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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4.08.24)]
/ 개신교와 천주교
(오세원 목사)
(마 16:13-18, 22:34-40)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금년 8월은 유별났습니다. 영화계에서는 “명량”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기록을 낳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리고 프란치스코라는 로마 교황의 한국방문을 통해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지난 8월14-18일까지의 교황방문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엄청난 기대 속에 방문하였기에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지난18일에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 교황의 방문이 어느 정도 국민들에게 영향을 주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인터넷의 검색어입니다. 8월13-20일까지 한 주간에 걸쳐서 인터넷에서 검색한 인물 중에 가장 많이 검색된 인물이 바로 교황이었습니다. 무려 62만2298건이었습니다. 2위는 김영오씨로서 24만1633건에 비하면 약 두 배 반이 넘습니다.
왜 이렇게 한국 국민들이 교황방문에 대해 같은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관심을 그렇게도 많이 가진 것인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역사적 이슈도 있지만, 지난 4월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로 인한 희생자가 많아 슬퍼하는 유족들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이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고 있고, 개신교의 경우는 좋은 일은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의 행보에 대해 이미 이미지가 실추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중 매체들로부터 외면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교황이 소형자동차를 이용하여 이동하고 약 한자, 낮은 자, 슬픈 자,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는 행보가 일반 시민들에게는 아름다운 행보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개신교가 그동안 안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는 일에 대해 그렇게 감동한 것은 일반 교황과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할 때(2013.03.19.)부터 세계적으로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인물됨에서 이미 지난 1년 반 동안 세계인들에게 좋은 이미지가 제고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어떤 사람인가? 베테딕토16세가 자진사퇴를 했습니다. 교황은 종신직으로써 임종을 앞두고 그만두는 것인데 베네딕토16세는 의외였습니다. 그래서 지난2013년 3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국적이 유럽이 아닌 아르헨티나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266명의 교황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1273년 만에 비유럽 출신 교황이 선택된 것입니다.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톨릭 입장에서는 프란치스코가 선택된 것만으로도 이미 새롭게 돋보이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교황의 이름을 다른 여타 교황들처럼 성인들의 이름을 따지 않고 쉽게 그 이름을 사용하기 어려운 ‘아시시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용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따오면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아시겠지만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는 청빈과 겸손을 상징하는 작은 예수처럼 알려진 이름이기에 교황이름과는 걸맞지 않음을 인식하여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이름인데, 이번 교황은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과감하게 사용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만큼 자신감이 있는 교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266명의 교황 중에서 로마 교황청을 개혁한 인물은 많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세 번째 개혁하는 교황의 반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번 교황의 경우 개혁적인 수도회인 예수회 소속의 첫 번째 교황이라는 사실입니다. 독일의 유력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가리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존중받고 엘리트주의적이고 논란 많은 남자 수도회 소속의 교황이 작은 형제단의 설립자인 프란치스코를 자기 이름으로 딴 것은 교황의 놀라운 자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2013년3월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이 된지 첫 번째 미사를 집례하면서 강론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나아가고 십자가 없이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속적으로 교황, 추기경, 주교, 사제일수는 있을지 몰라도 주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는 야전병원과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의 상처를 고쳐주고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가깝게 다가가고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황은 자신의 경우 전투가 끝난 후에 야전병원으로 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영적 병듦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탈이 난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거리로 나아가서 여러 가지 사건과 마주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로마 교화청의 입장에서 보면 획기적인 개혁정신을 갖춘 교황이 취임하게 됨으로 인해 모든 사제단들이 벌벌 떨고 있을 법 합니다. 이런 교황이 방문했기에 우리 국민들은 환대했다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비하시키면서도 남이 한 일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더욱 발전되면 사대주의 사상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메스컴들이 그리고 국민들이 보다 합리적이면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우리 나라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개혁하고 있는 많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국민들에게 잘 알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남의 밥에 있는 콩이 커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해외 다른 나라나 아니면 우리 지역의 인사들이 아닌 다른 지역의 인물들을 더욱 높이 평가해 주는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합니다. 교황이 이런 의식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우리는 무조건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인가? 물론 남다른 생각과 의지로 개혁해가려는 모습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겠지만 개신교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보다 깊은 성찰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반성을 함께 해야 합니다.
