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싸움, 프란치스코의 싸움
1열왕 18,20-39; 마태 5,20-26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2024.6.13.(수)
오늘 독서에서는 450명이나되는 바알신의 예언자들과 홀로 대결하는 엘리야 예언자의 싸움을 보여줍니다. 솔로몬 사후 갈라져 나간 북 이스라엘 왕국은 열 지파가 연합한 나라이기는 했지만, 그 열 지파의 야훼 신앙을 압도할 정도로 바알 신을 섬기는 주변 이방인 왕국들의 우상숭배적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왕권으로 바알신 예언자들을 거느리던 아합왕은 조상 대대로 섬겨온 야훼 신앙을 옹호하는 엘리야를 제압하려고 백성들을 카르멜산에 모이게 하여 우상과 신의 대결을 펼치게 했습니다. 과연 어느 신의 힘이 더 강한가를 카르멜산의 제단에서 겨루어 본 것입니다.
대결의 내용은 제단에 쌓은 황소 고기를 기도로 불러온 불길로 태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알 신에게 온갖 동작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해 보았지만 바알 신의 예언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엘리야는 번제물로 마련된 황소 고기 위에 물까지 부어 놓으라고 주문한 다음, 야훼 하느님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1열왕 18,36)
당시 북 이스라엘 왕국에는 매우 심한 가뭄이 들었고, 아합의 왕비 이제벨은 엘리야를 제외한 예언자들을 학살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카르멜산에서 이루어진 대결은 이 가뭄을 해결할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었고, 엘리야는 예언자 학살의 사태를 맞이하여 백성에게 다시금 하느님 신앙을 되찾아주기 위하여 제단에 올려진 황소 고기 번제물을 하느님께서 내리신 불길로 다 살라버리고 다시 온 나라의 가뭄을 해소할 수 있는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대결을 승리로 마친 다음 엘리야는 백성을 시켜 바알 신의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이제벨 왕비는 엘리야의 목숨을 노리게 되고, 엘리야는 호렙산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야훼 신앙을 지켜낸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과 제자들 앞에서 산상설교를 가르치시는 예수님께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태 5,2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의로워야 하는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예로 드셨습니다. 이는 하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한 새 질서와 새 정신의 첫 번째 사례로 제시된 것이었는데, 대인관계에서 저질러지는 악과 불의에 대한 분노와 화해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교부들의 주해에 따르면, 이 말씀 대목에서 성을 내거나 ‘바보!’나 ‘멍청이!’ 같은 비속어로 욕설을 내뱉는다는 것은 당시 박해 상황에서 믿음이 없는 이들이 믿는 이들에게 근거도 없이 행하고 있었던 언어폭력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믿는다는 이유로 또는 그 믿음에 입각하여 행하는 데 대하여 믿지 않는 이들이나 믿음을 거부한 이들이 성을 내거나 욕하는 짓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재판에 넘겨지거나 지옥에 떨어질 만한 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이들에게 욕설을 내뱉거든 그에 휘둘리지 말고 그 죄에 대한 심판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대인관계를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데에 더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이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고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엘리야가 수행했듯이 하느님 신앙은 우상숭배에 맞서 승리하는 힘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천명하셨듯이 우리의 의로움은 우상숭배자들의 행태보다 더 의로워야 합니다.
또한 오늘은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을 기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황직에 취임한 직후 ‘복음의 기쁨’이라는 사도적 권고를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낸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권고에서 현대판 우상 숭배를 자본주의라고 강하게 질타한 바가 있었는데, 2016년 자비의 특별 희년 폐막을 앞두고 매해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자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 관한 메시지는 늘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을 기리는 오늘에 작성하여 반포하곤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아마도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도와주었던 안토니오 성인이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주는 데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속설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마치 엘리야가 바알 우상을 섬기는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했듯이,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대판 우상인 자본주의가 밀어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교황의 이러한 노력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조와 대결하기 위하여 먼저 이 사조가 지닌 우상숭배적 속성을 일깨우는 한편, 가톨릭 신앙인들이 잊어가고 있다고 보여지는 신심, 즉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음을 일깨우는 데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교황은, “돈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을 거부합시다.” 라고 일깨우면서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과거 황금 송아지를 경배한 것이(탈출 32,1-35 참조) 무자비하면서도 새로운 탈을 쓰고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는 돈의 우상 숭배라는 가면을 쓰고 참된 인간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비인격적 경제 독재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났습니다.”(복음의 기쁨, 55항) “소수 사람들의 소득은 터무니없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행복한 소수 사람들이 즐기는 번영의 수준과 대다수 시민의 삶의 처지 사이의 격차도 급속도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불균형은 ‘시장 영역’과 ‘금융투기’의 절대자율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들이 낳은 결과입니다.”(복음의 기쁨, 56항) 그리하여 이 ‘새로운 독재자’는 일방적으로 그리고 임의로 자신의 법칙과 규칙을 세상에 강요한다는 것이며, 권력과 소유를 끝없이 갈망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와 대결하는 길은 엘리야가 입증해 보였듯이 하느님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어둠을 없앨 수는 없어도 몰아내려면 빛을 비추는 길밖에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가난의 신학으로 담화를 발표해 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은 “세상의 골칫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본질을 우리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도록 도와주는”(2017년, 1차 담화) 천사들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귀를 열어 놓으심을 믿고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주님의 자비로우신 손길로 해방되는”(2018년, 2차 담화) 본연의 신앙인들이라고 일깨워줍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은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탐욕을 보이게 드러내어주는 이들이어서,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가난과 궁핍이 구원의 힘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이 비논리적으로 보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힘은 십자가에 있다는 논리를 증명해 주는”(2019년, 3차 담화) 또 다른 예언자들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흔히 더럽고 게으르며 종종 부도덕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믿는 이들도 이 편견 성향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가난한 이들이 도덕적으로 성화되기를 기대하면서 도와주는 태도에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의 성화는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몫일 뿐 우리가 행하는 도움과 나눔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저, “가난한 이들에게 손을 뻗기”(집회 7,32)만을 바라십니다. 우리의 손이 닿은 가난한 이들의 마음은 하느님께서 움직이실 것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손을 뻗으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케 만드는 천사들인 것입니다(2020년, 4차 담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우리에게 환기시키셨습니다(마르 14,7). 하지만 당신을 기념하는 전례에서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가난한 이들이 항상 우리 곁에 있더라도 그들을 외면하기 마련임을 그분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기념하는 모든 전례에서는 그분과 함께 그분이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도 함께 기억하는 것이 실제로 우리 곁에서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가난한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은 우리가 전례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일깨워주는 길잡이들이기도 합니다.
교우 여러분!
바알신 우상과 대결했던 엘리야의 싸움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자고 호소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 대한 관심 대신 돈에 더 관심많은 자본주의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하는 의로움의 싸움입니다.
첫댓글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이들에게 욕설을 내뱉거든 그에 휘둘리지 말고 그 죄에 대한 심판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대인관계를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데에 더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사는 빌라 단지에서 입주후 칠년이 가까운 시간을 자진해서 쓰레기장이나 크고 작은 일에 마음쓰며 봉사하고 있습니다.
요즘 시간이 지나니 공동 작업이 요구되는 일이 많은가운데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이사 가고싶다는 생각이 앞서는 가운데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이 말씀에 힘을 얻습니다.
관계안에서 선한 영향력을 주는 나날되기를 기원하며 사랑을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