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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고증 통해 낱낱이 해부
19세기 세계정세와 동북아 근대화 등 전쟁의 내·외부 요인까지 철저히 분석
일제의 ‘경복궁 무력점령’이 전쟁 원인
조선 핵심 통치기구 빼앗아 정부 기능 마비 관군, 친일내각 지시로 동학농민군과 싸워
1894년 우리 땅에서 벌어진 두 열강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던 청일전쟁. 중국과 일본, 두 나라는 왜 조선 땅에서 혈투를 벌였을까? 그리고 청일전쟁의 발단이 된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또 청일전쟁이 120년 뒤를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육군 군사연구소 세계전쟁연구과가 철저한 고증을 통해 그저 ‘굴욕의 역사’로만 치부되던 청일전쟁을 낱낱이 해부한 책을 17일 발간해 눈길을 끌고 있다.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청일전쟁 당시와 맞닿은 지금
“고려의 문신 추적은 ‘미래를 알려거든 먼저 지나간 일을 돌아보라’고 말했습니다. 역사는 과거학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과거에서 교훈을 얻는 미래학입니다.”
김석구(대령) 세계전쟁연구과장은 청일전쟁 당시 조선의 상황과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이 마치 데자뷔처럼 비슷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대령은 청일전쟁을 다시 재조명하고 이를 통해 얻은 교훈을 통해 미래의 변화와 충격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일전쟁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 중화 체제 아래 공존하던 한·중·일의 관계를 급격히 와해시켰다. 일본의 승리로 끝난 전쟁의 결과 중국의 지위와 역할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 및 정치질서가 급변한 것이다. 김 대령은 중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통해 세계 2위의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동북아의 맹주’를 자처했던 일본의 지위가 위협을 받고 있는 지금은 청일전쟁 당시 구한말을 연상시킬 정도로 위중하다고 전했다. 그는 “한반도 주변의 안보환경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가 당면한 과제”라고 말했다.
김 대령은 청일전쟁 공간사 발간의 의미를 ‘과거를 모르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는 서양의 속담에서 찾았다. 청일전쟁은 단순히 두 나라의 알력다툼이 아닌 동북아의 판세를 가른 큰 정치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또 우리 민족과 한반도 분단의 단초를 제공하고 한국전쟁의 원류가 된 것도 청일전쟁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김 대령은 “조선 망국의 결정적 계기가 된 청일전쟁을 연구하고 교훈을 찾아내 비슷한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면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한 역사적 통찰력을 갖게 해 줄 것”이라고 전했다.
●청일전쟁의 원인은 ‘경복궁 무력점령’
그동안 청일전쟁을 다룬 연구서적은 여러 권 있었다. 하지만 전쟁과 관련된 정치·외교·경제·사회·문화·이념적 제반요인이 어떻게 군사적 문제와 연계됐는지를 종합적으로 설명한 군사사 수준의 서적은 찾기 힘든 상황이다. 책은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19세기 세계정세는 물론, 동북아 국가들의 근대화,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준비, 조선 영토 내·외부의 전투, 독일·러시아·프랑스의 삼국간섭 결과, 전쟁의 교훈 등을 망라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 간행된 청일전쟁 관련 문헌들의 누락·왜곡된 사실들을 고증을 통해 바로잡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청일전쟁 발발의 중요한 원인으로 일본의 경복궁 무력점령을 든 점이다. 책은 경복궁 무력점령이 조선 중앙군의 무장해제와 2차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져 청일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책은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 나카츠가 아키라 교수의 일제 비밀문서 고증을 바탕으로 경복궁 점령에 대한 사실을 밝혀냈다. 김 대령은 “경복궁은 8도의 감영과 산하 행정기구들을 관할하는 핵심 통치기구였다”며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전략적 중심인 경복궁이 무력화되면 국가 운영 전반이 마비돼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메이지유신을 통해 클라우제비츠의 군사사상을 받아들인 일제는 클라우제비츠의 ‘중심이론’에 따라 경복궁을 최우선적으로 강점해 조선 정부의 통치기능을 마비시켰다”며 “그 결과 조선 지방군은 친일내각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의 지휘·통제를 받아 동학농민군 초멸 작전에 동원됐다”고 덧붙였다.
책은 또 국내의 청일전쟁 관련 서적이 구체적인 군사작전 내용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 착안, 경복궁 전투는 물론 풍도해전, 성환·아산전투, 평양전투 등 우리 땅에서 벌어진 전쟁과 요동반도 내륙전투, 여순전투 등의 경과를 상세히 서술했다.
세계전쟁연구과 연구원 4명이 각종 책자 및 논문 100여 종과 국내외 전문가들의 자문, 19세기 후반 해외보도 내용 등을 분석해 공동 집필한 이 책은 군 장병들의 무형전력 향상을 위해 비영리 목적으로 발간됐다. 따라서 군 내 정책부서와 교육기관, 중대급 이상 야전부대, 유관기관에 배부될 예정이다. 물론 국공립 도서관과 주요 민간대학 도서관에도 책이 비치될 예정이기 때문에 민간인들도 열람이 가능하다.맹수열 기자 < guns13@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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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일본과 강화 맺고 조선에 대한 우월권 상실 일본 요동반도 차지…러시아·독일·佛 함께 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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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에 참가한 중국 기함. 위키백과 제공 |
임오군란 이후 한반도의 종주권을 강화한 청국과 일본 양국이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영국 등 열강의 중재가 있었지만, 양국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한반도가 양국 간 충돌의 격전지가 될 것이었다.
▶청국, 일본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다
구식 군대의 반발인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자 대원군이 다시 입궐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33일 만에 하야해야 했다. 3척의 군함에다 4000여 병력을 파견한 청군이 서울을 장악한 뒤 그를 군란의 책임자로 몰아 청으로 압송해 간 것이다. 청은 ‘조선의 자강을 위한다’는 외교적 명분으로 원세개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킨 채 명성황후 세력과 제휴하면서 내정간섭을 계속했다.
청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며 10여 년간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과의 수교(1882)와 그해에 영국·독일과 체결한 통상조약이 그러했고, 러시아와의 조약(1884)도 청의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협조하에 이뤄졌다. 이탈리아(1884), 프랑스(1886), 그밖에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등과의 잇따른 수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선의 앞날에는 대원군 집권 당시 염려하던 ‘문호개방은 개문영적(開門迎賊)’이라는 참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일, 결국 전쟁의 길로 가다
그런데 청국의 간섭정책으로 일본의 조선무역에 대한 독점적 지위가 흔들렸다. 때마침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농민군의 봉기(1894년 2월)가 일어났다. 조선 정부는 즉각 청에 원병을 청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본도 재빨리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군대를 인천에 파견했다. 정부가 폐정 개혁을 약속함에 따라 동학군은 전주에서 강화를 맺고 해산했다. 그러나 청일 양국은 군대를 계속 증파했다. 청이 일본의 저의를 알고 공동 철병을 제안했지만, 일본은 그들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청일의 관계가 급랭하자 영국이 한반도의 분할을 제안했다. 일본군은 서울과 인천에서 남한으로 철수하고, 청군은 아산에서 북한으로 철수해 중간에 중립지대를 설정해 각각 남·북한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청은 이 안에 승낙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그 대신 일본은 그해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중앙군을 무장해제했다.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내세운 일본군은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한편, 청에 대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이었다.
▶한반도, 청일전쟁의 전장이 되다
결국, 전쟁이 터졌다. 한반도가 전쟁터가 됐다. 7월 24일 군산 해상에 나타난 일본의 연합 함대가 쾌속 순양함 3척을 이끌고 청군이 주둔한 아산만 일대를 정찰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6시 30분 일본군은 풍도 해상에서 청의 군함 2척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일본은 제원(濟遠)·광을(廣乙)호가 먼저 발포했다고 청 측에 책임을 전가했다.
제원호와 광을호는 크게 격파됐고 청군의 인명 손실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여순항에서 아산항을 출발한 고승호(高陞號)가 또 격침당했다. 육군은 성환에서 패했고(7월 29일), 다시 평양(9월 15~17일)에서 대패했다. 10월 하순, 전쟁터는 압록강을 넘어 요동반도와 산둥반도로 확대됐다.
청일전쟁은 주변국이 한반도에서 벌인 패권 쟁탈전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0월 동학군이 재차 궐기해 일본군에 맞섰다. 지난번의 봉기와는 달리 직접 일본제국주의와 맞선 구국전(救國戰)이었다. 동학군의 반격은 요동과 산둥반도에 주력군을 둔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적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12월 동학군이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전쟁의 종결과 ‘국제적 흥정’
급기야 청이 일본과 강화에 나섰다.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이 맺어졌다(1895년 4월). 청은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상실했고,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하면서 만주 진출을 노리게 됐다. 이에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함께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삼국간섭’이었다. 일본은 할양받은 영토를 되돌려줬다. 일단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배격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고자 친러 세력의 중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시해했다(95년 10월). 조선 정국이 친러노선으로 기우는 가운데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했다(96년 2월). 이때 러시아가 대련과 여순을 조차하며 동북아 경영에 적극 나섰다. 러시아의 팽창을 우려한 일본은 러시아와 일전을 준비하는 한편, 협상카드를 들고 나왔다.
