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0월15일 월요일
[(백)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제1독서 갈라티아서 4,22-24.26-27.31─5,1
복음 루카 11,29-32
◈ [서울]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2018년 나해 10월15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연수중에 ‘자발적 진화’를 읽고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 새로운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처음
만나면 어색하지만 자주 만나면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몇 번씩 읽을 수 있는 책을 가까이하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책은 인류의 영적 진보를 하나의 나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인류는 정령신앙(animism)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함께
대화하고,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인류는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줄,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줄
신들을 생각했습니다. 다신론(Polytheism)의 시대입니다. 선한 신이
있고, 악한 신이 있고, 출산의 신이 있고, 농업의 신이 있었습니다.
다신론은 많은 신화와 문학의 발전과 함께 했습니다. 인류는 보다
강력하고, 절대적인 신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신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그 신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일신론
(Monotheism)입니다. 현대의 종교는 일신론을 중심으로 교리와
조직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일신론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만,
일신론은 고통과 악의 문제를 풀어야 할 과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의 원죄와 교만으로 고통과 악 그리고 죽음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은 일신론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리와 조직에 새로운 가치를
이야기 했습니다. 종교개혁은 문화개혁, 산업혁명, 계몽주의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중심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과학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진화론의 등장으로 우리는 모두 물질에 기반을 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진화 심리학, 진화 생물학 등이
등장하면서 인간은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는 생각이 생겼습니다.
유전자는 인간의 영혼이 이끄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최근에는
다시 이신론(Deism)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이신론은 생태와 환경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신론적인 신학, 교리, 조직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영적인 갈증을 느끼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신론, 동양의 종교와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과 철학은 이신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신론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다고 합니다. 미국 독립을 선언한 사람들 중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꾼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독립을 꿈꾼 사람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의 지혜와
삶은 하나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봉건주의와 왕정의 지배에서
자유로웠던 미국은 새로운 가치와 철학으로 신세계를 이룰 수 있었고,
이 꿈은 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자유, 평등, 박애’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불교에는 ‘윤회도’가 있습니다. 불자들은 윤회도를 보면서 바른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지금 열심히 살면 한 단계 높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지금 욕망과 욕심에 따라서 살면 더 낮은 단계의
삶으로 내려간다고 이야기 합니다. 패자부활전도 있을 것이고, 승자의
추락도 있을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그것을 ‘연기’라고 말을 합니다.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하느님 나라도 ‘답사’를 다녀올 수 있다면
어떨까? 지옥이라는 곳도 ‘답사’를 다녀올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의 삶은 변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런 것이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많은 보물을 남겨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발견합니다. 어떤 이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어떤 이들은 감성, 이성, 오성을 통해서 참된 진리의
길을 찾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물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면 잘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물은 잠시 멈추어서
바라모면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는 것도 큰 표징입니다.
우리는 밤에 잠을 자면서 죽음을 체험합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깊은 어둠을 체험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어쩌면 늘 새로운 부활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바라볼 때, 내가 만나는 이웃, 내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의 눈으로 바라볼 때, 교만함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서로를 이용하려하고, 모두가 경쟁의 상대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지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그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2018년 나해 10월15일 월.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그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있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는 기도 중의 기도인 관상기도에 있어서 최고봉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인관계로
설정했습니다. 하느님과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연서(戀書), 연애편지가
바로 ‘천주자비의 글’입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깊은 묵상기도와 황홀한
관상생활은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영적생활의 기쁨과 행복, 감미로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깊은 우물에서 건져 올린 하느님 사랑의 체험을 이웃들과
연결시켰습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던 수도회와 교회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그녀를 용감한 수도회의 개혁가이자 투사로
변모시켰습니다.
우리가 절실히 체험하는 바처럼 인간 존재는 대체로 한결같지
못합니다. 바깥에서는 천사, 법 없이도 살 사람, 성인군자가 따로
없지만 귀가(歸家)즉시 폭군으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타인으로부터 받는 평가 중에서 가장 정확한 평가이자 신빙성 있는
평가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알고 있는 가족, 이웃, 동료들로부터
받는 평가입니다.
