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당사 진대덕이 고구려에 들어가 산천을 유람하면서 산길의 험이와 인구의 다소, 요처 등 모두 허실을 깊이 알아내 돌아가 보고하자 당주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사군의 땅이다. 전국을 동원하여 군대를 크게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은 필히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이곳을 구하려고 할 것이다. 이때 따로 수군을 동래로부터 보내 해수로를 따라 평양에 이르러 수군과 육군의 힘을 합해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바를 공격한다면 이것(고구려)를 취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동정하려는 뜻을 갖게 되었다. [당지에 보임]
冬十月 高句麗泉蓋蘇文弑其君迎大陽[榮留王弟]之子臧卽位是爲寶臧王[見留記]
겨울 10월, 고구려 천개소문이 그 왕을 시해하고 대양[영류와의 아우]의 아들인 장을 영입하여 즉위하게 하니 이가 보장왕이다.[유기에 보임]
이전에 소문의 사람됨이 웅위하고 의기가 용감하고 거칠었다. 그 아비를 이어 동부대인[도독]이 된 뒤로는 욕망을 멋대로 하고 폭력을 함부로 하여 사사로운 원한으로 살인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사람들이 모두 꺼리고 두려워하여 감히 뭐라 말하지 못하였다. 병부의 여러 대인들이 그의 음흉하고 잔인함을 미워하여 왕과 더불어 주살하려고 모의하였는데, 그 일이 발각되었다. 소문이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몰래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병부의 도독 100여인을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취기가 거나했을 때 공후를 두들기며 장가를 부르니, ‘큰 바람이 일어나니 흰 구름이 날리는구나. 가을 서리가 날리니 초목이 누렇게 떨어지는구나. 난에는 꽃이 피고 국화에는 향기가 있구나. 사생에 때가 있으니 즐길 때가 얼마인고. 어떻게 용사를 얻어 사방을 바로잡겠는가.’ 노래가 끝나자 칼을 빼들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 모임에 참석한 자들을 모두 죽이고 나서 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막리지[관명은 곧 병부상서]가 되었다. 국사를 천단하고, 미워하는 자에게는 형벌을 내리고, 좋아하는 자에게는 상작을 주었다. 항상 다섯개의 칼을 차고 다녀 위령을 폈다. 출입할 때마다 귀인을 무장케하고 발을 포개고 땅에 엎드리게 했다. 이때부터 조정은 숙연히 두려워하고 꺼려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되었다.[유기에 보임]
이전에 신라의 장군 품석이 백제군과 대야성[대가야, 오늘날 협천]에서 전투를 했는데, 패배를 당하여 그 처와 함께 전사하였다.[품석의 처는 김춘추의 딸이다.] 이찬 김춘추가 이 소식을 듣고 슬픔에 겨워 하루 종일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얼마 후에 하늘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아! 대장부가 세상에 나와 어찌 원수를 갚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가서 아뢰기를 “원컨대 대왕께서는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청병하여 주십시오. 반드시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왕은 기묘하게 여기면서 허락하였다.[동사에 보임]
11월 신라왕이 춘추에게 병하여 고구려에 사행하도록 했다. (춘추가) 유신에게 말하길, “그대와 나는 왕의 고굉지신으로서 마땅히 휴척을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사행길은 반드시 60일이 지나지 않아 환국할 것입니다.(疑蒲字卽滿字之誤) 그렇지 못하면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60일이 지난 때) 공께서는 군대를 일으켜 급히 공격하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유신이 허락하여 말하길, “마땅히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춘추가 대매현에 이르렀을 때 그 현의 사람인 저사지가 춘추를 보고 애지중지하면서 청포 300필을 주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반드시 후에 쓸 곳이 있을 것이지 공께서는 사양하지 마시고 깊이 간직하여 두십시오.”라고 하였다. 춘추는 그 은혜에 감사하고 행장을 차렸다. 드디어 고구려의 수도에 들어갔다. 고구려의 왕은 평소에 김춘추의 위명을 들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이제 경내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설병하여 맞이하였다. 상견례가 끝난 후 춘추가 고구려왕을 설득하기를 “오늘날 백제가 백성들에게 무도포학하고 안으로는 다욕하고 밖으로는 이웃 나라에 대한 정이 없어 우리나라 서방의 미후 등 40개의 성을 침탈하고, 또 대야성을 침공하여 장군 도독인 품석이 출전하여 전사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발병하여 설욕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병사 3만을 빌려주어 같이 백제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눈다면 양국에 서로 이익이 되고 모두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승승장구할 것이고 신라는 약해질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만약 신라가 망한다면 고구려가 그 다음이 될 것이니, 대왕께서는 대책을 세워 결정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고구려왕이 말하기를 “마현, 죽령(오늘의 단양 남쪽 땅)은 원래 우리나라의 봉강이었다. 만일 그것을 돌려주고 사과한다면 병사를 일으켜 구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백제와 힘을 합쳐 신라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였다. 춘추가 눈을 부릅뜨고 한참을 노려보더니 “오늘날 백제는 바야흐로 강성해지고 있습니다. 가령 기병을 내어 서로 돕고 구하여 그들을 제패한다면 그것은 나를 위함이지 저들을 위함이 아닙니다. 대왕께서 어려움을 구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땅을 돌려주라 추궁하시니 이것이 어찌 교린의 도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적이 월을 멀게 여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고구려왕은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공은 돌아가라. 10년 이내에 현명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능력있는 사람을 쓰며, 병사를 양성하고 곡식을 저장하여 장차 신라를 공격하여 옛날 침략했던 것을 복수하겠다.” 춘추가 말하기를 “지금 대왕께서는 오늘날의 곤급함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도리어 과거의 침략 당했던 것에 분노하시고 계십니다. 이로 보자면 대왕께서는 조그만 원망 때문에 이웃 나라와의 교의를 손상시키고 도리어 큰 원망을 맺고 계십니다. 이것은 이른바 작은 원망을 버리지 않으면 큰 원망이 반드시 생긴다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고구려왕이 말하길 “공은 다시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곧바로 네 나라로 돌아가 나의 뜻을 신라왕에게 알려 속이 고성[마현 죽령]을 돌려주어 양궁의 백성을 온전케 하고 형제간의 우의를 두텁게 할 수 있도록 하라.”라고 했다. 춘추가 말하길 “저는 신라의 소신으로서 단지 명을 받들어 병사를 청할 뿐입니다. 몸이 비록 백번을 죽더라도 대왕의 말씀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고구려왕은 대로하여 사람을 시켜 붙잡아 가두도록 했다. 춘추는 이에 청포를 고구려왕의 총신인 선도해에게 뇌물로 주었다. (선도해는) 기뻐하며 달게 받고는 고구려왕을 설득시키기를 “춘추는 일개 미천한 신하일 뿐이니 죽이더라도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모기를 보고 칼을 빼어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석방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도해가 춘추에게 일러 말하길 “속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동해 용왕이 딸을 치료하기 위해 근심하다가 신령스런 거북으로 하여금 토끼의 간을 구해오도록 했습니다. (거북이) 바다를 건너 산에 들어가 이익으로 토끼를 속여 물속으로 끌고 들어온 후 토끼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지금 용왕의 따님이 병이 들었는데 백약이 무효라. 만일 간을 내어주어 약으로 쓰게 한다면 크게 공명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자, 토끼가 말하기를 ‘아, 내가 간을 빼내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보름이 지나면 간을 꺼내 씻어서 암석 사이에 둔다. 지금 곧장 달려가 가져온다면 너의 바램은 이루고, 나의 공명 또한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거북은 그것을 믿고 호송하였고, 산에 들어가자 (토끼는) 돌아보고는 ‘어리석구나, 거북의 믿음이여. 어찌 간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거북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장탄식하면서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도 거짓으로 기이한 모책을 내어 목숨을 보전하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춘추 역시 깨닫고는 곧 고구려왕에게 글을 올려 “침략당한 옛땅은 돌아가면 제 왕께 돌려주라고 설득하고 청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의심하지 마시고 화친을 맺고 형제의 우의를 두텁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고구려왕은 크게 기뻐하여 곧 석방하고 두텁게 대하였다. [유기에 보임]
이때에 김유신은 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정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한강을 건넜다.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나라의 위기를 보고 목숨을 내놓고 어려움에 당해서는 자신을 잊어야 한다고 했다. 무릇 한사람이 죽음을 무릅쓰면 백 사람을 감당할 수 있고, 백 사람이 죽음을 감수하면 천 사람을 감당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이웃 나라는 무도하여 사신을 붙잡아 두고 보내주질 않으니 진실로 즐거이 죽을 때이다. 원컨대 여러분은 힘을 다하고 죽음을 무릅쓰길 바란다.”고 했다. 드디어 격서를 띄우고 진군하자 고구려왕은 크게 놀라 마침내 춘추에게 사죄하고 후례하여 보내주었다. 춘추가 국경 밖에 나와 전송하는 사람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국가의 봉강은 내가 감히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옛땅을 돌려받는 것은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이끌고 귀국하였다. 신라왕이 나와 맞이하고, 유신을 압량군주에 배하였다.[나고지에 보임]
겨울 12월 고구려 천개소문이 백금을 당 황제에게 올렸다. 근신 저수량이 아뢰기를 “소문은 그 임금을 시해하고 국정을 천단하여 구이가 용납하지 못하는 자이고 지금 장차 토벌하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가 봉공한 금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내(해석 안 됨)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우 옳지 않습니다. 물리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옳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천통사에 보임]
11월 (백제)왕이 고구려와 병력을 합쳐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가볍고 예리한 군사를 선발하여 당에 들어가는 요로를 막고 통과하는 관리와 백성을 잔인하게 죽이니 이에 신라왕이 당에 구원을 청하였다. 백제와 고구려 양국은 당이 구원병을 크게 일으켜 배후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겁먹고는 병사를 이끌고 각 나라로 돌아갔다.[동사에 보임]
갑진 3년[신라 12년, 고구려 2년]
봄에 당 태종이 현장을 보내 고구려왕을 설득하길 “당과 신라는 화친한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침략하지 마시고 백제와 더불어 각자 그 병사를 거두고 생민을 편하게 하십시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당연히 출병하여 먼저 공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묵묵히 한참을 있다가 “이것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러 의견을 따르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소문은 “과거에 수가 우리나라를 정벌하려 했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약점을 엿보아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다. 그래서 군대를 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현장이 말하기를 “지난해의 일은 지난해에 하고, 올해의 일은 올해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지난 일을 가지고 논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소문은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가 보고하였다. 태종은 다시 장엄을 보내 고구려왕을 설득하였다. “수나라 난리를 일으킨 후로 사해가 쓸쓸해지고 만민이 피폐해졌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마땅히 군대를 쉬게 하여 천하의 마음을 위무하시고, 천하의 바람에 부합하십시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천하의 병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와 같이 공격하여 한사람도 남김이 없게 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이 그럴싸하다고 여겼다. 소문이 간언하여 말하길 “대왕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신라의 병사들은 피폐해 있으니 대왕께서는 급히 공격하시어 시기를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신이 듣기로 복은 다시 구할 수 없고 때가 이르러 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의 사신을 죽여 버리면 불가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이에 소문은 곧 장엄을 어두운 굴속에 가두고 죽이려고 했다. 간지리 온복이 간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 무고한 한 사람을 죽이고 천하를 얻은 자는 없다고 했습니다. 장엄은 당의 일개 소신일 뿐이지 죽인다고 해도 이득이 없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곧 풀어주고 예로 대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경의 말이 옳다.”고 하여 석방을 명하고 후대하고 사례하였다.
