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사적으로 튀어 오르듯 콧핏으로 달려가서 펌핑을 해서 물을 다 뽑아냈다.
케빈 안으로 들어 와서는 왜일까? 어디일까? 생각하며 빌지 속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려니 물이 아주 조금씩 차올라온다. 시간은 이미 16시 30분을 지나고 있다. 이제 곧 일몰인데! 마음이 급해졌다.
물이 들어 올만한 곳을 찾아내기 위해서 바닥의 저장실 문을 하나씩 열어가며 확인했지만 물기라곤 조금도 없다. 다음엔 파이프 확인 작업. 우선 눈에 뜨이는 곳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개수대, 오케이.
세면대 오케이. 변기 배수파이프, 오케이. 변기 흡수 파이프, 오케이. 마지막으로 오른쪽 구석에 있는
냉각수 파이프. 오호! 냉각수 파이프 개폐기 바로 밑 부분에서 물이 졸졸 흐른다. 거울을 받혀서 확인해 보니 약 1.5 밀리미터 크기의 균열이다. 앗, 동파로구나. 이 정도라면 배에 비치되어 있는 쇠 본드로도 처리가 가능하다.

작업 등을 켜고 앉아서 본드를 믹싱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졸졸거리던 물이 고무호스의 구멍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듯 세찬 물줄기로 변해서 뿜어져 나온다! 순식간에 불안감이 공포심으로 변했다.
쇠 본드는 물에 약하다. 졸졸거리는 물 정도는 잡아 줄 수 있지만 물줄기를 잡기에는 역 부족이다.
빌지를 드려다 보니 벌써 물이 거의 다 차올랐다. 또다시 펌핑 작업. 집에 전화로 현 상황을 알렸다.
아아, 바보같이 왜 동파 방지 준비를 하지 않았나! 몇 십 년 만의 혹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오늘도 케빈 안에 들어올 때 보았듯이 생수병이 얼어있었지 않았는가 말이다.
어쩔 수 없다.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나는 본드를 파이프에 붙이기 시작했다.
물줄기의 압력에 밀려서 자꾸만 떨어지는 본드를 한손으로 계속 눌러 붙이며 또 한손으로는
흐르는 물을 손으로 짜내며 본드를 두껍게 붙여 나갔다.
본드를 3개째 사용했을 때에 어느 정도 물이 잡혔다. 물이 작은 방울 정도로 흐른다.
빌지의 물도 차오르는 속도가 많이 줄었다.
10분 ~ 20분 주기로 물을 퍼냈었는데 이젠 2시간 주기정도로 물이 잡혔다.
한숨을 돌리고 시계를 보니 19시가 지나있다. 피곤하다. 일단 집으로 가자. 새벽 2시쯤 다시 와서 물을 퍼낸다면 될 것이다. 그 때까지야 바닥에 물이 차오르는 정도일 터이니 침몰될 일은 없다.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밥을 먹으며 머릿속으로 상황 정리를 하고 있는 순간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생각났다.
물의 압력이다. 물이 차오르면 홀수 선은 더 깊어진다. 그렇다면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물의 압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실 낫 같은 힘으로 근근이 붙어 있는 본드가 물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릴 것이다! 정신이 번쩍 났다. 남편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서 옷을 한 겹씩 더 끼어 입고 당항포로 차를 몰았다.
도착. 21시. 차의 계기판에는 밖의 기온이 -7C 로 뜬다.
불빛이라곤 없는 계류장은 암흑이다. 얼음이 얼어있는 폰푼 위를 걷다가 자칫 미끌어지면
문자 그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헤드랜턴을 머리에 쓰고서 조심 조심하며 배까지 걸었다. 배의 문을 열고 빌지를 보니 물이 5분의 4쯤 차있다. 생각 보다는 본드가 제 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 기특하다. 빌지의 물을 퍼내고서 본격적으로 밤샘을 할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조금이라도 온기를 얻기 위해서 부탄가스 랜지를 켰다.

오리털 침낭을 펴고 읽을거리용으로 가져온 책도 꺼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영하 9도정도의 배안에서 그것도 2시간 간격으로 물을 퍼내는 작업이 어떤 것인 줄을 몰랐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려했다니, 왕 무식한 생각이었다.