▶수교 직후의 미국 공사관
한반도는 국제적인 흥정의 대상이었다. 그해 5월부터 일본과 러시아가 협상을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에 거론된 대동강선(39도선)이 분할의 경계선으로 제시됐다. 이른바 ‘로마노프-야마가타 의정서’로 불리는 비밀협약. 일본과 러시아가 잠시 한반도에서 숨 고르기를 위해 타협한 것에 불과했을 뿐이다. 대한제국으로서는 수년 후 발생할 참혹한 열강의 대리전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피할 길이 없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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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동상. |
동학농민전쟁 그림. |
동학농민군의 2차 진격로.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성악가 조수미가 부르는 파랑새를 들으면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일본 침탈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던 우리네 농민군이 일본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는 광경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동요는 동학농민운동(1894) 때 불렸다고 전해진다. 동요에서 파랑새는 푸른색 군복을 입은 일본군을 뜻하며, 녹두밭은 전봉준을,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졌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자. 19세기 말 엘니뇨가 극성을 부리면서 전 세계의 가난한 나라 백성들이 떼로 죽어나갔다. 특히 1877년과 1878년에 발생한 강력한 엘니뇨는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 큰 가뭄을 가져왔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인도와 중국에서만 20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대기근 사태를 방관했고 중국의 청나라는 국민을 구휼할 재정이 없었다. 민중과 농민들은 처참한 기근 앞에 무기력하게 죽어갔다. 이런 형편은 우리나라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아프리카 동남부의 무수한 반란을 포함해 중국의 의화단운동, 한국의 동학농민운동, 힌두교 민족주의의 부상, 브라질의 카누두스 전쟁이 가뭄으로 인한 대기근에 의해 발생했음을 명확히 했다.”(R. B. 마르크스)
“조선에서는 1884년 강력한 대가뭄부터 가뭄의 정점이었던 1901년은 38년과 124년 주기 가뭄이 겹쳐 전국적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변희룡)
아시아와 조선에서의 대가뭄과 기근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에는 큰 기회였다.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이 1876년 조선과 강제로 맺은 강화도조약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기회를 줬다. 이 당시 조선은 1877년의 엘니뇨 때부터 인도나 중국처럼 가뭄으로 큰 타격을 받았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1877년 11월 조선에 일본으로부터 쌀을 받도록 권유했다.
“지난해 가뭄으로 상황이 가혹했고, 올해도 식량 사정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조선관리)
“우리는 쌀이 많으므로 조선이 우리 쌀을 받아줬으면 좋겠습니다.”(일본 공사)
“조선 반도는 땅이 너무 작아서 일본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보답으로 쌀을 되갚을 능력이 없습니다.”(조선관리)
“우리는 조선을 돕고자 하는 일이며 조선 쌀을 우리가 가져 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일본 공사)
그러나 일본 공사가 한 이 말은 채 10년도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이 큰 가뭄으로 시달리며 곡창지대였던 호남지방의 농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갔으니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전라도의 굶주린 농민들은 이 사태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민중의 자각과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당시, 삶에 대한 희망이 끊어진 사람들이 서양의 서학에 대항했고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시됐다. 동학은 인내천사상으로 전통적인 신분제도의 철폐와 인간평등주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기근으로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도적이 들끓고 민심이 흉흉함에도 관리들은 오히려 토색질을 일삼았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통분한 농민들이 전봉준 동학 접주를 중심으로 고부군청을 습격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10개 고을에서 1만 여 명의 농민들이 참여해 무장을 갖추면서 동학교도와 농민이 연합한 동학군을 결성했다. 황토현 싸움에서 관군을 패퇴시키고 5월 10일 정읍으로 진격했다. 전주에 입성한 동학군은 6월 11일 24개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관군과 화약을 맺었다.
그러나 일본이 동학농민전쟁에 끼어들면서 양상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어떻게 하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까 노리던 일본에 동학농민전쟁은 그야말로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 준 격’이었다. 조선 조정에서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6월 초 급히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러나 6월 11일 전주 화약으로 동학농민전쟁이 종식되자, 조선에 출병한 일본은 병력을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에 일본의 군부는 청나라와 전쟁을 벌일 계획을 추진한다. 전쟁계획을 진행시키는 와중에 한양으로 진주한 일본군은 경복궁에 침입해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 정권을 수립했다. 그리고 6월 23일에는 일본 수군이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대를 참패시킨 후 친일 김홍집 내각을 수립했다. 이에 해산했던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투쟁을 선언하고 다시 무장군을 일으켰으나, 10월 22일부터 시작된 공주?우금치 싸움에서 일본군에 참패한 후 해산했다.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고 사형에 처해진다. 당시 엘니뇨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엘니뇨로 인한 가뭄과 대기근이 없었다면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했을까?
[TIP]동학전쟁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1895년 日함대, 청나라 해군력 무력화 요동반도 점령
일단 조선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일본은 청나라를 무력화해 조선을 확실하게 점령하고자 한다. 이때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구실로 일본이 청나라에 제안했던 내용이다.
첫째, 서울~부산 간의 군용 전선가설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할 것. 둘째, 조선은 앞서 체결한 제물포 조약에 따라 일본 군대를 위한 병영을 건설할 것. 셋째, 아산에 있는 청국군은 정당한 명분 없이 파견된 것이므로 즉시 철퇴할 것. 넷째, 청한 수륙무역장정 등 조선의 독립에 저촉되는 청한 간의 모든 조약을 폐기할 것.
일본의 이 같은 제의에 대해 청나라가 단호히 거절하자 일본은 수순에 따라 외교관계를 단절한 다음 8월 1일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청일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청나라는 도저히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1895년 1월 30일 일본함대는 청나라의 해군력을 무력화시켰다. 일본 육군은 도망치기에 바쁜 청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요동반도를 점령했다. 이에 열강들의 중재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조인됐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극동지역의 최강자로 올라섰고, 청나라는 덩치만 큰 무력한 나라로, 조선은 일본의 강권적인 간섭에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돼 버린 것이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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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랴오닝성 단둥(丹東)에 1894년 청일전쟁 당시 해전을 기념하는 ‘갑오(甲午)해전 박물관’을 건립해 내년 9월 개관할 계획이라고 환구망(環球網)이 14일 보도했다.
중국 당국은 올해 청일전쟁 발발 120주년을 맞아 이 박물관의 주요 전시물 중 하나인 청나라 순양함 즈위안(致遠) 함을 실물 크기로 복제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단둥항에 문을 열 박물관은 연면적 1만6,000㎡ 규모로, 4개의 전시장을 갖추고 해전 관련 사료, 유물, 사진 등을 전시할 예정이라고 이 매체는 전했다.
청나라 베이양(北洋)함대는 1894년 9월 17일 압록강 하구의 다루다오(大鹿島) 해역에서 일본 연합함대와 전투를 벌여 즈위안 함 등 순양함 5척이 격침되며 대패했지만 당시 청군 장병들은 최후까지 분전해 중국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중국 당국은 우선 오는 9월 단둥항에서 복제를 마친 즈위안 함을 일반에 개방하는 등 갑오해전 박물관을 국민들의 ‘애국주의 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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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문 |
올해는 청일전쟁 발발 120주년이다. 1894년 7월 청국 북양함대에 대한 일본연합함대의 기습공격으로 불붙은 청일전쟁은 중국과 일본이 언젠가는 자웅을 겨뤄야 할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였다. 문명사적으론 19세기 아편전쟁 이래 서세동점이 가져다 준 누적된 모순의 폭발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조선이 전장이 돼야 했을까? 이 전쟁은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을 장악하기 위한 주변국들 간의 패권경쟁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1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되새겨봐야 할 교훈의 보고다.
어떤 경우라도 외세를 끌어들여선 안 된다는 게 가장 큰 교훈이다. 한반도에서 중국세력을 몰아내고 조선을 손안에 넣기 위해 대청전쟁을 10년간이나 준비하면서 기회를 노려온 일본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청의 조선파병을 개입의 빌미로 삼은 건 구실에 불과했다. 본질은 조선이 항거불능의 무기력한 약체였다는 사실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충분했더라면 청에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일본에게도 개입의 명분과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 터다.
지도층의 국가관과 외교력도 중요하다. 당시 수구파ㆍ개화파 할 것 없이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보다 국익을 우선시하는 자세로 세계시장 편입이라는 대외개방의 시대적 조류에 능동적으로 대처했어야 했다.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기에 외교력이 생겨날 리 없었다. 그래도 중국ㆍ일본ㆍ러시아ㆍ미국과 각기 균형외교를 추구했더라면 외세에 꺼둘릴 확률은 저하됐을 것이다. 오늘날 한미동맹과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동시에 심화, 관리해야 할 이유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당시 승패를 가른 건 군사력뿐만이 아니었다. 정치작동 시스템, 지도자의 이념과 국정운영, 경제력, 전쟁동원력, 민ㆍ관ㆍ군의 국민적 단결 및 전쟁지지와 민도 등이 유기적으로 작동된 국가의 총체적 전쟁수행능력에서 운명이 결정됐다. 전장의 병력은 두 나라가 엇비슷했다. 그러나 청은 정치 리더십부터 취약했다. 중대한 패인이었다. 위로 일왕에서부터 군부, 내각, 낭인, 일반인 등 전 국민이 일심으로 전쟁에 임한 일본에 비해 청은 외침에 직면해서도 조정조차 합심하지 못했다. 대응책을 두고 벌인 서태후의 후당(后黨)과 광서제의 제당(帝黨) 간의 대립이 개전에서부터 강화에 이르기까지의 대응을 더디고 복잡하게 했다.
정쟁은 청이 함선 82척, 어뢰정 25척 등 총톤수 8만5000톤의 4개 해군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북양함대만 참전하게 된 배경이었다. 나머지 세 함대는 각기 세력 온존을 위해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만 있었다. 정원(定遠) 등 총 13척의 군함을 출정시킨 북양함대만으로도 마쓰시마 등 12척의 일본해군과 대등했으니 만약 청 조정이 전 해군력을 모두 투입시킬 수 있었다면 쉬이 패했을까? 고군분투의 지방군 대 거국일치의 국가군 간의 전쟁이라면 승부는 애초부터 정해진 거나 다를 바 없다. 청이 패한 건 정쟁과 전쟁지도의 혼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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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5월 농민과 동학 교도들이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 왕조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청군은 6월8일 아산만에 상륙, 12일부터 군사 행동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일본은 조선에서의 청·일 간 세력 균형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파병,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지를 장악했다.
