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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8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마태오 11,28-30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에너지가 넘친다
‘최강의 인생’을 쓴 데이브 아스프리는 자신의 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돈과 권력과 쾌락을 다스렸는지 그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 째는 지금 이렇게 절제 없이 산다면 20년 후에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상상하는 20년 후의 나의 미래를 위해 지금 ‘아니오!’란 말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애정이나 인기, 돈이나 명예, 쾌락에 휩쓸리다보면 거기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빼앗겨 정작 힘이 필요할 때 주저앉고 말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를 위해서는 중요한 의사결정이 아닌 이상 삶의 모든 패턴을 자동화하라는 것입니다.
몇 시에 일어나서, 어떤 운동을 얼마나 하고, 식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옷을 입고 출근할 것인지, 출근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귀가해서는 어떻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의 자신의 욕구를 절제해야 하고, 그 방법은 욕구를 이기기 위해 평소 생각과 판단에서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학계에서 진행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판사들이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가석방 심사를 하는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10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1,000여 차례가 넘는 공판을 조사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판결 결과’는 범죄 유형이나, 수감자의 학력, 수감 생활 등의 변수보다는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시간대’에 더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전에 내리는 공판에서는 판사가 매우 너그러운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판사들은 수감자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점심 전에는 거의 0%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점심 식사와 잠시 휴식을 거친 뒤에는 다시 우호적 판결을 내릴 확률이 65%까지 오른 것입니다.
이런 ‘판결을 내리는 시간대’와 ‘판결 결과’의 상관관계는 꾸준하게 반복되어 나타났던 것입니다.
‘시간대’가 ‘판결의 결과’를 가르다니,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을까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가석방 승인 여부를 둘러싼 여러 의사결정들이 판사들의 ‘의지력 계좌’를 점차 소진시켰던 것입니다.
따라서 의지력이 바닥났을 때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나쁜 결과를 도출할 확률을 높이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의사결정 피로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의사결정을 많이 하면 할수록 피곤해져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생각과 판단은 우리의 의지력을 소진시켜 결국 통제해야 할 것들을 통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참조: ‘최강의 인생’, 체인지 그라운드; 웅 이사의 하루공부, 유튜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은 바로 구원받기 위한 믿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벳사이다, 코라진, 카파르나움은 믿음이 없어서 수많은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간직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너무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생각해야 할 때에 부모에게 맡겨버립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부모가 자라고 하면 자고 학교에 가라고 하면 갑니다. 숙제를 하라고 하면 하고 밥을 먹으라고 하면 먹습니다.
이것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와 겸손으로 얻는 ‘안식’은 ‘쉼’입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겸손하면 어린이처럼 에너지가 넘칩니다.
축구나 야구, 모든 운동이 그렇지만 지친 선수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경기에 뛰게 하지 않습니다.
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잘하기 위한 실력도 중요하지만 선택을 하기 위한 에너지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와 같은 사람들은 옷을 한 가지만 입었습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에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하니까 자신의 에너지의 한계를 알기에 하루의 일과를 정해놓고 온유하게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 부모님인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해 놓은 시간표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준 하루를 이렇게 알차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주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은 그래서 주님의 뜻에 따라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미리 생각해보고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잠자기 전에 감사 일기를 쓰고 다음 날 할 일들을 시간을 생각하며 시간표를 짜 봅시다.
다음 날 훨씬 힘이 덜 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메어주시는 멍에를 받아들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한 이들은 일일이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통해 평안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8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11,28-30
갖은 시련 속에서도 하루 하루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쌩고생을 반복하고 무거운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한번 뿐인 소중한 인생이기에 매일 매순간을 축제 즐기듯, 수행여행 가듯 가슴 설레며 살아야 마땅한데, 어렵고 지루한 숙제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명쾌한 정답이 오늘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을 가볍다.”(마태 11, 28-30)
우리가 이 좋은 세상, 이 좋은 시절을 힘겹게 살아가는 이유는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시시각각 주님의 현존 안에 살면서도 그분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시고,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않고 산다면, 그 어떤 수고나 고생, 시련과 상처에도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를 맞이하며 치매로 고생하는 어르신을 봉양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늘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기도만 하는 순한 치매도 있다지만, 그런 치매 환자는 백 만 명 중의 한명 꼴입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수시로 의심하고, 공격하고, 다투고, 힘들게 합니다.
끊임없이 이리 저리 배회를 하고 가출을 시도합니다.
폭력과 욕설을 거듭하는 치매 환자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케어하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노고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습니다. 대체 하느님 뭐하시나, 상태가 저 모양인데, 사람 노릇도 못하시는데, 빨리 데려가시지 않고,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특별한 형제를 봤습니다.
어르신을 마치 사랑하는 아기 다루듯이 대하십니다.
동화책도 읽어드리고, 식사를 거부하시는 어르신을 살살 달래가며 법을 떠먹여 드립니다.
수시로 게임도 하고 퀴즈도 내며, 어르신과 함께 하는 하루를 놀이하듯 재미있고 기쁘게 지냅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 가족들, 또래 환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납니다.
두분 주변은 언제나 웃음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것, 분명 무거운 짐이 확실합니다.
그들을 하루 온종이 케어한다는 것, 쌩고생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주님께서 굳건히 현존하고 계시고, 그 어르신 안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그 일을 기쁨이요 축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굳은 일, 힘든 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에도 큰 의미가 있음을 확신하고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임한다면, 그 일이 곧 복음화요 주님의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런 고생 저런 시련 속에서도 하루 하루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매일 주님 앞으로 나아가며, 그분 현존 안에서 살아가며,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겨드리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강론>
(2024. 7. 18. 목)(마태 11,28-30)
<성당은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이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희년선포 말씀’에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기쁨’과 ‘해방’과 ‘자유’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구원에서 배제되는 사람도 없고, 그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따라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과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 생명, 평화, 행복, 기쁨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이 나에게는 필요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논쟁을 벌였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ㄴ-32).”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요한 8,3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ㄴ-3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 즉 당신을 믿고 회개하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면 참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들은 자유를 잃은 적이 없다고, 자기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감방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열쇠를 주어도, 이곳은 감방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 예수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39-41).”
<보아야 할 것을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평화와 안식을 얻어 누리려면, 지금 자기가 무거운 짐과 멍에의 억압 속에 있다는 것부터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무거운 짐도 없고 멍에도 없다.
나는 자유롭게 잘 살고 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다가 심판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가 온갖 죄와 죽음이라는 짐과 멍에의 억압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평화와 안식을 외면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임종 순간에 그것을 깨닫고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그 순간에라도 회개하고 신앙을 받아들이고 임종을 맞이한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냥 후회만 하면서 생을 마치는 경우가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인생의 모든 고통에서, 또 죄와 죽음이라는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희망하고, 그 해방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예수님만이 참 안식과 해방과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 말씀에서 ‘내 멍에’는 반어법적 표현입니다.
멍에 자체가 하나도 없는 것이 진짜 해방이고 안식입니다.
따라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계명과 가르침대로 살면
온갖 멍에와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너희의 멍에를 벗겨서 편안함과 가벼움을 주는(참된 안식을 주는) 열쇠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결코 멍에가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무거운 멍에를 당신의 가벼운 멍에로 바꿔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무겁든지 가볍든지 멍에는 멍에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멍에와 짐을 완전히 없애 주시는 분입니다.
<성당은 주님과 함께 안식을 누리는 곳, 즉 안식처입니다.
만일에 신자들이 성당에 와서 안식을 누리기는커녕 여러 가지 부담만 잔뜩 얻는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목자들의 잘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