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인연의 나라, 베트남
-다낭, 호이안, 후에 김영월
두툼한 겨울옷을 벗어 던지고 반바지 차림으로 다낭 해변을 걷는다. 맨발에 와 닿는 꽃가루 같은 모래들의 입맞춤이 느껴지고 아오자이 치맛자락처럼 펼쳐지는 태평양의 물결에 환호한다. 날씬한 미녀들의 행진인양 야자수들이 해풍에 하늘거리며 탐스런 코코넛 열매를 젖가슴처럼 드러낸다. 이런 바닷가의 낭만 속에 와 있는 내가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고희를 맞이한 중학 동창생 부부들끼리 베트남의 중부 도시를 찾게 된 여행이 서울의 혹한을 탈출하는 멋진 선택이 되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여러 나라들 중 우리나라와 가장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베트남에 와 보고 싶었다. 바다를 끼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이나 월맹과 월남이란 이름으로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이었던 점도 그렇고 무엇보다 ‘월남파병’으로 오늘의 경제 부흥에 큰 덕을 보았던 고마운 나라가 아니랴. 코리안드림을 꿈꾸는 다문화가정의 많은 여인들 중 베트남 출신의 그들이 우리의 농어촌 총각들과 짝을 맺어 출산율 최하위의 위기에 처한 한국의 인구부족에도 기여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미 고령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이 곳 사회는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며 거리를 꽉 메우고 있다. 부모 세대들이 전쟁에 많이 희생된 탓으로 종전 40년이 흐른 상황에서 1억 인구 중 7.80프로가 젊은 층으로 구성된 탓에 미래를 밝게 한다. 교통 신호도 제대로 안 된 거리에 멋대로 달리는 오토바이족들의 사망율은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아직 우리나라의 70년대 수준이지만 국가발전의 전망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 마지막 한 마리 용으로 도약할 것으로 기대 된다. 이른 시각에 노점상들이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와 식탁을 비치하고 출근시간에 맞추어 차 한 잔과 가벼운 먹거리를 팔고 있다. 서민들의 일상적인 음식은 꼬치구이나 월남쌈(라이스 페이퍼) 이 많이 눈에 띤다. 둥근 차양의 갈대 모자를 쓴 아주머니들이 대나무에 과일 바구니를 매단 채 어깨에 걸치고 뒤뚱거리며 행상을 하고 있다. 바나나와 망고, 용과 같은 열대과일들 중 두리안이란 이름의 껍질이 우둘두툴한 과일은 어찌나 구린 냄새가 역겨운지 비싼 값만 지불하고 먹지도 못 한 채 버리게 됐다.
다낭 시내의 중심을 관통하는 한강은 서울의 한강과 똑같은 이름인지라 더욱 친근감을 준다. 한강을 가로질러 거대한 용 모양의 멋진 다리는 이곳의 상징처럼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다낭 시내에서 북쪽으로 후에(HUE)라는 고도가 있어 1대부터 13대까지 왕조들의 궁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호치민이 감격적인 남북통일을 이루고 맨 먼저 공산국기인 황성적기를 내걸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한 다음 뼛가루를 전국토에 골고루 뿌려주기를 원했지만 그리 되지 못하고 현재 하노이에 방부제로 시신처리를 해 보관되고 있다. 다낭의 남쪽으로 호이안(hoian)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도시로 일본인들이 1593년에 지었다는 고색창연한 목조 다리(내원교)가 관광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이곳은 오토바이가 통제된 지역인지 거의 보이지 않고 씨클로라는 자전거 모양의 택시가 관광객들을 태우고 시내투어를 하고 있다. 호이안에서 투본강을 따라 시원한 강바람을 쏘이며 작은 목선을 타고 목공예 마을을 방문했다. 가까운 곳에 도자기 마을도 조성돼 있고 이렇듯 사회주의 국가인만큼 장인들을 한 곳에 모아 두고 집단 거주지로 관리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에 1964년 9월에 전투 병력으로 파병된 청룡부대가 첫주둔지에서 민간인 135명을 사살했다는 이유로 ‘한국인 증오비’가 세워졌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가슴이 아팠다. 파월 병력이 미군 다음으로 32만명에 이르렀으니 한국 군인들과 베트남 여성들 사이에 태어 난 혼혈아(라이따이한)들이 1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아버지의 나라에서 소외되고 있는 그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니 연민의 정과 전쟁의 비극이 느껴진다. 베트남 국민들은 한국인들의 그러한 과거의 잘못에도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여 주는 듯하여 고맙게 여기고 제일 싫어하는 나라가 중국과 일본이라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요즘 인기 걸그룹등이 일으키는 한류 바람으로 이곳의 열성 팬들이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버스로 36시간이나 걸리는 교통사정에도 오직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차를 타고 지나며 주변의 산야를 바라볼 때 민둥산이 많이 보이는 것도 월남전 때 고엽제 피해로 그렇다고 하니 전쟁이 얼마나 그들에게 고통으로 남아 있으랴 싶다. 생각하면 내가 군복무 중에 파월 장병에 끼지 못한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 일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에 고엽제로 신음하는 전우회 모임도 있으니 그들의 헌신에 고개가 숙여진다.
베트남 최대의 불상(65m)이 있는 다낭 해변가 언덕위에 가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월남이 패망(1975년 4월30일)하고 보트피플이란 이름의 난민들이 발생했을 때 14,000명의 희생된 사람들 중 한 명이 미국으로 건너 가 크게 성공했다. 부자가 된 그는 개인 재산을 기부하여 영은사(靈恩寺)라는 절을 지어 함께 배를 타고 간 난민들의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이 곳 사원(손트라 반도 SONTRA)의 언덕빼기에서 바라 본 다낭 해변은 언제 그런 비참한 전쟁의 역사가 있었느냐는 듯 최고의 휴양지답게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이다. 드넓은 태평양 바다를 스쳐온 부드러운 해풍에 부겐비리아 꽃송이들이 더욱 정열적인 빛깔로 나그네를 유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