조선은 이제 동학농민운동의 내적 몸살에 시달리는 한편 청·일 두 나라가 으르렁거리는 팽팽한 긴장 국면으로 들어간 것이다. 일본군은 조선으로서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 격이었다. 조선은 동학농민운동이 진정됐음을 이유로 청·일 양군의 동시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철수를 거부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의 내정개혁(內政改革) 요구가 일본이 든 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894년 오늘 일본군은 선전 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일본군은 풍도(豊島) 앞바다의 해전 승리에 이어 성환에서 청군을 격파, 7월30일 아산을 점령했다. 이후 일본군은 계속 북상, 9월15일 평양에 집결해 있던 청군 1만 명을 패퇴시킨 뒤 10월 들어 청국 영토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11월6일 진저우(錦州)성, 11월22일 뤼순(旅順)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에 연전연패한 청국은 1895년 4월17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 ‘배상금 2억 냥(3억 엔) 지불’ 등을 요지로 한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일본의 대승으로 끝난 청일전쟁은 이후 한·중·일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일본 자본주의는 급속히 발전했고 조선·중국은 일본과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 대상이 돼 갔다.
오늘, 영국의 발명가 조지 스티븐슨이 증기 기관차 시운전에 성공했고(1814년)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 루이스 브라운이 영국 올드햄 병원에서 출생했다(1978년). 소련이 제정 러시아가 중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 폐기를 내용으로 한 ‘카라한 선언’을 발표했고 오상순·염상섭·변영로 등을 동인으로 한 문예지 ‘폐허’(廢墟)가 창간됐다(1920년).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46년간의 적대 관계 종식에 합의한 공동 선언에 서명했고(1994년) 한국·프랑스 정부 간에 프랑스 소장 외규장각 도서 297권과 국내 고문서를 맞교환하기로 합의했다(2001년).
〈양영채 나루커뮤니케이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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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7월 25일 오전 7시 25분, 아산 근해의 섬 풍도(豊島) 앞바다.(현 행정구역상, 경기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이 시간쯤이면 여름 해가 수평선 위에 떠올라 밝아진 상황. 그런데 평화로워야 할 이 조선의 바다에 한 발의 포성이 바다를 진동시켰다. 일본 군함들이 청나라의 ‘제운(濟運)’ ‘광을’(廣乙)함을 향해 제1탄을 발사한 것이었다. 청일전쟁은 그렇게 조선 땅에서 시작되었다.
■ 청일전쟁, 그 비극의 시작과 끝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여 전인 1894년 6월 7일, 청나라는 2000여 명의 군사를 아산과 성환, 평택지역으로 상륙시켰다. 조선 조정이 그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본은 1885년 청일간에 체결된 톈진조약에 따라 7600여 명의 병력을 인천 항을 통해 한성으로 진출시켰다. 조선 조정은 수차례에 걸쳐 일본군 파병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철군을 요구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자국에서 발생한 작은 농민운동도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조선 조정의 요구는 일본군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운명의 7월 25일 아침. 풍도 서북해상을 지나던 청국 군함들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3척의 일본 군함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아 1200여 명이 풍도 앞바다에 수장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해전에 이어 1894년 7월 28일 저녁, 일본군과 청군은 충남 아산 성환역 인근에서 5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를 했다. 이 전투에서 청군은 500여 명이 전사한 반면 일본은 단 68명이 전사하였다.
1894년 9월 15일에는 일본군 1만7000여 명의 병력과 청군 1만2000여 명이 평양에서 다시 한번 혈전을 벌였다. 일본은 평양까지의 긴 거리간 식량과 보급문제 등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시작된 청일전쟁은 ‘성환전투’ ‘평양전투’ 등에서 청나라가 연이어 패배하면서 이듬해 2월 청나라의 항복으로 끝났다.
전쟁은 청과 일본이 벌였으나 전쟁터는 조선이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청일간의 협상의 주요 안건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와의 종속관계에서는 벗어난 대신,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희생물로 전락되어 간 것이었다.
■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청일전쟁은 청과 일본간의 전쟁이었으나, 전쟁이 벌어진 곳은 조선이었다. 조선 백성들의 삶의 터전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었다. 항의할 수도, 보호를 요청할 수도 없었던 조선의 백성들은 고스란히 전쟁의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전투가 벌어진 일대의 마을들은 양국군의 포탄으로 초토화되었으며, 한참 벼가 자라고 있었던 논들은 쑥대밭이 되었다. 군수물자 운반과 보급을 위해 동원된 백성들,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동원된 그들의 고통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청과 일본의 침략과 횡포에 조선 백성들은 가슴에서 열불이 나고, 답답하였지만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백성을 보호해야 할 조선의 조정이 그 임무를 버린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답한 가슴 쥐어뜯으며 하늘을 향해 탄식했던 말이 ‘아산의 청군이 무너지나, 평택의 일본군이 깨지나’였다. 이 말은 지금도 현지주민들이 답답함을 토로할 때 내뱉는 탄식의 표현으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
2014년은 청일전쟁이 발발한 지 120년이 되는 해다.
많은 안보 전문가들은 최근의 동북아 안보환경이 120년 전과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 추진 등 우경화와 군사대국화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중국은 지역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급속히 증강하는 등 중일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과거사 문제와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 등으로 동북아 안보상황은 갈수록 복잡하고 위중해지고 있다. 이처럼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동북아 안보정세는 우리에게 120년 전의 청일전쟁 중에 백성의 안위를 지키지 못한 조선의 전철을 결코 밟아서는 안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일깨워 주고 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어, 조국의 산하를 열강의 전쟁터로 내 주었던 뼈아픈 역사를 깊이 자각하고 우리의 국방안보태세를 확고히 하는 데 온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발표·토의해 봅시다.
1. 청일전쟁 때 왜 조선은 열강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는지 이야기해 보자.
2. “위기를 기억하며 스스로 지킬 힘을 길러야 한다”는 교훈의 의미가 무엇인지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자.
<국방부 국방교육정책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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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청에 승리 찬양 … 태극기·일장기 활용
친일내각 조종하며 조선 침략을 노골화
경부선 기공식에도 유독 큰 일장기 게양
자원 탈취 위한 철도부설 日 의도 드러나
사진① 1894년 11월 17일 자 The Illustrated London News의 삽화. (필자 제공) |
청일전쟁과 태극기
영국의 화보주간지인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 1894년 11월 17일 자는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삽화를 보도했다. 2쪽 분량의 삽화에는 태극기와 일장기로 장식된 ‘凱旋門(개선문)’이 크게 부각되고, 일본군이 문을 향해서 행진하고 있다. 또한 주변에 많은 일본군이 집결해 있으며, 노인과 어린 조선인 구경꾼도 눈에 띈다. (사진①)
1894년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위태로운 시기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중국의 영향력이 우세하던 한반도에 일본을 비롯한 미국·러시아·영국 등 외세의 침략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특히 1884년 갑신정변을 배후에서 조종하다 실패했던 일제는 청나라가 힘없고 무기력하게 된 것을 계기로 10년 만에 한반도 지배의 마수를 본격적으로 뻗치기 시작했다.
동학혁명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한 일본은 1894년 7월 23일 조선의 왕궁(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강제로 친일내각을 구성했다. 7월 25일 성환에서 청나라 군대를 격파한 일본군은 다음날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격침했다. 8월 1일에 청나라와 일본이 선전포고를 했으며, 일제는 8월 5일 마포구 공덕동 만리창에서 개선 행사를 거행했다.
일본군이 청나라군을 물리치고 개선하는 장면을 묘사한 이 삽화 속에 일장기와 함께 등장하는 태극기는 민족 시련의 서막을 알리는 태극기라고 불러도 결코 틀리지 않는다. 역사상 처음으로 조선이 일본의 전승(戰勝)을 축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조선 왕궁을 점령하고 친일내각을 조종했던 일제의 가증스러운 선전 전략의 일환이었다.
청일전쟁의 와중에 일제는 오늘의 시각에서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치욕적인 조약을 조선의 친일내각에 강요했다.
첫째는 1894년 8월 21일 자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이라는 것이다. 7월 23일 일제가 왕궁을 점령한 사건을 타협·조정한다는 취지의 이 조관은 제1항에서 “향후 일본정부는 조선국의 내정개혁을 희망하고, 조선정부도 그것이 급선무임을 자각하여 다음의 사항들을 순서에 따라 시행할 것을 보증한다”라고 명시했다.
제2항은 “경부선과 경인선 철도부설 사업은 조선정부의 재정이 아직 여유가 없음을 살펴서 일본 정부 혹은 일본이 어느 회사와 계약한 다음, 시기를 보아서 기공되기를 원하는 바이나 현재 사정이 여의치 않아 처리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좋은 제도나 법규를 도출하여 계약을 맺어 공사를 시작할 수 있기 바란다.” 이는 일제의 한반도 침탈 제1보가 철도부설에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는 잠정합동조관 1주일 후인 8월 26일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한일공수동맹(韓日攻守同盟)이다. 이 조약의 전문에는 “일본정부는 조선정부로부터 청나라 병사를 몰아내는 위탁을 받아 군사를 파병하여 대리로 싸우게 된 터이라 이미 양국 정부는 공격과 수비에 있어 서로 공조하는 위치에 있다”라고 명기됐다.
공수동맹의 제1조는 “이 맹약은 청나라 병사들을 조선 국경 밖으로 철퇴시켜서 조선국의 자주독립을 공고히 하고 한일 양국의 이익을 증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라고 돼있다. 이는 조선의 청나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조항이기도 한다.
사진② 경인선 서대문역 개통식. (1900년 11월 12일, 필자 제공) |
일제의 철도부설과 태극기
청일전쟁의 승리에 고무된 일제가 조선 왕비를 시해하는 등 조선 침략을 노골화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년간이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고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외세 배격과 자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또한 러시아·미국·영국 등 열강이 일본을 견제했다. 그러나 이런 여건 하에서도 일제는 한반도 침탈 계획을 집요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 언급한 잠정합동조관에 명기된 철도부설이다.
우선 경인선 철도 부설을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경인선 철도부설권은 1896년 미국인 모스에게 주어졌다. 그는 1897년 공사에 착수했으나 자금 사정으로 일본 경인철도합자회사에 권리를 양도했다. 경인선은 1899년 제물포와 노량진을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됐으며, 1900년 한강철교 준공과 함께 노선이 서울역까지 연장돼 전 구간이 완공됐다. (1900년 11월 경인선 서대문역 개통식의 태극기와 일장기: 사진②)
사진③ 경부선 기공식. (1901년 9월 21일, 부산 초량, 필자 제공)? |
일제가 식민지화를 통한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 탈취를 위해 가장 중점을 둔 기간산업은 철도부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눈독을 들인 사업은 경부선 건설이었다. 일본자본으로 설립된 경부철도주식회사는 1901년 8월 21일 서울 영등포, 9월 21일 부산 초량에서 각각 공사를 개시했다.