이때 당 황제는 사신을 가두고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10만 3천명의 병사를 일으켜 수륙으로 병진하여 장차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사신을 보내고 격서를 띄워 말하기를 “천개소문은 무도하여 그 임금을 시해하고 적신 능력공의 무리는 백성은 핍박하며, 이웃나라를 침해하니 죄가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 마침내 진군하니, 장량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고, 이세적은 요동도행총관으로 삼고, 강행본을 명하여 총관도독으로 삼아 각각 군사를 나누었다. 신라, 백제, 해(?), 거란과 더불어 군대를 합해 출병하여 먼저 공격하였다.[요동사에 보임]
2월 왕이 진군하여 매리포성을 습격하였다. 신라왕은 유신에게 출병하도록 했다. (유신이) 맞싸워 백제군을 크게 공파하고 2천여급을 참수하였다. 이에 왕이 분노하여 군사를 크게 일으켜 지름길을 따라 말을 몰아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왕이 유신을 불러 말하길 “국가의 존망이 모두 경의 일신에 달려 있으니 다시 가지 않을 수 없다. 장군은 노고를 생각하지 말고 사직을 보전하도록 하라.”고 하자, 유신이 조아리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바쳐 신하가 되었으면 마땅히 마음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하물며 지금 천하가 흉흉한데 어찌 피로하다 하여 사양하겠습니까. 제 몸은 군진에 있어야 마땅하며 죽음 또한 두렵지 않습니다.”고 했다. 이에 바삐 서둘러 집에도 가지 않고 출정했다. 군사들이 모두 즐거이 따르며 이르기를 “장군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우리들이야?”하며, 용감하게 나아가 앞에서 싸우니 사기가 당당하고 나가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길을 나누어 협공하여 백제의 군대를 크게 이기고 마침내 백제의 장군을 죽이니 나머지 (백제) 병졸들은 모두 그것을 보고 달아나 군대가 무너졌다. [조선열전에 보임]
3월 당 태종이 출병하여 고구려의 안성을 공격했으나 패전하여 정주까지 후퇴하였다.[요동지]
좌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요동은 원래 우리나라의 지방이었다. 옛날 수 황제가 네 번 출병하여 패전하였는데, 열 가운데 여덟, 아홉은 죽었다. 그래서 내가 중국의 부로로서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고자 한다. 원컨대 여러 장군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여 성공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고 몸소 활과 화살을 차고, 안장 뒤에 비옷을 묵은 후 스스로 보기 4천을 거느리고 고각을 옆구리에 끼고 깃발을 눕히고 산을 올라가 독전하니 모든 군사들이 고각 소리를 듣고 일제히 나아갔다. 뜻하지 않게 공격을 받은(出其不意를 나누어 의역함) 고구려 군은 크게 놀라 성벽을 굳건히 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때 요동부 대총관 강하와 와도종이 각각 수 천기를 거르리고 신성에서 회합하고, 절충도위 조삼랑은 삼 만기를 거느리고 성문을 곧장 압박해 들어가니 성 안의 사졸이 감히 나와 진을 치지 못했다. 선봉장 장검이 건안성[요동 개주성 남서]에 이르러 고구려 군을 공파하고 천여급을 참수했다. 이세적, 강하 등이 개모성을 공하하고 그 땅을 개주로 만들었다. 장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해항에서 출발하여 사비성에 이르러 그 서문을 습격하였다. 우위장군 정명진은 군사를 거느리고 밤을 틈타 습격하였다. 이세적이 요동성 아래 다다르자 고구려 군이 보고 놀라 두려워하며 “우리 군의 수는 적고 적군은 많으니 경솔하게 나갈 수 없다.”고 하자, 장군 진기가 “그렇지 않다. 적병은 많은 수만 믿고 경솔하게 침입했고, 또 먼 거리를 와 피로해 있다. 급히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고 하고는 곧 출병하여 맞서 싸우니, 협공하여 들어가는 곳마다 모두 우수수 무너지고 달아나므로 당군을 크게 무찔러 수 천급을 참수하였다. 당주가 그 소식에 크게 노하고는 스스로 수 천기를 거느리고 요수를 건넌 후 다리를 끊어 결사의 뜻과 돌아갈 뜻이 없음을 보여 사졸의 마음을 굳게 했다. 그리고 마수산에 주둔하고는 왕도종과 마문거를 불러들였다.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서는 몸소 흙을 짊어지고 해자를 매워 사졸들이 부지런히 힘쓰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세적은 요동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수 십일이(疑句當作旬)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당과 신라 양군이 서로 표리가 되어 성을 수 겹 에워싸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나아가 공격하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신라왕이 태종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지금 고구려군은 나무를 베어 루대를 만들고 끈으로 묶었습니다. 그러므로 불을 놓아 속공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고 했다. 태종이 옳게 여려 남풍이 불 때 야반에 서남에서 불을 놓았다. 성 안이 차례로 타 들어가자 고구려 군은 크게 혼란하고 상실하니, 이때 급히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고구려군 가운데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요동성을 요주로 만들었다. 마침내 길을 나누어 오골성으로 공격해 들어가니, 등주에서 동으로 오호도에 이르고, 또 동방해(?) 곶에서부터 청니포, 도화포, 행인포, 석인포, 고치만을 거쳐 오골강에 이르렀다.
신라 장군 설심하가 경기 8백을 거느리고 곧장 들어가 선공하다가 유시에 맞았다. 상련봉어[신라 관명] 설계두가 단기로 달려가 구출하였다. 고구려 군을 크게 무찔러 백 여리를 추격하고 천 여급을 참수하였다. 세적이 백암성에 다다라 그 서남쪽을 공격하고, 태종은 서북쪽을 공격했다. 손벌음[백암성재]이 몰래 사인을 태종에게 보내 말하기를 “저는 항복하고 싶은데 성 안에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여 신호를 보낼까요?”라고 하자, 태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당의 깃발을 그 사자에게 주었다. (그 깃발을) 성 위에 세우자 성 안이 크게 놀라 “당이 이미 성을 함락했단 말인가” 하고는 군사가 모두 항복했다. 그 성을 암주로 만들고, 손벌음을 암주자사로 삼았다.
