분별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이를 의미합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들은 개념이 없다는 것,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는 것, 아직 세상 물정 모른다는 것, 뭐가 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순종적입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아직 작고 힘이 없다 보니 철저하게도 의존적입니다.
늘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가 가자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부모 입장에서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철이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어설프나마 배워가면서 슬슬 자기주장이 생기고, 고집도 늘어갑니다.
때로 뺀질거리며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한마디 하면 전에는 절대 그러지 않았는데, 이젠 꼬박꼬박 말대답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분의 지속적인 축복을 원한다면, 인간을 한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의 손길을 느끼고자 한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부지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천진난만한 성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대들고 튕기는 것이 아니라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의 신비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있어 보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투자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부실함과 결핍과 약점을 애써 감추려고 기를 쓰니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의 삶이 늘 부담스럽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자칭 지혜로운 사람들,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통해 한 분야의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유치원생보다 못한 사고를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와서 자주 생각하는 것이 편식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한 과목에 집중하지 말고, 여러 과목에 골고루 신경써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를 쓰며 쌓아 올리고자 노력하는 학문적, 세상적, 인간적 지혜 위에, 인문학적,
영적, 정신적, 신앙적 지혜가 가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강론>
(2024. 7. 17. 수)(마태 11,25-27)
<하느님 나라에는 소외계층이 없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5-27)”
1) 여기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인간 사회의 ‘기득권층 사람들’을 뜻합니다.
‘철부지들’은 ‘사회적 소외계층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것’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사업, 구원의 진리, 예수님의 복음, 하느님 나라’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는, 기득권층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외면하고 배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이 보지 못하게 구원의 진리를 감추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외면하고 안 보는 것입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는, 소외계층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당하지 않고 구원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고 예언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감사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기득권층 사람들도 제대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일,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소외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라도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소외당하지 않고 똑같이 구원을 받으니 선하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2) 기득권층과 소외계층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 말씀은, ‘마리아의 노래’에 들어 있는 찬양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은 축복하고, 교만한 자들과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저주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소외계층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고 구원받는 것을 찬양하는 말씀이고, 또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교만한 자들도 교만을 버리고 진심으로 겸손해지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재물을 내려놓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더욱더 움켜쥐고만 있다면, 심판 날에 하느님 앞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빼앗기는) 초라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그 자신들이 자초한 일입니다.
3)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라는 말씀은, 18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 나라에는 소외계층이 없고,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고, 힘 있는 사람도 없고 힘없는 사람도 없고,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없고,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도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특별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잘못되어 있는 그 마음부터 버려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고 미리 체험하게 해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발언권이 없거나 약한 소외계층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실제로 소외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 안에 소외계층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곧
기득권층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신앙인들부터 회개해야 하는 것처럼, 세속의 기득권층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교회 내부의 기득권층 사람들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4)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구원사업’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버지와 당신은 완전한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이 하시는 일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이고, 예수님의 뜻은 곧 아버지의 뜻이고, 예수님의 일은 곧 ‘하느님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를 쓰시는 것도,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당신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을 따르는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참되고 유일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