경부선 건설은 관민의 저항과 반대에 직면해서 순조롭지 않았다. 일제의 철도부설이 한반도 및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한 기반작업이라는 사실을 우리 민족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지 매수에 따른 분쟁, 홍수와 한파, 한일 간 화폐 가치의 차이 등 난관에 봉착해서 공사가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개시한 일제는 신속한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공사를 서둘러 1905년 1월 1일 개통했다.
경부선이 개통되자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선박)을 매개로 한일 철도가 연결됐고, 1906년에는 경의선이 개통돼 1908년부터 부산~신의주 간 직통열차가 운행하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 침략으로 수송량이 급속히 늘어나자, 일제는 1936년부터 복선공사를 시작해 약 8년 동안에 거의 모든 노선을 복선화했다.
1901년 9월 21일 부산 초량에서 열린 경부선 기공식 장면(사진③)의 태극기와 일장기를 유심히 보면 일제의 한반도 철도부설이 우리가 아닌 그들을 위한 것이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통상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태극기와 외국기가 동시에 게양될 때 보는 이의 시각에서 태극기가 왼쪽, 외국기가 오른쪽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인데 사진에는 거꾸로 돼있다. 더구나 사진 속의 태극기 크기가 일장기보다 훨씬 작은 것은 우연으로 보기 힘들다.
이 사진은 일제가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2000만 평에 달하는 부지를 수용(收用)하고, 연인원 1억 명에 달하는 한국인을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했다는 우리 학계의 주장을 증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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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영 교수 가톨릭대·안보학 |
최근 1개월 간격으로 선조들이 웅혼을 떨쳤던 광활한 만주벌판과 한민족의 문화적 영혼이 서려 있는 일본의 중남부 일대를 돌아보았다. 동북 3성 곳곳에 건설붐이 일고 있어 기가 살아 꿈틀거리는 중국과 세계 2대 경제 강국의 지위를 상실하는 데서 오는 심리적 박탈감과 쓰나미ㆍ원전폭발로 기력이 쇠잔해 가는 일본은 대조적이었다. 동북아가 새롭게 재편돼 가는 상황에서 한국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해외탐방이었다.
신흥 강대국이 등장할 때마다 기존 패권국에 도전하는 전쟁이 발생하곤 했다는 국제정치학의 세력전이(勢力轉移) 이론은 동북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근대화에 앞장선 일본이 청나라에 도전함으로써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패권을 장악한 일본은 러일전쟁을 감행했고, 태평양전쟁을 통해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일본은 전후복구를 위한 미국의 경제지원은 물론 6·25전쟁과 자국민의 놀라운 복원력에 힘입어 세계 2대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뿌리 깊은 족벌 정치로 인해 지난 5년간 6명의 총리가 교체될 정도로 정치 리더십이 부재하고, 고령화 사회로의 급속한 변화와 젊은이들이 비전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것을 보고 동력이 상실돼 가는 것을 느꼈다.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와 중국의 위협 등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놓고 방황하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극도로 침체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1세기 이상의 와신상담과 개혁개방을 통한 지속적 경제성장을 이뤄내 지난해 일본을 제치고 2대 경제 강국으로 등극했다. 중국은 경제력에 힘입어 매년 15% 내외의 국방비를 증액해 왔다. 우주선과 위성요격 무기 발사,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스텔스 전투기 시험비행, 항공모함 시험운항 등 무섭게 군사력을 증강해 왔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동북아 안보지형이 요동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한국이 외교안보력의 부재로 자초한 청일·러일전쟁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참담한 상황이 재현돼서는 안 된다. 한국은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제3세계의 국가발전 모델국이자 지난해 세계 7위의 수출을 달성한 나라로서 중일·미중 간 갈등을 완화시키고 분쟁을 예방하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미국이나 중국이 동북아 안보협력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서로가 선뜻 받아들이기가 부담스럽다. 쇠퇴하는 경제력과 신뢰 추락으로 일본이 미·중 간 중재자 역할을 하는 데 한계가 있다. 유럽 중심인 러시아가 동북아 화해 협력의 견인차 구실을 하기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동북아 역내 국가 간 상호 존중과 화해 협력의 산파역을 감당해야 한다. 동서문화를 융합시키고 다른 종교가 공존하며,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승리한 대한민국에 이러한 시대사적 소명이 주어졌다고 보며, 지난 7월에 서울에 설립한 한중일 협력사무국이 모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사회지도계층인 정책입안자,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들이 한민족의 웅혼한 기풍과 웅장한 문화 DNA를 되살려 과거를 뛰어넘어 보다 역동적인 미래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동북아 역내 국가들의 카운터 파트들과 인식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갈등과 분쟁의 진원지인 한반도가 평화와 공동 번영의 허브로 거듭날 때 비로소 통일도 이뤄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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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장군 행차 삽화 필자 소장 |
조선의 기선에 게양된 태극기 삽화 |
헤세-바르테크의 저서 ‘Korea’ 표지 |
1894년 청일전쟁 전 조선 방문
헤세-바르테크가 조선을 찾은 것은 1894년 6월 말이었다. 당시 조선은 동학혁명에 휘말렸고, 한반도에 진주한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치르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는 한여름에 부산을 거쳐 제물포·서울을 여행했으나, 본래의 희망대로 조선 방방곡곡을 누비지는 못했다. 청일전쟁 발발을 앞두고 신변상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방한 1년 후인 1895년 태극기로 표지를 장식한 ‘Korea’라는 책을 발간했다. ‘조선으로의 여름여행’(Eine Sommerreise nach dem Lande der Morgenfrische)’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이 책에는 그의 경험담은 물론, 많은 삽화와 자료들이 소개됐다. 참고로 이 책은 1904년에 개정판이 발간됐는데, 이는 독일어로 발간된 우리나라에 관한 책들 중에서 드문 사례다.
헤세-바르테크는 이 책에서 한민족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러한 저력이 부정부패한 관리들 때문에 개인과 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아쉬움을 도처에서 토로한다. 특히 우리는 이 책에서 태극기와 조선의 군대에 관한 매우 흥미롭고 주목할 만한 정보들을 접할 수 있다.
태극기 구입 일화와 선적기(船籍旗)
헤세-바르테크는 조선 여행 중 태극기를 사려고 했던 매우 특이한 인물이다. 아마 1세기 전에 조선을 여행하면서 태극기를 구입하려고 했던 유일한 외국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부산에서 태극기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겪은 불쾌한 경험담을 ‘Korea’에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조선의 시청관리가 포졸을 대동하고 하루에 한 번씩 검사를 위해 거리를 배회한다. 이 시청관리는 조선 정부가 임명한 인물이며, 대부분 그의 동료가 다른 지역에서 행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돈을 착취한다. 사소한 사례 하나를 들어보기로 하자.
조선 국기 하나를 구입하려고 수소문한 끝에 나는 앞서 언급한 관리만이 국기를 판매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결국 그가 근무하는 관청에 가서 넝마와 다름없는 무명천에 붉은 벽돌색과 검은색 타르를 처바른 태극기를 비싼 값을 주고 샀다. 내게 사정 얘기를 들은 부산항의 외국인 세관원은 조선 정부가 상당한 돈을 받고 그 관리에게 부산에서의 태극기 독점판매권을 주었다고 설명해 줬다.
이 관리는 고의로 질이 나쁜 태극기를 만들어 모든 선박이 이를 게양하도록 명령한다는 것이다. 한차례 소나기나 험한 바닷바람에 태극기가 못쓰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새것을 사야만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태극기 판매 독점은 수지맞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Korea, 9쪽)
또한 헤세-바르테크는 ‘Korea’에 당시 자료들을 인용해 조선의 선박과 태극기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서 원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으나, 일본이 원산의 거의 모든 무역을 장악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태극기를 게양한 소형기선 2척을 원산과 두만강의 2개 항구를 운행하고 있다.” (위의 책, 213쪽)
“선박 교통에 있어서 조선의 돛배들이 1893년에는 대부분 기선으로 교체됐다. 1892년에 태극기가 게양된 기선의 적재량이 고작 8000톤에 불과했지만, 1893년에는 무려 4만1000톤이나 됐다! (중략) 태극기를 단 기선과 그 적재량의 증가는 조선 정부의 기선(해룡호 등 4척) 구입에 따른 것이다. (위의 책, 218~219쪽)
막강한 잠재력 지닌 조선 병사들
헤세-바르테크는 그의 저서 ‘Korea’에 하나의 장(章)을 할애해 조선의 군제(軍制)에 관해서 소개했다. 여기에는 병력 및 징집에 관한 사항은 물론, 컬러 삽화와 해설이 곁들여진 장군의 행차 장면 등 귀중한 사료도 등장한다.
“세계 각국에는 희한한 군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중에서 조선군은 가장 특이해 보인다. 조선 정부의 공식 통계에는 병력이 120만 명으로 돼 있다. 양반이 아닌 건장한 남성은 병역의무를 지며 병적부에 등재된다. 그런데 이들 중 99%는 무기와 군복을 소지해 본 적이 없다.
조선 관리에게 병적부 작성은 짭짤한 장사다. 돈으로 벼슬을 산 하급관리들은 매년 병적부 작성을 위해 관할구역을 순시해 공공연히 병역을 면제해 주고 돈을 착복한다. 이런 부정부패는 동학혁명을 유발했고, 이는 한반도 침탈에 혈안이 된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조선의 120만 명 병사 중 약 1만 명만이 무기를 소지하며, 이 중에서 8000명이 서울에서 근무한다. 병사들은 정부에서 제공하는 옷감으로 군복을 만들어 입는다. 군화와 군모는 자비로 구입해야 한다.
