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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레꼬레아들1 |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키리바시 공화국. 이곳에서는 한국을 지칭하는 ‘Korekorea(꼬레꼬레아)’가 매춘여성들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있다.
도대체 키리바시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한국이라는 말이 매춘여성을 지칭하게 된 것일까?
키리바시, 2000년 밀레니엄 축제 때 들어 본 이름이다. 물론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이곳은 적도에 인접하고 날짜변경선 왼쪽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2005년 8월 17일 오전 6시, 세계 최초의 일출은 그 형식적인 타이틀에 걸맞게 무거운 모습이었다.
3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도서국가, 키리바시. 유인도는 12개 정도, 나머지 섬들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의 주식은 코코넛과 바다에서 잡은 생선들이다. 쌀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값싸게 제공해주고 있다. 돈이 넘쳐도 사고 마시고 입고 할 것이 제한되어 있는 국가다. 자급자족의 사회였던 것이다.
성산업, 이곳에 처음에 등장한 산업이라는 조금은 과장되었지만 명확한 표현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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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박중인 배들 |
어선들이 들락거리는 수도 타라와의 베시오 항구, 관광객들도 찾아오지 않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3-4개의 술집 BAR들이 보였다. 시끄러운 음악은 여느 술집과 같았으나 내부는 너무 허름했다. 아무 인테리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하고 한적한 다른 곳과 달리 술집들은 현지인들이 바쁘게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특히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인들이 술집 안과 바깥에서 눈에 띄었다.
이들을 키리바시 사람들은 ‘꼬레꼬레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16살 린다(가명)가 취재진의 “뭐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던진 말이었다. 다른 여인들도 그들이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느낌을 말해 주었다. 친절하다, 잘 생겼다, 매너가 좋다 등 한국은 그들에게 ‘좋은’나라였다.
“술 마실 수 있고 돈을 벌수 있기 때문에 한국을 좋아 한다” 18살 메리(가명)는 2001년도부터 한국 어선에 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14살 때 꼬레꼬레아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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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와 띠에따 |
26살 시나(가명)는 지난 주에 한국 어선에 갔다 왔다고 했다. 샤워를 하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잤다고 했다. 시나는 아이가 한 명 있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 한국인의 성과 이름, 석자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O O O.
아침에 한국 배에서 나왔다는 꼬레꼬레아 한 명을 만났다. 3일 동안 배에 머물렀는데 꼬레꼬레아 한 명이 술에 취해 갑판 위로 넘어지는 바람에 선장이 화가 나서 모두 내보냈다는 증언을 했다. 성관계를 가졌고 나올 때 약 100달러 정도의 돈을 받아 왔다고 했다.
그녀들은 대체로 한국말을 조금씩 할 수 있었다.
“OO 놈, 새끼야, 이리와, 쩝쩝, 괜찮아”
대부분 욕이었고 심지어 성기를 우리말로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내뱉는 한국말이 가벼웠다. 매춘은 그 순간 모든 행위, 언어를 가볍게 만들고 있었다.
저녁 11시경, 동양인 남성들이 5-6명의 키리바시 여자들과 함께 술집을 지나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따라가 보았다. 그들은 모두, 약 10명 정도였다. 조그만 배에 모두 올랐다. 그리고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배 뒤편에 써있는 배이름을 보았다.
'FAIR WINNER' 그들은 모두 바다 멀리 떠있는 커다란 배로 향해 갔다.
다음날 그 동양인들이 술을 먹었던 술집을 찾아갔다.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 “코리언들이다” “확실하냐?” “글쎄!” 밥을 먹었던 곳에 가서 확인한 결과 그들은 모두 대만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배역시 대만 선박 소유였다.
동양인은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모두 한국인으로 보였다. 약 10일을 머무르면서 술집근처에서는 한국선원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한국선원들이 술집에서 술을 먹고 있다는 이야기들은 들려왔다. 그래서 다시 물으면 확실하지는 않다고 동양사람들은 모두 똑같아서 구별하기가 어렵다며 “어떻게 구별하냐고 언어도 모르는데?” 라며 오히려 반문했다.
부두에서 일하고 있는 키리바시 원주민들 역시 바다 멀리 정박해있는 대형선박들이 어느 나라의 배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어선으로 향하는 여자들은 ‘꼬레꼬레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국선원들과 가는 것을 평상시에 자주 보았기 때문이란다.