이런 면에서 데레사는 크게 칭송받을 만합니다. 그녀는 교회 역사 상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영성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가들보다 훨씬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녀와
동고동락했던 동료 수도자들의 평가입니다. “이토록 거룩하고
신비로운 분, 이토록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녀를 저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성생활과 관련된 데레사의 가르침은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그 누구도 이렇게 영성생활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바가 없었습니다.
“좋은 벗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하느님과 단둘이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성(理性)만으로 그분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개념들도
끄집어내지 마십시오. 대단하고 복잡한 명상도 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탁월하고 매력적인 인물이요 성인 가운데서도 대성인인
데레사였지만 자신의 생애 안에 방황하던 청소년기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때 연애 소설에 심취해서 밤낮없이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또한 외모를 가꾸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예쁜 옷, 값비싼
향수, 화려한 장신구를 구하는데 혈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래 여자
친구들과 수다 떠느라 하루해가 짧았습니다.”
지금은 만인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대성녀에게도 한때 이런 ‘흑역사’가
있었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는 큰 위안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데레사가 꿈꿨던 가르멜회 개혁 작업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한번
편리함과 달콤한 세속주의의 맛을 본 수도자들은 개혁을 반대하는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개혁 작업 내내 그녀는 지독한 반대와
혹독한 박해와 맞서야 했습니다. 반대파들은 그녀가 악마의 조종을
받고 있다면서 이단자로 몰아세웠습니다.
그런 순간에도 데레사는 불평불만 한 마디 던지지 않았고 성모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귀여워하시는 이들을 고생길로 이끄시고 많이 아끼실수록 많은
고생을 내리십니다.” 라고 외치며 쉼 없이 개혁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15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11,29-32: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참 메시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져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나라는
표징 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요나의 표징이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요나의 표징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으로
갔겠지만, 요나의 예언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 멸망하기도 한다.
이 표징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남방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도 주님께 왔고, 남방 여왕이 이
세대를 단죄하듯 교회도 그럴 것이다. 지나가고 마는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왔던 남방 여왕이 그 세대를 단죄한다면,
지혜자체이신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어떻겠는가?
바로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 요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는데도, 즉 다른 어느 세대, 어느
백성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전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자기 고집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지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와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소화시켜 전해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 성서 등 우리는 하고자만
한다면 더더욱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욱 의욕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때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특전이 내린 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잘 안된다면 우리도 성경 말씀대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태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듯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의 이익만을 찾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는지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기적도 나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 변화될 때에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표징이 표징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
2018년 나해 10월15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표징이 표징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
복음: 루카 11,29-32
‘사실 인간성에 문제가 있었던 역사적 위인 5명’이란 제목의 유튜브
인기 동영상에 마더 데라사 수녀님이 끼어있어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분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주된 이유는 ‘빈곤의 고통이 아름답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노벨상을 수상하고 가톨릭교회에서
성녀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그분의 단점이 가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시설 내에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취급하는 방법이 좋지 않았다고 동영상은 소개합니다. 실제로
그곳에서 활동했던 봉사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전문지식이 부족했던
스태프들, 그리고 한번 사용한 주사기의 반복적 사용, 사용 기한이
지난 약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들에게 시중에서 판매되는 해열제와 진통제를 먹이는 부적절한
치료도 이루어졌고 시설에 있는 환자들이 가족들과 면회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금액이 전 세계 각국에서
기부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설에 있던 사람들에게 적절한 처우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자금의 부족이 아니라 데레사 수녀님의
의도였는데 그 증거가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던 사람들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말하며 빈곤 자체를 미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란
주장입니다.