개혁적인 마인드만으로 개혁적인 내용이 사라질 것인가? 즉 개혁될 것인가? 카톨릭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권위주의적인 수직적인 성직의 구조나 잘못된 교리까지도 고쳐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보다 더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교황의 경우는 일개 대통령과 같습니다. 로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대사관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로마대사가 있습니다. 교황의 권위는 하늘높은줄 모르고 치솟아 있는 제도입니다. 국가의 수반이요 수장이며 돈과 재정권, 행정과 교권을 독점하고 있는 군주와도 같습니다. 교황의 제도가 어디로부터 출발한 것인지 아시죠?
첫 번째 교황이 베드로입니다. 이 주장을 하는 근거의 말씀이 오늘 읽은 마태복음16장의 본문입니다. 1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도착했을 때 느닷없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다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예수님은 자기 정체성을 일반 사람들과 가까이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알고 싶으신 것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잘못될 수도 있고 바로 알 수 있겠지만 제자들은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이때도 베드로가 급하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엄청난 반응을 하십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흥분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칭찬을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 그러면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절).
이 말씀을 가지고 카톨릭은 기독교교회는 베드로위에 세워졌으며, 로마 지교회의 최초주교로 베드로가 임명되었으며, 베드로가 그의 후계 교황(주교)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인계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베드로의 위를 승계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카톨릭만이 예수께서 세우신 "참 교회"이며 따라서 구원은 카톨릭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 주장이 과연 옳습니까?
카톨릭 신학자인 한스 킹도 교황의 수장권을 확정할 수 있는 말씀을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고 교황의 수장이 될 수도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4-5절 말씀,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교황으로서의 특별한 권한을 부여한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후 예루살렘교회의 경우, 주님의 제자들이 사도로서 이끌어 가고 있었는데, 행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의 회의장면에 의장은 베드로가아니라 야고보사도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개신교에서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16절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로 봅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카톨릭은 1년에 한 번씩 고해성사를 합니다. 우리는 수시로 죄를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받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탄생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2,000년 전 사도 바울이 복음증거 할 때 고린도에서도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교회를 세웠는데도 교인들 간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고린도전서 1:12절에 보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하면서 우월의식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사실은 고린도 교회가 영적인 지도자들 때문에 교회가 나누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나눠지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세워진 것이 교회요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사도 바울은 다시 가르쳐 줍니다.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중보자입니다. 우리 모두의 중보자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을 자랑합니까? 오늘날도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은 바울도 아볼로도 베드로도 다 고린도교회의 것입니다.
(22절)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바울은 자신도 고린도 교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바울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명 영적 지도자들조차도 교회의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붙어있는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23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할렐루야!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 앞에,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되어야 합니다.
(고전 3:10-11)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도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장로도 아닙니다. 그 어떤 직분자도 아닙니다. 다음세대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어린 아이들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터는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섬기면 안됩니다. 잘못된 교회에서 벗어나 개혁된 교회로 출발한 것이 개신교입니다.
우리는 개신교인들로서 개신교를 알아야 합니다. 개신교의 태동은 종교개혁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 역사를 살펴봅시다. 초대교회가 주후64년부터 약 250년간 10명의 황제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결국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은 망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주후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기독교 공인됩니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점점 강건하지를 못합니다. 핍박을 받을 때는 순교자도 나타나고 아주 강한 신앙의 힘을 가졌는데 자유를 주니까 나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슬람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로마와 동로마 교회로 분열됩니다. 동로마는 희랍정교회로, 서로마교회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것이 1054년입니다. 이런 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가 500년 동안 태평성세를 누리면서 신앙이 타락하고 사제가 타락하였습니다. 그래서 개혁운동이 일어나 마침내 루터를 통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1517년 붸텐베르크 성당정문에 고쳐야할 내용 95개 조항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개신교, 일명 기독교입니다. 그 후 다시 카톨릭은 1534년에 성공회가 생깁니다. 사제도 결혼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성공회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500년이 지나면서 개신교, 즉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우선 종교별 신도수를 살펴봅시다. 세계10대종교편람에 나온 2012년도 세계종교인구 분포도를 보면 이렇습니다. 기독교 신도가 23억2,550만 명으로 33%입니다. 두 번째가 이슬람으로 15억8,378만명, 흰두교 9억 6,960만명, 불교 3억7,880만 명, 유대교 1,514만 명입니다. 한 가지 여쭈어보겠습니다.
