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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 김일훈 선생의 혈액형사상체질론
인산 김일훈 선생은 1909년 기유년(조선 순종 3년) 음력 3월 25일 밤 10시경 함경남도 홍원군 용운면 연흥리에서 부친 언양 김씨 김경삼과 모친 강릉 유씨 사이의 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예전의 세상에 온 뭇 성인들이 그러하듯 선생 또한 유년시절 남달리 총명할 뿐더러 예지력을 발휘해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선생은 1912년 네 살 무렵 이미 한글을 떼고, 한글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창제되었음을 간파하였다고 한다. 한글을 터득한데 이어 옥편을 떼고 한문본 삼국지, 당시, 두시, 강희자전 등을 차례로 독파하는 믿기지 않는 총명함을 보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선생의 특출 난 의술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었다. 선생은 말과 글을 알면서부터 우주만물의 이치를 꿰뚫고 질병의 유무와 치료약물에 대한 예지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 /SPAN>
1915년 선생이 7세가 되던 때에는 비개인 하늘의 오색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약리작용을 활연대오한 선생은 공간 색소 중의 약 분자 합성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병명도 모른 채 숨져가는 이웃의 환자들을 구료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절,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동해산 마른명태 다섯 마리를 고아 먹여 낫게 한 것이나 폐암 환자를 수백 마리의 땅벌에 쏘이게 하여 치료한 사례 등은 천문지리의 원리를 꿰뚫은 선생의 직관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1917년 선생이 9세가 되던 때 한반도에 전래되어 온 약소금 제조법을 보완, 소금을 대통 속에 다져넣고 송진 관솔 등을 이용해 강한 화력으로 아홉 번을 구워야 제대로 법제된 약소금을 만들 수 있다는 견해를 조부께 피력하기도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왜 소금을 구워서 사용해야 하는지, 왜 대통이나 송진 등을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다만 습관적으로 그렇게 해왔을 따름이었다. 오늘날 세상에 널리 알려져 유통되는 죽염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1924년 16세 때에는 의주에서 횡포를 일삼던 일본인 청년들을 제압한 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선생은 항일운동의 영웅 변창호 선생이 이끌던 모화산 부대에 들어가 항일전투에 참여하였고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 묘향산 등지를 떠돌면서 병자를 구료하였다. 오지를 전전하던 이 시절의 선생은 탄광 광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진폐증을 탕약과 쑥뜸요법을 병행하여 완치케 하였으며 죽염제조도 실험을 거듭하여 성공하기에 이른다.
1934년 26세 때인 봄철 어느 날, 철원경찰서 습격 사건의 주동자인 모화산 부대 대장 변창호 선생을 만나러 철원으로 가던 도중 일제의 앞잡이 형사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여러 달 계속된 모진 고문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복역 1년 6개월 째 되던 어느 날, 형무소를 탈출하여 묘향산으로 들어가 선생 자신이 창안한 인산쑥뜸법 곧, 영구법으로 병을 치료해 건강을 되찾았다. 묘향산에 들어간 선생은 당대의 걸출한 선지식이었던 송만공, 김수월, 하동산, 방한암 스님들과 교유하였다.
1943년 35세 때에 장영옥 여사와 혼인한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당시 은신해 있던 의주 천마산 영덕사에서 하산하여 서울로 와 여운형, 방주혁, 김규식, 백성욱, 이명룡, 최영호, 백운계, 송진우, 김성수, 김범부, 정인보, 장덕수, 김준연, 조병옥 선생들과 국사를 의논하기도 하였다.
1961년 55세 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주교동, 종로5가 등지에 머물면서 구료활동을 벌여왔다. 이 무렵 영구법으로 소경 어대사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데 어대사는 그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산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주로 소경을 비롯한 난치병 환자들을 보살펴 주었다. 이 무렵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 곱사, 간질, 폐암 등 당시의 불치병들을 다스려 장안에는 ‘묘향산 활불이 나타났다’ 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후 1981년 72세 때까지 서울 삼양동, 충무로5가, 수송동, 창신동, 장충동, 동자동, 수유리 등지를 전전하며 난치병 환자들을 구제하였다. 이 시절에 온몸에 극심한 화상을 입어 숨져가던 사람을 살려내고 암 치료제인 오핵단을 개발하여 임상에 응용하면서 기적의 의술을 펼친다. 경남 함양으로 낙향하기 직전인 1980년에 선생 최초의 저술인「우주와 신약」을 펴낸데 이어 1981년에는 우주와 신약을 한글화한「세신방」을 연이어 출간하여 자신의 의학론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1981년 12월 31일 함양읍으로 낙향하여 운림초당에 거처하던 선생은 78세 때인 1986년 우리나라 현대의학 사상 불멸의 대 저술로 손꼽히는「신약」을 드디어 세상에 내어 놓는다. 그리고는 곧바로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선생은 1986년 6월 20일 한국일보 대강당에서 시작하여 82세 때인 1990년까지 도합 22차례의 공개강연회를 통해 공해독 시대의 난치병 치료법을 제시하였다.
