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 나크(1890-1960,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은, 그의 소설에서 러시아 혁명의 치부를 드러냈다고, 그의 조국 러시아는 그에게 수여된 노벨상 수상 마저도 방해했고 그를 작가 동맹에서 쫒아내고 먹고 사는 일 마저 막아버리고 해외로 추방까지 하려했다. 결국 그는 그가 쓴 닥터지바고의 주인공 처럼, 남의 집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브라질에서 텔레비젼 드라마가 되어 방영이 되고 영화화 되고 출판이 되었다.
그리고 온 세계에 그의 소설은 알려지게 되었다.
영화 닥터 지바고는 불륜의 지독한 사랑을 그린 순애보이다. 주인공 라라를 향한 지바고의 사랑은 눈물겹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지바고는 군의관으로 라라는 종군 간호사로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두 사람은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지바고와 라라는 1917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혁명, 2월 혁명과 10월 혁명과 이후에 적군과 백군의 전쟁 속에서 재회, 사랑, 이별, 도망, 우랄산맥에서의 설원에서의 재회와 이별, 그리고 끝내는 지바고의 죽음으로 마무리 된다.
영화는 애절한 사랑과 함께 펼쳐지는 설원의 장중한 배경에, 마지막 장면에 라라를 애타게 부르며 죽어가는 지바고, 그리고 그것을 모르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는 라라의 모습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닥터 지바고의 시대적 배경이 된 1 차대전부터, 러시아 2월 혁명이 지나고 독일이 제공해준 열차를 타고귀국한 레닌의 4월 테제로 출발하여 트로츠키의 적군과 함께 10월 혁명에 성공한다. 곧이어 왕당파의 백군과의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러시아 2월 혁명은,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고 혼자서 가계를 책임졌던 여성 공장 노동자의 임금 인상 시위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급기야 군인들까지 설득하고 남성 노동자들이 참여하게 되고 러시아 왕정에서 임시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볼세비키들은 이틈을 비집고 들어선 기회주의자들이었다. 레닌은 독일과의 전쟁 중단을 약속하며 적국 독일의 지원을 받았다. 트로츠키의 적군들은 무자비했다. 감히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살육을 벌였다. 그것은 마치, 프랑스 대혁명 시절 공포정치의 대명사 쟈코뱅당의 기로틴 처럼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쟈코뱅당의 빨간 모자를 흉내내어 적군이었던가.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게 하여 적군이었던가.
적군이 승리하게 된 이면에는 러시아 농민들의 도움이 컸다. 혁명이 끝나면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겠다는 거짓말이 적군이 승리하게 된 커다란 원인이었던 것이다.
"왜 이걸 꼭 해야 하는데?"
"혁명과 인민을 위하여...."
"하지만, 누가 혁명을 원한다고 그래?"
"다들 원해, 하지만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야"
라라의 애인 지식인 청년 파샤가 거리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나서 라라와 나눈 대화이다. 그후 파샤는 1자 대전에 참여하게 되고, 라라는 파샤를 찾아 종군 간호사가 되고 그곳에서 군의관이었던 지바고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후, 파샤는 전쟁이 끝나고 라라와 아이를 남겨둔채 적군의 지도자가 되어 내전에 참여하게 되고 라라를 찾으러 오다가 백군에 잡혀 죽게 된다.
내전의 와중에 지바고와 라라는 우연하게 만나게 되고, 우랄산맥의 설원 속에서 최고의 행복한 시간을 가지게 되지만 전쟁을 두 사람을 그냥 두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은 인민을 위한다는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가 보여주었던 것이다. 혁명은 반대로 인민들을 착취했으며 그것이 바로 라라와 지바고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만들게 되었고, 혁명 전사 라라의 남편 파샤 마저도 불행한 죽음을 초래했던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을 주도했던 배과팠던 여성 노동자들의 염원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오로지 가족의 행복만을 염원했던 그래서 거리로 나왔던 여성들, 자신의 사랑을 찾아 전쟁에 참여햇던 라라, 그리고 지바고, 보통 사람들, 농민들....그들 모두는 혁명의 피해자였다.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했던 볼세비키들의 붉은 혁명은, 인민들의 진정한 염원은 담지 못하고 그들에게 붉는 피만 흘리게 한 레드 컴프렉스였던 것이다.
오히려, 철부지 일본 적군파 청년들의 붉은 피가, 지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의 붉은 피보다 순수할 지경이다.