조선의 장군 행차는 보기 드문 볼거리다. 2명의 나팔수와 12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길 양편으로 앞서 행진하고, 장군은 작은 조랑말을 타고 뒤따른다. 장군의 앞뒤로 마부가 수행하는데, 앞의 마부는 말고삐를 잡는다. 장군은 보라색 소매에 금실로 수를 놓은 긴 옷을 입고 청색 띠를 맨다. 머리에는 붉은색 말총으로 장식된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굵은 호박(琥珀) 구슬 끈으로 모자와 턱을 매 고정시킨다. 장군의 뒤에는 군인으로 보이지 않는 하인들이 각각 부채·담뱃대·연초주머니·기름종이로 만든 우비·군화·옷 궤와 자물쇠·그물망에 담긴 놋쇠 요강을 들거나 등에 메고 뒤따른다.
˝조선 병사의 자질은 뛰어나다. 중국 병사보다 훨씬 낫고, 난쟁이처럼 왜소한 일본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하다. 서울에서 내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5.9피트 이하의 신장을 가진 조선 병사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힘이 넘치고 튼튼했으며, 영양 상태도 좋았다. 게다가 검은 수염을 기른 근엄한 용모를 가진 쾌남아(快男兒)들이라 근위대로서 적격이었다. 그러나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하고 훈련이 충분치 않아 자질과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Korea, 96~101쪽)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테크(Ernst von Hesse Wartegg·1854~1918, 사진). 1세기 전,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여행가 이름이다. 빈(비엔나)에서 태어난 그는 베네수엘라 주재 스위스 영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당시 소프라노 가수로 유럽과 미국에서 이름을 날렸던 미니 하우크(Minnie Hauk)의 남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오늘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여행기록 때문이다. 1872년(18세) 남유럽 여행을 시작으로 그는 1900년(46세)까지 카리브 해의 섬들·중앙아메리카·미국·캐나다·멕시코·남아메리카·아프리카·조선·일본·중국 등 전 세계를 누볐으며, 무려 20여 권의 여행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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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들 이권 쟁탈·조선의 중립화 요건 불충분으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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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
유길준의 모교 미국 보스턴 대학. 위키백과 제공 |
청국이 청불전쟁(1884)과 청일전쟁(1894)에서 연이어 패하며 한반도의 각축전에서 밀려났다. 한반도를 둘러싼 각축은 러시아와 일본의 맞대결 양상을 보였다. 이 무렵 조선을 중립국화하자는 소위 ‘영세중립국론’이 대두했다.
▶청·일 각축기의 중립화론
조선의 중립국화 방안은 조선을 유럽의 스위스와 벨기에처럼 영세중립국으로 만들자는 것이 골자였다. 독일의 부영사 붓들러의 제안이 대표적인 견해였다.
붓들러(H. Buddler)는 상관인 총영사 젬부쉬의 뜻을 받들어 한성조약(1885)의 체결을 위해 전권 대신으로 내한한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카오루에게 제안했다. 청·러·일 3국이 공동으로 조선을 보호하자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에서 청 세력을 약화시키고, 동양 진출이 늦어진 독일로서는 발언권을 얻어 자국의 지위를 높이려 한 의도였다.
붓들러의 제안은 일본 외무경의 동의를 거쳐 외아문독변 김윤식에게 전달됐다. 김윤식은 거부의 뜻으로 원본은 반환하고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사본만 보냈다. 그러나 한·러 간에 밀약사건이 터지고 청국이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면서 논의가 무색해졌다.
▶조선 개화파들의 중립화론
갑신정변(1884) 직후,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이 중립화론을 제기했다. 열강의 이권 침탈이 갈수록 심해지고 주권이 농락당하자 그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유길준과 김옥균이 그 주역이었다. 1885년 11월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1856~1914)이 유학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한 후 귀국했다. 그러나 그는 개화파 인사와 가깝다는 혐의로 곧바로 체포돼 포도대장(한규설, ?~1930)의 집에 연금됐다. 당시 주변의 담론을 들은 유길준이 ‘중립론’이란 글을 썼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선 청국이 주도돼 조선의 중립국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일본 망명 중이던 김옥균(1851~1893)도 중립론을 내세웠다. 그는 조선 국왕과 청국 정부에 ‘조선의 중립국화’를 촉구했다. 1886년 7월 조선정부가 파견한 내아문 주사 지운영(1852~1935)의 ‘김옥균 암살계획’이 폭로되자 이를 규탄하며 서신으로 밝힌 것이다. 특히 이홍장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조선정부를 사주한 청을 비판하고, 조선의 중립국안을 제기하며 구미 각국과 교섭을 통해 동아시아의 안전을 도모할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
유길준이나 김옥균의 주장은 성공하지 못했다. 열강들이 자국 이익에 골몰했고, 특히 종주국으로서 패권을 강화하고자 청국이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 세력은 정치적 실력이 크게 위축돼 실력발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러·일 각축기의 중립화 논의
조선중립화론이 러일전쟁 직전에 다시 재점화됐다. 독립협회가 주도한 중립외교론, 대한제국의 미국인 고문 샌즈(W. F. Sands)의 영세 중립론(1900년 1월), 그리고 러시아 측 안(1902년 9월)과 대한제국이 추진한 전시국외중립론(1904년 1월) 등이 그것이다.
특히 대한제국의 전시국외중립선언(戰時局外中立宣言)은 영세중립화가 백지화되고 러일전쟁 개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최후 수단으로서 제기됐다. 고종과 국내 중립파들이 주축이 돼 추진하고 몇몇 외국인 외교관들이 은밀히 협조했다. 이에 앞서 고종이 1900년 6월 프랑스 변호사 출신의 법률고문인 크레마지(M. Cremazy)의 권고로 중립을 선언한 적이 있었지만, 그땐 목소리가 너무 작아 무시되고 말았다. 이제 러일협상이 공전되고 전운이 짙어지자 고종이 직접 독자적인 국외중립선언을 시도했던 것이다.
전시국외중립선언은 1904년 1월 21일 고종의 직접 명령을 받은 특사가 한국 외무대신 이지용의 명의로 중국의 개항지에서 각국에 기습적으로 불어로 타전됐다.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은 일본에 큰 충격을 줬다. 이지용조차 자신의 명의가 도용된 것을 알고 놀랄 정도의 기습적인 선언이었다. 그러나 각국의 반응이 신통찮았다. 러시아는 방관적 태도를 보였고,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대부분 나라는 회신이 없거나 접수 회신만 보내왔다. 결국, 전시국외중립안은 국제적 승인을 얻지 못한 채 헛수고에 그쳤다. 선언은 35일 만에 한일 의정서의 체결로 그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교훈
조선의 중립국화가 실패한 것은 열강들이 자국 중심의 이익쟁탈에 골몰한 사정 외에도 조선이 중립화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자위력을 갖추고 군비가 충실해야 하며, 이를 위한 재정의 자립도는 물론 지정학적으로 주변 열강들의 세력균형과 중립화에 대한 합의와 보장이 선행돼야 했다.
조선의 여건은 열악했다. 전략적 요충지임에도 세력균형상 주변국인 중·일·러·미에 의한 중립의 상호보장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다극 체제하에서 완충지대라기보다 양극체제하에서 교두보 역할에 더 가까웠다. 조선은 청·일·러 3극점의 심장부에 있었으나 임오군란 이후 청·일 간의 각축전과 청일전쟁 이후 러·일간의 각축전을 통해 양극체제 안에 갇혀버린 신세였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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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7일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勒約:억지로 맺은 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째 되는 날이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일본은 1905년 11월17일을 기해 조선의 외교권 박탈을 골자로 한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후 조선의 외교권은 물론 행정권·사법권·경찰권까지 순차적으로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19세기 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혼란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힘이 없던 조선은 외세의 강압으로 개항을 당해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외세의 침략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만한 국력을 배양하기보다 오히려 일본과 러시아·청나라를 이용,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려 했다.
1884년 일본의 지원을 받은 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조선의 수구파는 청나라 군대를 개입시켜 이를 저지했다.
또 1895년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조선의 친러 세력들은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고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에 대한 청나라·러시아의 영향이 커지자 이를 우려한 일본은 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
결국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모두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05년 11월17일 협박과 변칙 절차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이후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국가의 기능마저 빼앗아 버렸다.
해마다 덕수궁의 가을은 형형색색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든다. 단풍으로 물든 덕수궁 돌담 길을 걷노라면 허름한 서양식 2층 건물과 마주하게 된다. 본디 덕수궁에 딸린 접견소 겸 연회장이었던 이 건물이 바로 을사늑약의 현장인 중명전(重明殿)이다.
당시 일제의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총칼로 무장한 일본 헌병 수십 명을 대동하고 중명전의 회의장에 난입, 대신들에게 조약의 가부 결정을 강요했다.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은 늑약에 찬성했다. 훔쳐 낸 관인이 찍힌 늑약은 다음 날 황제의 비준 없이 공포되었다.
늑약이 공포되자 민영환·조병세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의 자결이 이어졌다. 특히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들은 그의 운전기사가 주인을 따라 자결한 일화는 순국의 충정을 다한 예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밖에 수많은 애국지사가 자결·단식·의병운동 등의 방법으로 일제의 강제 늑약에 항거했다.
일본은 이러한 전국적인 항거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의병 항쟁마저 제압하고 모든 행정권을 장악한 일본은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했다. 우리는 이를 경술년의 치욕스러운 역사라고 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부른다.
덕수궁 돌담 길은 이미 데이트 코스로 잘 알려져 있는 명소다. 그러나 돌담 길 끝자락에 위치한 중명전에서의 비극은 잊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국력이 미약해 국권을 강탈당한 비운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현장인 중명전은 우리에게 “을사늑약의 비극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을사늑약을 전후해 죽어 간 수많은 순국선열을 기리기 위해 11월17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제정했다. 한 시민 단체는 을사늑약의 현장인 중명전을 ‘일제 침략 역사 사료관’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제의하고 있다.