이렇듯 동영상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거의 정신병자로 몰고 있고
댓글을 보니 수녀님을 옹호하는 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분이
빈곤의 고통이 아름답다고 말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아름답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가난의 상징입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처참하면서도 우리 구원의 원천이기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아름답게 보지 못하여
도와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이지, 그들을 형제처럼 아름답게
대하는 것을 그들이 계속 고통 받기를 원했다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억측일 뿐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자서전에 보면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은 굶어야 했던 상황도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더운 곳에서도 그녀는 가구 하나 없는 아주 작은 방에서 낡아빠진
선풍기 하나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마치 세계에서 쏟아지는 돈을 유용이라도 했다는 듯이,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주신 분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 안에서 자신을 변하게 만들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 때문에 변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고 그 이유로 자꾸
다른 표징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표징입니다. 표징이 되려면 자신 안에서
하느님과 이웃이 만나게 해야 합니다. 표징이라면 성막이나 성전을
생각하면 됩니다. 성전은 하나의 표징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을
모시면 사제가 들어와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모든 성전은 표징이
됩니다. 그리고 그 성전 안에 들어오기 합당한 사람이라면 그 표징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 변화되는 것입니다.
가장 완전한 성전이요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도 군중은 계속 다른 표징을
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완전한 표징을 두고도 다른
표징을 요구한다는 말은 마음이 그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싶지
않게 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표징이라면 요나를
닮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표징이 되기 위해
물고기 속에서 사흘 밤낮을 견뎠습니다. 이는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죽지 않는 누구도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참 표징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요나처럼 땅 속에서 사흘을
계셨습니다. 누구든 표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나무라십니다.
요나의 예언 때문에 니네베의 모든 이가 회개하였고,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멀리 남방에서 여왕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였는데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 계심에도 그분께 다가오려 하지 않는
것은 ‘변하고 싶은 의지’가 없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를 보고 자신도 불쌍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하면 됐지, 굳이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찾아내어
그분을 거부하는 것은 그분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예수님도 거부하고 그분의 십자가도 거부합니다.
자신이 표징을 받아들이면 자신도 그 표징의 표징이 되어야하는데
그러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죽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표징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가 그런 사람이고 그분이 파견하신 교회를 거부하는 이가
그런 사람이며 성체성혈을 거부하는 이가 또한 그런 사람입니다.
요나처럼 나를 물고기 속에도 묻을 수 있는 마음을 청합시다. 도망
다니는 삶보다 표징이 되는 삶이 훨씬 행복합니다. 표징은 내가
변하기를 원할 때만 표징으로 보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10월 15일 (월) -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
오늘은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1장 6절 말씀에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실행을 위하여 세상에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그 약속을 따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죽지 않고
살아난 우리가 그 할 일은 이제 예수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면서 그동안
다 전하지 못하신 그 복음을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못 다하신 그 삶의 유언을 대신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예수님의 것이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사는 줄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이 땅에서 제대로 작동하며 돌아가는
제품처럼 원활하게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제품은 제대로 작동하지도 못하고 부작용을
일으키고 육신의 생각으로 별별 사사건건으로 그 돌 던 기계를 멈추는
이유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예수님의 남은
삶을 우리가 최선을 다해 이어가며 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속 마음이 중요하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0월15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루가 11,29-32)
속마음이 소중하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군중을 보시고 “요나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1,30).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쇄신을 갖지 않은 이상 어떤 것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표징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징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단죄의 표징이
됩니다.
요나 예언자가 회개의 삶을 가르쳤을 때 삶을 바꾼 사람은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체가 벌이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벌입니다.
일상을 하느님의 손길이 주어지는 자리로 인정할 때 매 순간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는 주님의 손길이 매 순간 주어져도 결코 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꾸십시오.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일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성녀 줄리아르는 말합니다. “정력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일하되
법석을 피우지 마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
조용한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겉모양에 힘쓰는 허영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더 소중함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착각과 오류 속에 살면서 그것을 지적해 줘도 인정하지 않고 완고하게
버티면 그것은 악한세대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죽음을 체험 한 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회개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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