1987년 79세에는 민속신약연구회를 발족시키고 곧이어 인산의학 최초의 정기간행물인「민의약」을 발간하였다. 신약의 출간으로 선생의 독창적 의학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선생이 머물던 함양 읍내 상동마을과 이곳 함양읍의 3남 댁 신약당과 삼봉산 인산농장 일대에는 전국 각지의 난치병 환자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선생을 찾은 많은 환자들이 선생과의 단 한번 만남으로 생명을 구하게 되어 어디든 선생이 계신 곳은 난치병 환자들의 종착역으로 불리었다. 이른바 ‘지리산 도사’ 할아버지가 베푸는 기적의 인술은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신문, 방송, 잡지 등을 통해 선생의 의학론이 소개되기 시작하였으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도 선생을 흠모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1992년 초부터 주위에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리며 마지막 밝히고 가는 의학의 비밀을 공개할 것을 지시하였다. 84세 때인 1992년 임신년 음력 3월 3일에 가족들을 모이게 한 뒤 세상에 남기고 가는 말을 녹음토록 하였다. ‘인업을 중시함이 부국의 지름길’ 이라는 요지의 이 말씀은 유언이 되었다. 그 녹음한 전문이 시사춘추 92년 4월호에 수록되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충정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효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선생은 1989년부터 1992년 초까지 3남 집의 신약당에서 거처하며 사리장을 최후로 개발하고 밤낮 밀려드는 난치병 암 환자들을 구제하다가 과로로 인해 1992년 5월 19일(음력 4월 17일) 오후 11시 25분 향년 84세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하고 선계로 떠났다. 선생이 가신 뒤 생전에 환자들을 맞아주던 삼봉산 인산동천 산등성이에 법구를 안장하였다. 7월 6일 지리산 실상사에서 봉행된 사십구재 때는 평소 자신의 사후에 나오리라고 예언하였던「신약본초」를 영전에 바쳤고 1994년 이후로 신약당의 인산출판사에서 선생의 어록과 원고 등을 정리하여「신의암처방집」,「신의원초」,「의사여래」,「의약신성」,「활인구세」,「약본초3」등을 엮어냈다.
그 후 선생의 3남 김윤수씨가 1998년에 한국인산의학회를, 2002년에 사단법인 인산학연구원을, 2005년에 인산의학센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현재 3남의 자부 최은아씨가 인산한의원 대표이사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월간 인산한방암센터를 발행하면서 인산선생의 활인구세 정신을 이어 선양하고 있다.
위와 같이 필자가 인산 김일훈 선생의 약전을 소개하는 것은 가난하고 병든 민초들의 전설적인 신의로 구료활동을 해오면서 인산의학을 창시하신 선생의 숭고한 업적을 모든 국민에게 알리기 위하여 인산한의원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을 발췌하여 서두를 설명한 것이다. 선생이 이 세상에 안 계시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너무나 귀중한 영혼이 떠나신 것에 대하여 필자는 말 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며 비록 뒤늦은 감이 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인산 선생이 타계한 후 16년이 흐른 오늘 필자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그동안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못하고 아쉬움으로 남아있던 체질분류법과 체질별로 먹어야 할 식품을 분류하고 질병에 따른 체질별 식단관리의 필요성을 밝히고자 하는 이유는 신개념의 독창적인 혈액형사상체질의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대중적인 생활의학으로 보급하는 일은 그다지 많은 진전이 있지 못했다. 이에 필자는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베일에 가려졌던 인산 선생의 혈액형사상체질론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하여 체질구분의 명확한 기준과 객관성을 가지고 식생활적인 측면에서 연구한 결과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찍이 인산 김일훈 선생은 사상의학을 창시한 동무 이제마 선생 사후에 현자로 나타나 한평생을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여 건강한 삶을 되찾아 주면서 쑥뜸, 죽염, 사리장, 홍화씨, 유황오리, 다슬기, 무엿, 호두기름 등 많은 신약식품을 개발하고 신약을 집필하여 국민건강에 기여하였다. 