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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가르 대학살…청에 대항하다 종족 소멸
아틀라스 뉴스 김현민 기자
2019.08.19
건륭제, 끝까지 대항한 준가르족에 초멸 명령…부족의 80%, 50만~80만 학살
중국 역사가들은 청나라 6대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6~1799)를 청조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라고 치받들고 있다.
그는 동쪽으로 사할린섬에서 서쪽 신장(新疆), 북쪽 외몽골, 남쪽으로 베트남, 네팔, 타이완,
미얀마까지 평정한 황제였고, <사고전서> 등 수많은 서적을 편찬해 문화사업을 벌였다.
건륭제는 말년에 스스로를 열 번의 전쟁에서 모두 이긴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며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그는 살인마였다. 그에게 끝까지 저항한 몽골의 준가르 부족을 말살시켰다.
청군의 토벌작전에 준가르 부족의 80%가 학살되거나 질병, 기아 등으로 사망했다.
서방 학자들은 죽은 숫자가 50만~80만명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한자어로 ‘초’(剿)라는 글자가 있다. ‘완전히 없애다’는 뜻인데,
건륭제는 준가르 공격을 지시하면서 장수들에게 이 글귀를 여러차례 내려보냈다.
어물쩡 준가르 부족민을 살려준 장수는 갈아치웠고, 적을 초토화했다고 보고한 장군에게 상을 줬다.
황제가 대량살육(genocide)의 주범이었다.
청군의 준가르 대학살
준가르에 대한 토멸(討滅)은 옹정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옹정제는 서역 정벌에 나선 장수들에게 궁병독무(窮兵黷武)를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평화니 자비니 하는 것보다 무력을 최대한 동원해 폭력적으로 진압하라는 의미였다.
청나라에게 준가르족은 인간이라기보다 동물이었고,
살려둘 경우 다시 나타나 위협을 하는 늑대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옹정제는 준가르족이 정벌해서 궤멸시켜야 할(征剿) 존재로 보았다.
1727년 준가르에 체왕랍탄이 죽고, 그의 아들 갈단 체렝(Galdan Tseren)이 권력을 쥐었다.
옹정제는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을 체결해 우호적 관계를 맺은 이상 준가르를 ‘독안에 든 쥐’라고 판단했다.
갈단 체렝이 티베트 라싸에 불교식 차공양(만차)을 할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옹정제는 “서북 귀퉁이에 붙어 있는 작은 부족이 감히” 운운하며 거절했다.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모든 몽골족이 모두 청에 항복했지만,
유독 준가르만이 항복을 거부한데 대한 불쾌감의 표시였다.
옹정제는 1729년 준가르를 멸망시키기 위해 원정을 준비했다.
1729년 청군은 준가르 정벌을 위한 군대를 파견했다가 준가르가 항복을 의미하는 제스추어를 보내자 회군했다.
하지만 곧이어 갈단 체렝은 병사를 보내 코코노르(칭하이)와 신장 변경기지를 공격해 다수의 말을 빼앗아갔다.
옹정제는 속았다는 기분에 1731년에 다시 대병을 파견했다. 하지만 준가르 군은 멀리서 온 청군을 궤멸시켰다.
청군 2만명중 2천명만 살아 돌아왔다. 청군이 준가르에 당한 최초의 대패였다.
옹정제는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의 수명이 복수를 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옹정제가 죽고 건륭제가 청 황제에 올랐다. 건륭제는 초기에 준가르에 대해 유화정책을 취했다.
새 황제는 준가르에게 청과 무역을 할 권리를 주었다.
1739년 청은 준가르와 화친 협정을 맺고 정기적인 교역을 허용했다.
건륭제는 준가르에게 4년에 한번 베이징에 조공무역을 하고,
그 사이에 국경무역을 하도록 열어주었으며, 티베트에 차공양을 할수 있도록 했다.
준가르는 말, 소, 양, 낙타, 모피, 건포도등을 팔았고,
청에서 비단, 차, 대황(大黃, 약초), 은(銀) 등을 수입했다.
그 평화기간은 15년간 지속되었다.
1745년 갈단 체렝이 죽을때까지만 해도 준가르는 강력한 국가였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준가르에 파멸을 가져왔다. 준가르는 갈기갈기 찢어졌고,
그 틈을 노려 건륭제는 아버지 옹정제의 한을 복수하게 된다.
갈단 체렝은 3남 1녀를 두었다.
아버지가 죽자, 둘째 아들 체왕 도르지 남잘(Tsewang Dorji Namjal)이 권력을 쥐었다.
그는 폭력적이었고, 괴팍하고 편집증이 있었고, 술 마시고 개를 죽이는데 열중했다고 한다.
누나 울란 바야르가 그의 비행을 나무라자, 그는 누이를 옥에 가두었다.
얼마 후 첫째 아들 라마 도르지(Lama Dorji)가 울란 바야르의 남편과 공모해
동생 남잘과 또다른 동생 다시 다와와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번에는 칸의 방계 가문으로 티베트 공격에 나섰던 체링 돈둘의 손자 다와치와
체왕 랍탄의 손자 아무르사나가 라마 도르지에게 도전했다.