이에 태종은 안시성[지금의 봉황성]으로 진군하여 들어갔다. 북부누살[관명] 고연수와 남부누살[관명] 고혜진이 각각 정예병과 말갈병 15만을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하러 왔다. 혜진이 연수에게 이르길 “오늘 전투의 계책이 세 가지 있습니다. 병사를 이끌고 곧장 나아가 굳게 지키고 성과 연계하여 보루에 진을 치고 높고 험한 산을 요새로 삼아 성 안의 군량에 의지한 후 말갈병을 풀어 그들의 치중(보급로)를 끊는 것이 상책이고, 병사를 쉬게 하면서(疑接當作按) 구덩이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단단히 지키고 나가지 않는 것이 중책이고,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병사와 병기를 잘 다루지 못하면서 가벼이 나서고 가벼이 물러서는 것이 하책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로[관명] 고정의가 말하길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당의 병사들은 아직 강성하므로 가볍게 대적할 수 없습니다. 또 승세를 타고 멀리에서부터 전투를 벌이고 와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정예병을 뽑아 그들의 귀로를 끊고 오래도록 주둔하고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면 저들은 반드시 전투를 벌이고 싶어도 할 수 없고, 돌아가고 싶어도 길이 없어 병량이 다하고 병사들은 굶게 될 것입니다. 이때 출병하여 급히 공격한다면 반드시 당의 군대를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연수가 듣지 않고 이내 말갈병을 이끌고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니 깃발이 40여리에 뻗혔다. 당주가 멀리서 보고는 크게 놀라 감히 출전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연수를 거짓으로 설득하기를 “나는 장군의 나라에 적신이 있다고 들었다. 천개소문은 그 왕을 시해하고 국정을 맘대로 하며 백성을 핍박하였기에 오늘날 군대를 일으켜 그 죄를 물어 죽임으로써 천하의 마음에 징계하고자 함이다. 지금 전쟁을 하는 것은 오로지 소문 때문이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또 양국이 교전하게 된 것은 본심이 아니었는데 고구려에 들어와서 군량이 보급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몇 개의 성을 공격하여 취하여 주둔하게 된 것이다. 원컨대 장군은 꾸짖지 말고 노하지 말라. 만일 화친을 맺으면 침략한 여러 성을 반드시 돌려주겠다.”고 하자 연수는 그 말을 믿고 들어주어 전비를 갖추지 않았다. 그 날 야반에 당주가 세적에게 명하여 병사 5만을 서령에 매복시키고, 무기, 우진달, 강행본에게는 각각 수만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나아가 계곡을 끼고 진을 치게 하고, 당주는 스스로 기병 4만을 거느리고 북쪽 산에 올라가 전세를 관망하였다. 이 밤에 유성이 연수 쪽으로 떨어지고, 우레와 바람, 폭우가 매우 심하여 연수는 매우 근심했다. 당주는 안시성을 도모하지 않고 병력을 이동하여 먼저 남북부(의 누살군)를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은 크게 놀랐으나 시석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나와 싸우니 당 군은 감히 응전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당의 장군 설인귀는 본래 요동 사람이다. 성질이 호용하고 거칠며 지략이 많았으나 고구려왕이 사람을 쓸 때 현명하고 어리석을 구별하지 않고 문벌반상에 따라 택하여 쓰므로 등용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다. 마침 이때에 오랜 원한을 풀기 위해 은밀히 당주와 통해 말하길 “소인의 재주가 비록 미천하나 산천의 험이와 도로의 원근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출전하여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한 번 시험 삼아 써보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당주는 크게 기뻐하며 손을 붙잡고 등을 어루만졌다. 유격장군을 배수하고 병사 수만을 이끌고 전진하게 했다. 인귀가 당 군이 후퇴하는 것을 바라보고는 크게 놀라 크게 소리치며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니 고구려 군사가 크게 무너지고 죽은 자가 2만 명이 넘었다. 이에 연수는 남은 병사를 모두 거두어 산에 들어가 굳게 지켰다. 이때 무기 등은 고구려 군의 귀로를 끊고 곧장 맹공을 퍼부었다. 연수 등은 감히 항전하지 못하고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태종은 연수를 홍로경으로, 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아 진중에 머무르게 했다. 그 나머지 황성, 은성도 그 소식을 듣고 무너졌다. 수백리가 사람과 밥 짓는 연기가 오래도록 끊기게 되었다.
이때 당 장군 장량이 병사를 이끌고 건안성을 지났다. 고덕이 출병하여 습격하여 당 군을 크게 무찌르자 고구려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고덕에게 말하길 “원컨대 장군은 만사지계(매우 힘든 경우에 처하여 내는 계책)를 내어 사직을 보존하고 남은 백성을 위로하라.”고 했다. 고덕이 조아리면 말하기를 “이미 중임을 맡았으니 어찌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안시성은 북쪽에 있고, 지세가 험하고 병력은 강하여 저들이 비록 승세에 있다고 하나 짧은 기한에 함락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병사들은 지쳐있고 군량도 적어 만일 적병을 맞이한다면 위태로움이 아침, 저녁에 달려있습니다. 만일 태종이 상계를 내놓는다면 나라의 존망을 알 수가 없게 되고, 하계를 내놓는다면 당의 병사들은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계책을 내놓을 것 같은가?” 대답하길 “태종은 절세의 영웅입니다. 그러나 지세를 익히 알지 못하고 병사의 많은 수만 믿고 (우리 고구려 군이) 약하다고 업신여기고 있으므로 반드시 하계를 내놓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고구려왕은 크게 기뻐하여 여러 장수를 부르고 성 안의 노약자와 미부한 자(?)를 데리고 안시성에 이르니 고구려 군이 다시 크게 떨치게 되었다. 성벽을 굳건히 지키면서 자주 당 군에 싸움을 돋우었으나 당 군은 끝까지 출전하지 않았다. 고구려 장군이 사람을 시켜 욕설을 퍼붓길 여러 날이 지나자 과연 고덕의 말대로 태종이 크게 노하여 용기만 믿고 경솔하게 나와 먼저 공격했다. 안시성의 장군이 건장한 병사들은 숨겨놓고 노약자들만 싸움에 나가게 하여 거짓으로 패하여 성안으로 달려 들어오게 하자, 당의 병사들은 승세를 몰아 추격하여 성 안으로 돌진하였다. 고덕은 협공을 퍼부어 당 군을 크게 무찌르고 만 여급을 참수하였으며, 이에 다시 10여성을 회복하였다. 요동의 곡식을 차지하고 험준한 직성을 요새로 하며, 남으로는 석문령을 막고, 북으로는 태자하를 지켜 귀로를 끊고, 용만까지 추격하여 당군을 크게 무찔러 모두 죽여 묻어 버리고, 수만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유기에 보임]
이때 당 군의 군량이 다하여 기갈로 인해 서로 공격하고 어지러웠다. 고구려왕은 당 군이 패잔함을 알고 고만에게 정예병 2천을 거느리고 추격하도록 했다. 수천 급을 베고 태종에게 활을 쏴 그 눈을 맞추었다. 태종 속으로 사기를 잃을까 염려하여 도리어 놀라는 듯하며 다리를 문질렀다. 그러나 여러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달아나 무너지며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모두 달아나 숨었다. 이때 연수와 혜진이 전쟁 기구를 모두 거두어들이니 그것이 매우 많았다. [유기에 보임]
태종이 스스로 지략이 다하고 전쟁에 패함을 알고 흩어진 병졸 800명을 거두어 샛길을 따라 달아났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서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하였다. “나에게 만일 위징이 있었다면 어찌 이런 후회가 있겠는가. 천하의 대병을 이끌고서 일개 작은 나라에서 곤액을 당하였으니 매우 분하고 부끄럽구나.”[이색의 시에 ‘이것은 주머니 속의 작은 물건이라고 하더니(안시성을 함락시키기는 것이 주머니 속에서 작은 물건 꺼내듯 쉽다는 뜻), 어찌 현화(눈동자)가 흰 깃털(화살)에 떨어질 줄 알았겠는가!’] [요동사에 보임]
이전에 신라인 설계두가 인귀가 출전하는 것을 보고 몰래 서로 연락을 취하여 꾸짖기를 “ 너는 어찌하여 역심을 품고 적에게 붙어 도리어 나라의 군대를 공격하는가. 하늘에 부끄럽지도 않은가?“라고 하자 인귀가 대답하기를 “우리 왕이 등용하지 않기 때문에 당태종에게 청하여 의탁한 것이다. (태종은) 자신의 옷을 벗어 나에게 입혀주고, 음식을 밀어서 나를 먹여주었으며, 나에게 상장군의 인을 주고, 수만의 군대를 주어 입신양명하게 했다. 부유같은 한 인생, 그저 즐길 뿐이지, 어찌 내 나라, 저 나라를 구별하겠는가?“하고 말했다. 계두 또한 옳게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인귀가 안시성 전투에서 죽자 대종은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정동대장군을 추증하고, 어의를 벗어 시신을 거두고 성주 양만춘에게 예에 맞게 장례를 치루라고 명했다.[요동사에 보임]
이때 태종이 달아나다가 돌아보니 수행원 8백 명이 5백 명에 불과하므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저 창대하고 의연한 푸른 하늘을 보라. 나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하고 장탄식을 그치지 못할 때 갑자기 한 사람이 나와 당주에게 절하고 말하기를 “저는 신라인 설계두입니다. 제 나라에서 사람을 쓸 때는 비록 뛰어난 능력과 대단한 재주를 가졌어도 문벌이 부족하면 등용되지 못합니다. 원컨대 폐하를 따라가 절세의 용맹을 떨쳐 누구보다 뛰어난 공을 이루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은 매우 기뻐하며 손을 어루만지며 함께 돌아갔다.[당진정기에 보임]
가을 7월에 왕은 비녕자를 장군으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신라의 무산을 공격하게 했다. 신라 장군 유신이 출병하여 응전하고 포위했다. 녕자는 지략과 힘이 다하여 그 포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신라 병사 수십 명을 죽이고 자살했다. 그 아들 학진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아비가 죽고 아들은 살아있으니 기필코 복수를 하리라.”하고는 곧 적진으로 달려가 분투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 노비 합절은 땅을 치고 하늘에 소리쳐 “두 주인이 모두 죽었으니 의리상 나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 복수할 뿐이다.”하고는 전투에 나아가 목숨을 잃었다. 이에 군중이 크게 놀랐다. 나아가기도 어렵고, 물러서기도 어려우므로 군사들은 모두 기꺼이 죽음을 무릅쓰고 힘을 다하여 용감하게 공격하여 무산을 크게 무찔렀다. [제사에 보임]
丁未 六年[羅十五年 麗五年] 春 正月 新羅毗曇廉宗等 皆伏誅
정미 6년[신라 15년, 고구려 5년] 봄 정월에 신라에서 비담, 염종 등이 모두 주살을 당했다.
