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베를린 비엔날레가 ‘The Present in Drag’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개막했다. < 가디언 >은 이렇게 썼다. “이 전시는 더 나은 미술 세계가 아니라, 미술 전체를 포기하기 위해 논쟁한다.” 현대미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문제적 전시를 직접 살펴보았다.
비엔날레를, 큐레이터의 비전을 통해 당대 미술의 흐름을 재성찰하는 기회이자 장소라고 정의한다면, 이번에 DIS가 큐레이팅한 베를린 비엔날레는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성공적이라 평가할 만하다. 비엔날레 규모의 기획을 맡은 적 없던 미국의 젊은 집단 DIS는 자신들이 가장 잘 알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 베를린에서 기꺼이 수행해내고 있다. DIS는 이성애자 커플인 로렌 보일과 마르코 로소, 게이 커플인 솔로먼 체이스와 데이비드 토로가 주축이 돼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패션지 에디터, 작가, 웹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등의 친구들이 모여 정체성을 확립한 이들은 작가나 기획자로서 이런저런 전시나 아트페어에 참여하기도 하고, 겐조나 레드불 같은 브랜드와 협업해 독창적인 결과물을 선보이기도 한다.
또한 2010년부터는 온라인 잡지 < DISmagazine >을 통해 활동 영역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노동, 트윈에이지, 아트 스쿨, 스톡, 사생활 등 동시대 미술에서 익숙한 주제를 취하고는, 거기에 엉뚱한 패션 스타일링을 접목하는 식의 이미지 메이킹으로 기성 패션지나 미술지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패션 브랜드의 스튜디오 사진 문법을 비틀어버린 DIS의 ‘변태적’ 이미지는 흡사 초현실주의자의 몽타주 기법이나 기이한 인형 놀이의 결과물 같기도 하다. 1990년대 베네통 광고의 프로파간다적 이미지나 2011년부터 발행된 < Toilet Paper >도 떠오른다. 하지만 DIS의 이미지는 사실 아무 메시지가 없는, 텅 빈 기호에 가깝다. 트위터, 텀블러,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를 떠도는 저급한 이미지와 곧바로 연결되는 그것은 아름답지도 귀엽지도 고급스럽지도 그렇다고 혐오스럽지도 않은, 그저 뭔가 이상해 보여서 ‘쿨하고’ ‘펀한’ 디지털 시대의 감각적 이미지 세계를 파고든다. DIS는 < DISmagazine >에 이어, 2013년에는 스톡 사진 에이전시 ‘DISimages’를, 2014년에는 리테일 플랫폼이자 실험실로서 작가와 디자이너가 제작한 옷, 침구, 화분, 신발, 아트 오브제 따위를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 ‘DISown’을 잇따라 오픈했다. 리지 피치, 라이언 트레카르틴, 사이먼 대니, 사이먼 후지와라, 존 라프만, 코라크리트 아루난논드차이 등의 작가나 후드 바이 에어, TELFAR, 69 등의 ‘힙한’ 신생 패션 브랜드가 그들과 협업했다. DIS라는 ‘브랜드’의 생산 시스템은 그렇게 착착 완성되었고, 미국의 반짝이는 창작 집단으로 떠오른 지 몇 년도 안 돼, 현대미술 제도의 가장 ‘영예로운’ 임무인 비엔날레의 큐레이터까지 맡게 된 것이다.
이렇게 DIS의 이력을 세세히 살핀 이유는, 베를린 비엔날레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튀어 나온 < DISmagazine >이자, 그들의 활동을 중간 점검하는 회고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혹은 ‘DISown’의 오픈을 기념하는 팝업 전시로 2014년 뉴욕의 레드불 스튜디오에서 열린, 비엔날레 이전까지 그들이 기획한 가장 큰 규모의 < DISown- Not For Everyone >전의 확장판 같기도 해서다. “미술도 패션도 아닌 새로운 장르를 만든다”는 평가에 걸맞게, DIS는 미술, 패션, 대중문화, 음악, 광고, 퍼포먼스, 파티 등을 아우르는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비엔날레를 구성했다. 전시장 분위기는 미술 엘리트주의에 도취한 작금의 큐레이션과 사뭇 다르다.