다와치(Dawachi)는 라마 도르지를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권력을 잡은 후 다와치는 술 주정뱅이에 망나니가 되어 아무르사나의 미움을 샀다.
아무르사나는 준가르 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족의 지지를 얻지 못해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나라를 팔아먹는 조건으로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했다.
자신이 준가르 수장 자리에 오르게 도와준다면, 청나라에 항복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다와치
아무르사나(Amursana)는 청군의 지원을 받아 준가르로 돌아갔다.
1755년 건륭제는 2만5천의 군대를 두 개 군단으로 나누어 다와치를 공격했다. 다와치는 대항하지 못했다.
술을 취해 있는 동안에 부하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고, 부하들은 청군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항복했다.
다와치는 도망쳤으나,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호송되었다.
이제 아무르사나가 준가르를 장악했다. 그는 청에게 칸(khan)의 지위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청조는 그에게 칸의 자리를 주지 않고 장군의 자리를 주었다. 여기서 아무르사나는 화가 났다.
그는 청이 준 인장과 예복을 사용하지 않고, 준가르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갈단 체렝의 옥새를 사용했다.
그는 중앙아시아 초원을 떠돌며 지원군을 모집하고 청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검은 머리의 인간이 배신을 때리자 건륭제는 반다 장군에게 명해 아무르사나를 제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청의 장수 반다는 이리(伊犁)에서 포위되어 자결했다.
건륭제는 신장에 주둔하던 청군에게 준가르 초토화 작전을 지시했다.
청군은 준가르의 부대들을 격파하면서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아무르사나는 카자흐 칸국으로 도망쳐 버렸다.
아무르사나가 도망치자, 건륭제는 준가르 포로들을 모두 죽여버리라고 명했다.
“반도(叛徒)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 늙고 약한 이들만 남겨라. 우리는 이전에 너무 관대했다.
우리 군이 예전처럼 행동하고 철수한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아무르사나
건륭제는 ‘초’(剿)라는 말을 반복하며 명령을 내렸다.
건륭제는 준가르 병사를 학살했다고 보고한 장군에게는 고위직을 제수했지만,
준가르인이 달아나도록 내버려둔 장군에게는 벌울 주었다.
청군은 러시아 영내로 도망친 준가르족에 대해서도 추격해 일소했다.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은 살려주었지만, 몽골족 또는 만주족에게 노예로 주어 민족성을 잃게 했다.
건륭제는 명령했다.
“그들은 일반적인 소도둑이 아니다. 그들을 잡아서 처형해야 한다. 지도자와 추종자를 구별할 필요가 없다.
그들 부족에는 수많은 도적들이 있다. 지금 완전하게 없애지 않으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륭제는 ‘초멸정진’(剿滅淨盡)이란 용어를 섰다. “모두 죽여 깨끗하게 정리하라”는 지시였다.
단순한 반란군 진압이 아니었다. 청군은 준가르족의 씨를 말리는 작전을 펼쳤다.
살아남은 준가르족은 러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뿔뿔이 흩어져 현지 주민에 동화되거나
청군에 붙잡혀 노비가 되었다.
아무르사나는 카자흐 칸국에게 의지했지만,
카자흐 칸 아블라이도 청의 압력에 아무르사나를 더 이상 보호할수 없었다.
아무르사나는 러시아 차르에게 도움을 호소했지만,
러시아는 캬차흐 조약후 청과 전쟁을 벌일 의향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1757년 7월 아무르사나는 러시아의 세미팔라친스 요새에 나타나 러시아 사령관에게 항복했다.
그때 그는 쳔연두를 앓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병든 그를 급히 토볼스크로 보냈는데,
아무르사나는 1757년 9월 21일 그곳에서 35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군의 준가르 공격(1756년)
준가르 부족의 잘못은 막북(幕北)·막남(幕南)의 다른 몽골족과 달리
청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려고 한 것이었다.
힘이 약할 때엔 청조에 굴복하는 듯 머리를 숙이다가도 힘이 생기면 청에 대항했다.
강희, 옹정, 건륭제에 걸쳐 청조는 준가르가 비겁하게 배신했다고 대의명분을 세웠지만,
이는 대드는 자에게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자의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써 준가르는 나라는 물론 종족 자체가 소멸했다.
준가르족이 소멸한 자리에 청나라는 자신들에게 복속한 한족, 위그르족, 회족(回族)을 대거 이주시켰다.
청이 침략하기 이전에 신장지역에 준가르인이 60만, 위구르인이 37만 정도로 추산되었지만,
이후 신장지역은 위구르인이 번영하게 되었다.
청은 준가르를 평정한 이후 이리에 텐산 남북로를 관할하는 판사대신과 협판대신을 파견하고
주요 거점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1768년 청은 이 지역을 새로이 개척한 영토라는 의미로
신장(新疆, new territory)이라고 개명했다.
1955년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지역을 신장-위구르 자치구로 개칭했다.
건륭제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첫댓글 글 감사
감사
신장- 위구르와 청/ 역사공부
잘 했어요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