비담 등이 서로 반역을 모의하였다. 여왕이 잘 다스리지 못하다는 거짓 이유를 들어 병사를 일으켜 폐하려고, 몰래 장군과 병사를 불러 명활성에 주둔시켰다. 왕이 듣고 크게 놀라 군중에 명하기를 “저들 편인 자는 오른쪽 소매를 걷고, 내 편인 자는 왼쪽 소매를 걷어라.”하니 군중이 모두 왼쪽 소매를 걷었다. 이에 왕은 남북부의 모든 군대에 명하여 월성에 주둔시켰다. 서로 열흘 이상을 대치하며 풀지 않고 있는데, 한 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 등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며 “별이 떨어진 곳에는 반드시 피가 흐른다. 이것은 월성이 패하려는 징조다.”고 하였다. 적군은 이상하다 의심하면서도 그것을 믿어 크게 함성을 지르며 나와 공격하였다.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니 왕은 대경실색하였다. 유신이 왕에게 아뢰기를 “길흉은 일정한 것이 아니고 화복은 들고 나는 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옛날 주는 적작을 얻었지만 망했고, 노나라는 기린을 잡았지만 쇠약해졌으며, 은의 종실은 꿩이 울었지만 흥성했고, 정공은 용이 나타나 싸웠지만 창성했습니다. 임금은 오직 덕을 닦아야 하며, 덕은 요망한 것을 이깁니다. 그러므로 별의 변이는 두려워할 것이 못됩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신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큰 불을 안기고 연에 실어 날려 보냈다. 그리고 사람들을 시켜 전에 떨어졌던 별이 다시 올라갔다고 말을 퍼뜨리도록 했다. 병사들은 모두 그 말을 믿었으나 오로지 적군은 의심했다. 그리고 백마의 피를 가지고 별이 떨어진 곳에 제를 올리며 축원하기를 “천도는 양은 굳건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인도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낫습니다. 그런데 혹 순차가 바뀌어 대란이 일어납니다. 지금 비담 등은 신하로서 임금을 도모하니 아래에 있는 자가 윗사람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민이 꺼리고 미워하는 것이고, 하늘과 사람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변괴가 나타나니 이 또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는 바입니다. 원컨대 창천은 민심을 따라 선한 자는 좋아하시고 악한 자는 미워하시어 천하의 사람들에게 가르쳐 잘못 알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했다. 예가 끝나자 모든 장수들에게 신칙하여 (그들의) 죄목을 조목조목 들어가며 맹렬히 성토했다. 비담 등 30여 명을 참수하고 드디어 난리가 평정되었다.[나고지에 보임]
○秋七月羅王築瞻星臺上方下圓 中通外直 由中升降 高亦十數丈耳[在慶州]
가을 7월 신라왕은 첨성대를 축조했다. 위는 네모 모양이고 아래는 원형이며 가운데는 통해있고, 외부는 곧으며, 가운데를 통해 오르내리는데, 높이는 수십 장이다. [경주에 있음]
○八月 羅王薨 國人迎眞平王之母弟 國飯之女勝曼 卽位是爲眞德女王
8월 신라왕이 죽었다. 나라 사람들이 진평왕의 동복 아우인 국반의 딸 승만을 맞이하여 즉위하게 하니 곧 진평여왕이다.
○秋九月 羅王命百僚冠服悉遵唐制焉[見羅古志]
가을 9월 신라왕이 모든 관료에게 명하여 관복을 당의 제도에 따르도록 했다.[나고지에 보임]
겨울 10월 당 태종은 지난해의 분함과 부끄러움을 설욕하고자 우진달, 이해안에게 각각 수만 기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출정하여 내주를 침략하게 하고, 이세적, 손이랑에게 각각 삼만 기를 거느리고 신성을 침입하게 했다. 고구려왕은 고덕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맞서 싸우도록 했다. 남소성에서는 불리한 전투를 하고, 석성에서 패전하는 등 연패하자 고구려왕은 크게 노하여 친히 만 기를 거느리고 적리성 아래에서 싸워 당 군을 크게 이기고, 수천 급을 참수한 후 추격하여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때 진달 등은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요수를 건너 날아났다.[요동사에 보임]
무신 7월[신라 원년, 고구려 6년] 정월 당 태종은 설만철, 배행방에게 명하여 각각 삼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에서 항해하여 고구려를 침입하게 했다. 고구려왕은 장수와 병사를 선발한 후 굳게 지키도록 하고, 가볍고 날랜 병사로는 사잇길을 통해 습격하게 하여 크게 이겼다. 당 군은 모두 패하여 달아나 숨었다.[유기에 보임]
여름 4월 당주는 호명진, 고신감에게 각각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깊이 침입하여 공격하게 했다. 고구려왕은 친히 정병 3만을 거느리고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당 군을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다시 그 퇴로를 끊고 용맹하게 싸워 크게 무찔렀다. 만철 등은 달아나 압록강을 건너 작성에 주둔했다. 고구려왕은 부손에게 수만의 병사를 일으키게 하여 서로 대치하였으나 40여 리를 당군에게 밀렸다. 고구려 장군 고문은 이에 오골[성 이름]과 안시[성 이름]의 병사 3만을 일으켜 부손과 합세하여 급히 공격하여 크게 싸워 당 군을 대파하고 만여 급을 참수했다. 만철 등은 흩어진 병사를 거두어서 달아났다.[유기에 보임]
기유 8년[신라 2년, 고구려 7년] 가을 8월 왕이 좌장군 은상에게 명하여 병사 7천 명을 이끌고 신라의 석토성을 공격하게 했다.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에게 죽지[복성]진, 춘천존 등을 통솔하고 각각 3군으로 나누어 다섯 갈래의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서로 겨루길 10여 일이 지나도록 승패가 일정치 않고 자웅이 결판나지 않았다. 들판에는 뼈들이 나뒹굴고 길에는 시체가 쌓였다. 이에 유신은 도성으로 물러나 주둔하며 병마를 쉬게 했다. 한 동안 있다가 대야성으로 진군했다. 그때 마침 물새가 군막 위로 날아갔다. 장군과 병사들은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유신은 이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여기고 오늘 필히 백제의 반간이 있을 것이니 여러분들은 괴의치 말고 성을 지키고 나아가지 말라고 했다. 그 후에 군대를 순시하는 중에 과연 간첩이 있었다. 출병하여 급히 공격하고 유신은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났다. 옥문관에 복병을 두었는데, 백제군이 추격하여 이곳에 이르자 복병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앞뒤로 협공하여 백제군을 대파했다. 12개 성을 함락시키고, 9개 성을 도륙냈으며, 2만여 급을 참수하고 정중은상 및 장수 10 명과 병졸 8,988명을 포로로 잡았고, 말 만 필을 노획했다. 종평 정복은 군사를 이끌고 항복했다. 유신은 정복에게 귀의장군을 배수하고 남은 졸병들을 진무하게 한 후 군대를 돌렸다. 신라왕은 기뻐하고 가상히 여겨 유신에게 행군대총관을 배수했다.[삼국사에 보임]
이에 앞서 신라왕은 이찬 김춘추와 그 아들 문주를 당에 보냈다. 태종이 춘추의 거동이 영위함을 보고 서적, 패, 문장복을 내리고 후대하였다. 춘추는 삼가 사례하고 당주를 설득하기를 “오늘날 백제는 강성하고 교활 무도하여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당으로 통하는 길을 막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군대를 빌려주어 위엄을 보이시고 천하를 바로잡으십시오.”라고 하였다. 태종은 옳게 여겼다. 춘추가 감사의 절을 올리고 행장을 꾸리자 당주는 온군에게 배행하도록 했다. 해상에 이르렀을 때 마침 고구려 병사들을 만났다. 그들이 해치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 당의 사신이 춘추를 대신하여 높게 관을 쓰고 큰 옷을 입은 후 배를 바꾸어 앉았다. 고구려 병사들이 춘추가 당에 들어간 것은 군대를 청하기 위함이라고 짐작하고 드디어 그를 죽였다. 태종이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소정방에게 칙령을 내려 병사 20만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요통에 진을 치고 주둔하게 했다. 그 후 태종이 죽자 정방을 진을 풀고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요동사에 보임]
신해 10년[신라 4년, 고구려 9년] 2월 신라왕은 파진찬 김인문[김춘추의 둘째 아들]을 당에 보냈다. (김인문은) 황제를 권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여 과거의 수치를 설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당주는 수긍하였다. (당주는 김인문을) 아끼고 범상치 않게 여겨 매우 중시했다.[나고지에 보임]
○金仁問 自幼及長 博覽諸書 兼涉莊老之學 浮屠之說 善爲射御 能通音律 雅量宏遠 時年二十三矣
김인문은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고, 노장학과 불교의 설도 겸하여 섭렵하였으며, 활쏘기와 승마를 잘하였고, 음률에 능통했으며, 국량이 넓고 포부가 컸다. 이때 나이 23세였다.