꼬레꼬레아에는 원죄와 과장이 함께 있었다.
다음날 오후에 다시 술집들을 찾았다. 멀리서 우리를 보고 누군가가 재빨리 몸을 숨기는 여인을 발견했다. 어제 만난 16살 린다와 매리였다. 두 술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들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왜 다른 직업을 찾지 않나요?”
“그냥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것이 좋아요. 술도 먹을 수 있고 일하는 것이 싫어요”
어제 밤에 처음으로 만난 그녀들은 대부분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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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레꼬레아들2 |
술집에서 맥주캔을 손에 든 채 어딘가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는 한 여인. 놀랍게도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흰자위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술 냄새가 조금 떨어지게 할 정도로 강했다. 대낮인데도 엄청 취해 있었다. 자신은 꼬레꼬레아가 아니라고 하면서 친구들이 지금 한국어선에 가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심코 그녀는 “아이고”라는 한국말을 내뱉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 바로 뒤편에 꼬레꼬레아들 몇 명이 단체로 살고 있다고 했다. 텅비어있었다. 옆집의 소녀들이 꼬레꼬레아들은 약 8명이 같이 살고 있고 그녀들은 2-3일 전에 집을 나갔다고 했다.
‘한국원양어선노동조합’
우리가 머무른 모텔, 청소를 하는 여자 한명이 걸치고 있는 빨간 티셔츠에 적힌 글자였다. 한국 선원이 주고 갔다고 했다. 올해만 약 20-30명이 다녀갔다고 했다. 방 한 곳을 들어가 보았다. 옷장을 열어 보았다. 조그맣게 ‘월 화 수 목 금’ 한글이 보였다. 글자 위에 모두 X표시가 되어 있었다. 한국 선원은 이곳에서 시간을 세고 있었다. 즐기는 시간이 아니었다. 자본이 있고 시간을 세고 있는 사람들, 남자들, 이 지점이 매춘의 근거일까? 누구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하고 누구는 근거가 아니고 변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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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레꼬레아 2세 띠에따 |
꼬레꼬레아들 중에는 아이를 낳은 사람들도 있었다. 부두에서 만난 한국선원 한 명은 이런 2세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취재진은 3명만 만날 수 있었다.
26살의 시나, 그녀의 아이는 띠에따. 3살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가 띠에따를 키우고 있었다. 띠에따는 시나의 여동생을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시나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아침에 또 띠에따의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 나갔다고 했다. 띠에따의 아버지인 한국인은 지난달에 한번 왔었다고 했다.
차별은 없는지 궁금했다. 아버지가 언제 오느냐 또 오긴 오느냐? 이런 질문들 외에 이웃들은 관심을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외국인이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키리바시 사람들에게 한국은 경제적으로 잘 살고 사람들이 똑똑한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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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레꼬레아 2세 따께 |
9살의 따께는 현재 양부모와 살고 있었다. 따께는 생후 2개월, 바로 그때 입양되었다고 한다. 엄마는 키리바시 사람으로 따께를 낳은 후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지금은 다른 외지의 섬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따께의 한국인 아버지는 작년에 왔었다고 했다. 300달러를 주고 갔는데 따께가 먹는 음식비용으로 다 들어간다고 지금의 아버지가 말했다. 한국인 아버지는 배가 키리바시에 오게 되면 이곳에 들린다고 했다. 키리바시는 초등학교까지가 의무교육이다. 하지만 따께는 학교엘 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따께는 학용품을 살 돈이 없어서 학교엘 가지 않는다고 가도 금방 다시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고 했다.
따께의 얼굴은 한국인보다 더욱 한국적이다. 외국에서 마주친 얼굴이라 더욱 그러했다. 따께의 얼굴은 키리바시 사람들과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항상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다. 따께는 그 다름의 근원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 근원인 한국에게 뭔가를 강하게 묻고 있었다.
부두에서 만난 한국 선원들은 7월에 한국 언론에 꼬레꼬레아 문제가 보도된 뒤 회사에서 전문이 날라와 선원관리를 엄격하게 하고 있어 키리바시 여자들이 어선에 올라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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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레꼬레아 문제를 |
국제사회에 꼬레꼬레아 문제를 처음 알린 키리바시 NGO에서 일하고 있는 마리를 만났다. 그녀는 2004년 UN산하 ESCAP회의에서 아동 성매매와 관련되어 있다며 꼬레꼬레아라는 용어를 처음 국제사회에 알렸다. 그녀는 키리바시에 현재 꼬레꼬레아는 약 100명 정도 된다고 말했다. 꼬레꼬레아는 매춘에 관련된 여성들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며 그들은 그들이 행동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모르고 있으며 학력수준이 너무 낮다고 했다.