이들은 ‘미국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베를린에 온 관광객의 동선과 딱 떨어지는 공간을 전시장으로 선택했다. 전시장은 모두 20~30분 거리에 있는데, 그중 아카데미 데어 쿤스테에서 가장 DIS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사방에서 빛이 들어오는 데다, 내부에는 계단이 지그재그로 교차해 애초부터 집중력 있는 전시를 꾸리기 어려운 장소지만, 그 특징을 극단적으로 밀어 붙여 거대한 복합 쇼핑몰처럼 연출해놓고는 작가와 디자이너를 불러 모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전광판에 ‘Welcome to The Present in Drag’라는 환영 인사와 함께 ‘전시 속 전시’를 표방해 작가와 디자이너 열세 팀이 쇼핑몰 입간판처럼 제작한 이미지 프로젝트 ‘LIT’가 관람객을 맞는다. 그리고 오른편 팝업 숍에서는 TELFAR의 티셔츠와 토트백, 잉크베 홀렌의 콘택트렌즈, 이자 겐즈켄, 에드리안 파이퍼, 토털 프리덤 등이 이번 비엔날레를 위해 만든 스페셜 LP < Anthem >을 판매한다. 수박 모양의 오브제와 재활용 에코 가구로 장식한 그라운드 카페에선 데보라 델마 코퍼레이션에서 생산한 녹색 음료 ‘Mint’를 마실 수 있다. 그리고 기자간담회와 오프닝 날에는 센터 포 스타일의 패션쇼가 열리기도 했다. 피곤한 관람객은 닉 커즈머스가 만든 철제 운동 기구에서 몸을 풀거나, 푹신한 소파와 침대에서 M/L 아트스페이스, 니지 피치와 라이언 트레카르틴, 크리스토퍼 쿨렌드란 토마스의 영상을 보며 잠깐 잠을 청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쇼핑센터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이번 비엔날레 출품작의 대표적 특징인 ‘기능을 지닌 플랫폼’이라는 특성은 다른 전시장에서도 반복된다. 베를린 비엔날레를 상징하는 쿤스트베르크(이하 KW)의 입구에는 아틀리에 르 발토의 인공 정원 < Passage >, 데님을 활용한 실험적 패션으로 명성을 얻은 브랜드 69의 아웃도어 가구 < 69 R&R >은 더도 덜할 것도 없이 그저 정원이고, 의자다. 슈프레 강을 따라 베를린의 경관을 관람하는 블루 스타 투어 보트에는 코라크리트 아루난논드차이와 알렉스 그보직이 공동 제작한 영상 작업이 상영되지만, 귀신의 집처럼 색다르게 장식한 보트에서의 이국적인 투어에 관심이 더 쏠린다. 통신용 벙커에서 컬렉션 전시장으로 탈바꿈한, 포이에얼레 컬렉션에는 조세핀 프라이드의 미니어처 기차가 관람객을 태우고 전시장의 끝과 끝을 즐겁게 횡단한다. 동독의 국가 기관이었다가 통일 후 학교로 쓰이는 ESMT 건물에서 선보인 사이먼 대니의 신작 ‘Blockchain Vasionaries’는 블록체인 애플리케이션과 디지털 통화의 선두 기업으로 꼽히는 세 회사를 위한 쇼케이스이자 안내 데스크로 제작했다. 이런 일련의 운동 기구, 테이블과 의자, 장난감들, 카페, 편의점, 모델하우스, 소형 극장과 바, 투어 보트 등의 기능과 형식을 갖춘 작품은 ‘DISown’에서 제작 판매하는 라이프스타일 아트 상품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것을 꼭 비엔날레라는 형식을 통해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작품들은 전시장을 식당으로, 휴식 공간으로, 아파트나 사무실 등으로 전환하며 작가와 작품, 관람객의 상호 관계를 탐색한 관계 미학의 자장 안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작품의 목적은 전시장이라는 미술 제도에 의문을 표하거나 작품 창작과 수용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데 있지 않고, 작품의 내용을 포장하는 원초적 장치로서 현실의 사물과 공간의 기능을 모방해 버린다. 전시장을 빠져나오며 ‘이게 다인가?’하는 허탈감은 ‘크리에이티브’라는 허장성세를 앞세운 패션 브랜드가 미술가와 진행한 쇼룸을 보고 났을 때와 유사하다. 평평하고 공허한 장식으로서의 생활-미술만 남아 있는 풍경.