9월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백제왕에게 이르길 “해동 삼국은 기원이 오래 되고 강계가 병렬하여 서로 마치 개 어금니처럼 들쭉날쭉하게 접해 있는데, 요새 서로 간에 틈이 벌어져 번갈아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이 안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삼한의 백성들은 칼과 도마 위에 목숨을 올려놓고(:해석이 부드럽지 않습니다. 과연 그때 민족이란 말이 있었는가도 모르겠습니다. 귀명도조는 아마도 백성들의 목숨이 도마 위의 어육처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무기를 찾아 함부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끊이지 않으니, 과인이 매우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과거에 잡아갔던 포로들을 모두 석방하여 보내주고, 침탈했던 여러 성들을 곧 반환하겠습니다. 청컨대 화친을 맺고 항상 형제의 나라가 되어 백성들이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천명을 따르는 것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심사숙고하십시오.”라고 했다. 왕은 의심하여 들어주지 않았다.[조선실기에 보임]
겨울 10월 신라왕은 사신을 통하여 고구려왕에게 글을 보냈다. “오늘날 고구려와 신라는 서로 입술과 이처럼 의지하고 있는데, 서로 다투어 병갑을 들어 침입하여 핍박하여 강계가 날로 줄어들고 위력은 날로 잃어 백성들의 소망을 저버리고 있으니 근심스런 바입니다. 이제 과인은 포로와 빼앗은 성을 아울러 돌려주어 화친하기를 청합니다. 백제, 고구려, 신라 3국 정족하면 사이에 군림하고 팔황을 외복시키며, 백성들은 안도하고, 임금은 모두 베개를 편히 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화를 풀고 병사를 해산하고 무기를 거두어 백성들의 바람에 따르기길 바랍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칼에 피가 마를 날이 없고, 시체가 길에 쌓이며, 백성들은 농사와 길쌈을 폐하여 천하는(疑不當作下) 쓸쓸해질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일 들어주지 않는다면 말갈 군대를 몰고, 거란의 병사를 이끌고, 중원의 단단한 갑옷과 예리한 검과 함께 깊이 들어가 공격하여 취한 후 모두 군부를 만들어버리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심사원려하여 나중에 후해할 일을 남겨두지 마십시오.” 고구려왕이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말하기를 “각자의 나라 일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어찌하여 강권하고 심히 유혹하는가? 치란존망은 모두 하늘의 운수에 달린 일이지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마음대로 하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나고지에 보임]
갑인 13년[신라 7년, 고구려 12년] 3월 신라왕이 후사가 없이 죽었다. 사량에 장례를 지냈다. 제신들이 이찬 알천에게 왕위에 즉위하도록 권했으나 알천은 고사하며 “나는 불초하여 중책을 맡을 수가 없다. 마땅히 춘추를 맞이하여 보위에 오르도록 하여 백성들의 바람에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춘추를 맞이하여 옥새와 부절을 무릎 꿇고 올렸다. 춘추[진지왕 후손 김용춘의 아들]는 서쪽으로 세 번 사양하고, 남쪽으로 두 번 사양한 후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무열왕이다. 왕은 그 죽은 아비인 용춘을 문흥왕으로 추존하고 어미를 왕태후라 하였다. 율령 60여 조를 정하였다.[나고지에 보임]
을묘 14년[신라 원년, 고구려 13년] 봄 고구려왕이 말갈병을 거느리고 백제와 공모하여 신라를 추격하여 북쪽의 30여 성을 공략했다. 신라왕은 사신을 당주에게 보내 구원을 청했다. (당주는) 드디어 정명진, 소정방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도록 했다. 요수를 건너 왔을 때 고구려 군은 그들이 피로해진 것을 엿보아 성문을 열고 급히 공격하여 당과 신라의 양 군을 크게 격파하고,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그 진영을 모두 태워버렸다. 천여 급을 참수하고 사로잡은 자들이 매우 많았다.[유기에 보임]
○秋八月 羅王以長子法敏爲太子 庶子文注爲伊飡 老且爲海飡 仁泰爲角飡 知鏡愷元皆爲伊飡
가을 8월 신라왕은 장자 법민을 태자로 삼고, 서자 문주는 이찬, 노차는 해찬, 인태는 각찬, 지경, 개원은 이찬을 삼았다.
9월 유신이 왕께 아뢰기를 “지금 백제왕은 무도하고 날마다 음란함을 일삼고 정치를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제가 그 죄를 성토하고 징벌하여 백성의 소망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왕이 “좋다.”고 하고 유신에게 백제의 공격을 명했다. (유신은) 백제의 도비천성을 공격하여 드디어 함락시켰다.[조선실기에 보임]
이에 앞서 급찬 조미곤이 부산태수였다가 백제의 포로가 되어 풀려나지 못하고 나중에는 좌평[관명] 임자의 종이 되었다. 이때 소매를 뜯고 유신에게 돌아와 절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불초한 사람이 고국으로 따라 돌아가 남은 목숨을 보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유신은 보고 이용가치가 있음을 알고는 미곤에게 청하기를 “내가 듣기로 임자는 백제왕의 총신으로서 국정을 천단한다고 하는데, 공께서는 돌아가 일을 도모해보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미곤은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하며 “지금 장군께서 이 미천한 자에게 국사를 같이 도모하도록 해주시니 비록 죽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고 했다. 이에 미곤은 돌아가 임자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어찌 전날의 죄를 두려워하여 사실대로 다 말하지 않겠습니까. 소인은 신라의 허실을 엿보기 위해 거짓으로 망명한다고 하고 신라의 군영에 들어갔습니다. 굳센 병사, 살찐 말, 무기, 보급품 등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천하에서 신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라와 백제는 서로 겨루고 있는데, 존망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만약 백제가 망하면 나를 따라 신라로 들어가고, 신라가 망하면 공을 따라 목숨을 보존하겠습니다.”고 하자, 임자는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했다. 이에 미곤은 유신에게 돌아가 보고하니, (그 보고 내용이) 백제 국사의 대소가 매우 잘 갖추어졌다. 이때부터 유신가 백제를 도모하는 것이 더 급해졌다.[조선실기에 보임]
겨울 신라왕은 김흠운을 낭당통감으로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양산 아래에 주둔하게 했다. 백제의 조천성을 공격하는데 백제 군은 성을 굳게 지킬 뿐 나오지 않다가 밤을 틈타 기습 공격을 했다. 신라 군은 놀라 어쩔 줄 모르고 백제 군은 그 혼란한 틈을 타고 급히 공격했다. 우레처럼 북을 울리고 비처럼 화살을 날렸다. 이에 흠운은 몹시 분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말을 타고(문맥 상 타다는 의미인데 撗자에는 그런 뜻이 없어 다른 글자의 오자인 듯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음) 창을 들고는 시석 가운데에서 북채를 쥐로 북을 쳤다. 대사 전지가 이르기를 “지금 적이 습격하고 밤은 어두워 지척을 분간하지 못해 병사들이 서로 밟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더욱이 장군께서는 왕이 아끼시는 사위이시고, 나라의 중신입니다. 지금 만금의 옥체를 아끼지 않아 만일 적에게 해를 입으신다면 이는 적에게는 행운이고 우리에게는 수치가 되는 일입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자애하시어 목숨을 삼가십시오.”라고 하자, 흠운이 말하기를 “장부가 세상에 나와 이미 몸을 맡겼는데 어찌 위안사생에 따라 그 본 마음을 바꾸겠는가!”라고 하고는 꿋꿋이 서서 움직이지 않고 사기를 독려했다. 종자가 말고삐를 당기면서 간하기를 “적의 형세가 매우 급박합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피해 숨으십시오.”(피닉이 반복된 것은 衍文인듯 함) 흠운은 내저으며 듣지 않고 결국에는 적진으로 들어가 수백 명을 격살하고 스스로 목을 베어 자살했다. 수장태감 예파와 소감 적득 역시 모두 전사했다. 보기당주 보용나는 흠운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장탄식하며 말하기를 “이제 장군이 이미 죽었으니 구차하게 살아나는 것보다는 싸우다 죽는 것이 낫겠구나.”라고 하고는 용감하게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좌충우돌 단병(짧은 칼)으로 접전하여 수십 명을 죽이고 자살했다. 왕이 듣고는 애처로워하고, 흠운, 예파에게는 일길찬을, 보양나, 적득에게는 대나마를 추증했다. 당시 사람들이 양산의 노래를 지어 그들을 애도했다.