대체로 다른 섬에서 돈을 벌기 위해 수도인 타라와로 온 그들은 부모들과 함께 살지 않기 때문에 가족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그녀 역시 한국 선원들에게 절반의 책임을 꼬레꼬레아들에게 나머지 절반의 책임을 묻고 있었다.
마틴 신부가 말한 내용과 비슷했다.
키리바시는 90%가 넘는 국민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 카톨릭이 약 55%정도 나머지는 기독교신자들이었다. 종교국가이기 때문에 가족 내에서 딸의 순결에 대해 중시한다고 했다. 딸이 처녀로서 결혼하는 것을 가족의 명예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딸의 가정의 보물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외지에 오랜 기간 나와 머무르고 있는 한국 선원들에 대해서도 인간으로서 그들의 본능을 이해한다고 했다.
일반 국민들 중에서도 한국을 혐오하거나 증오하는 사람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키리바시공화국은 외국 선박들로부터 걷어 들이는 입어료가 국가재정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취재진을 약 한 시간 정도 계속 미행해왔던 한 키리바시 어업 에이전트 직원은 손가락으로 나를 지목하며 “우리 키리바시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당신이 문제를 만들고 있다. 여자들이 성관계를 갖는 것은 자유다. 그리고 한국선장들이 당신 때문에 무척 화가 나있다”고 흥분했다.
키리바시에는 텔레비전이 귀하다. 모텔이나 호텔같은 곳에서만 커다란 안테나를 세워 놓고 호주 텔레비전 방송을 본다. 일반 가정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단지 라디오 방송국이 한 곳 있을 뿐이다. 라디오 방송국 편집장은 문제를 조금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그는 2000년에 한차례 꼬레꼬레아 문제를 방송했다고 그런데 반응이 심각했다고 했다.
일반 사람들이 흥분했고 특히 종교계 사람들이 정부에게 강력하게 뭔가를 해야 한다고 압박했다고 한다. 그래서 2002년도에 경찰에서 외국배에 오르는 키리바시 여성 80명을 잡아들인 적이 있다고.
그러나 처벌할 규정이 없어 모두 내 보냈고 오히려 일부 여성들의 부모들이 왜 자신들의 딸들만 잡아 들이냐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편집장은 대안도 제시했다. 첫째 외국배에 여자들이 오르지 못하도록 경찰이 강력하게 법집행을 해야 하고 둘째 일자리를 정부가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꼬레꼬레아들은 모두 실업상태라는 것이다. 실업률이 50%가 넘는 나라, 젊은 사람들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특별나게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가 있고 산업이나 관광이 발달하지도 않은 키리바시, 일자리 창출도 말처럼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키리바시 사람들은 신분증이 없었다. NGO에서 일하고 있는 마리가 갖고 있는 여권이 키리바시에서 머무르는 10일 동안 본 유일한 신분증이었다. 출산율이 낮아서 아이의 등록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키리바시 UNICEF 지부의 로라 베르너는 빨리 I.D Card를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 미성년 성매매를 방지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4일 후 다시 찾아간 꼬레꼬레아 집단 숙소. 누군가 밥을 하고 있었다. 목욕을 하고 있는 여자도 있었고 빨래를 너는 사람도 있었다. 며칠 동안 어디에 있었냐고 물었다. 어선에 갔다 왔다고 했다. 한국어선이라고 했다. 배의 이름도 정확히 말해 주었다. 술만 먹고 왔다고 했다. 맥주와 소주를 마셨다고.
