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히터(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는 구 소련의 피아니스트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1915년 우크라이나 지토미르(Zhitomir)에서 태어났으며, 오데사(현 우크라이나의 4번째 도시)에서 자랐다. 부친은 러시아로 이주한 독일인이며,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다. 아버지가 오르간니스트였지만 기초적 음악 교육만 받았을 뿐 대부분은 독학으로 공부를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뛰어난 관찰력으로 정기적으로 지방 발레단, 오페라단과 연습을 했으며, 오데사 음악원에서 발레 리허설의 피아노 반주가 그의 첫 직업이었다. 1934년 오데사 엔지니어 클럽에서 첫 연주회를 갖지만 정식 음악 교육은 그 후 3년 뒤에야 시작된다.
그가 모스코바 음악원에 등록했을 때 음악원은 이 비범한 젊은이의 입학시험을 생략해 버린다. 리히터는 그 곳에서 노이하우스(Heinrich Neuhaus, Emil Gilels의 스승이기도 하다.)를 만난다. 노이하우스는 리히터를 "내가 평생을 기다려온 천재이다"라고 극찬을 했다. 그 후 근 10년 동안 노이하우스에게 배웠다. 리히터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 훌륭한 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신이 "노이하우스가 나를 피아니스트로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1940년 아직 학생이었을 때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소나타 6번을 초연한다. 작곡자가 직접 그의 연주를 듣고 결정한 것이었다. “그는 내 작품을 전혀 새롭게 들리게 만든다.”고 프로코피에프는 그를 격찬했으며, 리히터는 후에 프로코피에프의 7번도 초연했다.
9번은 리히터에게 헌정되었다. 리히터가 Melodiya와 EMI, DG등에 남긴 많은 프로코피에프의 레코드는 리히터 최상의 상태를 들려줌과 동시에, 아직 교과서로 대접받고 있다. 음악원에서 리히터가 필수 과목인 정치학에 불참하는 것이 알려져 첫 해에 두 번이나 정학 당했다. 그는 항상 정치적인 일을 멀리했으며, 한 번도 공산당에 가입 한 적이 없었다. 잠깐 가족사 이야기를 하면, 리히터의 아버지는 독일계라는 이유 때문에 1941년 소련이 독일의 침공을 받자 소련 비밀경찰에게 암살당했으며, 어머니는 남편의 동생과 함께 독일군을 따라 서독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에 있던 리히터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이후 1960년 리히터가 첫 서방 연주회를 미국에서 연 후 다음 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서유럽 연주 여행을 다녔는데, 서독에 있던 어머니는 방송에서 리히터의 연주를 들은 후, 리히터를 찾아왔는데 거의 20년만의 상봉이었다. 리히터는 1945년 림스키코르샤코프와 프로코피에프의 노래가 포함되어 있는 공연에서 소프라노 니나 도를리악(Nina Dorliak)의 반주를 해주며 그녀를 처음 만났다. 비록 정식으로 결혼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은 평생의 동반자였다. 니나는 리히터의 충동적인 성격을 완화시키고, 그의 기행을 완만하게 처리하곤 했다.
1949년 스탈린 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러시아, 동 유럽, 중국으로 연주 여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서방 연주 여행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나 에밀 길렐스보다 늦어졌다. 1955년 2차 대전 후 소련 연주자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에밀 길레스가 환호하는 청중들을 향해 "나에게 박수를 보내주어 감사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라는 피아니스트가 있는데, 그가 나보다 천 배는 더 낫다."라는 말로 리히터를 소개한다.
그 후 리히터의 이름을 서방에 확실히 알린 두 사람은 글렌 굴드와 반 클라이번이다. 글렌 굴드는 1957년 모스크바 연주 여행을 왔다가 리히터의 연주회에 참석했다. 첫 프로그램은 슈베르트의 소나타 D.960이었는데, 굴드 왈, "그 순간 나는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음악 전달자를 보고 있었다. 리히터의 음악적 재능을 완전하게 표현 할 수 있는 것은 연주회이다." 반 클라이번은 19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참가했다가 리히터의 연주를 들었다. 그는 단언했다. "내가 들은 중 가장 강력한 연주다“. 다른 얘기지만 반 클라이번이 연주할 때 심사위원석에는 리히터가 있었는데, 10점 만점에 100점을 주었다고 한다.
미국의 유명한 흥행사 솔 휴로크(Sol Hurok)가 리히터를 초청하려는 노력은 1960년에야 실현될 수 있었다. 1960년 시카고 심퍼니와 라인스도르프(Erich Leinsdorf)의 지휘로 브람스의 협주곡 2번을 연주했고, 카네기 홀에서 그 후 열린 전설적인 연주로 그의 명성은 완전히 확립됐다. 다음 해부터 서유럽을 연주 여행하면서 20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올라섰다. 일본 및 최 만년(1994년)에 찾아온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를 여행했지만, 사실 리히터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계획되지 않은 연주회를 열었고, 노년에는 미리 알리지도 않고 작고 어두운 홀에서 연주 하곤 했는데, 어떤 때는 피아노 앞에 작은 램프만 켜고 연주하기도 했다. 건강과 변덕스러운 기분 때문에 연주회 취소도 잦았으며, 관객은 연주회장에 와 봐야 프로그램을 알 수 있었다. 항상 자신의 연주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고, 불만에 차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를 '거룩한 악마'라고 평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주로 프랑스에서 지내다가 1997년 모스크바에서 별세했다.
리히터의 연주 목록은 몇 개의 예외(바하의 골드베르크 베리에이션, 베토벤의 발트 슈타인 소나타와 4번 5번 피아노 협주곡, 슈베르트 소나타 A장조 D. 959)는 있지만, 중요한 피아노 곡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녹음 중 주목 받는 작품은 슈베르트, 슈만, 베토벤, 바흐(그는 평균율 클라비어곡 2집을 한 달 만에 배웠다고 말했다.), 쇼팽, 리스트, 프로코피에프,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을 포함해서 다양하다.
그는 손이 큰편으로 12도를 짚을 수 있었다.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6번,7번(이 곡은 4일 만에 배웠다고 한다.)을 초연했고, 9번은 리히터에게 헌정되었다. 독주 뿐 아니라 David Oistrakh, Benjamin Britten, Mstislav Rostropovich와 짝을 이루어 연주 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의 레코드 목록은 엄청나다. 1961년 에리쉬 라인스도르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최고 클래식 연주 부문의 그래미 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