흠운[내물왕 8세손]이 젊었을 때 화랑 문노의 문하에서 쫓아 배웠는데, 문도 중 많은 이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동문 승전밀이 “네가 만약 적진에 이른다면 결코 살아 돌아오지 못하겠구나.”고 하자, 흠운이 “내가 상문[승문]을 쫓아서는 한 가지도 얻을 것이 없다. 차라리 종군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군복을 입고 병부에 갔다. 결국에는 자기 몸을 희생하였다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나고지에 보임]
병진 15년[신라 2년, 고구려 14년] 3월 왕이 망해정을 세우고 궁녀들과 함께 날마다 음란함을 일삼고 잠시도 정사를 듣지 않았다. 좌평 성충이 극간하자 왕이 크게 노하며 가두었다. 성충이 글을 올리길 “어리석은 제가 현재의 형세를 미루어 살피건대 오래지 않아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크게 우려스런 일입니다. 그 때에 출병하여 먼저 요지를 지키고 적병을 막은(藺자에는 막다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闌의 오자가 아닌가 함) 연후에 사직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적병이 육로를 따라 침범한다면 먼저 탄현에 기병(요즈음 말로 특공대)을 숨겨놓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를 따라 들어온다면 먼저 백강에서 막아 건너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황산의 험준한 산세에 의지하여 막고, 웅진의 입구를 지키며, 한양의 양곡에 의지하여 굳건히 지켜 나가지 않는다면 폐하는 베개를 편히 하고 주무실 수 있고 국가는 무사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끝내 옥중에서 스스로 굶어 죽었다. 이때부터 조정에서는 감히 다시 간언하지 못하였고, 왕도 끝까지 깨우치지 못하고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놀기에 무도함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탄현은 공주에 있고, 백강은 지금 부여의 백마강이다.][제사에 보임]
경신 19년[신라 6년, 고구려 18년] 2월 왕이 출병하여 신라의 변경을 공격했다. 신라왕은 그것을 걱정하며 사신을 당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주는 소정방을 병마원수, 유백영을 대장, 풍사귀를 비장, 염효공을 선봉장으로 하여 각각 13만 명을 이끌고 수륙으로 병진하여 구하도록 했다. 신라왕은 김유신을 우이도행군총곤으로 삼아 보기 5만을 이끌고 당 군과 힘을 합해 장차 백제를 물리쳐 정벌하고자 하고, 성산에서부터 바다를 건너 서덕물도[지금 인천의 서쪽에 있으니 곧 덕적도진영으로서 지금은 폐쇄했다.]에 주둔하였다.
이에 앞서 백제 좌수의 서안을 보면 흰 여우가 대낮에 와 앉아 있고, 우물물이 핏빛이 되고 사비하의 물도 모두 붉어졌으며, 두꺼비 수만 마리가 도시의 나무 위에 모여 어지러이 울어댔다. 얼마 후 대낮에 귀신이 궁중에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소리 지르고 바로 땅 속으로 들어가 홀연 보이지 않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곳을 파보니 한 마리 큰 거북이 있었고, 등에 글자가 있는데 ‘백제는 둥근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고 쓰여 있었다. 왕이 보고 이상하다 싶어 좌우에 물어보았다. 직솔 상대가 나와 말하길 “둥근달은 쉬이 이지러지고 초승달은 점차 차오릅니다.”고 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결국 죽였다. 근시아관이 아뢰기를 “둥근달은 크고, 초승달은 작습니다. 어리석은 제가 보기에 백제는 크고 신라는 작다는 것이니 좋은 징조이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괴이하게 여기지도 마시고 현혹되지도 마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신라를 병합하고자 계책을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와 말하기를 “지금 당 군은 주야를 쉬지 않고 먼 거리를 진군하여 피로할 것이 분명하고, 신라의 군대는 원조만 믿고 교만하고 나태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날랜 병사들을 급히 출격시켜 먼저 당 군을 깬다면 신라의 병사들은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달아나 무너질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옳게 여겨 곧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당 군을 선제공격하도록 하니, 달솔상영이 아뢰기를 “지금 정방은 멀리서부터 승세를 타고 싸우니 그 예봉을 감당하기 어렵고, 신라의 군대는 자못 화살에 다친 새처럼 경계를 하는데다 자주 패전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안에 복병이 있을 것이니 가볍게 나갈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제가 살피건대 지금 정방, 백영은 원정을 나와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군량이 뒤에 있습니다. 원컨대 패하께서는 정병 4천 명을 풀어 그 보급로를 끊고 당 군이 피로하고 군량이 다할 때를 엿보아 경기병으로 신라의 군대를 선공하여 그 선두를 대파한 연후에 그 형세를 살핀다면 승패를 알 수 있고 사직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결국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했다.[제사에 보임]
이 전에 좌평 흥수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지명]에 귀양가 있었는데, 이때 왕이 불러 계책을 물었다. “바야흐로 국사가 급하다. 지금 신라와 당이 침입하여 위태로움이 경각에 달려있으니 어떻게 하여야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대답하길 “지금 당은 병위를 떨치고 신라와 합세하고 있습니다. 만일 평야지대에서 가벼운 수레와 돌진하는 기병으로 나가게 하여 서로 부딪힌다면(평야에서 벌이는 회전을 말함)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백강과 탄현은 국가의 요충지로서 한 사람이 창을 들고 지키면 만 사람(疑未當作夫)도 당할 수 없습니다. 정예병을 선발하여 그곳을 고수하여 정방은 백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 유신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한 후 폐하는 굳게 지키고 싸우지 마십시오. 군량이 다하여 병사들이 굶주릴 때를 기다려 좌우에서 공격한다면 반드시 무찌르고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좌평 직의(앞의 의직과 동일 인물 같은데, 글자가 전후가 바뀌어 있음)가 임금에게 말하길 “흥수는 오랫동안 구속되어 있어서 폐하를 원망하고 또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첨하여 받아들여지기를 원하고 있으니 그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정방이 백강으로 들어오면 사람을 시켜 노를 젓게 하므로(해석이 부정확하여 의미가 다가오지 않음) 배를 맘대로 조정하지 못할 것이고, 또 단현의 길은 구불구불하여 수레를 똑바로 몰 수 없고, 기마병이 열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만일 유신이 넘어 들어온다면 이는 새장 속의 새나 그물 속의 물고기가 수족이 잘린 것과 같으니 이때 대왕께서 가볍고 예리한 병사들을 풀어 급히 공격한다면 항아리 속의 쥐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수비하는 방책은 옳지 않습니다.”고 하자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얼마 후 정방, 백영은 백강을 건넜고, 유신은 탄현을 넘어 모두 황산[오늘날의 연산]에 주둔하였다.
