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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국로추사 의자왕편을 올릴테니...정서를 해 주시죠.
라디오 추천 0 조회 482 07.12.16 22:53 댓글 2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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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2.16 23:16

    첫댓글 흠... 삼국사기와 별 차이가 없네요.

  • 07.12.17 01:57

    의자왕 편인데 의자왕에 관한 이야기는 한 줄 나오네요;; ㄷㄷㄷㄷ

  • 작성자 07.12.17 02:05

    뒤에 나옵니다.

  • 작성자 07.12.17 02:04

    壬寅 元年[羅十年 麗二十二年] 임인 원년 642년[신라 10년, 고구려 22년] 고구려 22년이 틀려져 있어..정정했고, 간지의 연대 642년을 찾아서 넣었습니다. 청포를 뇌물로 주었다는게 신기하군요. 토끼와 거북이 얘기가 재미있군요. 麻峴竹嶺, 죽령은 익히 알아도, 마현은 금시초문입니다.

  • 작성자 07.12.17 02:19

    "아, 내가 간을 빼내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보름이 지나면 간을 꺼내 씻어서 암석 사이에 둔다. 지금 곧장 달려가 가져온다면 너의 바램은 이루고, 나의 공명 또한 이룰 것이다." 해석이 조금 어색합니다.. 연결이 매끄럽지 않죠. 근데, 3만명 고구려 군사로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을까요?

  • 작성자 07.12.17 02:36

    乃釋之厚待焉 곧 석방하고 두텁게 대하였다.=> 곧, 그를 석방하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두텁게' 라는 말보다 '후하게'로 바꿔 주는게 좋습니다. 대하다/대접하다. 양쪽 다 좋습니다. 이런 부분을 정정해 주면 됩니다.

  • 작성자 07.12.17 02:58

    釋 = 풀 석 ㉠풀다 ㉡설명하다 ㉢풀리다 ㉣(의심이나 오해가)사라지다 ㉤벗다 ㉥용서하다 ㉦내놓다 ㉧석방하다 ㉨놓다 ㉩두다 ㉪석가 ㉫주해, 釋=풀어주다, 석방하다 의 뜻입니다.=> 곧, 그를 풀어 주고 후하게 대하였다. 이렇게 해도 좋아요. 의역을 가미하면.. "곧, 그를 풀어 주고 잘 대접해 주었다" 바꾸어도 됩니다.

  • 작성자 07.12.17 08:51

    그냥 다 한꺼번에 올렸어요.

  • 07.12.17 14:05

    국로추사가 강린에 의해 일제치하때 저술된 책으로 보이는데..인용 사료에 留記 ,濟史(백제사), 羅古志(신라고지)등 현재 전해지지 않은 역사고서들을 참조했다면 적어도 일제 강점기까지는 전해졌다고 봐야 하겠네요..아니면 濟史(백제사), 羅古志(신라고지)는 삼국사기 본기나 열전을 보고 그렇게 표기 한 것인지????..그런데 고구려의 역사서인 留記가 눈에 확~ 뜨이는군요!

  • 07.12.17 14:58

    이부분도 王命階伯將士五萬以拒之 계백의 5천 군사를 5만으로 막도록 했다고 誤記를 했군요..비록 약간씩 오기(誤記)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여러 사서류를 나름대로 편년체로 일괄 정리한 안정복의 동사강목과 같은 사서류 로 보입니다

  • 작성자 07.12.17 15:24

    5천명? 고등학교 2개의 학생수가 5천명입니다. 5천 가지고 전쟁이 되나요?

  • 07.12.17 19:57

    국로추사에서는 왕이 계백에게 명하여 군사 5만을 거느리고 막도록 했다는데 이것은 황산벌 전투로 5만이 아니라 5천의 군사를 내어 준것을 오기(誤記)한 것 아닌가요??..그리고 상영을 베고 직의는 사로잡았다는 대목에서도 상영이 이미 황산벌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는 삼국사기 본기와는 내용이 많이 다르군요..

  • 작성자 07.12.18 03:02

    그렇군요. 그외 다른 기사가 있나요?