뭐어, 내가 호텔에 온 줄 착각을 했었다.
다음엔 엔진룸을 살폈다. 아까는 정신이 나가버려서 엔진룸을 열어 볼 생각조차 못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다행히 임페라도 배수관도 다른 어떤 부분도 동파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천만 다행이다. 엔진이 터졌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 아닌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상황이 다급한지라 수중 본드를 가져다 달라고 아는 사람에게 연락을 했다. 다행히 내일 낮쯤에는 당항포에 도착할 수 있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 했다. 2시간 간격으로 물을 퍼내기만 하면 된다.
나는 2시간 이후에 알람이 울리도록 저장을 해놓고서 침낭 속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잠? 아니다. 공기에 노출된 부분은 바늘에 찔리는 듯 따끔거리고 얼어버린 몸은 도무지 온기가 돌아오지를 않는다. 몸을 잔뜩 옹크리고서 침낭 속에 누워 있으려니 온갖 생각들이 떠오른다.
지금 이 시각, 나처럼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굳어진 몸을 옹크리며 억지로 잠을 청해 보려고 하고 있을 노숙자들이 생각났다. 서울역, 지하철역, 어디인가 냉혹한 바람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곳을 찾아서 하드보드 박스로 움막을 만들어 그 속에서 희망 없이 그저 견디어 낼 수 있기만을 바라며 몸을 누이고 있을 사람들이 생생한 체감으로 느껴졌다. 나는 자청해서 이곳에서 , 그 것도 오늘 하루만 견디면 되는 것이지만 그들은 끝이 언제일지도 모르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엔 무심코 지나쳤던 그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짙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는 그 들의 강렬한 의지에 감동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유야 어떠하건 대단한 사람들이다 는 생각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다음에 그 들을 만난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했던가? 밖의 콕핏으로 펌핑을 하러 몇 번 나갔다 들어 왔다하다 보니 어느덧 04 시가 다 되었다. 유입되는 물의 양도 현저하게 줄어들어 2시간 정도가 지났어도 빌지에 절반 정도의 물만이 고여 있다. 아마도 젖어있는 상태임에도 본드도 조금씩 굳어져 가는가 보다.
또 다시 펌핑을 해서 물을 다 뽑아냈다. 그리고 나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이 상태로 라면 아마도 3시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긴장이 풀어져서 인지 더 이상 배에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한 순간이라도 빨리 차로 들어가자.
잽싸게 케빈의 문을 닫고 차로 갔다. 시동을 켜고 히터를 끝까지 올려놓고 뒷자리에 누웠다. 잠시 후
따듯한 바람이 온 몸을 부드럽게 감싸 준다. 뻣뻣하게 얼었던 몸이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 난 고드름이야 ~ 라고 중얼 거리던 나는 어느 새 ~ 난 소프트 아이스크림이야 ~ 라는 말로 바꾸었다.
햇살이 환하게 차창으로 들어온다. 살짝 잠이 들었었나 보다. 깜짝 놀라 시계를 보니 08시.
벌떡 일어나 배로 갔다. 빌지를 보니 물이 정상적일 때처럼 바닥에 깔려있는 정도로만 고여 있다!
그 동안 용케도 본드가 굳어주었구나! 피곤함이 싹 달아나 버렸다. 이제 오후에 수중 본드로 교체해서
다시 막아 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커피를 끓여 마시고 컵라면도 하나 먹었다. 이제야 살 것 같다.
13시경, 수중 본드가 도착했다. 젖어있는 상태인 쇠본드를 떼어 내고 수중 본드로 다시 작업 시작.
17시경, 모든 작업이 끝났다!

행복하다.
이 번에 ~ 집 나가면 고생. ~ 이라는 말을 겁나도록 확실하게 체험을 했기에 가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접어 버렸다.
첫댓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단 걸 다시금 깨닫고 있습니다...
급 반성 중입니다....^^;;
아 뭐어, 비처럼 나를 겨누고 총알을 쏘아대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정신 없이 뛰지 않겠어요?
드뎌 레이저가 발사되는군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잘 읽었습니다.ㅎㅎ
처음엔 빌지?....뭔 얘기지 했습니다.
이런 글을 통해서나마 세일링의 현장에 있는 듯 벅차 오르는 기분 좋네요.
일찍부터 이 곳 지리산에 터잡고 계신분들과는 전혀 무관한 생활을 하는 저였기에 이런 생뚱맞은 글을 올려도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좋은 마음으로 받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언하자면 저는 그저 뱃사람입니다.
이제 다 읽어봅니다.
처음에는 뭔말이지? 직업에 대한 이야기인가? 핸폰으로 읽으려니 눈이 침침해서 컴퓨터로 제대로 봅니다.^^
지금은 어찌 집으로 잘 돌아오셨나요?
지리산행복학교 분들 대부분이 아직은 이곳에 터를 잡은 분들이 많지 않아서 아마도 무슨 이야기든 하시면 다들 공감해 주실 거랍니다.
그저 뱃사람, 더 궁금해지는데요.
수중 본드 다 붙인 배도 궁금하고요.^^
그날 다행히 죽지않고 무사히 집으로 왔습니다. 언제든 시간이 되시면 연락 주세요. 같이 세일링하며 수다떨면서 놀아 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