한편, 출품작들은 DIS의 겉핥기식 가벼움을 공유한다. 미술의 즐거움을 주장하는 DIS에게 유럽을 잠식한 그림자 – 난민 수용, 영국의 유로존 탈퇴, 경제 위기, 인종 갈등 등 – 는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방해 요소였을 것이다. 이들은 전시 서문에서 “과연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까? 이라크는 국가인가? 프랑스는 민주 국가인가? 내가 샤키라를 좋아하나? 나는 우울증을 겪고 있나? 우리는 전쟁터에 있나?” 등의 널뛰는 질문을 던진다. 작가들도 민감한 정치적 이슈를 감정이입을 위한 문고리로 재활용하면서, 미술의 울타리에서 가지고 노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터키 작가 할리 알틴데레는 시리아 출신의 래퍼 모함마드 아부 하자르와 협업해 유럽을 분열시키는 난민 문제를 랩 뮤직비디오로 풀어냈고, 안나 우덴버그의 아크로바틱한 포즈를 취한 여성 형상은 브란덴부르크 토어와 프랑스 대사관, 알리안츠 생명 빌딩, 파리저 플라츠를 병풍 삼고는 셀카 봉으로 자신의 성기를 촬영하면서 오르가슴에 빠진 표정으로 여행 가방에 떡하니 얹혀 있다. 조지 부시, 딕 체이니, 콘돌리자 라이스, 토니 블레어 등 이라크 전쟁의 주역인 정치인이 죄수복을 입고 “I’m so sorry”라고 눈물을 흘리는 조시 클라인의 CGI 영상을 보며 ‘정치적 비평’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내는 건 곧장 과잉 해석이 되어버린다.
이번 비엔날레 내러티브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건, DIS가 줄곧 관심을 보인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미술의 관계다. 트레버 파그렌과 제이콥 애플바움이 한스 하케의 작품 ‘Condensation Cube’의 형태를 따라 만든 조각 작품 ‘Autonomy Cube’는 패스워드만 입력하면 관람객에게 무선 인터넷을 제공한다. 티무르 시-친의 인공 정원은 센서에 따라 관람객을 LED 화면에 비추며 인터렉티브한 환경을 조성한다. 안토니 아바트는 전시장에선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인터넷에서 진행 중인 < BlindWik >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장님이 스마트폰 앱으로 기록한 특정 장소에 관한 경험을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알렉산드라 피리씨의 ‘Signals’는 암흑의 공간에서 블랙 모션 캡처 의상을 입은 퍼포머가 페이스북의 엣지랭크나 구글의 페이지랭크의 알고리즘에 따라 춤추고 노래하거나 추상적 불빛 형태를 만든다. 이런 작업들에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테크놀로지와 미술의 ‘융합’을 통해 ‘미래의 예술’로 환영받은, 이제는 파산한 판타지가 강렬하게 스며 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작품에 비하자니, 차라리 오큘러의 VR 기기로 가상현실 경험을 제공한 존 라프만의 작품이 더 순수해 보일 지경이다.
테크놀로지의 환영에 홀린 자기만족적 기계 장치나 상투적인 SF 스타일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21세기 디지털 기술이 세상과 맺는 은밀한 관계를 직접 결부한 작가는 히토 슈테이얼뿐이다. 관련 분야의 이론가이기도 한 그는 아카데미 데어 쿤스테 지하 3층의 공연장을 군사 비밀 기지로 탈바꿈시켰다. 우크라이나의 3D 렌더링 회사가 주요 클라이언트인 서구 열강의 주문에 맞춰 제작한 군사용 게임과 럭셔리 부동산 시뮬레이션 등에 관한 기술자의 자전적 인터뷰, 이라크 북부 산악 풍경과 이라크의 국립 천문대였다가 모바일 통신사의 타워로 쓰이는 건물을 중국산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 등을 뮤직비디오와 오락용 게임 스타일로 편집했다.