역사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과거의 조언이다. 100년 후를 생각해 보자.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강력한 국방력 건설과 투철한 호국 의지 없이는 100년 후의 국권을 보장할 수 없다. 100년 후 우리 후손들에게서 “선조들이 튼튼한 국방을 이루었기에 세계 속에 우뚝 선 대한민국이 될 수 있었다”는 자랑이 나오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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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전쟁 때 마다 중국의 참전·군사 개입사례 분석 중국에 한미동맹 이해시키고 이슈별 균형감각 주문
중국은 외교·안보 측면에서 한국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와도 같다. 비단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그럴 것이고, 과거에도 그랬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조성훈 박사, 국방대학교의 박창희 교수, 외교통상부의 이상현 정책기획관 등 한국정치사학회 소속 연구자들의 학술세미나 발표 논문을 담은 ‘한반도 분쟁과 중국의 개입’은 그 같은 숙제를 풀기 위한 시도 중 하나다.
이 책은 중국 당 태종의 침략부터 시작해서 임진왜란, 청일전쟁, 6·25 전쟁 등 역대 전쟁에서 중국의 참전 혹은 군사 개입 사례와 그 의미를 여러모로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휴전 후 중국군의 북한 주둔과 철수 문제를 거쳐 ‘북한 급변사태에서 중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이나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대응’ 같은 현재의 국제 정치적 이슈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정치외교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회답게 역사와 국제정치를 접목시켜 보다 넓은 시각에서 중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바라보면서 중국의 한반도 군사개입 문제를 풀어본 것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중국 당나라의 침략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했을 때 우리나라는 삼국 전체 영역에서 75%를 잃었다. 임진왜란 때 중국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파견했지만, 마냥 고마워할 만큼 문제가 간단치는 않았다. 명나라 장수들은 내정간섭도 주저하지 않았고 약탈과 성폭행도 혹심했다.
청일전쟁도 결국 그들의 관점에서는 ‘조공국 조선’을 일본에 뺏기지 않으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6·25 전쟁 때도 중국은 철저히 자국 국익의 관점에서 참전을 결정했다. 즉 중국은 정통왕조시대나 근대국가에 상관없이 시종 일관되게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고,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 중 하나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중국을 경계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이 책에 실린 이상현 정책기획관의 주장 중 하나다. 한미동맹과 한중관계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점을 중국에 이해시키고 이슈별로 정교하고 유연하게 균형감각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 정책기획관의 주문이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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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했을 때 그들을 돕는 일본 민간인들이 있었다. 천우협이라는 단체명을 달고 동학농민군을 지원하던 일본의 대륙낭인들은 사태를 과격하게 만드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왜 이들은 동학농민군을 지원했을까. 그 배후에는 일본 극우세력의 대표적 단체인 현양사가 있었다. 현양사 간부이자 대륙낭인이던 마토노 한스케는 청국과의 전쟁을 망설이던 일본 외상 무쓰 무네미쓰를 만나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청국과 전쟁이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마토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군 내부의 주전론자인 일본 육군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 대장도 만나 전쟁을 권유했다. 가와카미의 대답은 “누군가 바다를 건너가 불을 지르면 군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치안 상황이 악화되면 일본군이 개입할 명분을 얻을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이다.
마토노는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천우협이란 단체가 동학농민군을 지원하면서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한 것이 그 결과물이었다. 결과적으로 가와카미와 마토노의 도박은 성공했다.내전 수준의 혼란 끝에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게 되고 그 끝은 일본군의 서울 주둔이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수도에 입성한 일본군은 이후 우리의 국권을 강탈할 때까지 조선 조정을 압박하는 전위 역할을 수행했다.결국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는 일본 정부의 관료·군인뿐만 아니라 현양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극우세력도 적지 않는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일본 극우세력의 모습은 심심찮게 언론에서 접할 수 있다. 차량에 확성기를 달고 다니면서 독도 문제에 대해 생떼를 부리거나 야스쿠니 신사에서 군복차림으로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 대표적인 모습이다. 천황제를 비판하는 언론인에게 테러를 가했다는 소식이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자국 시민단체 회원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했다는 뉴스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최근 펴낸 ‘일본 우익의 어제와 오늘’은 이처럼 파란만장의 일본 우익 역사의 전체상을 논문 형식으로 살펴본 단행본이다. 저자들은 일본 극우세력의 뿌리에는 막부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해방론(海防論)이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서양세력의 침탈에 대비해 일본의 국력을 강화하자는 주장인 해방론이 일본의 과도한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극우세력과 연결됐다는 것.
저자들은 일본 극우세력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는 점도 잘 보여준다. 천황제를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연결고리가 있지만 각각의 단체들이 지향하는 바는 천차만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각양각색이다. 심지어 같은 극우 중에도 친미와 반미가 나뉠 정도로 외교의 기본 지향점조차 다른 경우도 있다.
물론 극우세력을 일관하는 공통적인 기반은 있다. 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무모할 정도로 과격한 행동력이다. 일본 민간 극우세력이 전쟁에 개입한 것은 청일전쟁뿐만이 아니다. 1904년 벌어진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의 극우세력은 의군을 자처하며 민간인 신분으로 특수작전을 수행한 이들이 수백 명이나 됐다.
1945년 패망 이후 일본의 극우세력은 자신의 세력 기반 대부분을 잃었다. 일본의 우파 정치인 주류는 극우파와는 성향에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극우세력을 폭력적 일탈행위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시대착오적 소수세력으로 단순히 치부하기가 쉽지 않다.
역사왜곡 등 국제적 책임감이 부족한 일탈행위를 주도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배후에는 이들 극우세력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일본 극우세력은 일본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지역 안보에도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변수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우익의 출현 과정과 역사적 변천, 주요 인물이나 단체·사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도 그 때문이다. 문의 02-2012-6065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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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민족은 반만년 역사 속에서 930여회(평균 5년에 1회)에 달하는 외침을 받았으며, 최근 100년간 겪은 전쟁만 해도 5회나 된다.
-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의 와중에서 우리 민족은 일방적인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으며, 급기야는 한일합방(1910)으로 국권이 유린되고 민족사가 단절되는 치욕을 당하였다.
-중 ·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45)시에는 수많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총알받이로 희생되었고, 30여만 명의 꽃다운 처녀들이 정신대로 끌려가 일본군의 노리갯감이 되어 힘없는 조국을 원망하면서 타국 땅에서 죽어 갔다.
- 1950년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의한 6·25 전쟁으로 당시 총 인구의 1/6에 해당하는 520만 명의 인적손실과 30만 명의 전쟁 미망인, 10만 명의 전쟁고아, 1000만 이산가족이 발생하였고 남한의 물적 피해만 해도 가옥의 60%와 공업시설의 45%가 파괴되는 등 전 국토가 폐허 되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 왜 우리 민족이 이처럼 처절한 수난을 반복해서 겪어야 했는가?
- 첫째, 과거 우리 민족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전국민이 일치 단결하여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으나, 평화시대가 도래하면 태평성대가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착각에 빠져 안보와 전쟁대비에 소홀했으며,
- 둘째, 국민의식상 스스로의 힘으로 조국을 지키겠다는 `상무정신'을 배양하기보다는, 강대국에 안이하게 의존하려는 사대주의에 젖어 있었고,
- 셋째,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이, 오직 `약육강식'의 힘의 원리만이 지배하는 냉혹한 국제정세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힘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한 국가의 흥망은 국민들의 국방의식에 의해 좌우되며, 강대국들의 경우 사회 지도층일수록 국가가 필요로 할 때 목숨 바쳐 앞장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충실히 구현되고 있다.
- 칭기즈칸은 전쟁터에서 네 아들로 하여금 항상 선두에 서게 하였고, 모택동과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한국전에서 전사했으며, 영국의 앤드류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시 가장 위험한 항공모함의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 중동전쟁시 미국에 유학한 이스라엘 학생들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귀국길에 오른 반면, 아랍 학생들은 징병 통보를 피하여 피신하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 국방의 의무는 국민 각자의 몫이다.
- 오랜 민족수난의 역사를 겪은 우리에게 국방의 의무는 국민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신성한 의무인 동시에 일정한 자격을 갖춘 젊은이들만이 수행할 수 있는 명예 그 자체인 것이다.
- 군대는 국가의 보전과 국민의 보호를 위해 필요하며, 개인적으로는 내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최근 남북간의 대화와 교류가 활성화됨에 따라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환상적 기대가 확산되고 있으나, 이런 때일수록 우리 장병들은 민족수난의 교훈을 되새겨 군복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 즉 “천하가 아무리 평안해도 전쟁을 잊으면 위태롭다”는 금언처럼 우리는 오랜 민족 수난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명심하여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군복무를 스스로 보람되고 명예롭게 생각하며, 임무완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 우리 역사상 국방태세 미비에 의한 外侵사례
○ 조선시대 율곡의 10만 양병설과 임진왜란
-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년)에 발발하여 불과 20일 만에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7년여에 걸친 그 피해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 일본이 조선에 파견한 `겐소'가 조선인 오익령에게 “명년에는 우리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조선에 길을 빌려 명나라를 바로 침범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오익령이 조정에 보고하였으나, 오히려 그를 해임시키는 등 전혀 국방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 특히 율곡이 제창한 10만 양병설은, 당시의 국방에 대한 취약성을 익히 알고 병력 10만을 상비군으로 양성하여 장차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경고였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파 싸움만을 일삼았으며, 국방력을 스스로 약화시킨 무능과 우둔의 결과 임진왜란을 초래했던 것이다.
○ 청나라의 조선 침입 : 병자호란
- 임진왜란 때 그토록 쓰디쓴 체험을 맛보고도 조선의 위정자들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또다시 전란을 자초하고 말았다.
- 청태종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의 완전한 복속을 강요하였다. 조선이 이에 반발하자, 1636년 12월초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우선 강화도에 피신하려고 했으나, 청나라 군사가 사전 도로를 차단함에 따라, 당시 인조를 비롯한 조정대신 일행은 수구문(水口門 : 서울 4소문(小門)의 하나인 광희(光熙)문의 옛이름)으로 빠져나가 겨우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
- 그러나 청태종은 남한산성을 포위 공격하게 되고, 남한산성의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결국 청태종의 요구대로 삼전도에 나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굴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자료 : 민족의 시련과 영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미래를 대비하는 선진국군 교관용 교재〉
미래를 대비하는 선진국군 교관용 교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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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5만명 파병 만주 점령…한반도 또 한차례 처참한 대리전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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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의 즉위식이 열린 원구단의 일부 건물인 황궁우. |
청일전쟁(1894)은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4월 17일)으로 종결됐다. 한반도에서 청국이 물러가고 일본의 독무대가 된 듯했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가 새로운 견제 세력으로 맞짱을 떴다.