닥터 지바고를 염두에 썼던 소설이 김성종의 [여명의 눈동자]다. 90년 대초, 텔레비젼 드라마로 반영이 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여명의 눈동자와 닥터지바고의 시대적 배경을 다르지만, 작가의 날카로운 눈으로 보면 여명의 눈동자는 틀림없이 닥터지바고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파샤에 해당하는 김재성 라라의 채시라 지바고와는 역할이 다르지만 비슷한 인품의 박상원, 그리고 지리산 노고단의 설원, 라라와 지바고의 짧았던 행복을 담았던 우랄산맥은, 최재성의 아이를 키우며 박상원과 난생 처음 행복한 시절을 보낸 제주도와 몹시도 닮아 있었다. 2차 대전 중에 동남아 전쟁터에서 최재성은 일본군으로, 채시라는 종군 위안부로 만나, 시청자의 심금을 울렸던 그 유명한 철조망 키스신을 남겼다. 그 광경 역시도 1 차 대전에서의 군의관 지바고와 종군 간호사 라라의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이별로 대신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오기 전, 이승만 주석 여운형 부주석의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그 조직은 조선 팔도 곳곳에 형성되어 마을의 모든 것을 인민들 스스로가 결정하게 된, 이른 바 인민들 스스로의 자체 조직이었다. 그것은 정부가 없어도 인민들 스스로가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었다. 미군이 진주 하기 전의, 폭격으로 페허가 되었던 동경 역시 인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지키고자 하는 조직이 있었다.
그것이, 미군의 점령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철저히 부서져버렸다.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던 많은 사람들이 미군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그들 중 일부가 지리산 빨치산이 되었던 것이다.
좌의 혁명 정부이던, 우의 위성 정부이던, 인민들에게 주었던 상처는 같았다. 그것은 역사가 보여주었다. 어느 권력화된 정부가 들어 오기전의, 짧았던 임시조직들은 우리의 역사에서 참으로 아쉬웠던 순간이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순전히 우리 인민들의 진정한 역사였던 것이다.
특히, 좌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붉은 피의 역사는 우리 인민들의 피의 희생만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구역질 나는 레드의 더러운 역사를, 이곳 좌파들이 흉내 내려고 하는가. 더욱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레드에 대한 지독한 외상후 스트레스라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대중들의 표심에 좌우되는 정치조직에서 왜 굳이 이렇게 손해날 짓을 일부러 하는가.
일본 적군파 아이들처럼 영웅심리인가. 아니면, 그들이 착각했던 준엄한 순교자의 허세인가. 그것이 더욱 아니라면, 세 군데로 분열된 좌파진보당이라는 어지러운 지점에서의 스스로 순종이라고 자부하는 자존심인가.
민주노동당 시절, 황광우와 장석준은 [레즈를 위하여] 라는 책을 써서 좌파 이론가로서 우뚝 섰다가, 얼마전 레디앙에서 싸움박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보기에는 두 사람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한마디로 똑 같은 인간들이 영웅질 하는 모습 밖에 다름 아니였다.
그들이 싸운 그곳 레디앙은 어떤가. red 와 ian이라는 영어에도 없는 합성어를 만들어 내어 스스로 빨갱이 임을 자랑스러워하고 대견해 하고 있다가, 요즘 벌이는 행적을 보면 가없기 그지 없다.
그리고 이번에 보여주었던 당명 토론에서 또 한번 레드의 어리광을 볼 수 있었다. 노동당의 빨간색 바탕이란, 또 한번 대중들을 어떻게 자극할 것인가. 시위 데모판에서 펄럭일 노동당의 붉은 색깔을 보면서 그들은 마스터 베이션의 짜릿한 희열을 느낄 것인가.
인문학 서적을 파는 서점의 이름으로 평범하면 좋을 것을 왜 굳이, [레드북스] 인가. 왜 그렇게 스스로를 강조하는가. 왜 스스로를 그렇게 포장을 해야 하는가. 스스로 튀어서 진보좌파판의 영웅이라도 되고 싶어 하는가. 더욱 웃기는 것은, 그곳에서의 독서 모임의 이름까지 [레드모임] 이라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효시를 이루었던 전태일 열사, 박정희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YH여공 농성, 그리고 오늘날 노동 운동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구로공단의 공순이 노동자들은 우리들의 누이였다. 그녀들의 운동은 오로지 너무나 힘든 삶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녀들에게 붉은 머리띠를 채운 자들은 누구였던가.
그녀들 스스로의 조직화가 오늘 날 한국 노동운동의 촉매제였고 시작점이었다. 그녀들의 빨간색은 도무지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