왕이 계백에게 명하여 병사 5만을 거느리고 막도록 했다. 계백은 가기에 앞서 장탄식하며 “한 나라의 일부 군대를 가지고 두 나라의 백만 대군과 싸우도록 하는 것은 양떼를 몰아 사나운 호랑이와 싸우도록 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존망을 곧 판단할 수 있다. 만일 내가 피해를 당한다면 처자식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잡힐 것이니 살아서 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하고는 가속을 모두 죽였다. 드디어 진군하여 멀리서 진의 형세를 보고는 혼비백산하여 곧 굳게 지키고 싸우지 않았다. 정방, 유신은 소를 잡고 술을 풀어 병사들을 먹이니, 복습사(?)와 기사 모두 싸우기를 원했다. 이에 당과 신라는 날랜 기병 수천을 선발하여 요로에 매복시키고 자주 싸움을 돋우었으나 계백은 끝까지 출전하지 않았다. 신라 군이 사람을 시켜 무수히 욕을 해대자 백제의 장수는 크게 노하여 성문을 열고 응전했다. 당과 신라 양 군은 좌우로 공격하였다. 유신은 병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앞을 치고 들어가 백제의 군대를 대파하고 드디어 계백을 죽였다. (백제의)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그것을 보고는 달아나 무너졌다. 이에 왕은 흩어진 남은 병사들을 거두어서 웅진[공주 금강]에서 방어하였다. 정방은 웅진의 왼쪽으로 진군하고 산 위에 기치를 벌여 병사들이 매복해 있는 듯 했다. 드디어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니 왕과 병사들은 막았다. 밀물을 타고 급히 공격하자 백제의 군대는 대패하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제사에 보임]
이때 정방은 병사들은 쉬게 하고 주연을 베풀었는데, 유신이 늦게 도착했다. 정방이 크게 노하며 유신과 그 장수들에게 “공들은 모두 시간을 맞추지 못했으므로 마땅히 참형에 처하리라.”고 하자, 유신이 크게 노하며 “장군은 봉산에서의 승부는 알지 못하고 그저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고 죄를 물으니 우리들이 어떻게 지은 죄도 없이 욕을 보겠는가? 오늘 먼저 정방과 자웅을 겨룬 다음에 백제 군을 격파하리라.”고 하고는 도끼를 들고 방패를 안고 군문을 헤치며 곧장 들어갔다. (유신의 모습이) 노한 머리카락은 위로 뻗쳤고 눈초리는 찢어졌으며 허리에 찬 보검은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 나왔고, 머리에 쓴 금투구는 습인사일(해석못함)하여 그 위풍과 검광이 사람들을 겁에 질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했다. 정방은 대경실색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소인이 다만 웅진에서의 곤액만 알고 봉산에서의 위급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장군께서 관대하게 특별히 용서하시고 노여움을 푸시고 꾸짖지 말아주십시오. 우리 양국이 천하에서 호령하는 것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니 지금 두 호랑이가 싸운다면 그 권세는 모두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국가의 급함을 먼저 하시고 이처럼 사사로운 원한은 뒤로 하시는 것이 또한 옳다고 봅니다. 또 우리 두 사람은 당과 신라의 중추입니다. 중추가 움직이면 천하가 진동하고, 천하가 진동하면 양국의 국사는 장차 날로 틀어질 것입니다. 안위와 존망의 권한이 모두 장군에게 있으니 원컨대 장군께서는 죄를 용서하시고 노여움을 풀어서 사졸들을 안심시키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유신은 사과하며 “소인은 봉산에서 싸웠고, 장군께서는 웅진에서 싸워 사졸이 모두 죽음을 피하기 않았고 전투에서는 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시간을 놓치고 싶었겠습니까. 다만 병세가 위급하여 부득이 시간을 놓쳐 죄를 지은 것입니다. 또 지금 양국의 국사의 권한은 장군에게 달려 있습니다. 장군께서 오른쪽으로 편들면 백제가 이기고, 왼쪽으로 편들면 신라가 승리합니다. 장군께서 도리서 어질게 용서하시고 말씀을 두텁게 해주시니 소인이 어찌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드디어 악수하며 서로 화해하고 주연이 끝났다.[조선실기에 보임]
이때 양군은 합세하여 도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크게 놀라며 상영에게 선봉장을 맡기고 직의에게는 후군을 맡겨 출천하게 했다. 유신과 정방은 좌우에서 협공하여 백제 군을 크게 격파하고 상영을 베고 직의는 사로잡았다. 이에 왕은 지략이 다하고 병사가 패전한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장탄식을 하며“성충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볼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태자 요를 이끌고 북비로 달아나 웅진을 지켰다. 이때 왕후는 왕이 계신 곳을 몰라 여러 후궁들과 미색을 감추고 대왕포로 달아난 후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했다. “나는 지금 임금을 모시면서도 거처를 알지 못하니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아아! 돌아가셨는가, 운명이 장차 쇠미해지는구나!”라고 말하고는 절벽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따르던 후궁들도 서로 말하길 “이제 왕후가 돌아가셨으니 우리들은 어찌 살아날 궁리를 하겠는가?”하고는 모두 따라 떨어져 죽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눈물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고, 그곳을 이름 하여 낙화암이라 하였다. 이에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으로 자처하고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도성을 지켰다. 문사[태자 효의 장자]가 그 아들 융에게 말하길 “지금 왕은 달아나고 숙부가 제 맘대로 왕이 되었다. 만일 적병이 포위를 풀고 후퇴한다면 우리들이 어찌 안전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고는 드디어 좌우를 거느리고 달아났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서로 붙잡고 말하길 “이 사람은 어진 사람으로서 실수할 분이 아니다.”고 하고는 늙은이는 부축하고 어린애는 안고 그를 따라갔다.[제사에 보임]
이에 정방은 도성으로 진격하였다가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났는데, 백제군은 성을 비워놓고 쫓아갔다. 유신이 곧장 성 아래로 들어가니 성문이 저절로 열렸다. 백제의 깃발을 뽑아버리고 신라와 당의 기치를 세웠다. 보화와 미녀를 모두 거두고는 성을 지켰다. 이때 백제군이 돌아와 그것을 보고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달아났다. 새로운 왕 태가 목에 옥쇄와 부절을 걸고 진문에 가려고 하는데 왕과 태자는 그것을 듣고 모두 와서 항복했다.[제사에 보임]
8월 유신과 정방은 큰 잔치를 베풀고 사졸들을 먹였다. 백제 의자왕에게 당하에서 무릎을 꿇고 술잔을 돌리게 하니 백제의 신하들이 모두 울음소리를 삼키며 눈물만 흘렸다. 곧 주연이 끝나고 백제왕과 그 아들과 손자 즉 효, 태, 륭, 연 4명과 대신, 장군 88명, 백성 12,870명을 포로로 잡아 당에 보냈다. 백제 5부, 37군, 200성, 76만호를 낮추어 능진, 웅진, 마한, 금련, 덕안 5도독을 두고, 백성 가운데 준수한 자를 택하여 자사로 삼았다. 유인원, 왕문도를 오도독으로 삼아 남아 지키게 하고 사졸을 기르고 백성을 진무하게 했다.[조선실기에 보임]
겨울 11월 백제 의자왕이 돌아와 북비에서 죽었다. 진숙보 묘 옆에 장사지냈다. 이때 백제는 드디어 망하니 모두 30세에 걸쳐 나라가 세우진지 651년이었다.[제사에 보임]
국사가 말한다. “오호라! 백제가 망했구나. 개국 27년에 조선의 국통을 이어받아 30세에 이르러 신라에게 전해주었다. 무릇 역년이 모두 651년이고, 양 도를 합하면 678년이다. 당초 온조가 난을 피하여 망명하여 마한에 들어왔을 때 왕이 아끼고 가련히 여겨 땅을 나눠주어 그에게 목숨을 보전케 하고 대업을 이루도록 해주었는데, 마침내는 그 나라를 병탄했으니 이것은 배은망덕인가, 아니면 천명을 따른 것인가. 하늘의 이치는 사람의 힘으로 미칠 수 없는 것인가. 의자왕 때 이르러 황음무도하여 날로 도가 지나치고 성충의 극간에도 불구하고 끝내 뉘우치지 못하고 마침내는 대업을 잃어버렸다. 아아! 이는 위정자의 귀감이로다.”
"아, 내가 간을 빼내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보름이 지나면 간을 꺼내 씻어서 암석 사이에 둔다. 지금 곧장 달려가 가져온다면 너의 바램은 이루고, 나의 공명 또한 이룰 것이다." 해석이 조금 어색합니다.. 연결이 매끄럽지 않죠. 근데, 3만명 고구려 군사로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을까요?
釋 = 풀 석 ㉠풀다 ㉡설명하다 ㉢풀리다 ㉣(의심이나 오해가)사라지다 ㉤벗다 ㉥용서하다 ㉦내놓다 ㉧석방하다 ㉨놓다 ㉩두다 ㉪석가 ㉫주해, 釋=풀어주다, 석방하다 의 뜻입니다.=> 곧, 그를 풀어 주고 후하게 대하였다. 이렇게 해도 좋아요. 의역을 가미하면.. "곧, 그를 풀어 주고 잘 대접해 주었다" 바꾸어도 됩니다.
국로추사가 강린에 의해 일제치하때 저술된 책으로 보이는데..인용 사료에 留記 ,濟史(백제사), 羅古志(신라고지)등 현재 전해지지 않은 역사고서들을 참조했다면 적어도 일제 강점기까지는 전해졌다고 봐야 하겠네요..아니면 濟史(백제사), 羅古志(신라고지)는 삼국사기 본기나 열전을 보고 그렇게 표기 한 것인지????..그런데 고구려의 역사서인 留記가 눈에 확~ 뜨이는군요!
국로추사에서는 왕이 계백에게 명하여 군사 5만을 거느리고 막도록 했다는데 이것은 황산벌 전투로 5만이 아니라 5천의 군사를 내어 준것을 오기(誤記)한 것 아닌가요??..그리고 상영을 베고 직의는 사로잡았다는 대목에서도 상영이 이미 황산벌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는 삼국사기 본기와는 내용이 많이 다르군요..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김유신이 김춘추 구하러 고구려로 출병하는 대목에서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1만, 열전에서는 3천명의 용사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3만으로 되어 있군요, 또한 여기서는 비녕자가 신라장수가 아닌 백제장수로 내용이 완전히 틀립니다. 또한 648년(무신) 대야성 보복전투와 649년(기유) 은상의 석토성 침공및 도살성 전투부분에서 1년차이가 나는데 같은 해의 사건으로 순서도 바뀌어 기록되어 있군요..또한 “三韓之民族” 이라는 용어는 국로추사가 1920년대의 비교적 근대에 제작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지금 국로추사.. 번역된 것들을 죄다 읽는 중입니다.. 그런데 유기에서 나오는 내용이라고 하는 부분 중에서.. 삼국사기 명림답부에 관련된 기록에 나오는 장면이 건안성 전투에 등장하는군요..;; 게다가 연개소문이 아니라 천개소문이라.. 정말 유기가 맞는지 의심이 갑니다..(그래도 흥미로운 기록이 많네요.)