▶러시아, 조선에서 득세하다
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은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잃었다. 요동반도와 대만·팽호열도가 일본에 할양됐다. 만주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가 반발했다. 조약 체결 엿새 후인 4월 23일 러시아가 프랑스·독일과 함께 견제에 나섰다. 일본의 행위가 청국이나 조선을 위태롭게 하고 동양평화를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3국의 공동 간섭에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해야 했다.
러시아의 위세로 조선에서 친러파가 득세했다. 동양 사정에 밝고 수완이 좋은 웨베르 공사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청과 전쟁을 치르고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한 일본은 친러의 중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시해(1895년 10월, 을미사변)했다. 장군 출신의 미우라(三浦梧樓) 공사가 정세를 관망하다가 10월 7일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일본, 명성황후를 시해하다
10월 8일 미명 일본군과 낭인들이 대궐로 들이닥쳤다. 폭도들은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훈련대의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현장에서 살해됐다. 국왕과 왕비의 침전인 곤녕전과 옥호루가 짓밟혔다. 끝내 몸을 피하지 못한 왕비는 흉한의 칼날에 시해됐다. 일본은 국제 여론에 못 이겨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해 가둬놓고 진상을 규명하는 체했으나 흐지부지 시간만 보냈다.
당시 김홍집 제3차 내각이 집권하고 있었다. 내각은 일제의 비호 속에 개혁정책을 계속했다. 태양력, 연호 건원(建元)의 사용, 단발령이 시행됐다. 11월 15일 밤, 국왕 이하 정부 대신들이 삭발했다. 관료 중에는 머리를 깎지 않으려 등정하지 않은 이도 있었다. 학부대신 이도재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고, 춘천의 이소응을 위시해 유인석·서상렬·김복한·기우만 등 유림의 거의(擧義)가 잇달았다.
▶고종,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다
김홍집 내각은 당황해 의병 진압을 하고자 친위대 병력까지 출동시켰다. 서울의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친러파들이 극비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시켰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임 상궁 등의 내밀한 주선 속에서 국왕과 세자가 궁녀 교자에 몸을 감춰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왕후 시해 4개월 만에 이뤄진 아관파천이었다.
고종의 행방이 묘연해 약간의 혼란이 일었으나 고종이 김홍집 등 5 대신을 역적으로 포살토록 함으로써 조정에는 친러파 내각이 구성됐다. 그러나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많은 이권이 러시아 공사에 의해 농단됐다. 일본은 한편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한편으로 협상을 전개하며 기세 싸움을 이어갔다.
▶일본과 러시아 한반도 분할을 논하다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 분할문제를 놓고 협상을 계속했다. 일본이 39도선 분할을 제안했다. 양국 회담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5월 26일)이 거행될 무렵 절정에 달했다. 세계 20여 국가의 대신들이 초청됐고, 조선의 민영환도 특권대사로 초청됐다. 대관식 이틀 전 러일 외상 간의 비밀회담(로마노프-야마가타 회담)이 열렸다. 다음 달 9일 마침내 양국 간 밀약이 성립됐다. 일제가 제안한 39도선 안이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장래 필요에 따라 공동 점거한다는 것이었다. 운명적인 39도선은 ‘국제적 흥정’의 마지노선이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다
그래도 한반도에는 그런대로 세력균형이 유지됐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새로 수리한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1897년 2월)했다. 그리고 그해 8월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해 황제에 등극했다. 독립협회나 조정의 대신과 일반인들이 그토록 바라던 바였다. 길일로 택한 11월 12일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이 거행됐다. 위기의 조선을 구출할 군주의 마지막 포효였다.
주한 열국 공사가 황제를 알현했고 일본·러시아·미국·영국이 새 정부를 승인했다. 1898년 2월 영국은 양국 관계를 공사관으로 승격시켰다. 대한제국이 비상하는 듯했다. 제국은 자주적인 광무개혁을 단행했다. 토지 측량, 산업과 교육의 진흥도 새롭게 모색했다.
▶광무개혁의 교훈
대한제국이 광무개혁을 통해 개혁과 대외적인 자주권을 천명했지만, 그 실효성은 약했다. 재원이 절대 부족했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입지가 제한적이었다. 특히 러일 간의 균열은 제국에 치명상을 입혔다. 러시아가 청의 의화단 사건을 빌미로 5만 명의 군사를 파병해 만주를 점령(1900)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초조해진 일본이 러시아와 협상을 재개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협상은 타결될 수 없는 줄다리기였다. 한반도에 또 한 차례의 처참한 대리전이 예고됐다. 대한제국이 중립국을 선언했다(1904년 1월). 하지만 일본군이 그해 2월 서울을 점령해 중립선언을 무력화시켰고 전쟁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러일전쟁이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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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2월 단발령 공포되자 의병 활동 전국적으로 확대
국가가 전란의 위기에 빠졌을 때 충과 의로써 일어난 민군을 의병이라고 한다. 백암 박은식은 민병의 뿌리는 임진왜란을 거쳐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했다. 한말의 의병은 민병이라는 조직의 이념이나 지향, 그 투쟁양식 등을 통해 ‘의병전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 특징과 성격을 잘 드러낸다.
▶한말 의병투쟁의 기원
한말 최초의 의병투쟁은 1894년 청일전쟁을 기화로 일제가 무력으로 군사를 동원해 ‘갑오경장’을 추진하려 한 데 대한 반발에서 비롯됐다. 이때에 거의한 의병투쟁은 1915년 무렵까지 계속됐다. 1894년 6월,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한 뒤 8월에 친일내각을 앞세워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명분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는 일제의 침략을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했다.
이에 민족 존망의 위기감을 느낀 지방의 일부 척사 유생들이 일본군의 무단에 저항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최초의 거의자인 서상철은 ‘갑오변란’으로 경복궁이 유린당하고 고종이 핍박당하자 1894년 7월 격문을 발표하고 안동향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안동부에 의해 저지당했으나 계속 의병을 모집해 상주 태봉에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상원 의병인 김원교 등은 상원 관아를 공격하면서 반개화·반침략을 기치로 봉기했으며, 을미사변(1895년 8월 20일) 직후인 9월 18일에는 무과 출신인 문석봉이 국수보복(國讐報)을 기치로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그해 12월 30일 단발령이 공포되자 의병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전역으로 의병 항쟁의 물결이 번져갔다.
▶을사조약 늑결 이후 의병의 투쟁이 거세지다
의병투쟁은 러일전쟁 직후에 더욱 가속화됐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19일 을사늑약의 체결로 외교권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주권을 상실한 상태가 됐다. 이때 을미의병 당시 항전 경험을 축적한 의병들이 상당수 재기해 전선에 투신했고, 이들이 의병항쟁을 촉발시켰다. 강원·경기·충남·경북·전라도 등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의병의 전투능력도 상당수의 포군이나 포수 및 활빈당 등이 합류함으로써 향상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투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해산된 군인들이 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 지방에 내려가 의병에 가담해 의병부대의 규모가 커지고 조직력이 강화돼 전면적인 항일전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의병은 유생과 군인, 그리고 농민·포수·광부·상인 등 각계각층을 포함하게 됐다.
특히 1908~1909년 사이의 의병전쟁은 호남지역의 의병이 주도했는데, 1909년 9월 일제에 의한 이른바 ‘남한 폭도대토벌작전’이 실시될 때까지 지속됐다. 일제의 잔혹한 초토화 작전으로 역부족이었지만, 의병전쟁은 민족을 대표하는 항일투쟁의 의심할 나위 없는 중심적인 활동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군대와 헌병 및 경찰력을 증강, 배치하면서 의병 진압에 필요한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예컨대, 조선주차군의 2개 사단 외에도 1908년 5월 2개 연대 1600명을 증파했으며, 1909년 6월부터 여단 규모의 임시 한국파견대를 증강 배치했다. 1910년을 전후로 의병들은 주로 황해·경기·강원·함경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해갔고, 그 활동은 1915년 7월 평남 성천에서 채응언이 체포됨으로써 사실상 종식됐다.
▶의병전쟁의 무대가 해외로 확대되다
결국, 1910년을 전후로 대부분의 의병장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비밀결사로 전환해 투쟁을 전개했다. 해외 망명지는 만주와 간도, 그리고 연해주가 중심을 이뤘다. 연해주에서는 이범윤과 안중근이 연합했으며, 1910년 6월에는 유인석이 합류하면서 13도의군이 결성됐다.
한편, 태평양 건너 미주지역에서도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 박용만의 활동이 주목된다. 1909년 네브래스카에서 그는 소년병학교를 창설했으며, 멕시코에서도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창설해 투쟁의 기반을 확대해 갔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의 포살도 해외 의병투쟁의 개가였다.
해외 의병투쟁은 이렇듯 투쟁지역, 무장단체의 수나 조직력, 그리고 투쟁의 강도 등이 더욱 강화되면서 단순한 저항을 넘어서 적극적인 의미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전쟁을 목표로 하게 됐다.
▶의병전쟁의 교훈
한말의 의병 투쟁은 의병전쟁이라 부른다. 정부의 정규군이 없는 상황이지만 국민을 대표해 일어선 의병이 일본 제국주의를 대항해 전쟁을 선포한 그야말로 총력전이자 국민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의병전쟁은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등으로 표현된 일제 침략에 맞서 반제국주의적 구국 이념이 중심 개념으로 부상했고, 1907년 고종의 퇴위, 정미조약, 그리고 군대 해산으로 이어지는 국권 상실의 과정에서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승패의 여부와 상관없이 오직 충의로써 일어선 의병은 민족의 정수요 민족정기의 정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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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구운 빵’ 비스킷이 뿌리 추위·더위·습기도 견디게 개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처럼 전쟁도 식후경이다. 나폴레옹이 한 말인데 정확하게는 “군대도 먹어야 진격한다”고 말했다. 먹어야 싸울 수 있다는 진리는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다. 유방이 항우를 물리친 것도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으니(以食爲天) 군량미부터 확보하라”라는 참모 역이기의 조언 덕분이다.