“카톨릭은 기독교입니까? 아닙니까?” 위의 통계에서 기독교에는 카톨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자가 23억2,550만 명중에 카톨릭이 11억8,763만 명,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 루터교회, 구세군, 복음교회, 성공회 등 개신교 4억3,289만 명, 독립교회가 3억5,861만명, 희랍정교회가 2억1,624명, 성공회 7,700만 명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 중에 장로교인은 얼마나 될까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개신교가 세계에서 제일 많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장로교가 큰 교단이기 때문에 장로교가 세계적인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세계 종교 분포를 보면 이슬람이 22%, 흰두교가 14.3%, 카톨릭 15%, 개신교 11%, 불교 6.5%, 희랍정교 3.2%, 유대교 0.2%, 무종교 15%, 기타 12.8%입니다. 개신교 11% 4억3289만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와중에 유럽의 장로교와 미국의 장로교가 약화되고 있습니다. 한국만 빛을 발하다가 요즘은 장로교가 다른 나라들처럼 역시 문제가 많이 발생함으로 교세가 약화되고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백성들이 로마 교황에 빠져있는 이때에, 개신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카톨릭과 개신교는 무엇이 다른가? 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독교를 결정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성경을 경전으로 믿는가? 에 대한 대답이 확실해야 합니다. 개신교 카톨릭 정교회 등 사도신경을 고백하는가? 4세기 신앙고백을 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가? 개신교 천주교 정교회 등입니다. 아리우스가 이것을 부정함으로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후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마리아 숭배 사상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아 축복받은 여인까지 복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머니로 신격화하는 것은 안 됩니다. 마리아는 누가복음1장에서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했다고 천사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46-48절)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도 여전히 죄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 있는 인간의 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교황무오설을 조심해야 합니다. 교황의 강론을 성경과 동일하게 봅니다. 성경에 없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카톨릭은 성경관의 경우 전통과 전승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집니다. 이것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성례통한 구원과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면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세례는 죄씻음받은 것을 확인한 성도들에게 증표로 주시는 것이지 그 세례의식을 통해서 죄가 사함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주심을 기념하는 예식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사제가 기도한다고 살로 피로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받습니다. 구원은 죄 사함 받을 때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의 화체설은 더욱 아닙니다. 떡과 잔을 받는 것은 기념하는 것인데 그것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예수를 하나님을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니까 갈등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무슨 고백을 했는가 하면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선행을 행한다면 천국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헤민 스님이 트윗에 인용했는데 그것을 7500회 이상 퍼져나갔습니다. 이 주장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왜 어렵고 힘들게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왜 미사를 드려야 합니까?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아니 헌금하는 것으로 선한 선행에 사용하면 천국 가는데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기독교인들은 지나치게 배타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그리고 흑백을 분명하게 가릴 것처럼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지 못하고 입술로만 외치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우습게 알고 대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바르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왜 교황 한 사람 때문에 엄청난 중계방송을 하고 100만 인파가 모였습니까? 기독교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하는 잘못된 교인들, 바로 저와 여러분 때문은 아닐런지요?
이럴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개혁자정신을 살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구원자는 예수님 이름 외에는 없음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황의 행보가 아무리 선한 행위였고 위로였고 감동을 주었어도 그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교황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동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22장 3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 중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36절)
철저하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온 몸 바쳐 사랑해야 합니다. 생명 걸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에게 하는 사랑을 이웃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39절) 모든 율법의 최종 클라이맥스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교황보다 우월하다고 하면서도 카톨릭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면서도 그들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자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처럼 우리 또한 왕관을 내려놓고 가시관을 써야 합니다. 이웃을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웃보다도 우선 교인들끼리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모습은 아닙니까? 주님 앞에서 자신 있게 ‘나는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교인을 사랑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둘 이상 앉으면 교회 흉보고 목회자 비난하고 비판하고 앞장서서 섬기는 직분자들을 비방하고 헐뜯는 것이 사랑입니까? 카톨릭 신자들은 오히려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사제들을 보호합니다. 교회를 세워나가야지 교회를 허무는 일을 자행하면 안 됩니다. 우리도 말씀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카톨릭보다도 훨씬 더 성경적이고 확실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만 우리의 부족함이 무엇인가를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대한 실천이 부족합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글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우리가 부정하는 카톨릭 교황도 교회는 야전병원과 같다고 했는데 우리는 교회를 뭘로 생각합니까? 전쟁에서 부상당한 사람은 누구든지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받듯이 교회도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다 오셔서 치료받고 치유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안 됩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하십시오. 모든 것은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성경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성령 받아 말씀에 순종한 초대교회로 돌아갑시다. 성령 받읍시다. 그리고 사랑으로 나누는 삶이 됩시다.
하나님 나라를 훼손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본받지 않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자행한다면 과연 나는 기독교인인가? 크리스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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