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Going home)
뉴욕에서 플로리다 해변으로 가는 버스에
활달한 세 쌍의 젊은 남녀가 탓습니다.
승객이 모두 타자 버스는 곧 출발했습니다.
세 쌍의 남녀들은 여행의 기분에 취해 한참을
떠들고 웃어 대다가 시간이 지나자 점점 조용해졌습니다.
그들 앞자리에 한 사내가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무거운 침묵, 수염이 덥수룩한 표정 없는 얼굴….
젊은이들은 그 사내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누구일까?
배를 타던 선장?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역 군인?
일행 중 한 여자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그에게는 깊은 우수의 그림자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포도주 좀 드시겠어요?"
"고맙소."
그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그리곤 다시 무거운 침묵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침이 되었습니다.
버스는 휴게소에 섰고 어젯밤 말을 붙였던 여자가
그 사내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수줍은 표정을 보이면서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고
젊은 여자는 그의 옆자리에 가 앉았습니다.
얼마 후 사내는 여자의 집요한 관심에 항복했다는 듯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빙고'였으며 지난 4년 동안
뉴욕의 교도소에서 징역살이하고 이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소.
나는 부끄러운 죄를 짓고 오랜 시간 집에 돌아갈 수 없으니
만약 나를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되거나 혼자 사는 그것이
고생된다고 생각되거든 나를 잊어 달라고 했소.
재혼해도 좋다고 했소.
편지를 안 해도 좋다고 했소.
그 뒤로 아내는 편지하지 않았소.
3년 반 동안이나….
석방을 앞두고 아내에게 다시 편지를 썼소.
우리가 살던 마을 어귀에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있소.
나는 편지에서 만일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그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아달라고 말했소.
만일 아내가 재혼했거나 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손수건을 달아놓지 마세요.
그러면 나는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로든 가버릴거요.라고"
그의 얼굴이 그렇게 굳어져 있었던 것은 거의 4년간이나
소식이 끊긴 아내가 자기를 받아줄 것인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여자는 물론이고
그녀의 일행들도 이제 잠시 뒤에 전개될 광경에 대해
궁금해하며 가슴을 조이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승객들에게도 전해져
버스 안은 설렘과 긴장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빙고는 흥분한 표정을 보이거나 창밖을 내다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굳어진 얼굴에서 깊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그는 이제 곧 눈앞에 나타날 실망의 순간을 대비하며
마음속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을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20마일, 15마일, 10마일...
물을 끼얹은 듯 버스 안은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만이 꿈결에서 처럼 아스라하게
일정한 리듬으로 고막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모두 창가로 몰려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버스가 마을을 향해 산모퉁이를 돌았습니다.
바로 그때 '와~!!'
젊은이들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습니다.
버스 승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얼싸 안았습니다.
참나무는 온통 노란 손수건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20개, 30개, 아니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남편이 손수건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까
봐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참나무를 온통
노란 손수건으로 장식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오로지 빙고 한 사람뿐
그는 넋 잃은 사람처럼 자리에 멍하니 앉아
차창 밖의 참나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윽고 빙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늙은 전과자는 승객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버스 앞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인 피트 하밀이
뉴욕포스트에 게재한 '고잉 홈(Going home)'이란 제목의 글입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1973년 Tony Olando & Dawn이
만든 노래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세요.'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가
전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를 기록하면서 모두가
기억하는 감동 스토리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노란 손수건은 용서와 포용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용서해 주고 고달픈 세월을 마다하지 않고
남편을 기다려준 아내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I'm coming home, I've done my time.
(나 형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If you still want me.(당신이 아직도 나를 원한다면)
Tie a yellow ribbon around the old oak tree.
(그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 한 개를 달아주세요.)
1979년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50여 명이 인질로 억류되었는데
당시 인질로 붙잡힌 한 외교관의 아내가 남편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염원을 담아
노란 리본을 집 앞 나무에 매달았고,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미국 전역에 인질들을
조기 석방하여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노란 리본 캠페인이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도 노란 리본은 걸프전과 이라크전 등
전쟁터로 떠난 군인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는 상징으로 사용됐습니다.
The Yellow Ribbon around the old tree.
무조건 정치적인 대립으로 뜻 없이 생각 없이 이슈화하기보다
실제적인 노란 리본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 보는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9.11 사건의 피해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메시지는 사업이나
회사의 프로젝트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말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남긴 메시지는
하나같이 가족에게 남긴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여보, 난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을 다시 봤으면 좋겠어.
부디 애들하고 행복하게 살아."
많은 사람이 일에 치여 가족도 잊은 듯 바쁘게 살아가지만,
목숨이 1분도 채 남아 있지 않았을 때는
결국 가족을 찾는다는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여보, 나의 아이들아!
그렇습니다.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보람은 일이나
성공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아무리 소중하고 가치가 있어도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소설가 신달자 씨가 어느 라디오 대담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9년간의 시부모 병시중과 24년을 남편 병시중했고,
끝내 남편은 그렇게 죽었습니다.
일생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창밖에 비가 와서 '어머, 비가 오네요.'하고
뒤돌아보니 그 일상적인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제야 남편의 존재가 자기에게 무엇을 해 주어서가 아니라
그냥 존재함으로 고마운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읽고 느낌 있어셨다면 나의 지인님들은 감성이 살아있는 분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슴에도 노란 리본 희망의 리본을 달아 봅시다.
전에 읽었던 글임에도 또한 감동을 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