유기! 보는 순간 심장이 벌렁거렸습니다. 허허;; 이 카페 주인장선생님께서 꿈꿀 때마다 본다는 그 책이 정말 남아 있었던 겁니까!; 이건 정말 '믿고 싶은' 기록이네요. 의자왕편이라고 했지만 백제보다는 고구려 관련 내용중에서 눈에 띄는 것들이 많네요. 백제 관련 내용은 삼국사기의 것과 전체적으로 근본적인 차이는 없어보입니다. 오히려 더 부정확하다는 인상도;;; 다만 흥수의 책략에 반대한 자가 의직이라는 것이나 의자왕의 왕후(아마도 문제의 그 '요녀'?)가 자결했다는 이야기나 제라간 전투에 대한 삼국사기보다 상세한 서술 등은 흥미롭습니다.
'유기'에서 나왔다고 지칭된 내용은 위에 여러분께서 지적한 문제점들이 있기는 하지만(즉, 만약 이 기록을 사서로 인정한다고 해도 실제로 '유기'의 내용 자체가 충실히 옮겨진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국로추사'의 필자는 실제 '유기'를 봤다기 보다는 그 유기를 옮겨놓았다고 한 다른 기록을 보았다는 추정이 가능하겠지요.) 확실히 고구려인의 관점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제사'나 '동사'등은 역시 신라인의 관점이 짙게 배여있네요. 어쨌든 놀라운 자료입니다. 이거 퍼가도 될런지요?
지금 님의 댓글을 보고 그 부분을 다시 봤더니 정말 흥미롭습니다. 웅진강구 전투에서 당군이 '밀물을 타고 공격하였다'는 내용과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만여 명'이라는 내용... 그리고 '정방이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성을 비우고 쫓아갔다'와, '유신이 곧바로 성으로 진격하니 성문이 저절로 열렸다!'는 내용... 허허;;
첫댓글 흠... 삼국사기와 별 차이가 없네요.
의자왕 편인데 의자왕에 관한 이야기는 한 줄 나오네요;; ㄷㄷㄷㄷ
뒤에 나옵니다.
壬寅 元年[羅十年 麗二十二年] 임인 원년 642년[신라 10년, 고구려 22년] 고구려 22년이 틀려져 있어..정정했고, 간지의 연대 642년을 찾아서 넣었습니다. 청포를 뇌물로 주었다는게 신기하군요. 토끼와 거북이 얘기가 재미있군요. 麻峴竹嶺, 죽령은 익히 알아도, 마현은 금시초문입니다.
"아, 내가 간을 빼내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보름이 지나면 간을 꺼내 씻어서 암석 사이에 둔다. 지금 곧장 달려가 가져온다면 너의 바램은 이루고, 나의 공명 또한 이룰 것이다." 해석이 조금 어색합니다.. 연결이 매끄럽지 않죠. 근데, 3만명 고구려 군사로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을까요?
乃釋之厚待焉 곧 석방하고 두텁게 대하였다.=> 곧, 그를 석방하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두텁게' 라는 말보다 '후하게'로 바꿔 주는게 좋습니다. 대하다/대접하다. 양쪽 다 좋습니다. 이런 부분을 정정해 주면 됩니다.
釋 = 풀 석 ㉠풀다 ㉡설명하다 ㉢풀리다 ㉣(의심이나 오해가)사라지다 ㉤벗다 ㉥용서하다 ㉦내놓다 ㉧석방하다 ㉨놓다 ㉩두다 ㉪석가 ㉫주해, 釋=풀어주다, 석방하다 의 뜻입니다.=> 곧, 그를 풀어 주고 후하게 대하였다. 이렇게 해도 좋아요. 의역을 가미하면.. "곧, 그를 풀어 주고 잘 대접해 주었다" 바꾸어도 됩니다.
그냥 다 한꺼번에 올렸어요.
국로추사가 강린에 의해 일제치하때 저술된 책으로 보이는데..인용 사료에 留記 ,濟史(백제사), 羅古志(신라고지)등 현재 전해지지 않은 역사고서들을 참조했다면 적어도 일제 강점기까지는 전해졌다고 봐야 하겠네요..아니면 濟史(백제사), 羅古志(신라고지)는 삼국사기 본기나 열전을 보고 그렇게 표기 한 것인지????..그런데 고구려의 역사서인 留記가 눈에 확~ 뜨이는군요!
이부분도 王命階伯將士五萬以拒之 계백의 5천 군사를 5만으로 막도록 했다고 誤記를 했군요..비록 약간씩 오기(誤記)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여러 사서류를 나름대로 편년체로 일괄 정리한 안정복의 동사강목과 같은 사서류 로 보입니다
5천명? 고등학교 2개의 학생수가 5천명입니다. 5천 가지고 전쟁이 되나요?
국로추사에서는 왕이 계백에게 명하여 군사 5만을 거느리고 막도록 했다는데 이것은 황산벌 전투로 5만이 아니라 5천의 군사를 내어 준것을 오기(誤記)한 것 아닌가요??..그리고 상영을 베고 직의는 사로잡았다는 대목에서도 상영이 이미 황산벌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는 삼국사기 본기와는 내용이 많이 다르군요..
그렇군요. 그외 다른 기사가 있나요?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김유신이 김춘추 구하러 고구려로 출병하는 대목에서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1만, 열전에서는 3천명의 용사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3만으로 되어 있군요, 또한 여기서는 비녕자가 신라장수가 아닌 백제장수로 내용이 완전히 틀립니다. 또한 648년(무신) 대야성 보복전투와 649년(기유) 은상의 석토성 침공및 도살성 전투부분에서 1년차이가 나는데 같은 해의 사건으로 순서도 바뀌어 기록되어 있군요..또한 “三韓之民族” 이라는 용어는 국로추사가 1920년대의 비교적 근대에 제작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표기에 따르면 확실히 인용한 사료는 삼국사기와는 많이 다른데 어째 삼국사기나 기존정사와의 내용이 별반차이가 없는 게 좀 이상하군요;;;
사서는 연대별로 내용이 비슷비슷합니다. 어떨 때는 삼국사기 기사 더 상세할 때가 잇고..다른 사서가 더 자세할 때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누락된 인물명,지명이 나타나 있죠.
국로추사가 어떤 사서인지 궁금합니다. 유기라.... 조선시대까지 유기가 전해져 왔다는 얘기일까요..?
홍사, 심당전서같이 도서관에 있는 사서도 아직 공개가 안 되었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서는..
지금 국로추사.. 번역된 것들을 죄다 읽는 중입니다.. 그런데 유기에서 나오는 내용이라고 하는 부분 중에서.. 삼국사기 명림답부에 관련된 기록에 나오는 장면이 건안성 전투에 등장하는군요..;; 게다가 연개소문이 아니라 천개소문이라.. 정말 유기가 맞는지 의심이 갑니다..(그래도 흥미로운 기록이 많네요.)
유기! 보는 순간 심장이 벌렁거렸습니다. 허허;; 이 카페 주인장선생님께서 꿈꿀 때마다 본다는 그 책이 정말 남아 있었던 겁니까!; 이건 정말 '믿고 싶은' 기록이네요. 의자왕편이라고 했지만 백제보다는 고구려 관련 내용중에서 눈에 띄는 것들이 많네요. 백제 관련 내용은 삼국사기의 것과 전체적으로 근본적인 차이는 없어보입니다. 오히려 더 부정확하다는 인상도;;; 다만 흥수의 책략에 반대한 자가 의직이라는 것이나 의자왕의 왕후(아마도 문제의 그 '요녀'?)가 자결했다는 이야기나 제라간 전투에 대한 삼국사기보다 상세한 서술 등은 흥미롭습니다.
'유기'에서 나왔다고 지칭된 내용은 위에 여러분께서 지적한 문제점들이 있기는 하지만(즉, 만약 이 기록을 사서로 인정한다고 해도 실제로 '유기'의 내용 자체가 충실히 옮겨진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국로추사'의 필자는 실제 '유기'를 봤다기 보다는 그 유기를 옮겨놓았다고 한 다른 기록을 보았다는 추정이 가능하겠지요.) 확실히 고구려인의 관점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제사'나 '동사'등은 역시 신라인의 관점이 짙게 배여있네요. 어쨌든 놀라운 자료입니다. 이거 퍼가도 될런지요?
연개소문 보다는 보장왕의 역할이 보다 강조되어 있네요. 그리고 계백의 패배이후 의자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당연합군과 싸웠다는 기록도 흥미롭습니다.
지금 님의 댓글을 보고 그 부분을 다시 봤더니 정말 흥미롭습니다. 웅진강구 전투에서 당군이 '밀물을 타고 공격하였다'는 내용과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만여 명'이라는 내용... 그리고 '정방이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성을 비우고 쫓아갔다'와, '유신이 곧바로 성으로 진격하니 성문이 저절로 열렸다!'는 내용...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