  • 07.12.18 13:31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김유신이 김춘추 구하러 고구려로 출병하는 대목에서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1만, 열전에서는 3천명의 용사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3만으로 되어 있군요, 또한 여기서는 비녕자가 신라장수가 아닌 백제장수로 내용이 완전히 틀립니다. 또한 648년(무신) 대야성 보복전투와 649년(기유) 은상의 석토성 침공및 도살성 전투부분에서 1년차이가 나는데 같은 해의 사건으로 순서도 바뀌어 기록되어 있군요..또한 “三韓之民族” 이라는 용어는 국로추사가 1920년대의 비교적 근대에 제작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 07.12.17 17:00

    표기에 따르면 확실히 인용한 사료는 삼국사기와는 많이 다른데 어째 삼국사기나 기존정사와의 내용이 별반차이가 없는 게 좀 이상하군요;;;

  • 작성자 07.12.17 19:23

    사서는 연대별로 내용이 비슷비슷합니다. 어떨 때는 삼국사기 기사 더 상세할 때가 잇고..다른 사서가 더 자세할 때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누락된 인물명,지명이 나타나 있죠.

  • 07.12.18 02:55

    국로추사가 어떤 사서인지 궁금합니다. 유기라.... 조선시대까지 유기가 전해져 왔다는 얘기일까요..?

  • 작성자 07.12.18 03:03

    홍사, 심당전서같이 도서관에 있는 사서도 아직 공개가 안 되었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서는..

  • 07.12.18 14:51

    지금 국로추사.. 번역된 것들을 죄다 읽는 중입니다.. 그런데 유기에서 나오는 내용이라고 하는 부분 중에서.. 삼국사기 명림답부에 관련된 기록에 나오는 장면이 건안성 전투에 등장하는군요..;; 게다가 연개소문이 아니라 천개소문이라.. 정말 유기가 맞는지 의심이 갑니다..(그래도 흥미로운 기록이 많네요.)

  • 07.12.28 17:30

    유기! 보는 순간 심장이 벌렁거렸습니다. 허허;; 이 카페 주인장선생님께서 꿈꿀 때마다 본다는 그 책이 정말 남아 있었던 겁니까!; 이건 정말 '믿고 싶은' 기록이네요. 의자왕편이라고 했지만 백제보다는 고구려 관련 내용중에서 눈에 띄는 것들이 많네요. 백제 관련 내용은 삼국사기의 것과 전체적으로 근본적인 차이는 없어보입니다. 오히려 더 부정확하다는 인상도;;; 다만 흥수의 책략에 반대한 자가 의직이라는 것이나 의자왕의 왕후(아마도 문제의 그 '요녀'?)가 자결했다는 이야기나 제라간 전투에 대한 삼국사기보다 상세한 서술 등은 흥미롭습니다.

  • 07.12.28 17:35

    '유기'에서 나왔다고 지칭된 내용은 위에 여러분께서 지적한 문제점들이 있기는 하지만(즉, 만약 이 기록을 사서로 인정한다고 해도 실제로 '유기'의 내용 자체가 충실히 옮겨진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국로추사'의 필자는 실제 '유기'를 봤다기 보다는 그 유기를 옮겨놓았다고 한 다른 기록을 보았다는 추정이 가능하겠지요.) 확실히 고구려인의 관점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제사'나 '동사'등은 역시 신라인의 관점이 짙게 배여있네요. 어쨌든 놀라운 자료입니다. 이거 퍼가도 될런지요?

  • 07.12.30 21:19

    연개소문 보다는 보장왕의 역할이 보다 강조되어 있네요. 그리고 계백의 패배이후 의자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당연합군과 싸웠다는 기록도 흥미롭습니다.

  • 08.01.04 16:43

    지금 님의 댓글을 보고 그 부분을 다시 봤더니 정말 흥미롭습니다. 웅진강구 전투에서 당군이 '밀물을 타고 공격하였다'는 내용과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만여 명'이라는 내용... 그리고 '정방이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성을 비우고 쫓아갔다'와, '유신이 곧바로 성으로 진격하니 성문이 저절로 열렸다!'는 내용...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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