또한 디지털 그래픽을 활용한 대다수 영상 작업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할리우드의 완벽한 기술력과 차별화된 조악한 CGI 이미지, 레트로 취향과 낭만적 디스토피아 정서, 인터넷을 헤매다 발견한 이색적인 푸티지 영상, 불균질한 이미지의 빈틈을 채우는 사운드, 작가의 나르시시즘적 내러티브 등. 올해 베를린 비엔날레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꼽히는 세실 비 에반스의 ‘What the Heart want’는 앞서 언급한 요소와 방법론을 망라한 영상 설치 작품이다. 작가는 KW 1층의 거대한 전시장을 물로 가득 채우고 중심에 런어웨이 형태의 플랫폼을 설치해 동굴처럼 꾸며놓았다. “기술적, 사회적, 정치적 기계 장치가 미래의 인간을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가?”를 내용으로, 상품 광고의 만화경적 이미지, 북한의 선전 방송, 남한의 탈북자 토크쇼 클립, 화면을 떠도는 흐물흐물한 신체 파편, 리얼리티를 3단계로 나눠 구현한 캐릭터, 팝 음악을 리믹스한 뮤직비디오 구성, 화면에 오버랩된 문자 메시지나 HTML 텍스트, 일본의 가상 캐릭터 요와네 하쿠, 숭고함을 불러일으키는 대자연 풍경, 이카루스의 신화를 풍속화 장르에 담은 피터르 브뤼헐의 명작, 깊은 바닷속 해파리 등을 풍성하게 뒤섞어 놓았다.
올해 베를린 비엔날레는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남발하며 분류해온 수많은 작업이 결국 새로울 것 없었다는 점을 실감케 했다. 작가들이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 생산자로서 창작 활동을 계속 펼쳐나가야 한다면, ‘포스트-인터넷’, ‘포스트-컨템포러리 아트’ 등의 용어를 향한 미술계의 냉소주의를 걷어내고, 어쨌든 곤경에 빠진 미술을 끄집어내야 한다. 아카데미 데어 쿤스테 지하와 KW의 옥상으로 통하는 문에는 애드리안 파이퍼의 프로젝션 작업인 ‘Howdy’가 설치돼 있다. 파이퍼는 빨간 원 중앙에 ‘HOWDY’라는 글자를 경고문처럼 대문자로 새겨놓았다. 관람객은 별다른 생각 없이 “어떻게 지냈니?”라는 의미를 지닌 이 친근한 문구를 보며 힘껏 문을 열어보지만, 도무지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어리둥절해한다. 다소 허망하기까지 한 이 작업은 장식이 된 미술, 세계의 불행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유희적 이미지 놀이, 테크놀로지와의 조건 없는 랑데부, 21세기식 ‘빈자의 미학’이라 할 법한 CGI 랜더링 이미지의 무한 복제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오늘의 미술이 처한 ‘출구 없음’의 상황을 은유하는 듯했다.
DIS는 인터뷰나 간담회 등에서 자신들의 역할은 미술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 지닌 고민을 더욱 증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더욱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 사생활에 대한 심포지엄을 열기 보다는 그것을 더욱 위태롭게 하는 것, 현재의 문제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 전시를 보고 나면, 그들의 이런 발언은 애초의 의도라기보다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들이 이번 전시에서 제시한 ‘역설paradox’과 ‘본질essence’을 결합한 용어인 ‘역설적 본질paradessence’이라는 키워드는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DIS의 진짜 의도라면, 그래서 모종의 불안을 유발했다면, 그들은 일단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게 아닐까? 베를린 비엔날레는 9월까지 계속된다. 향후 어떤 논쟁을 생산적으로 개척할 수 있을까? 연일 미술계의 비판을 받는 DIS도, 베를린 비엔날레의 큐레이터 자리를 발판 삼아 성장한 마시밀리아노 지오니나 아담 심치크처럼 동시대 미술 권력의 중심부로 다가갈 수 있을까? 어쩌면 미술의 아우라를 한층 강화한 그들을 패션계에서 더욱 환대해줄지도 모른다. 하기야 미술이면 어떻고 패션이면 어떤가, 둘다 아니라면 또 어떤가. 그것이야말로 ‘역설적 본질’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