전쟁과 음식은 뗄 수 없는 관계다. 고대의 전쟁부터 현대전까지, 장군에서부터 병사에 이르기까지 먹지 않고는 싸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에는 전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잔 술을 수천의 병사가 나누어 마시고 승리한 전투도 있고 고깃국 한 그릇 때문에 패한 전쟁도 있다. 전쟁에 얽힌 음식 이야기에는 작전의 교훈, 인생의 지혜가 숨어 있고 미처 몰랐던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이 있다. 음식으로 읽는 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건빵은비스킷에서기원해발달한식품이다. 19세기뉴욕맨해튼에있던비스킷공장. (뉴욕관광지첼시마켓에전시된사진) |
건빵은 비스킷에서 기원해 발달한 식품이다. 19세기 뉴욕 맨해튼에 있던 비스킷 공장. (뉴욕 관광지 첼시 마켓에 전 |
옛날 병사들은 전투가 치열할 때 무엇을 먹으며 싸웠을까? 밥 해먹을 시간적 여유조차 없을 때 먹던 전투식량이 주먹밥이었고 말린 쌀이며 미숫가루였다. 그런데 주먹밥이 문제였다. 날씨가 습한 여름이면 한나절만 지나도 밥이 쉬어 먹을 수가 없었고 겨울에는 꽁꽁 얼어 이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싸울 때도 많았다. 이런 황당한 상황을 해결해 준 것이 바로 건빵이다. 전투 중인 병사의 허기를 달래 준, 엄지손가락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건빵은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든 것일까?
무심코 먹는 건빵이고, 너무나 사소한 식품이라서 누가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었을 것 같지도 않지만, 건빵은 장기간의 세월에 걸쳐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건빵이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또 다른 전쟁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건빵의 뿌리는 비스킷인데 제국주의 일본군에서 비스킷을 개량해 건빵으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건빵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복잡한 시대적 배경이 얽히고설켜 있다.
일본은 19세기 중반,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유럽을 흉내 내려고 갖가지 개혁을 추진했다. 심지어 병사들에게 하루 세끼 밥 대신 빵을 먹이기도 했는데 키 작은 일본인의 체형을 서양인처럼 만들겠다는 시도였다. 유럽인들은 빵이 주식인 만큼 빵을 먹으면 키도 커질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병사들의 반발이 심해 밥 대신 빵을 지급하는 계획은 곧바로 취소됐지만, 빵을 이용해 휴대용 전투식량을 개발하려는 계획은 중단 없이 지속됐다.
이전까지 일본군의 비상 전투식량은 주먹밥이었다. 하지만 주먹밥은 앞서 지적한 불편뿐만 아니라 많이 휴대할 수도 없고 장기간 보관도 쉽지 않아 대체품 개발이 절실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서양의 비스킷을 응용해 개발한 전투식량인 ‘중소면포’였다.
중소(重燒)는 두 번 구웠다는 뜻이고 면포(麵包)는 빵이니까 중소면포는 ‘두 번 구운 빵’이라는 뜻이다. 비스킷(biscuit) 역시 비스(bis)는 두 번, 킷(cuit)은 요리이니 두 번 요리한 과자라는 뜻이다. 즉 비스킷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 중소면포다. 빵이나 과자를 두 번 구우면 수분이 없어져 장기보관이 가능해진다. 중소면포가 곧 건빵의 원조인데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크기가 수첩만 해 휴대가 어려웠고 군복 주머니에 넣으면 잘 부스러져 먹기도 불편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휴대용 전투식량인 중소면포를 더욱 개선해 발전시킨다. 전쟁터가 섬나라 일본을 벗어나 한반도와 대륙으로 옮겨지면서 보급선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식량을 제때 공급하기 어려워지자 가볍고 휴대가 편리하며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비상식량이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유럽에 기술자를 파견해 각국의 군용식량을 연구한다.
1903년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새로운 비상 전투식량이 만들어졌다. 이름도 종전의 중소면포에서 건면포(乾?包)로 바꿨다. 마를 건(乾)에 면포는 빵이니 바로 건빵이다. 중소면포가 건빵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은 병사들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두 번 구웠다는 뜻의 중소(重燒)와 큰 부상을 당했다는 중상(重傷)의 일본어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건빵은 이후에도 개량작업이 계속됐는데 지금처럼 먹기 편하고 휴대도 간편한 소형 건빵이 나온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만주 전선의 극한 추위, 동남아의 더위와 습기를 모두 견딜 수 있도록 개선된 것이다.
건빵은 현재 우리 국군과 일본 자위대가 비상 전투식량으로 채택하고 있고 중국 인민군도 압축병간(壓縮餠干)이라는 이름의 건빵을 전투식량으로 지급한다. 또 건빵의 뿌리는 서양의 비스킷으로 미국과 유럽 각국의 전투식량에 대부분 비스킷이 포함돼 있으니 생김새와 이름만 다를 뿐 건빵은 전 세계 군인의 전투식량인 셈이다.
작은 과자에 불과한 건빵이지만 그 속에는 전쟁의 역사와 전투의 속성이 모두 깃들어 있다. 전투력 극대화를 목표로 작은 건빵 하나를 개선하는 데 약 150년의 세월과 노력이 투자됐기 때문이다. “군대는 먹어야 진격한다”는 나폴레옹의 사상과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유방의 정신이 무심코 먹는 건빵 한 조각에 모두 담겨 있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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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조선 침략 위해 시모노세키 항구에 병력 집결
출병 전에 복어 먹고 죽는 병사들 속출해 금식령 내려
일본 최초의 복어요리점 춘범루, 이곳에서 청일전쟁의 결과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됐다. 필자제공 |
“그렇게 빨리 죽고 싶으면 조선에 건너가서 싸우다 죽어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전쟁을 일으킨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노발대발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조선을 공격하러 떠나기도 전에 죽는 사무라이와 병사들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한낱 생선에 지나지 않는 복어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해인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전국에서 끌어모은 16만 명의 병력을 시모노세키 항구에 집결시켰다.
일본열도 구석구석에서 사무라이들이 병사를 이끌고 이 항구도시로 몰려왔는데 그중에는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출신들도 많았기 때문에 복어에 치명적인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시모노세키에서 맛있는 생선, 복어를 처음으로 먹어봤다. 시모노세키는 지금도 일본에서 복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지역으로 유명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에도 복어가 많기로 유명했다. 병사들은 값싸고 맛있는 복어를 먹으면서 독이 있는 내장까지도 멋모르고 끓여 먹었다.
히데요시가 화를 낸 이유 역시 이렇게 함부로 복어를 먹다가 죽는 병사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투를 앞두고 병력 손실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많은 장병이 죽었으니 자칫 조선 출병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였다.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마침내 복어 금식령을 내린다. 글자를 모르는 병사를 위해 복어 그림을 그려 넣고 복어를 먹으면 벌한다는 지시사항을 적은 말뚝을 곳곳에 세웠다.
그 덕분에 복어를 잘못 먹고 죽는 사무라이들은 없어졌지만 그로 인해 일본사람들은 무려 300년 동안이나 복어를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됐다.
복어 금식령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지속됐다. 전쟁이 잦은 일본에서 자칫 복어를 먹다 사무라이들이 사망하면 전력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영주들이 계속 복어를 먹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끝없이 억누르기란 쉽지 않았다. 위로는 영주인 다이묘에서부터 아래로는 하급 무사인 사무라이까지 몰래 복어를 먹다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주슈(長州)라는 곳의 영주가 복어를 먹다가 죽었다. 이 사실을 안 막부에서는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영주가 복어 금식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하사했던 토지를 모두 몰수했고 녹봉을 다시 거둬들인 것은 물론 자식들을 상류층의 신분을 빼앗아 서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사무라이들은 복어 먹는 것을 수치로까지 여겼다. 명분은 자신의 목숨은 주군을 위해 바친 것인데 전쟁터가 아니라 복어를 잘못 먹다가 중독이 돼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복어 한번 먹은 벌치고는 가혹하지만, 사무라이들은 복어를 먹으면 안 된다는 자기 합리화의 명분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복어를 먹지 말라고 다그쳤다. 일본 사람들이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라고 말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蔭) 같은 사람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복어 식용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1882년 일본 정부는 심지어 “복어를 먹으면 구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는 법령까지 만들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어떤 이유가 됐건 상부에서 아무리 복어를 먹지 말라고 말리고 처벌을 해도 일반인들은 복어를 먹었다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병력 손실을 이유로,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국민의 안전을 이유로 복어를 못 먹게 했지만, 맹목적인 금지가 원천적 욕구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의 전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렸던 복어 금식령이 풀린 것은 꼭 300년 후인 1892년으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은 경술국치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서였다. 일본의 복어 금식과 해금이 모두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일본의 초대 총리가 된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를 방문했을 때, 춘범루(春帆樓)라는 여관에 머물렀는데 마침 바다에 거센 폭풍우가 불었다.
배들이 며칠 동안 출항을 하지 못해 싱싱한 생선이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여관 주인이 금지된 생선인 복어를 요리해 총리에게 대접했고, 복어를 맛보고 감탄한 이토 히로부미가 현의 지사에게 요청해 춘범루에서는 특별히 복어를 요리해 팔 수 있도록 조치를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춘범루를 공식 복어요릿집 1호로 꼽는 이유다.
참고로 일본 최초의 복어 요리전문점 춘범루가 또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다.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중국과 일본이 싸운 청일 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리홍장(李鴻章)이 조약을 체결된 장소가 바로 춘범루였다.
청나라는 이 조약에서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고,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펑후 섬 등을 일본에 양도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자신의 세력권에 넣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든 것이다.
복어 한 마리에 얽힌 우리의 역사이고 동양의 근대사다.
<윤덕노 음식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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