인산 선생은 동무에 이어 일찍이 사상체질을 논급한바 있는데 사상의학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동양철학적 기조에 있어서는 동무와 약간의 다른 일면을 보고 있으나 20세기 후반 현대에 와서 사상체질에 혈액형체질을 접목하여 사상체질론의 유사점을 논술하고 혈액형사상체질의학이라는 독창적인 인산의학을 주창하여 체질을 분류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태양체질은 금기는 지나치고 목기는 모자라며 폐장은 크고 간장이 작으므로 폐장과 대장은 백색소를 위주로 한 합성물이며 혈액형은 대게 AB형으로 희귀한 편이다. 이 혈액형은 좀처럼 병에 걸리지 않으나 한 번 병에 걸리면 맞는 약도 드물고 치료하기 어려운 체질이다. 소양체질은 화기는 지나치고 수기는 모자라며 심장은 크고 신장이 작으므로 심장과 소장은 적색소를 위주로 한 합성물이며 혈액형은 대게 O형이다. 태음체질은 목기는 지나치고 금기는 모자라며 간장은 크고 폐장이 작으므로 간장과 비장은 청색소를 위주로 한 합성물이며 혈액형은 대게 A형이다. 소음체질은 수기는 지나치고 화기는 모자라며 신장은 크고 심장이 작으므로 신장과 방광은 흑색소를 위주로 한 합성물이며 혈액형은 대게 B형이다라고 체질을 분류하였다.
또한 인산 선생은 혈액형에 따른 식성을 구분하고 음식물을 통해서 체질을 판별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하였다. 혈액형에 따른 식성을 보면 AB형은 인삼, 부자를 쓰면 효과도 부작용도 없으며 닭고기를 못 먹는 체질인데 이는 소양인?태음인?소음인 혈액형 중 음식의 기호나 인삼차의 반응이 가장 비슷한 혈액형 용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태양인이다. O형은 꿀이나 진한 인삼차를 먹으면 두통이나 번열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기는 사람은 소양인을 말한다. A형은 본래부터 밀가루 음식을 즐기지 않고 소화도 잘 안 되며, 진한 인삼차를 복용해도 별 반응이 없는 사람은 태음인을 말한다. B형은 본래부터 육식을 즐기며 소화도 잘되고, 진한 인삼차나 개고기를 먹으면 반응이 좋은 사람을 소음인이라 하였다.
더불어 혈액형사상체질을 음양사상으로 분류하여 양성의 태양인(AB형)과 소양인(O형)은 열성체질이 되고 음성의 태음인(A형)과 소음인(B형)은 냉성체질이라 하였다. 여기에 후천적인 영향을 받아 열성화 된 냉성체질과 냉성화 된 열성체질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체질은 부모 중에서 같은 혈액형을 이어 받는 쪽의 체질이나 성격도 닮기 때문이다. 혈액형 AB형과 O형은 열이 많은 열성체질이므로 음식이나 기호식품 등 무엇이든 차가운 성질의 음식을 먹어 몸을 보하고, 혈액형 A형과 B형은 냉성체질이므로 음식이나 기호식품 등 무엇이든 더운 성질의 음식을 먹는 것이 몸에 이롭다고 하였다.
이같이 인산 김일훈 선생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일찍이 예방의학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을 가지고 동무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에 현대의 기초의학이 되는 혈액형의학을 접목하여 모든 사람이 손쉽게 체질을 구분할 수 있도록 세계 최초로 혈액형에 따른 사상체질 분류법을 정립하고 병의 상태와 환자의 정확한 체질을 숙지한 뒤에 그에 알맞은 치료를 하였다. 따라서 누구든지 혈액형사상체질에 맞게 음식을 먹으면 사전에 질병을 예방할 수 있고 만약 질병 중에 있을지라도 허약한 간장, 신장, 폐장, 심장(비장) 등의 4장부를 보하는 약선음식으로 치료도 가능케 한 것이다. 인산 선생은 70여년의 구료경험을 통해 직접 확인한 분류 방법으로 모든 사람은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확신과 신념을 심어 준 신의이자 명의로서 저서 신약을 통해 생활의학을 구현한 선구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인산 선생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은 태양인(AB형)이 5%로 100명 중에 5명밖에 안 될 만큼 그 수가 많지 않다. 그리고 소양인(O형)은 30% 정도, 태음인(A형)은 40% 정도, 소음인(B형)은 25% 정도로 보고 있으며 태음인의 사람들이 가장 많다고 하였다. 동양인의 과반수 이상이 냉성체질인 반면 서양인에게는 열성체질이 많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체는 기와 혈로 생을 유지하면서 허와 실의 부조화로 건강에 직접적인 질병의 영향을 받는데 선천적으로 부모로부터 받은 오장육부의 체질과 기혈은 유전적으로 50% 정도가 영향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태어나서 후천적으로 환경과 성장, 식생활과 생활습관 과정에 따라 50% 정도가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질병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각각의 고유한 혈액형과 각자에게 주어진 체질을 가지고 있으나 체질은 후천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언제(절기), 