다들 눈들이 힘이 없어 보였다. 따이(가명)라는 여자는 19살, 현재 임신 3개월이라고 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한국인.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계급만 알고 있다고 했다. 질문 3-4개에 대해 답을 하고는 곧바로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피곤하다고 했다. 그녀들은 한국에서 온 속옷들을 보여주었고 한국 제조회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샌들 한 켤레도 내 놓았다. 이들은 보통의 키리바시 여인들과는 옷차림이 달랐다. 또 하나 다른 점은 눈이 너무 지쳐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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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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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위령탑 |
그들이 다녀왔다는 한국 어선의 선장과 전화통화를 했다. 선장은 그녀들이 새벽에 현지인의 배를 타고 몰래 들어왔다고 했다. 낮이나 초저녁에 오는 현지인들은 다 막았는데 새벽이라 막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들어온 사람들을 내쫓을 수가 없어서 식당으로 안내한 뒤에 음식과 맥주를 제공한 뒤 작은 보트가 들어온 뒤 바로 되돌려 보냈다고 했다. 7월이후 선원들의 외출도 금지하고 술 역시 관리를 확실히 하고 있으며 현지 경비원들을 배에 승선시켜 현지 여성들이 배에 오르는 것을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해안가에는 지금도 2차 세계대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녹이 잔뜩 보이는 대포가 보였고 부서진 참호도 눈에 들어왔다. 1943년 11월 이곳에서는 일본군 약 4,000명과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 1,400명이 사망했다. 베시오 항구 술집들이 모여 있는 곳, 바로 앞 조그마한 숲이 있었다.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개의 위령탑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일본군을 위한 또 하나는 사망한 한국인을 위령탑이었다. 키리바시에 남겨진 한국 최초의 흔적이었다. 일본과 한국은 다르면서도 같은 흔적을 같은 시기에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이 다르다. 키라바시의 교통수단은 100% 일본이 책임진다. 자동차, 미니 버스, 트럭, 오토바이 모두 일제다. 섬과 섬을 연결하는 다리도 일본이 놓아주었다고 했다. 선원들을 교육시키는 Marine Training Center도 일본은 운영하고 있었다.
2년 전에 키리바시와 수교를 맺은 대만은 공원(Taiwan Park)을 하나 만들어 놓았고 키리바시 사람들을 상대로 농업기술을 전수하고 있으며 쌀도 무상으로 제공했었다고 한다.
중국은 식당으로, 좁은 이곳에 약 5개의 중국 식당이 있었고 제조품의 많은 부분을 중국은 책임지고 있었다. 다들 흔적남기기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흔적은? 꼬레꼬레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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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냥 인터넷 서핑하다가 알게된 사실인데
깜짝놀랬어요..ㅠㅠ
저 사진속의 한국 혼혈아들
진짜 한국인처럼 생겼네요..
첫댓글 너무나 많데요.....................ㅠㅠ 아이들 자라는환경도 열악하고..아버지는 한국으로도망와서 자식은 책임도 안지도..무책임한인간들~
세상에나....병신들..... 피임도안하고 저짓을왜하냐 진짜 남자들 치떨린다규
여자가 ㅋㄷ쓰자고 하면 남자들이 내가 그걸 왜 하냐고 막 화낸다고 들었는데..아 이건 베트남 유학생 얘기였든가? 하여간 ㅁㅊㄴㄷ
한국 남자들 진짜 국제적으로 노네 ㅁㅊㄴ 이제 진짜 한국 남자라면 치가 떨린다
이렇게까지 해서 섹스를 해야하나? 맨날 본능이라고 하지만 본능을 못이기면 그건 동물이지 인간은 아닌데... 정말 이런사람은 극소수라고 믿고 싶다
222222222222222222222222222222
극소수 아님 필리핀가서 매춘하는 남자색히들이 90%정도는 됨...한번이라도 한놈들..
아 진짜 쪽팔려..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 나라망신은 다 시키고 다니면서 어휴 진짜 ㅠㅠ 챙피하고 내가 다 저 사람들한테 미안하다.
볏신들.. 성욕만있고 책임감은 어디로 원정보낸거냐. 아이임신하게해놓고 한국으로 튀면 끝.ㄷㄷ..저런남자 만날까 진챠 무섭다긔. 저런건 어찌 조사해볼 방법없나..
아 쪽팔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대만 이런 잡것들이 한국인 행세를 하고 한국을 망신주네.. 에라이 ..저기간 한국놈들도 참..........
더럽다.
아이들이 불쌍타..크면 알게되겠지... 엄마는 매춘녀에 아빠는 이름도 모르는 캐볏신........
불쌍하다~ 저아이들이 잘클수있기를.... 한국남자들 외국가서 진짜 아래 조심들 하라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