태어나서(시간), 어디에서(방위), 무엇을 먹으며(식습관), 어떻게(환경), 누구와(배우자와 가족관계) 살며, 무슨 생각(의식)을 하는가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 흡사 같은 체질의 쌍둥이라 하더라도 식습관과 생활환경에 따라 이들의 체질은 약간 달라질 수 있지만 본래의 혈액형은 변함이 없다고 보았으며 이 혈액형을 중점적으로 사상체질화 하여 동무 이제마 선생 이후 우리나라 최초로 식습관을 개선하고자 노력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체질의 특성을 무시한 채 잘못된 식습관에 젖어 체질에 맞지 않는 먹을거리로 인해 몸이 병들어 가고 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대부분의 병은 먹을거리에서 오는 식원병이다. 물론 식원병은 잘 먹어서 생기는 병이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의 최대 고민인 성인병은 음식을 자신의 체질에 맞게 잘 챙겨 먹지 못한 결과이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체질을 바로 알고 자신에게 맞는 평생 먹을거리를 찾는 것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식이요법이 된다.
인산 선생에 앞서 19세기 후반에 사상의학을 주창한 이제마 선생도 인체의 체질을 병인, 병리, 의약, 식양 등 양생법을 동양의 철학적인 음양오행상으로 보는 대자연의 섭리에 의한 4체질(태양인?소양인?태음인?소음인)로 분류하여 연구 저술한 지 100여 년이 흘렀다. 그 후 인산 선생도 자연의 섭리와 동?식물의 약리작용을 깨우쳐 곳곳에서 병명도 모르고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료하면서 인간의 생사화복이 체질과 무관하지 않다는 두 분의 신의들이 주창한 사상의학과 혈액형사상의학은 참으로 훌륭한 체질의학론이다.
오늘날 고도의 의술을 자랑한다는 현대의학에서도 모든 병은 잘못된 식습관의 결과에서 온다는 것을 알고 식이요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보조의료로 활용하고 있다. 무조건 잘 먹는 것이 건강을 위한 길인 줄 알았는데 질병으로 이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의 식생활은 하루가 다르게 서구화되면서 기름기가 가득한 사식을 먹기 때문에 질병에 노출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세대 간 최대 이슈는 어떤 음식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섭취하는 것이 건강을 위한 길인가? 또는 어떻게 먹어야 정말 내 몸을 생각하는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체질에 맞는 음식을 선택하여 건강을 유지해보려고 노력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체질구분의 연구가 체계화되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격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누구나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체질구분인데 사상체질이나 팔상체질로는 체질을 명확히 판별할 수가 없었고, 그 결과 역시 만족스럽지 않았다. 가령 어딜 가면 소음인이라 하고 또 어딜 가면 소양인이라 할까? 왜 내 성격은 소양인 같은데 내 체형은 태음인 같을까? 왜 사상체질과 팔상체질법에서 주장하는 오링테스트 또는 완력테스트로 판별한 체질은 전혀 상반된 결과가 나올까? 등과 같은 불만 섞인 질문이 쏟아지곤 했었다. 이같이 체질에 따라 가려 먹어야 할 음식과 건강관리법이 다르다는 것 역시 만인의 상식으로 통하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체질논쟁이 난무하고 있을 뿐이다.
필자는 혈액형만 알아도 누구든지 손쉽게 체질을 구분할 수 있도록 체질에 따라 신체적 특징, 성격, 질병관계, 건강관리, 운동, 식생활, 생활습관 등을 그동안 사상체질과 혈액형체질의 임상적인 특징을 잘 분류하여 연구한 결과를 종합적으로 묶어 분류하게 되었다. 그동안 어렵게만 느껴져 왔던 체질구분의 그 답답함을 속 시원하게 해소시킬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이제 체질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혈액형사상체질의학은 특수한 분야가 아니고 체질별로 양생의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에 자신의 체질을 알고 체질에 맞는 음식을 먹는 바른 식생활만 실천하면 평생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강장수법을 배울 수 있고 삶의 질을 더 한층 높이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을 익힐 수 있으므로 생활의학으로 적극 활용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